2000년 9월호

마당발 이수성, 독립군 강준만

  • 입력2006-08-17 14: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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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과 상담실에서 자신의 은밀한 얘기를 털어놓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이 하나 있다.

    “나말고 이런 사람이 또 있나요?”

    직장상사와의 심각한 갈등, 아내와의 불화, 자식문제 등 우리가 주위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일임에도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잠시 객관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슷한 사례로 상담실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말해주면 그때부터 편안한 얼굴을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상황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을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고립’에 대해 본능적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잠재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동조성이 생기는 이유다. 동조(conformity)란 외부의 압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영향을 받아 행동상의 변화를 나타내는 현상이다.

    재미있는 심리학 실험을 한 가지 보자. 의자에 앉은 4명의 남자에게 묻는다.



    “박찬호는 일본 활동 중인가?”

    이중 3명은 실험 협조자로서 그 질문에 ‘그렇다’는 거짓 대답을 하기로 합의가 된 사람이고 마지막에 앉아 있는 한 사람만 진짜 실험 대상자다. 실험 협조자 세 사람이 자신있는 표정으로 “그렇다”라고 말하면 네 번째 사람은 혼란에 빠져 버린다. 박찬호의 경기를 자주 시청했던 사람이라도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사정이 있어서 요즘은 일본에서 활동 중인지도 몰라’ 또는 ‘미국 메이저리그 선수라는 건 내 착각일지도 몰라’ 등등의 불안감 때문에 ‘그렇다’라고 어이없는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실 관계가 명확한 질문에서도 무려 35%가 남의 의견에 속없이 따른다는 게 이 실험의 결과다.

    그게 인간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다는 동조심리다. 이러한 동조심리에 근거해 벌어지는 현상이 바로 ‘패거리주의’나 ‘연고주의’다. 많은 사람이 이것에 얼굴을 찌푸리긴 하지만 그런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나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들에게 ‘패거리주의’는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문제다. 지난번 현대그룹의 핵심요직에 있던 전문경영인 한 사람이 갑자기 한직으로 밀려났다. 소위 MK, MH라인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을 취해온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왕자의 난(亂)’ 같은 위기 상황이 되니까 어느쪽도 그를 챙기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후문이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 이유를 조사했더니 22%가 업무 때문인 반면, 나머지 78%는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사회생활에서 남자의 능력이라는 건 결국 얼마만큼 다양하고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좌우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위 ‘마당발’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남자들은 표피적인 인간관계에 집착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마음과 복잡한 일을 전화 한 통화로 간단히 해결해버리는 현실적 효용성을 부러워하는 감정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수성 전총리와 강준만 전북대 교수. 한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개인적인 인간관계가 가장 넓다고 평가받는 ‘지성적 마당발’로 사람과 직접 교류하는 ‘근거리 네트워킹’의 대가이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절대고립을 자청한 채 살아가는 ‘독립군 지식인’이자, 사람을 절대로 만나지 않으면서 인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원거리 네트워킹’의 대가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의 일상에 빛과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고립과 연대’의 의미를 살펴보자.

    감염되면 약이 없는 ‘이수성 바이러스’

    필자가 아는 어느 중소기업체 사장은 자신이 이수성 전 총리와 친한 사이라고 자랑스레 말하곤 한다. 같이 식사도 몇 번 했단다. 그러나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이수성 전총리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전국에 5만명 쯤 된다는 사실이다.

    한번 감염되면 약도 없다는 ‘이수성 바이러스’. 누구라도 일단 만나기만 하면 그의 사람이 된다는 이수성의 친화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더구나 단시간에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은 놀랄 만큼 강력해서 일본에서 활동중인 세계적인 사업가 손정의를 연상시킨다. 손정의는 만난 지 5분 안에 상대방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마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순진, 성실, 열정이 흘러넘치는 손정의의 친화력이 사람을 확 돌아버리게 만든다는 거다.

    그런데 이수성의 흡인력은 휴머니티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손정의를 능가한다. 80년대 서울대 학생처장 시절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후에 그를 조사하던 사람의 아들 결혼식에 주례를 서게 된다. 조사를 하던 그 틈에 보안사 직원은 이수성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그러나 가장 불가사의한 건 이수성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다. 가끔 정치인 자질을 평가하는 기사 등에서 언급되는 부정적 표현을 제외하면 그에 대한 평가는 칭찬 일색이다. 이수성의 그늘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통합도 가능하며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남녀 차이도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이수성을 존경하거나 흠모한다고 말한다.

    살다보면 죽마고우와도 감정적 골이 생겨 험담을 할 수도 있는 법인데, 그 많은 사람들과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다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지난 4·13 총선 때 경북 칠곡에서는 이수성의 국회의원 당선을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수십명의 ‘동생’들이 ‘형님’의 선거운동을 거들었다. 또 칠곡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려던 장영철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했다. 4선을 위해 뛰던 장의원이었지만 이수성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뜻을 접었다는 것이다. 이수성의 매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수성은 1939년생으로 경북 칠곡이 고향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 1995년에 직선제 총장에 선출되었다. 1995년 12월부터 1년3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냈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수석 부의장을 지냈다. 그는 그중에서 서울대 교수라는 타이틀이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가 서울대 교수일 때 일이다. 타 과의 한 교수가 검찰과 관련한 민원이 있어 법대 원로교수를 찾아갔더니 원로교수는 “이수성이가 힘 좀 쓴다”며 그를 불러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당시 이수성 교수는 그 자리에서 조교에게 자신의 오후 강의를 모두 휴강하도록 지시한 다음 부탁한 교수와 함께 검찰로 직접 가서는 즉석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다. 그 교수가 그 날 이후 열렬한 ‘이수성 팬‘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국의 3대 마당발

    이수성은 김상현 전의원, 김재기 전주택은행장과 함께 한국의 3대 마당발로 불린다. 그러나 마당발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이수성과의 비교를 위해 김상현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김상현은 가난한 시골 집안의 5대독자로 태어나 조실부모했고 학력은 고교중퇴가 전부다. 그에 비해 이수성은 서울대 법대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는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법무장관으로 거론될 정도로 신망있는 변호사였다. 불행히도 6·25전쟁 때 납북되긴 했지만 이수성의 인간관계는 명망있는 아버지의 인맥에서 비롯된 측면이 많다.

    김상현은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고, 자신에겐 그 외에 어떤 밑천도 없다고 말한다. 그의 마당발은 헝그리 정신을 기본으로 한다. 자기 컴퓨터에 입력된 사람만도 2만7000명에 이르며, 이름도 알고 얼굴도 기억하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1만명 쯤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인맥으로 나하고 연결되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게 김상현의 믿음이다.

    그는 새벽 5시반에 일어나 새벽미사를 마친 후 신자들과 차 한잔 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식사 약속 외에는 사람들을 만날 때 10분을 넘기지 않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한 명이라도 더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한 장소에서 2개 이상의 약속을 하는 일도 많다고 한다. 이 정도면 마당발은 원한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이 명백해진다. 넘치는 정열과 강인한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며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부지런한 것도 필수 조건이다. 김상현의 경우 그런 물리적 조건들이 극명하게 부각돼서 그렇지, 이수성도 그런 마당발의 조건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이 전혀 다른 마당발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김상현은 피나는 노력을 통한 ‘후천적 마당발’이라 볼 수 있고, 이수성은 타고난 성향에서 비롯된 ‘선천적 마당발’이다.

    여러 자료에 근거해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이수성의 성격을 분류해 보면 그는 ‘외향적 감각형’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극적인 행동파’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상징적으로 표현해본다면 이들은 어딜 가도 불을 밝히고 음악을 듣고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스타일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도 극적으로 만든다.

    사례 하나. 80년 5월, 서울역에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집결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당시 이수성 교수는 시위학생들이 남대문을 넘어설 경우 신군부의 엄청난 진압작전이 준비돼 있다는 얘기를 내무장관을 통해 들었다. 이수성은 그런 얘기를 듣고도 모른 척 지나칠 수 있는 타입이 아니다. 그는 즉시 현장에 나가서 학생들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해산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의 주역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서울역에서 서울대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학교로 돌아온 그는 교직원들을 동원해 학생식당에서 1000여명의 학생들에게 따뜻한 밥을 해먹였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 같지 않은가. 이수성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을 드라마틱하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사례 둘. 95년 교수들의 압도적 지지로 서울대 총장이 된 이수성은 이례적으로 총학생회 출범식에 참석했다. 그때까지 서울대 총학생회 발대식은 과격시위의 전초전으로 인식돼 역대 총장들은 대부분 그 행사에 참석하는 걸 꺼렸다. 그런데 서울대 총장이 된 이수성이 총학생회장의 손을 잡고 행사장 연단에 오른 것이다. 그 장면이 다음날 일간지의 빅뉴스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밋밋한 일도 그를 거치면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탈바꿈한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기질로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이벤트성 감화력’의 원천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쇼맨십이 강하다고 비난한다.

    “그게 쇼라면 나는 평생 쇼만 하고 살 사람입니다. 내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두고 패거리 정치 어쩌고 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저는 지금까지 어떤 의도를 갖고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사람을 좋아했고, 지금도 코흘리개 어린이나 장애인 같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안아주고 싶습니다. 저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행동은 인위적이라기보다 자연스런 그의 기질로 보이기 때문이다. 총리실 직원들의 평가에 의하면 어떤 행사를 할 때 직원들의 요청사항을 제일 완벽하게 ‘연기’해낸 사람이 이수성이라고 한다. 그런 부분에서는 역대 총리 중 최고였다는 것이다. 그의 극적인 행동력은 그렇게 그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외향적이고 감각형인 사람들은 ‘극도의 위험부담을 안고 모험을 즐기는 성향’이 다분하다. 67년에 위수령이 내려지고 서울대에 군대가 진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데모 주동자로 찍힌 학생 손학규와 조영래는 군인들의 눈에 띄면 바로 잡혀갈 상황이었다. 학생처장이던 이수성은 군인들의 눈을 피해 관용차를 끌고 와서 손학규와 조영래를 학교 밖으로 탈출시켰다. 탈출 후에도 숨을 데가 마땅치 않자 그는 어머니가 사는 고향 칠곡으로 둘을 피신시켰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이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이 된 손학규는 지금도 이수성을 은인으로 모신다고 한다.

    특별히 정치적인 소신이 뚜렷한 경우를 제외하고 교수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수배학생을 피신시키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이수성의 행적이나 말이나 글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아도 그에게서 뚜렷한 정치적 성향이 나타났던 때는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극우부터 극좌까지 그저 모든 사람을 감싸 안아야 한다는 다분히 색깔없는(?) 포용과 화합이 그가 내세우는 주장의 알파와 오메가다.

    그러면서도 그는 학생들과 관련된 시위의 고비고비에서 심리적 지원자나 실질적 후원자로 맹활약한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상황에 개입했던 것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소신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주변인들의 삶에 지나치게 밀착하는 그의 ‘근거리 성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인간관계에서만큼은 쉴새없이 오버한다. 좋은 쪽이지만 말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매우 동정심이 많은 듯하지만 냉정하게 분석하면 실제로는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언제나 상대를 주시하고 있어서 상대방의 아주 미세한 기미도 잘 알아차리고, 따라서 타인의 예상보다 항상 몇 발 앞서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동정심이 많아 보이는 것이다.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속도의 차원에서 바라볼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좋은 게 좋은 거지, 선행조차도 뭘 그리 삐딱하게 보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결과를 놓고 보니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기도 했다. 이수성의 성향에 몰두한 정신과 의사의 직업병(?) 정도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정체성 모호하게 만드는 화해와 통합의 논리

    이수성은 늘 화해와 통합을 외친다. 그 정도와 범위가 워낙 엄청나서 그의 정체성마저 모호하게 한다. 2000년 4월 민국당 창당시에 “신당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을 들어보자.

    “누구는 안되고 누구는 좋다는 식이 돼서는 안된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함께 간다. 4·19와 5·16세력이 화합하고 5·17과 5·18세력의 화합도 필요하다. 대화해를 통해 동서와 남북,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과거 잘못이 있는 사람도 자성하면 모두 모시겠다.”

    이수성은 ‘방법은 다르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나라를 생각해서 그러지 않았겠느냐’며 포용력을 과시한다. ‘알고 보면 다 착한 사람’ 이라는 논리며, 덕담에서 덕담으로 끝나는 인간관계다. 그는 자신에게 나쁘게 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고맙게 한 것은 기억을 하고 고마워한다고 말한다. 그게 자신의 장점이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같은 값이면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응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정신의학에서는 어떤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본다. 있는 그대로를 알아야 그에 맞는 대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21세기 민주 박정희론’을 제기했고,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 문제에 대한 사면을 주장하는 데서는 “일반론적인 법이론을 갖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찬반 양론이 있는 줄 압니다. 어쨌든 법의 근본 이념은 정의보다 사랑입니다”라고 말했다.

    열린 친화력이라고 할까, 아니면 마당발식 화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의 ‘총론적인 사고’는 정도가 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박해받은 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그림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진실 여부보다 인간관계 자체를 더 중시하면서 포용과 친화력을 주장하는 그의 특성은 자신의 ‘각론적 사고’의 부재를 덮는 화려한 수사(修辭)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수성의 최대 약점은 그의 정신적 에너지가 오로지 바깥 세상을 향해 있기 때문에 자신만의 생각, 자아에 대한 성찰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1500회 가량의 주례를 섰다고 한다. 40대 중반부터 주례를 서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20년간 매년 75회, 그러니까 1주에 1.4회씩 주례를 섰다는 계산이 나온다. 휴가나 명절, 외국방문 등의 날짜 등을 제외하고 계산해 보면 그는 마흔다섯 이후로는 거의 매주 2회씩 주례를 선 셈이다. 주례만으로도 일주일의 일정이 분주한 느낌인데, 그 외의 일들은 또 어떻겠는가. 그러고도 교수였던 그가 자신의 공부를 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근거리 네트워킹식 삶의 위기

    그는 법대 교수로 있을 때 실정법상의 범죄구성 요건을 주로 따지는 고시법학보다는 피해자의 권익보호, 피고 인권 보호기능 등 ‘휴머니즘’을 유독 강조했다고 하는데, 그 자신도 “법조문보다는 법 정신이 중요하다는 핑계로 밤을 새우는 연구가 적었다”고 고백한다. 정치를 할 때도 원론 수준의 추상적인 주장 외에 구체적인 정책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지금 그의 ‘근거리 네트워킹’식 삶이 최대 고비를 맞았다. 4·13 총선에서 패한 넉달 후인 지난 7월 이수성과 인터뷰를 한 기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인터뷰 내내 그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는 오해를 풀고 싶다’ ‘나는 정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선거가 끝난 지 언제인데 아직도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정치인 내면의 고통과 속사정까지 헤아려 어루만져줄 만큼 너그럽지 않다. 이씨의 고통은 바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천성에서 비롯한다.”

    이수성은 불안에 대한 수용력이 취약하여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긴장상태나 갈등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외적인 상황이 삶에 근간이 되었던 사람은 그것이 무너지면 자신을 추스르기가 어렵다. 그간 쌓아둔 내면적인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늘 하던 대로 자신에게 등을 돌린 고향사람들과도 빨리 ‘화합’하고 그들을 ‘포용’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소외되었던 자기 내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기자가 물었다.

    “정치가 맞지 않는다, 국회의원 되려고 출마했던 것이 아니다, 이런 말씀을 강조했는데 정계은퇴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글세… 정치를 안한다고 얘기하면 곤란하겠지. 내가 결단력이 부족해서 이렇게 되었는데. 그렇지만 민족화합을 이루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그는 아직도 바깥세상에서 해결의 단서를 잡으려 하고 있다. 어두운 데서 동전을 잃어버린 소년이 가로등 밑이 환하다고 거기서 동전을 찾으려 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지금 그에게 절실한 것은 그가 늘 외치던 남북, 동서의 화합과 포용이 아니다. 그의 외향적인 모습과 그의 내면의 ‘화합’이며 지금껏 소외되어온 그의 내면을 ‘포용’하는 것이다. 휴머니즘의 한 전형을 보여 주는 이 특별한 대인(大人)의 균형감각이 하루속히 회복되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이수성 같은 사람이 해결해줘야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강준만에 대해서 살펴보자. 강준만은 인물 전문가다. 그가 동의하든 아니든 적어도 필자가 판단하기엔 그렇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등의 사상(思想)에 관한 분석에 있어서 현재까지는 그 양이나 질적인 측면에서 가장 정교하고 체계적인 전문가가 바로 강준만이다.

    강준만 하면 자동적으로 ‘인물과 사상’이 떠오른다. 99년 7월1일자 한 언론사의 주간지에는 창작과 비평사와 문학과 지성사를 해묵은 권력에, 강준만 교수의 ‘인물과 사상’을 신생 문화권력으로 자리매김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1997년 1월부터 스스로 ‘저널룩(journalook : journalism + book)’이라 부르는 단행본 ‘인물과 사상’을 창간했다. 평균 3개월에 한번씩 나오는 이 책은 현재 14권까지 나오는 동안 97명의 인물과 사상을 다루었다. 단행본 ‘인물과 사상’ 시리즈가 예상 외의 성공을 거두자 그는 1998년 5월부터는 월간 ‘인물과 사상’을 창간하여 2000년 9월호까지 통권 28호를 발행했다.

    그 외에 ‘대통령과 여론조작 : 로널드 레이건의 이미지 정치’라는 저서를 시작으로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인상적으로 각인시킨 명저 ‘김대중 죽이기’와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한국언론 115년사’ 등 지금까지 무려 40여권의 저서를 발간했다.

    다작을 하다 보면 글의 질이 떨어지거나 여기저기 반복되는 글이 나올 법도 한데 그의 작업은 오히려 갈수록 탄력이 붙는다. 그는 글을 쓰는 속도가 너무 빨라 청탁을 받고 마감시간을 지켜본 적이 없단다. 늘 1∼2주 전에 원고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 마감시간이라는 것 때문에 피가 마른다고들 하는데, 그는 예외다.

    그의 글은 대부분 인물에 관한 것이다. 단행본 ‘인물과 사상’ 1권의 표지 안쪽에 그가 자신의 사진과 함께 밝힌 일종의 창간사는 이렇게 씌어 있다.

    “우리는 기록과 평가의 문화에 인색하다. 특히 인물의 경우에 그러하다.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공익을 추구한 사람도, 위선과 기만과 변절을 범한 사람의 과거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그래선 안된다. 보상과 문책에 철저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공익을 생각하고 기회주의적 처신을 두렵게 여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소위 사회적 공인 중에 그의 안테나 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 인물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특히 저널리즘 에 종사하는 지식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지난 몇 년간 그가 중점적으로 언급한 지식인들의 경우 그들이 쓴 책은 물론 그들의 논문까지 모조리 읽어치웠다. 그는 분석대상 인물이 여러 매체에 기고한 칼럼들을 거의 다 갖고 있고 빨간줄을 쳐가며 읽는다.

    강준만식 파일 분류법

    아마 글쓴이 자신이 모아놓은 자기 칼럼들보다 강준만의 ‘파일’이 훨씬 더 정리가 잘 돼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인데, 필자는 그의 이러한 주장을 간접적으로 보증할 수 있다. 지난 5년간 그의 작업을 경탄의 눈길로 꼼꼼하게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는 1000 개가 넘는 파일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수백 개가 인명 파일이란다. 여기 저기 매체에 글을 많이 기고하는 지식인들의 경우, 그 이름을 파일에 붙여 그들이 쓴 글과 자료를 모은다는 것이다.

    ‘이규태 분류법’이라는 게 있다. 박학다식으로 유명한 칼럼니스트 이규태가 자신의 한국학 연구를 위해서 1만6000 건이 넘는 관련 자료들을 즉시 찾을 수 있도록 색깔별로 구분한 자료 정리법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아마 세월이 흘러 자료의 양이 더 많아지면 인물자료를 분류하는 하나의 모델로 ‘강준만 분류법’도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그는 그런 성향이 다분한 사람이다.

    그는 누구를 비판하고자 할 때엔 그 사람 이름이 붙은 파일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다. 어떡하다 걸려든 말 한마디 물고 늘어지는 따위의 비판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지금도 정치인, 언론인 등 사회적 공인이 낸 책은 거의 다 사들이는데 한 달에 책값만도 100만원이 넘게 들어간다.

    그는 텍스트 비평도 헤밍웨이와 마르케스가 역설한 이른바 ‘빙산 문학론’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달랑 텍스트만 보고 비판에 임할 게 아니라 그 텍스트의 일곱 배에 이르는 기초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인물에 대해 평가를 내리려면 적어도 그 사람이 쓴 책이나 글은 물론 그 인물에 관련된 글들은 거의 다 읽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실 그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 종류의 일은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어렵다. 그의 말처럼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만 있으면 앉은 자리에서 수십 매의 원고를 쓸 수 있는데 굳이 엄청난 자료를 모으고 그 자료를 일일이 다 읽어야 쓸 수 있는 글에 누가 매달리고 싶어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강준만은 자신의 성향과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일에 제대로 뛰어든 셈이다.

    이 글은 인물비판의 프로임을 자부하는 강준만이란 인물을, 정신과 의사의 눈으로 분석하는 글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갑작스럽게 프로 축구단의 축구 경기를 해설해야 하는 조기축구회 회장처럼 개인적으로 많은 부담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책들을 다시 읽고 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가 인물평가를 할 때 지켜야 한다고 하는 가이드라인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강준만 교수와 필자는 인물평가를 할 때 사용하는 잣대가 조금 다르다. 그는 어떤 인물을 다룰 때 공적 영역에서 널리 알려진 것을 대상으로 삼는 데 비해 필자는 그 인물의 개인적 성향이나 속마음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지식인이 전두환 전대통령의 집에 세배를 갔을 때 강준만은 그 방문의 의미를 5공과 연결시켜 그 인물의 전력이나 사상 등을 공적인 차원에서 언급하지만, 필자는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한 의리나 충성 혹은 사적인 인연의 차원에서 그 인물의 개인적 성향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물론 중복되는 측면도 있겠지만 그런 잣대를 가지고 강준만을 보자.

    강준만에 대한 양극단의 평가

    강준만은 1956년 생이다. 전남 목포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쭉 서울에서 성장했는데 그의 부모님은 모두 황해도 출신이다. 중·고교 시절에는 어른들이 감짝 놀랄 정도로 모험적인 여행을 많이 하고 다녔다고 한다. 1980년에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에 3년 정도 MBC에서 PD로 근무했다. 그후 미국유학을 가면서 언론학으로 전공을 바꿔 1984년에 미국 조지아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석사학위를, 1988년에는 미국 위스콘신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정보제국주의 : 제3세계의 도전과 미국의 대응’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강준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극단적이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교도라고 할 만큼 그를 신봉하는 반면,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튀어보려고’ 혹은 ‘돈을 벌려고’ 지나치게 대중적이고 선정적인 글을 쓴다고 비난한다.

    특히나 지식인 사회에서 그에 대한 시각은 더 부정적이다. 한 대학교수는 자신이 강준만처럼 남의 인권을 침해하는 글을 써서 돈버는 짓을 하지 않는 게 자랑스럽다고까지 말한다. 실명비판이라는 다소 생소한 방식과 공격적 스타일의 글쓰기가 인권침해 시비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세간에 그는 ‘김대중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1995년 ‘김대중죽이기’라는 책에서 시작해 끊임없이 DJ를 옹호하고 정권교체를 외쳤기 때문이다. 강준만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그가 반(反) DJ진영의 지식인들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DJ를 옹호하는 건 단지 정치적 취향의 문제 이상이다. 그는 전라도와 DJ가 부당하게 차별을 받아왔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건 모든 차별의 폐지다. 특히 지역차별·학력차별·여성차별·장애인차별 폐지는 그의 기본철학이다. 서울대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요, 지역감정 문제에 분노하고 천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핵심적 요인이 지식인의 직무유기와 언론권력의 오만방자함이라고 주장한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매서운 실명비판이나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로 대표되는 안티조선 운동이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하는 일들이다. 물론 그의 활동은 글쓰기로만 이루어진다.

    이문열에서부터 박노해, 김중배, 백낙청, 이건희, 최진실, 조순, 조갑제에 이르기까지 그가 다루는 인물은 다양하다. 그는 글을 쓸 때 ‘공정성’이라는 원칙과 ‘거리두기’라는 기본전략을 고수한다.

    그의 ‘공정성’이란 기계적 중립성이라기보다는 아웃사이더나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 약자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선과 악이 대결하는 구도에서 중간에 서 있는 게 공정성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그의 글에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단어가 많이 들어가는 것은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일 것이다.

    글쓰기에 있어 ‘거리두기’ 전략은 그의 실생활을 철저하게 고립시킨다. 그는 글과 말로는 무슨 소리를 하건 정치권과는 일절 접촉하지 않고 지낸다. 정치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서신을 통해 만나자는 제의조차 매몰차게 거절한다. 지난 5년 동안 그는 이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하고 있다. 정치인과는 절대 접촉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과 시간절약을 위해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과 만나지 않으려는 실질적인 이유가 겹쳐 그의 고립은 극대화된다.

    “제가 요즘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친한 친구들조차 만나질 못하고 살아요. 제가 개인적으로 잘 알거나 존경하는 분이 전주에 내려와도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 비인간적인 작태를 저지르고 삽니다. 왜냐구요? 저는 슈퍼맨이 아니거든요. 저는 시간과 전쟁을 하며 지냅니다. 정말 치열한 전쟁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가 너무 책을 많이 낸다고 흉을 보지만 그 이면엔 제 사생활의 눈물겨운 희생이 있는 거지요. 주위 사람들이 제게 ‘왜 사느냐’고 묻곤 합니다.”

    일반인이 볼 때 그의 고립은 쉽게 이해되거나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는 무엇엔가 몰두해 자신을 통째로 던지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일종의 환자(?)라고 자신을 진단한다.

    실제로 현재 전주에 거주중인 그는 전화도 끊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매일을 고등학교 3학년처럼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만 하면서 살아간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에도 그렇게 산 적이 있다. 공부하는 즐거움에 빠져 5년 동안 한번도 한국에 나오지 않고 학교와 집이 전부인 생활을 했다. 자기가 살던 소도시의 지리를 전혀 모르고 그저 학교와 그 앞에 있던 아파트 사이의 길만 알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외국 유학의 가장 큰 장점을 ‘격리된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마치 고시생들이 절이나 고시촌에 들어가는 것처럼 공부에 미치지 않으면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시생처럼 한시적으로 자신이 이룰 뚜렷한 목표를 위해 고립을 자청하는 경우와 강준만처럼 지속적으로 격리된 환경에 있는 것은 확실히 다를 것이다. 같은 대학에 있는 교수들마저 그와 연락이 안 돼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도대체 어떻게 접선해야 되느냐?”고 물을 지경이란다.

    강준만의 고립된 삶은 그에게 무엇을 보장해 주는 것일까? 그의 육성을 한번 들어보자.

    “전 제 이름을 소중히 여깁니다. 먼 훗날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언론을 갖게 된다면 그때 가서 가장 공이 큰 공로자로 제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제가 ‘인물과 사상’에 모든 정열을 바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는 읽기에도 벅찰 만큼의 글을 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기가 질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밀고 당기고 높고 낮고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타자를 만나면 투수는 도대체 볼을 던질 곳이 없다는 공포감을 느낀다. 피부로 느껴질 만큼 내공이 막강한 고수와 맞선 상대는 자신의 초라함으로 절망감을 경험한다.

    한번 그의 글을 읽어 보라. 아침마다 10개의 일간지를 거실에 펼쳐 놓고 비교해 가며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그의 독서량은 사람의 기를 질리게 한다.

    절대 고립과 원거리 네트워킹

    그의 글을 읽다 보면 2000종이 넘는 정기 간행물 중에서 그가 읽지 않는 게 있을까 하는 턱없는 의심마저 생겨난다. 단행본, 월간지, 주간지, 무크지, 동인지, 문예지, 사보, 전문지, 협회보 등 그의 독서 욕구는 무엇이나 먹어 치우는 불가사리같다.

    물론 그 자료들은 특정인물을 새롭게 발견하거나 재설정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그러니까 강준만은 ‘절대고립’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과 ‘원거리 네트워킹’을 끊임없이 구축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홀로서기’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여러 유력한 관계망을 만들면서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와 보람을 만끽하고 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체질적으로 타고난 ‘마당발’이 될 수는 없겠지만 관계망을 키우면서 관리하는 일에 피곤함을 느끼는 그런 유형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격적으로도 ‘마당발’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그의 말이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작년 2월, 그는 그간 은둔하면서 글쓰기만 하던 방식에서 탈피해 좀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적으로 활동하는 방식을 병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방식의 하나가 전국의 언론강연회에 초청 연사로 참여하는 일이었다. 강연비는 월간 ‘인물과 사상’의 정기구독자 50명을 확보해준다는 조건으로 대신했다. 언론개혁 운동의 활성화와 잡지의 발행부수 증가를 위한 공격적 마케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의욕적인 출발과 달리 언론강연회는 2월25일부터 6월5일까지 모두 13회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필자는 그게 혹시 강준만의 개인적 성향에서 비롯한 대인관계의 한 패턴이 아닐까 추측을 해보게 된다.

    인물평가를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하면 안된다는 그의 지적이 들리는 듯하지만, 정신과 의사라는 필자의 직업을 핑계로 한번만 유추를 해보자.

    그의 글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는 ‘내향적 사고형’의 성격을 가진 사람 같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사고와 언어 방면에 정밀함을 보이는데 매우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며 객관적 비평을 잘한다. 일의 원리와 인과(因果)관계에 관심이 많으며 실체보다는 실체가 안고 있는 가능성에 관심이 많다. 개인적인 인간관계나 파티 혹은 잡담에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며,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대인관계에도 적용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가끔씩 자기 아이들이나 자기 부모와의 관계도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따져볼 정도로 객관적인 사람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내와 두 딸을 포함해 온 가족이 워낙 독립적(?)이라 가끔 동네 근처로 저녁 먹으러 나가긴 하지만, 그것 이외에 가족이 한 시간 이상 차를 타고 어디 놀러가는 건 1년 내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유형의 사람은 소수의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람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한두번 갖고 나면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의미없는 일을 절대 못 견디는 이들의 특성 때문에 대부분의 관계는 곧 끊어지고 만다. 그가 고립된 상태에서 일을 하는 데는 그의 기질적인 측면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고 변덕이 심하고 이기적이라서,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 하면 좋을 일도 만나서 회의하고 뭐하고 기타 등등 귀찮은 게 너무 싫어 자기 혼자 다 해보려 한다고 말한다. 그런 성향들이 맞물려 ‘전략적 연대’에서 다시 ‘절대고립’으로의 원대복귀를 선택한 건 아닐까?

    글쓰기 전문의 ‘지식 독립군’ 기질

    그는 작년 7월, 그간 해오던 각종 언론 매체와의 서면 인터뷰조차 중단하겠다고 말한다. 사실상 은둔을 해왔지만 자기 주장의 이론화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서 더욱 은둔하겠다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그러지만 알고보면 사교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글쓰기 전문의 지식독립군으로 남겠다는 것이다. 공적인 차원에선 든든하고 사적인 차원에선 안쓰럽다. 남한에 변변한 친척 하나 없어 무슨 일 생겼을 때 전화 한 통 할 데가 없다는 이 사내의 ‘독립군 지식인’ 선언을 마음 편히 듣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한국사회의 연고주의와 패거리주의에 적응하지 못하는, 현실세계에서 매우 발이 작은 한 사내의 자기 변명쯤으로 치부해버려도 좋은 것일까. 주로 ‘잘난 척하는 경우’에 왕따를 당한다는 학생들의 조사결과를 인용하면서, 남의 일이 아니라 마치 자기 얘기를 하는 것 같다고 내적인 갈등을 토로하는 이 사내의 말에 우리 모두 한번쯤은 진지하게 귀기울여 보아야 하는 건 아닐까.

    언론개혁 운동, 실명비판 문화 정착, 지식인에게 책임 묻기 등 강준만식의 ‘잘난 척’하기가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702명으로 시작한 월간 ‘인물과 사상’의 정기구독자가 1만명이 넘으면 ‘눈덩이 효과’에 의해서 오래지 않아 10만명 규모의 잡지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던 그의 가슴 설렘은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작년 6월 처음으로 1만명의 정기구독자를 확보한 그 잡지는 1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그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을 따름이다. 그의 말처럼 한국인은 그 어떤 악인보다도 혼자 잘난 척하는 사람을 훨씬 더 싫어하는 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 속에는 타인과의 연대나 관계에 귀속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담겨 있다. 부당한 청탁을 거절하는 중요 부서의 한 직장인에게 청탁자가 말한다. “당신,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그렇게 뻣뻣하게 굴어?” 그 청탁자가 유력 인사인 경우 그런 상황이 되면 많은 직장인들은 “나 혼자 이렇게 살 필요가 있는 것일까”하는 갈등과 유혹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강준만은 늘 그런 실존적인 고민에 시달리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많은 건지도 모른다. 그의 책을 보다 보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상가나 운동가에 대한 인물평가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인물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회적 공인에 대한 단순한 감시자의 역할을 뛰어 넘는다. 적성에 딱 맞는 보직을 부여받은 샐러리맨의 경이로운 성공담을 보는 느낌이다. 일간지의 인물동정란, 격월간지의 독자투고란에서도 인물을 발견하는 그의 감각은 거의 동물적 본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절대고립 속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과 ‘원거리 네트워킹’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강준만식 부메랑 비판

    강준만의 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부메랑’이다.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엔 ‘그대로 돌려준다’거나 ‘똑같이 적용된다’는 등의 문맥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거의 모든 글에서 예외가 없다. 어떤 인물이 사용한 문장의 논리구조를 그대로 차용해 그 인물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주장하는 함무라비 법전식의 비판이다. 펀치볼을 치고난 후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받는 충격의 강도는 당연히 자기가 주먹으로 내지른 펀치볼의 세기다. 필자는 이것을 강준만식 ‘부메랑 비판’이라고 부르련다. 이런 현상은 비단 비판의 영역에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도 강교수의 팬이다. 그런데 다른 팬들의 글을 찬찬히 살펴보면 이상하게 강교수의 글체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즉 강교수의 필체와 문체에 자신의 글체가 흡수되어서 무언가 공허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어느 네티즌의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강준만에 대해 애정어린 비판을 하는 지식인 중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문체뿐만 아니라 사고의 틀 자체도 강준만화 되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존경하는 인물난에 서슴없이 자기 부모님과 김대중대통령, 그리고 강준만을 적었다는 어느 육군 훈련병의 편지는 그러한 영향력의 크기를 절감하게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른다면 강준만도 ‘컸다’는 한 증거일 것이다. 그가 늘 공언하듯이 강준만은 이제 더더욱 자기의 말과 글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치열한 프로정신과 성실한 지적 활동을 통해서 얻어진 막강한 권력(?)은 이제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엄청난 책임감으로 그에게 돌아간다.

    그는 지식인의 애프터서비스 정신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지지한 사람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대중주의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그를 지지했으므로 김대중정권이 실패하면 공개적으로 강준만의 과오를 인정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미 그는 김대중정권의 실책에 대한 비판을 강도높게 진행하고 있다. 그런 논리에 따라 강준만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필자도 그를 감시하고 질책해야 할 입장에 서게 되었다. 시집간 딸의 이만큼은 몇년이 지나도 친정부모가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어느 어르신의 애프터 서비스 정신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

    필자는 강준만이 절대고립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치마끈을 풀고 아무에게나 몸을 허락하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절대고립의 외로움을 견디면서 권위적이고 부당한 차별에 대항했던 ‘독립군 지식인’ 강준만이란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우리가 그와 한 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을 감사하고 자랑스러워 하면서….

    이제 그의 육성으로 강준만평전(?)을 마무리한다.

    “독립은 고립이 아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 가치를 지향한다. 그래서 독립된 사람들끼리의 연대는 의외로 무서운 것이다. 서로 술 한번 같이 마신 적 없고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전화 한 통 한 적 없어도 같은 뜻을 나누고 힘을 모을 수 있다. 그래서 독립은 고독도 아니다. 고독하다면 그건 책임의 고독이다. 우리는 책임을 위해선 각자 좀 더 고독해져야 한다.”

    이 희한하고 매력적인 ‘독립군 지식인’에게 무한의 애정과 신뢰를 보낸다.

    한 사람이 번화한 거리에 서서 손을 이마에 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행인 중 80%가 길을 가면서 그 쪽으로 시선을 주고, 그중 40%는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그 사람과 같은 방향을 쳐다보게 된다고 한다. 독립적으로 사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정신분석학자 에릭 프롬은 인생 초기에는 부모로부터의 독립, 후에는 사회로부터의 독립이 가장 중요한 심리적 과제라고 했다. 사회나 집단이 강요하는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 자기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엔 ‘왕따’를 각오하면서도 자신만의 소신을 당당하게 펼쳐 보이는 삶도 필요한 법이다. ‘고립’은 ‘진정한 나의 모습(眞我)’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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