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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반 동안 공들인 남북 음악회, 정부가 가로챘다”

북한 상대로 민사소송 제기한 대북사업가 배경환씨

  • 송문홍·동아일보 신동아 차장대우

“2년 반 동안 공들인 남북 음악회, 정부가 가로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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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쪽 입장에서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요. 모든 수익은 일차적으로 남쪽으로 들어오니까. ‘음악회로 얼마를 벌든 간에 우리에게 200만 달러를 먼저 주고 나머지는 CNA가 다 가져가라’는 북측 말이 이해가 되더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수익금을, 더욱이 그 거액을 사전에 내놓기는 어렵고, 그걸 거부하자니 협상 자체가 깨질 것 같고, 그래서 제가 다시 새로운 협상안을 제시했습니다. ‘좋다. 200만 달러는 담보한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내가 그 200만 달러를 만들 수 있도록 당신네가 협조하라. 평양 음악회에 외부 관람객에게 표를 팔게 해달라’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북쪽에서 이런 식으로 공연을 한 전례가 있습니다. 일본의 프로레슬러 이노키가 평양에서 시합을 할 때 재일동포를 7000명인가 받아들인 적이 있었거든. 저는 우리쪽에서 5000명을 데리고 평양에 들어가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또 ‘200만 달러 지급에 대해서 우리 정부를 설득할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도 설득했습니다. 게다가 북한에 200만 달러를 주려면 저는 우리 대기업들을 스폰서로 끌어들여 400만 달러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평양 공연만으로는 도저히 수익성이 없다…”

―400만 달러를 확보해야 한다는 건 무슨 얘깁니까?

“북에 주는 200만 달러 이외에 제작비가 있잖아요? 연주자들 출연료도 줘야 하고. 아무튼 그만한 돈을 만들려면 우리 정부를 설득하고 기업들로부터 협찬을 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신네가 서울에 와서 공연을 해야 한다, 이걸 약속해주면 200만 달러를 담보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북쪽에서도 동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와 아태평화위원회 사이에 합의서가 만들어진 겁니다.”

그는 지금까지 대북사업에 뛰어든 기업인들이 돈은 돈대로 쏟아 부으면서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우리 기업인이 언제까지 북한에 저자세로 사업을 간청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젠 북한도 남쪽 자본주의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는 것. 배사장은 또 “문화·예술 분야의 공연 이벤트에 대한 지식이 없는 북한에 노하우를 전수해준다는 측면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아무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북한과 ‘정상적인’ 사업자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서울과 평양 공연 합해서 200만 달러를 주기로 한 것이지요? 평양 공연에 100만달러, 서울 공연에 나머지 100만 달러, 이런 식으로 나뉘는 게 아니고….

“그렇지요. 서울, 평양공연을 합쳐서 200만 달러였어요. 지불방식은 평양공연 때까지 200만 달러를 완불하고, 평양 공연 후에 서울 공연을 갖기로 했던 겁니다. 아무튼 저는 올해 2월7일 북한측에 100만 달러를 보냈습니다. (자료를 들춰보이며) 여기 그 송금서류가 있어요. 그 후 2∼3월에 두 차례 평양에 다녀왔는데 두 번 다 서울 공연에 관해서 문서화한다든가 한 적은 없었어요. 다만 3월에 평양에서 제가 ‘서울 공연 날짜를 잡고 표를 팔겠다’고 하자 북측에서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하라’며 묵시적인 동의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올해 배사장께서 추진해온 연주회는 작년과는 내용이 다른 것 아니었나요?

“아, 그 얘기가 빠졌군요. 98년 6, 7월 경에 북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로스트로포비치는 자기 조국을 배반한 망명자다. 그런 사람은 곤란한 게 아니냐’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는 ‘그러면 아예 음악회 형식을 바꾸자’ 이렇게 제의해서 남북한을 대표하는 지휘자를 내세우기로 한 것입니다. 처음에 논의하기론 북쪽에선 김일진, 남쪽에선 정명훈씨를 고려했어요. 오케스트라는 양쪽 연주자들이 섞이는 형태로 하기로 했고요. 협연자는 그때 그때 사정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문제였고…. 아무튼 이런 협의가 98년 11월 합의서 체결 때 완전 타결됐던 겁니다.”

통일부와의 신경전

―사업 추진과정에 우리 정부와의 관계는 어땠습니까?

“북한과 합의서를 체결한 한참 뒤까지도 정부의 사업승인을 받지 못했어요. 햇볕정책을 한다고 했지만 일선 행정기관에서는 다릅디다. 말로는 교류하라고 하면서 규제가 심했어요.

정부에서는 제 사업에 상당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런 형태의 사업은 말이 안된다, 그렇게 많은 돈을 줘가면서 어떻게 하려는가 등등 사사건건 걸고 넘어갔어요. ‘나는 민간인 사업자이고, 그만큼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니까 이걸 계획했다, 사업 취지가 인정된다면 나머지는 사업자에게 맡겨줘야 하는 게 아니냐’ 이렇게 대응했더니 이번에는 ‘그런 큰 돈이 건너가면 군사비로 전용될 수 있어서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정부 논리대로라면 현대그룹이 금강산 관광대가로 매월 북쪽에 주는 현금은 뭡니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사사건건 부딪쳤어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통일부로부터 99년 3월25일에 사업자 승인, 4월16일에 사업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4월16일에 제가 받은 건 반쪽짜리 승인이었어요. 즉 100만 달러에 대해서만 승인이 난 겁니다. ‘서울 공연은 꿈도 꾸지 마라. 당신이 하도 조르니까 100만 달러로 평양 공연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해봐라’ 이렇게 해서 내준 겁니다. 애초에 제가 북측과 체결한 합의서는 서울과 평양 공연을 묶어서 200만 달러였는데 말입니다.

저로서는 그 반쪽짜리 승인이나마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차피 한 걸음, 한 걸음씩 나갈 수밖에 없는 거니까. 제가 통일부로부터 사업승인을 받으려고 대북사업에 대해서 손해보험까지 만들었습니다. 통일부에서 제 자금계획을 내놓으라고 해서 당시 스폰서를 하기로 한 대기업을 댔습니다. 그러자 ‘만약 돈만 떼이면 어떻하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내 돈도 아닌데 그러면 문제가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보험회사에 의뢰해서 처음으로 평양 관련 보험을 만들게 했습니다.”

―아무튼 북측과는 서울·평양 공연 합해서 200만 달러로 해놓았는데 우리측 통일부에서는 평양 공연에 대해서만 100만 달러로 승인을 내줬단 말입니까? 그러면 서울 공연은 평양 공연 후에 다시 사업승인을 받으라는 얘기였나요?

“거기에 대해서는 서로 얘기가 없었던 거지요. 통일부에선 서울공연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돈문제는 그냥 어물쩍 넘어갔습니다. 제가 ‘만약 북측 공연진이 서울에 오면 경비는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당연히 별도로 부담해야지요’ 하기에 그냥 넘어갔어요.”

―아무튼 북쪽과 합의서를 체결했고, 통일부에서 사업승인도 받았는데 그 다음엔 또 뭐가 문제였나요?

“사업승인을 내준 그 날, 통일부가 저에게 협찬을 해주기로 약속했던 대기업에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승인이 났다고 해서 일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향후 일에 대해서는 통일부는 책임이 없으니 그리 알아라’ 그 기업에 이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얘기 아닙니까? 기업으로선 겁먹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이건 정부가 해서는 안될 말입니다. 아무튼 그러다보니까 30억원을 협찬하기로 했던 대기업이 태도를 바꿔버렸어요. 그래서 또 한동안 표류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외에도 돌출변수가 속출해 그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고 한다. 99년 6월에는 서해교전 사태가 벌어지고, 9월에는 금강산 관광객 억류사건 때문에 또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 99년이 훌쩍 지나갔다.

“올해 들어서는 새로 스폰서를 확보하고 보험에 가입하는 등 새롭게 준비를 해나갔습니다. 올 2∼3월에 제가 평양 갔다온 것은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3월경에 평양공연은 4월5일, 서울공연은 4월9일에 하기로 날짜까지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KBS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우리는 손 떼겠다’고 나왔습니다. KBS는 99년부터 이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요청을 해서 구체적인 협의까지 다 마쳐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올 3월20일 갑자기 손을 떼겠다고 통고해오니 참, 미치겠더라고요. (서류를 찾아 보여주며) 제가 여기 KBS 내부 결재서류까지 확보해놓고 있어요.”

베이징에서 일어난 일

―아무튼 4월 초에 평양 음악회에 가려고 사람들이 출발했잖아요? 결국은 무산됐지만.

“3월31일 지휘자 금난새씨를 비롯해서 음향기술자들과 오케스트라 단원 27명을 선발대로 평양에 들여 보냈습니다. 사전에 북쪽 국립교향악단과 연습을 해야 하니까요. 본진 70여명은 조수미, 미국 가수 그레이스 범블리 등의 아티스트들, 나머지 스태프와 관람단이었는데, 이들을 이끌고 4월3일 출국했습니다. 관람단 중에 대통령 사돈이 계시다는 사실을 저는 베이징에 가서야 알았어요.

그런데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2일 저녁에 갑자기 북측에서 ‘입북날짜를 하루만 늦춰달라’고 요청해왔습니다. 이건 4월4일에 들어오라는 얘긴데, 그렇게 되면 공연날짜도 하루씩 연기될 수밖에 없어요. 항의도 하고 이유가 뭐냐고 따지기도 했지만, 자기네도 위쪽 지시를 받았을 뿐 이유는 모른다는 겁니다.

저는 일단 예정대로 3일 출국해서 베이징에서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얻었습니다. 북한에서 초청장이 굉장히 늦게 나오고, 그 바람에 중국비자를 미처 발급받지 못하고 나온 분이 많아서 공항을 빠져 나오는 데에 애를 많이 먹었어요.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4일) 북한 고려민항 비행기에 짐 다 싣고서 입북비자를 기다리는데 북측에서 느닷없이 돈 100만 달러를 미리 달라고 떼를 쓰는 겁니다. ‘좋다. 주겠다. 그러나 지금 당장 줄 수는 없다. CNA가 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장하면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돼서 현대측에 100만달러를 맡겨놓고, 그 돈을 받았다는 확인서를 현대에서 받아다가 북측에 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현대에 100만 달러를 들고 갔는데, 현대에선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던 사람이 자리를 피해버렸어요.

다른 한편으론 입북 비자도 안 나오고 있었습니다. 오후 5시가 되도록 영사관이 문을 열지 않아요. 그래서 그 날은 틀렸구나, 하고 사람들에게 철수하라고 했습니다. 저녁 6시쯤 아태평화위원회의 황철 참사에게서 전화가 와요. 이런 일은 이제껏 없었는데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 일단 오늘은 그만 호텔로 돌아가 쉬고 다시 연락하자, 이랬어요.

그 때 사람들이 참 고생 많이 했어요. 3일 베이징 공항에 도착해서는 4일 출발한다고 하고서 넘어갔고, 4일에는 또 5일에 출발한다고 해서 넘어갔는데, 한두명도 아니고 수십명이 왔다갔다 했으니까. 베이징 공항측에서도 비자없는 사람들이 수십명씩 돌아다니니까 신경이 곤두섰어요.

4월5일 아침에 다시 공항에 나갔는데, 이 날도 결국 입북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관람단에 북측이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포함돼 있었다나 봅니다. 관람단 인선은 우리측 민화협에서 맡았는데, 평소 북측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꽤 포함됐다나 봐요. 평소 정치에 무관심한 저로서는 이런 사정을 알 턱이 없었어요. 아태측에서도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초청장을 보냈고, 북한 내부에서 이걸 문제삼아 비자 발급을 막아버렸다고 합니다. 저에게 돈을 미리 내라고 억지를 부렸던 건 입북을 막으려는 핑계였던 겁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정치적인 상황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베이징 공항에서 그러고 있는 동안 베이징 시내 호텔에서는 남북 정상회담 비밀 협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애초에는 통전부 쪽에서 입북자 신원문제로 비자발급을 늦추다가 이게 하루 이틀 계속되면서 정상회담 문제와 맞물리게 되지 않았을까…. 이건 저 혼자 생각이지만, 나중에 보니까 그렇게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당시만 해도 우리 언론은 북쪽에 대해서 비판적인 논조가 많았습니다. 총선이 임박해서 여야가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던 때라서 혹시 어떤 문제가 생기면 언론이 시끄럽게 떠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이 많은 사람이 돈을 주고도 입국을 거부당했다, 언론에 이렇게 노출되면 총선이나 당시 정상회담 협상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남북 양측이 이런 판단을 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본진 70여명이 며칠간 베이징에 있었던 거지요?

“이틀간은 입북을 시도했고, 마지막 6일에는 또 한국으로 돌아오려는데 황사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해서 공항에서 기다리다가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3월31일 평양에 먼저 갔던 사람들도 7일 베이징으로 나와서 다 함께 귀국했습니다.

그 며칠간 참, 난리가 아니었어요. 저로선 이런 낭패가 없었습니다. 나중엔 관람단 중 원로인사 몇 분이 모여서 이 분들이 그때 그때 서울의 모처로부터 지침을 받아서 행동지침을 결정했습니다.

그 때 저는 공연을 못하게 된 것에 대해서 보험 처리를 하려고 했어요. 보험은 북쪽 뿐만 아니라 남북간에 정치·군사적인 이유로 공연이 중단 또는 취소 됐을 때 처리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상황에 보험 청구를 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원로들이 ‘그건 안된다’고 막았습니다.”

― 그분들이 왜 그랬을까요?

“정부에서 관람단이 자체적으로 구성한 지휘부에 ‘CNA는 절대 건드리지 말고 북쪽을 자극하지도 말라. 언론에도 나오지 않도록 철저하게 덮으라’는 지침이 내려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보험 처리에 들어가면 또 시끄러워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앞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 정치 일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고. 그래서 보험 처리를 막았던 것 같아요.”

― 먼저 들어간 선발대는 며칠간 평양에 머물렀습니까?

“일주일. 3월31일에 들어가 7일에 나왔으니까, 날짜로는 8일간이었습니다. 그 사이에 북측과 연습은 완벽하게 끝냈다고 합니다. 사진과 비디오 자료가 다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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