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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릉에 십이지신상이 세워진 까닭

성덕왕릉에 십이지신상이 세워진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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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암(七佛庵)은 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고위산(高位山: 490m) 상봉 동쪽 기슭에 있다. 고위산 상봉에는 원래 봉수대가 있어 이 골짜기를 봉화골로 불러 왔는데, 행정구역은 경주시 남산동에 속한다. 동남산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터진 골짜기라서 계곡이 깊고 으슥한데 그 막바지에 이 절이 있다. 절 이름을 칠불암이라 부르는 것은 1930년대 이후에 이곳에 암자를 새로 짓고 나서부터다.

이곳에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이 새겨진 바위가 있어 칠불암이라 했다 한다. 그러나 이 사방불과 마애삼존불이 새겨지던 신라시대에 절 이름을 무엇이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사□사(四□寺)라는 명문이 있었다 하니 혹시 사불사(四佛寺)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삼국유사’ 권3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조에서 문경 사불산 대승사 얘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령 동쪽 100여리에(사실 사불산 대승사의 위치는 조령 동남쪽이고 죽령 서남쪽이니 죽령은 조령의 오자인 듯함) 산이 있어 높은 언덕으로 우뚝 솟아났는데 진평왕 9년(587) 갑신(진평왕 9년은 갑신년이 아니고 정미년이다. 갑신년은 진평왕 46년으로 서기 624년에 해당한다. 착오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진평왕 46년으로 바로잡아야 할 듯하다)에 갑자기 큰 바위 하나가 그 위에 나타났다.

사면이 한 길쯤 되고 네모 반듯한데 사면에 사방여래를 새겼다. 모든 면을 붉은 비단으로 가린 채 하늘에서 그 산 정상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수레를 타고 가서 우러러 뵌 다음 드디어 바위 곁에 절을 새로 짓고 대승사(大乘寺)라 이름하였다.

‘묘법연화경’을 외는 사람인 비구 망명(亡名)을 청해다가 절을 맡기고 청소하며 바윗돌을 공양하게 하여 향불이 꺼지지 않게 하였다. 이름지어 부르기를 역덕산(亦德山)이라고도 하고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했다. 비구가 죽어서 장사지내고 나니 그 무덤 위에서 연꽃이 피어났다.”



동륜(銅輪)태자의 장자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왕과 같은 이름인 정반왕이란 이름을 받아 전륜성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진평왕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조부왕인 진흥왕이 확장해놓은 방대한 국토를 지키느라 힘겨워하던 당시에 사방불의 가피력(加被力; 보살핌을 더해주는 힘)으로 천하 사방을 무난히 평정하여 정법으로 다스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에 이런 사방불을 조성했던 듯하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은 종교적인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려는 계책이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성덕왕(재위 702∼737년) 말년경이나 경덕왕(재위 742∼765년) 초년경에 이와 같은 사방불을 경주의 안산(案山)인 남산 동쪽 상봉에 조성하여 천하 사방의 평정을 기원하는 일을 되풀이하였으니, 보물 200호인 (도판 9)이 바로 그것이다.

진평왕 때 문경 사불산 대승사에 사방불을 조성한 것은 고(古) 신라지역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옛땅으로 나가는 관문이었던 이곳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였다. 그렇다면 이제 성덕왕이나 경덕왕이 경주의 안산인 남산 상봉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듯 사방불을 조성해냈다는 것은, 이미 사방을 평정하여 명실상부한 사주(四洲)의 주인이 되었음을 만천하에 표방하는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러니 이 사방불의 조성은 당 현종이 성덕왕에게 패수 이남의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덕왕 34년(735) 2월 이후에 진행된 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영유권 인정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했을 수도 있다.



칠불암 마애삼존상의 조각 양식

이런 추론이 가능한 것은 이 사방불이 보여주는 조각양식이 이 시대의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사방불과 함께 조성되었을 뒷벽의 석가여래 마애삼존상 조각양식은 성덕왕 18년(719)에 조성된 것이 분명한 (제16회 도판 1)이나 (제16회 도판 2) 양식을 바로 뒤잇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우선 불상에서 비교해보면 두 불상이 비록 앉고 선 차이가 있고 통견과 편단우견의 옷 입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육계의 크기와 형태가 넓고 나지막한 것이 비슷하고 네모 반듯한 얼굴에 미소 띤 근엄한 표정이 서로 형제인 듯 닮았으며 부풀려 올린 옷주름 표현법이 거의 한솜씨인 듯 닮았다.

다만 의 주불이 에 비해 조금 거칠고 굳은 느낌이 있어서 을 의식하며 조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항마촉지인을 지은 손의 표현이 자연스럽지 못하며 나발 표현을 생략한 두발에서 육계에 상투끈을 나타낸 듯한 것도 자못 어색하다.

이런 차이는 협시보살입상과 을 비교하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두 보살입상의 형식적 차이는 거의 없을 정도니 화려한 보관을 쓴 것이나, 천의를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왼쪽 어깨로 넘겨 입은 것, 치마말을 허리에서 뒤집어 내리고 그 위에 허리띠를 맨 것, 치마가 양쪽 다리를 따라 내려오며 반타원형 호(弧)를 거듭 쌓아내리듯 서로 다른 옷주름을 만들어내는 것, 천의 자락이 두 팔뚝을 휘감아 내리는 것 등이 기본적으로 같다.

그러나 보관에서도, 구슬꿰미로 만든 목걸이에서도, 천의나 치마의 옷주름에서도 의 협시보살입상 쪽이 거칠고 투박하다. 두 팔뚝을 타고 내린 천의 자락 표현을 비교해보면 두 보살입상의 기법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의 천의 자락은 산들바람이 흔들어놓은 듯 나부끼며 물결쳐 내려오는데, 은 둘 다 뻣뻣한 철사줄이 아래로 뻗어내린 듯 수직으로 내리 그어지고 있다.

이런 양식적인 차이 때문에 의 조성시기를 성덕왕 말년이나 경덕왕 초년으로 추정하게 되는데, 이 두 임금이 당시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사방불의 우리식 표현

사방불의 성격은 백제의 (제7회 도판 7) 이래 이 땅에 정착한 대로 동방 약사불, 서방 아미타불, 남방 석가불, 북방 미륵불일 것인데 동향한 동방불이 실제로 약호를 들고 있어 약사불임을 과시한다.

이미 제9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 사방불의 성격을 우리식으로 도출해내는가 하는 것을 구명하고 나왔다. 동진(東晉) 백시리밀다라(帛尸梨蜜多羅)가 번역한 ‘불설관정발제과죄생사득도경(佛說灌頂拔除過罪生死得度經)’, 즉 ‘관정경(灌頂經)’ 권12(317∼322년 번역)에서 동방약사유리광여래를 도출해내고,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402년 번역)에서 서방 아미타를 이끌어낸 다음, 석가불은 남방 인도에서 출현했으므로 남방에 위치시키고, 미륵의 하생은 백제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여 북방에 배치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신라의 사방불도 이 성격을 그대로 수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에서도 대판(大阪)의 사천왕사(四天王寺, 593년 건립)와 내량(奈良)의 원흥사(元興寺, 593년 건립)의 5중탑 안에 모셔진 사방불이 동방 약사, 서방 미타, 남방 석가, 북방 미륵으로 되어 있고 내량 흥복사(興福寺) 5중탑(730년 건립) 안의 사방불 역시 이와 같이 배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백제의 장인이 만든 것이었다.

사방불은 모두 활짝 핀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형태인데, 동방 약사가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에 약호를 들고 있는 손짓을 보임으로써 나머지 3방불도 모두 이와 같은 손짓을 짓고 있다. 다만 약호를 들지 않았으므로 왼손의 수인(手印)은 마치 항마인과 같이 되었다. 즉 시무외항마인이 된 것이다.

이는 전륜성왕이 사방의 마왕에게서 항복받고 그곳 백성들에게 정법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사를 전달하는 손짓으로 보아야 하니, 전륜성왕임을 자처하기 위해 조성해낸 사방불의 손짓 표현으로는 가장 적합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의 주불이 뜻밖에 편단우견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 흔히 보지 못하던 상 형식이다.

삼국시대 이래 포복식 불의 양식을 선호하여 그로 말미암아 , (제7회 도판 9), (제8회 도판 8), (제9회 도판 14) 등이 한결같이 포복식 불의 계통의 통견불의 양식이었다. 신라에 와서도 (제11회 도판 10), (제13회 도판 1), (제13회 도판 8), (제 13회 도판 10) 등이 모두 포복식 불의로 통견 양식을 보여왔다.

그런데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전반부터 수나라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아 편단우견의 불입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수나라에서는 이미 개황 4년(584)이라는 기년명이 있는 (도판 10)은 주불에서부터 반단(半袒)형식을 청산한 순수한 편단우견 형식을 보이고 있다. 경쟁적으로 수나라 문화를 수용해 들이고 있던 삼국에서도 곧바로 이를 모방함으로써 7세기 전기부터 일각에서는 이런 편단우견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백제지역에서 만들어낸 편단우견상으로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도판 11)이고,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도판 12)을 대표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편단우견이라는 관습에 생소했던 우리는 이런 형식의 불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신라 통일기로 접어들면서 오히려 초당(初唐)시대에 유행하던 굽타불상의 통견불의 양식을 수용하여 (제15회 도판 7)이나 (제15회 도판 10) 및 (제16회 도판 2)과 같은 통견불의 양식 계열의 불상을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이 의 주불좌상에서 갑자기 순수한 편단우견 좌상이 만들어졌으니 통일신라 조각사에서 가히 획기적인 변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편단우견상 양식을 수용해 들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성덕왕의 빈번한 대당교섭과 유학생 파견(728)과 같은 문화교류의 부산물이었다.

당나라에서는 초당시대에 현장(玄, 602∼664년) 삼장이 인도를 17년(629~645)간 여행하고 돌아오면서 당시 인도에서 만들어지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마왕에게 항복받은 표시로 왼손을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올려놓아 손바닥을 위로 가게 펴 대고, 오른손은 지신을 불러내어 이를 증명하게 한 표시로 오른쪽 무릎 아래로 엎어 대서 손가락들이 땅을 가리키게 한 손짓)의 편단우견상(도판 13) 양식을 새로 들여와 이전의 반단식을 청산하고 순수한 편단우견상을 활발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실물을 장안(長安) 3년(703)에 만든 (도판 1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항마촉지인 편단우견상 양식이 전래되어 의 주불좌상 형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항마촉지인 편단우견상은 통일신라 불좌상 양식에 주류가 되어가는데 에서 그 상 형식이 완성된다. 그러니 이 의 주존상은 항마촉지인 편단우견상의 효시로 양식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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