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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은 없고 권력투쟁만 있다

DJ정권·한나라당·자민련의 이념적 현주소

  • 김만흠

이념은 없고 권력투쟁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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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북 문제에 대한 견해는 자연히 미국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한미동맹 및 협조체제,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 등에 있어서는 대통령과 집권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모두 크게 차이는 없어 보인다. 다만 민주당이 우리의 자주적 대북관계를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야당인 한나라당은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더욱 강조하는 것 같다. 또한 미국내의 정치세력과 관련해서도 민주당은 북한에 대한 유화적 태도가 상대적으로 강한 미국 민주당을, 한나라당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공화당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서구의 이념 스펙트럼에서는 대체로 좌익과 진보주의는 국제주의적 경향을, 우익과 보수주의는 상대적으로 민족주의적 또는 국가주의 성향을 띤다. 따라서 극단적 민족주의나 종족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극우파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비서구 제3세계권에서는 좌우익 모두가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좌익이나 진보세력들도 강대국 및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는 이런 3세계적 특성에다 남북 분단구조가 맞물려 우익 및 보수주의 세력은 남한 중심의 우익적 민족주의를, 진보세력은 남북통합적 민족주의를 견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가체제에서 국가개입의 정도와 방향은 정치이념에 주요한 지표가 된다. 국가개입을 둘러싼 쟁점에서는 현재의 정당간에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 모두 형식상으로 시장자율을 강조하면서도, 국가주의체제의 유산 속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데 국가의 개입을 용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이념을 둘러싼 이념적 차이는 현 정부와 원외 진보세력 간에 두드러지고 있다. 진보세력들은 현재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과정을 신자유주의로 규정, 반대하며 비판하고 있다.

물론 한나라당은 정부와 집권여당의 구조조정 및 경제전략을 두고 국부유출 등으로 비판하며, 정부재정의 감축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민주당과 대비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세력처럼 노선이나 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주로 정부의 정책에 대한 평가 또는 정치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나라당이 정부재정의 감축을 주장하고 있지만, 예산의 각 항목에서는 오히려 정부 제출안보다 증액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재정감축 주장은 집권여당에 대한 견제 차원의 주장으로 보인다.



DJ정부 약자에게 고통 전가

국가개입과 경제이념은 사회계층 전략과도 맞물려 있다. 19세기까지 유럽의 경우를 보면 보수주의는 귀족과 엘리트층의 이해와 주장을 대변하는 경향이었고, 자유주의는 부르주아 및 중간계층을,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및 하위계층의 이해와 주장을 대변하는 경향이었다. 이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정착된 이래 국가개입의 강화는 복지정책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정책이 되었다. 20세기 들어 1970년대까지 유럽에서는 복지국가화 경향이 강화되었다. 그러다가 70년대 말 80년대로 접어들어 국가개입을 통한 복지정책을 다시 축소하면서 이른바 신자유주의 노선이 대부분의 국가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국가개입을 둘러싼 노선은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라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양 축으로 하여 나타나는 이념적 스펙트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들면서 시장경제적인 요소를 강조했던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 특별한 성과도 보여주지 못했고, 계획경제체제인 사회주의 역시 몰락하는 바람에 우익경제도 좌익경제도 모두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실패를 거울삼아 좌도 우도 아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모색해보려던 것이 1990년 후반에 등장한 영국 블레어 정부의 ‘제3의 길’이나 독일 슈뢰더 정부의 ‘새로운 중도 노선’이었다.

우리의 정당들은 국가개입 전략에 차이가 없는 것처럼 계층전략에서도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물론 집권 민주당은 정강에서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임을 강조하고, 정부정책에서도 생산적 복지 노선을 주장하면서 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하는 등 여타 정당보다는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또 지지계층으로 보았을 때 사회적 하위계층의 지지가 가장 많은 당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구조조정은 오히려 약자에게 더 직접적인 고통을 떠넘기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 약자를 우선한다는 이념은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세력이나 진보세력에서는 현정부의 경제정책을, 사회경제적 약자를 돌보지 않는 신자유주의로 규정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결국 현재 한국 정당정치에서 이념적 쟁점은 대북관계를 둘러싼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원내 정당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면서 현재의 대북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집권 민주당의 이념적 혼돈도 거의 없어 보인다. 현재의 이념과 노선에 대한 변화의 압력도 그렇게 크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민주당의 문제는 민주화 세력과 호남지역주의를 기반으로 구축되었던 정체성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야당 시절에 정권교체로 집약되었던 민주화의 논리를 계승하는, 집권 이후의 논리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맞물려 호남지역주의의 정당성도 주·객관적으로 약해진 듯하다.

최근 거론되고 있는 민주당의 당정쇄신 논란은 이런 문제점에서 비롯된 위기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김대통령과 민주당의 이념이 현실 정책으로 추구되면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이는 앞으로 민주당의 정체성을 말할 때 중요한 내용이 될 것이다.

대북정책에서 보수적인 목소리를 가장 강하게 내면서 집권 민주당을 비판하고 있는 한나라당은 대북관련 노선에서 불안정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는 현재의 한나라당이 3당통합, 그리고 이어진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확대·재편되면서 당의 구성원들이 전통적인 구 여권과 민주화 운동세력 및 재야운동권 출신의 일부가 혼합 편재된 결과다.

한나라당 내부에서 대북관계 등에 전향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김원웅 의원은 당의 이념적 논란을,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당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나라당의 이념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당의 정체성을 유지케하는, 차별성 있고 우월한 정치적 명분이 무엇인가는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현재까지 반DJ노선과 지역주의라는 당의 존재기반이 여타 부분의 당내 이질성을 봉합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당내 이념 구조는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단기적으로는 대권 후보를 중심으로 한 당의 지도력이 어떻게 유지될 것이냐가 중요한 변수로 보인다.

자민련은 보수기조를 가장 분명히 하고 있지만, 보수적인 한나라당과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민주당이라는 거대 양당의 틈바구니에서 보수 선언만으로 당의 정체성을 유지·확장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경험과 점진적 사회발전을 중시하는 보수주의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 내용이 바뀌어야 하는 바,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논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16대 총선에서는 개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개혁적 보수’를 표방했지만, 개혁의 내용이 분명히 부각되지 않았다. 결국 자민련은 현실적인 권력게임을 위해서도 이념적 재정립이 필요한 과도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제 개편해야 정당정치 산다

모든 정치체제에서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가장 분명한 이념적 대립은 재야세력과 제도 정치권의 관계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히려 한국사회의 최근 상황은 권위주의 시대보다 이념적 갈등이 오히려 작은 편이다. 이는 재야세력의 이념적 기반이던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하고, 국내적으로는 민주화가 진전하면서 재야세력의 대내외적 투쟁 명분이 약화된 결과다.

대신에 정부의 구조조정과 경제정책을 둘러싸고 이를 신자유주의로 비판하는 노동세력과 진보세력의 목소리가 두드러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비판과 같은, 국가개입과 시장경제를 둘러싼 쟁점이 앞으로 한국사회의 이념축으로 설정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분단체제라는 특수성 속에서 대북관계가 한국정치 이념에 주요 기준이 되고 있지만, 사실 정치공동체에서 정치를 통한 자원의 재분배 방식과 이를 위한 체제의 선택은 정치이념의 핵심적 기준이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의 논쟁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저소득층에 대한 배려와 복지의 강화를 주장하는 재야 진보세력의 이념이 한국 정당정치 과정에 변수가 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이들이 제도정당으로 세력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진보세력의 정치세력화에는 진보세력 자신의 이념적 설득력과 조직 능력, 시민사회의 구조 및 정치적 지지와 함께 정치제도 또한 커다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승자가 모든 것을 독점하고 소수세력은 배제되는 현행 정치권력 구조와 선거제도의 개편 여부가 재야 진보세력의 세력화에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현행 한국의 대통령제가 체계적 이념에 기초한 정치인과 정당의 정치활동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념만이 정당활동의 배경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 미국처럼 정당 조직의 정체성이 약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의 현실에 대한 책임있는 성찰과 미래에 대한 고민이 없이 정치권력의 향배에 따라 정치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쉽게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 정당정치의 문제점이다. 이런 정치적 환경은 정치인들의 부조리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대통령제 아래서는 정당정치가 활성화되기 어렵다. 미국의 대통령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권력분립이 안된 우리의 대통령제에서는 정당정치가 대권체제에 매여 의회정치의 실종까지 낳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정치가 정당정치를 토대로 발전을 모색한다면 현행 대통령제를 개편해야 할 것이다.

신동아 200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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