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정형근의 피해의식 마광수의 불안감

  • 정혜신

    입력2005-05-11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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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살이는 불화(不和)의 연속이다. 불합리한 제도로 인해 개인의 억울함, 주위 사람들과의 자잘한 토닥거림, 또 다른 자신과의 내면적 불일치 등 우리 일상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은 너무나 많다. 그런 갈등 요인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불화(disharmony)의 감정을 더 많이 느낀다.

    깨어 있는 의식이나 튀는 행동, 미심쩍은 과거, 부풀려진 괴담, 스캔들, 천재성 등 보통 사람과는 다른 생각을 하거나 앞선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겪는 불화의 괴로움은 범인(凡人)의 그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작가 이문열의 산문집 제목을 차용해서 말해 본다면 ‘시대와의 불화’쯤이 될 것이다.

    반체제 지식인이나 전위적인 예술가 혹은 치열한 사회의식을 가진 시민운동가들은 모두 시대와 불화를 겪는다.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대중예술인이나 정치인도 예외는 아니다. 시대와 빚는 불화가 심해지면 전투적이거나 냉소적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건 ‘피해의식’이 내면화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시대가 자신의 천재성이나 대의(大義)를 외면한다는 사실에 좌절하다가, 질책받고 억압을 당하기까지 하면 분노하기도 한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위축된다. 바로 피해의식 때문이다. 한때 시중에서 유행하던 ‘왜 나만 갖고 그래?’ 정도의 일상적 수준을 넘어 심각해질 경우 명백한 정신질환 증상인 ‘피해망상’으로까지 발전한다.





    정형근과 마광수의 피해의식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과 마광수 연세대 교수는 ‘시대’와의 불화를 빚고 있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 모두 적잖은 ‘피해의식’이 내면화되어 있을 것이라는 게 필자의 진단이다.

    이 대목에서 ‘정형근 의원 때문에’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정의원이 시대와 불화를 빚고 있다는 필자의 해석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재선 국회의원인 그에게 무슨 피해의식이냐고 코웃음을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심리란 객관적 현상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가해자인 사람이 본인 스스로 피해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경우도 있고, 피해자이면서도 턱없이 자신의 허물을 탓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정형근 의원이 이 시대와 불화를 겪으면서 느꼈음직한 ‘피해의식’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형근 의원과 마광수 교수의 ‘피해의식’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걸핏하면 아내를 구타하는 남자가 있다. 물론 그때마다 그에게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남편이 그녀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려고 손을 들어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남편은 혀를 찬다. 지나친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 쪽에서야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피해의식’이 있다는 말은 옳다. 그런데 이따금 그 남자는 그의 아내가 했던 ‘맞을(?) 짓’을, 힘있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하고 있다고 자각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그에게는 과장된 자기 방어기제가 작동되고 그러면 상대방의 어이없다는 반응이 뒤따른다.

    “당신, 나한테 무슨 피해의식 있어?”

    이런 경우 피해자인 아내와 가해자인 남편 모두에게서 피해의식이 발견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질적·양적인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정형근 의원과 마광수 교수의 정치행동과 지적 활동을 찬찬히 분석하다 보면, 사람들이 피해의식을 가지게 될 때 생기는 양면성 혹은 그때의 미묘한 심리적 차이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6·8부정선거 규탄한 서울대학생회장 출신

    먼저 정형근의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지난 11월 한 인터넷 웹진에서 ‘역대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 중 최악의 인물은 누구인가’를 묻는 네티즌 선거를 실시했다. 당선자는 현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형근이었다.

    그가 뽑힌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80년대 공안검사 시절부터 민주화 인사에 대한 고문을 주도했고, 둘째 서울대라는 시가 2억원짜리 브랜드를 팔면서 학력주의를 조장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중요한 정치적 사안마다 신빙성 없는 폭로전을 펼치며 ‘식물 국회’로 몰고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네티즌 조사는 자칫 유명인사 중 워스트드레서를 뽑는 행사처럼 선정적일 수 있고, 또 특정 연령대의 시각만이 반영된 조사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조사 결과를 정형근에 대한 글의 첫머리로 시작하는 것은 앞서 밝힌 세 가지 선정 이유 속에 정형근에 대한 세간의 인식과 그의 인간적 성향이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사결과를 보면서 정형근이 6·8 부정선거를 규탄한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금의 정형근과는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아서다.

    정형근은 1945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을 했다. 경남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후 법대 학생회장과 총학생회장을 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미국 미시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서울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수재다. 10년 동안의 검사생활을 거쳐 안기부에서도 핵심요직만 역임하다가 잠깐의 변호사생활을 거쳐 지금은 한나라당의 재선 국회의원이다. 이 정도 경력이라면 엘리트주의 냄새가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4남2녀의 장남으로, 기억하는 이사 횟수만 50회가 넘는다는 가난에 대한 처절한 기억이 있다. 어떤 때는 집을 구하지 못해 일가족이 헤어져 살던 때도 있고 아침 점심을 샘물로 대신하면서 수업료 1000원을 내지 못해 수업시간에 쫓겨난 적도 있단다. 물론 대학도 고학으로 마쳤다.

    그의 성장배경과 사회적 경력만 놓고 본다면 정의원은 진작에 다큐멘터리 ‘성공시대’에 등장했어야 할 인물이다. 거친 환경 속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안겨 주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2000년 현재의 젊은이들은 정형근을 역대 최악의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꼽고 있다.

    정형근은 자신의 부정적 이미지의 대부분이 안기부 근무 경력 때문일 거라고 짐작한다. 검사 출신인 그는 83년 안기부 법률담당관을 시작으로 대공수사국장, 기획판단국장, 수사차장보, 제1국장, 제1차장 등의 핵심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검사 신분으로 안기부에 파견된 경위도 그의 엘리트주의를 부추길 만하다. 83년 초, 안기부에서 처리한 간첩사건이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결받은 일이 있었다. 노신영 당시 안기부장이 제일 유능한 검사를 뽑아오라고 지시해 안기부, 검찰, 법무부에서 각기 1등에서 10등까지의 엘리트 검사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그 세 군데 모두에서 1등으로 추천된 사람이 정형근이었다. 출발부터가 화려했던 그는 엘리티즘이 뼛속 깊이 각인된 사람이다.v 그가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재직시 박노해에게 했다는 말은 워낙 유명해 전설처럼 인구에 회자된다.

    “너 같은 공돌이가 어떻게 서울대 출신 부하들을 거느릴 수 있냐. 너의 시나 글들은 모두 서울대 출신이 써준 것 아니냐.”

    ‘민족해방노동당 사건’으로 연행된 심진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 정형근이 마도로스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채 다가와서는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는 것이다.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 이것 네가 썼다며?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놈이 이걸 써? 네 뒤에 있는 놈을 대.”

    정형근은 운동권이라도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이어야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한다. 어느 여고에서 서울대와 명문대를 진학할 만한 학생들의 반은 장미, 백합 등의 이름을 붙여 주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의 반은 기타반 또는 들꽃반이라 불렀다던가. 그 학교에도 정형근 같은 엘리트주의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엘리트주의 신봉자 정형근은 13년간 안기부에 근무하면서 서경원·임수경 방북사건, 김낙중·이선실 간첩사건, 사노맹사건 등 대형 공안 사건을 직접 수사하거나 지휘했다.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던지 이 기간에 보국훈장 천수장, 보국훈장 국선장 등 훈장을 세 번이나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정형근이 보낸 절정의 40대는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는 원죄의 기간이 되어버린다. 바로 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서 끊임없는 고문 의혹 시비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문 국회의원 정형근을 심판하는 모임’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단체와 내로라하는 논객들이 그의 고문 전력을 문제 삼았지만 정형근은 명예훼손 소송도 불사하겠다며 펄쩍 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혹’이나 ‘시비’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다.

    당시 현역의원이던 서경원은 정형근에게 고문을 당해 피를 세 그릇이나 받아냈다고 증언하고, 고문의 현장에서 그와 몸서리쳐지는 대면을 했다는 증언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정형근은 당당하게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99년 4월, 서경원 전의원의 비서관 방양균씨는 유엔인권위원회가 열리는 제네바까지 따라와 내가 고문했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내가 참다참다 고소를 했더니, 그 뒤로는 방씨가 내 주변에 얼씬거리지도 않습니다. 이것만 봐도 내가 고문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다 알 겁니다.”

    그의 억울한 사연(?)은 계속된다.

    “안기부 조사실에는 비디오 카메라가 다 설치돼 있습니다. 다 찍히는데 어떻게 고문을 합니까?”

    슬쩍 한 발 양보하는 여유까지 보여준다.

    “수사를 하다보면 손으로 푸싱을 하거나 뺨을 한 대 때리거나 한 적은 혹시 있을지 몰라도 고문을 했다면 내가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정형근이 생각하는 고문의 수준은 어떤 것일까. 37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수사관들로부터 돌아가면서 계속 맞아 피오줌을 흘리고, 잘 때는 팬티가 붙어 야전침대에 누울 수조차 없는 정도가 되어야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한 사내가 늘 뒷짐을 지고 파이프 담배를 문 채 고문 현장에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수사관들은 일동 기립하여 그의 지시에 귀기울였다고 한다. 그 사내가 “이제 불 때가 되지 않았어?”라며 고문을 ‘예고’하고 돌아간 다음에는 어김없이 더 강도 높은 고문이 가해졌다. 그래서 고문 현장에서 파이프 담배의 사내를 마주쳤던 사람들은 그가 다녀가고 나면 늘 공포에 떨곤 했단다. 그런 의혹을 받고 있는 사내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모두 심신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라서 헛것을 보았거나 다른 사람과 착각했던 것일까.



    정형근 ‘나름의’ 소신

    92년 이선실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 장기표 전 신문명문화원장은 정형근과 서울법대 동문이다. 그는 올해 1월 한 잡지를 통해 정형근에게 공개적으로 편지를 보낸다.

    “잠시나마 교정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적이 있는 나도 당신으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정도였으니 당신이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저지른 반인간적인 일은 세인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하오.”

    만일 고문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면 정형근 자신도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강준만 교수의 말처럼, 모두가 억울하다니 하루 빨리 ‘고문조작 의혹 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모든 진상을 규명해 이 나라를 영원히 고문이 없는 나라로 만들어야 옳다.

    이런 의혹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안기부 재직시절에 대한 자부심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안기부에서 부장도 하지 않았고 예산을 만지는 일도 하지 않고 오직 수사 전문가로만 일했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한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도 했겠지만 나름대로 기준과 잣대를 갖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안기부 근무시 사회가 좌파 이념으로 물결칠 때였던만큼 나라도 몸으로 막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내가 자랑스럽다.”

    주로 대공수사 업무에 종사하면서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 때문에 부정적 오해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한다. 운동권은 운동권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소신을 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름의 소신’은 몰가치적인 현상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필자는 작년 10월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 전 경감이 구속될 당시 그의 아내가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미장원을 경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그의 부인은 평생을 국가를 위해 봉사한 죄밖에 없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짐승처럼 매도되고 처벌을 받아야 하느냐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에게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해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파괴된 피해자들이 들으면 억장이 무너질 얘기겠지만, 이근안과 그의 가족들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 국가 공무원으로서 소신을 가지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왜들 그러느냐고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백백교 같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광신도의 믿음이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다 죽어가는 독립투사의 신념은 다르지 않다. 소신이란 객관성이나 공동선(共同善)을 가져야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정의를 지키는 부산의 아들’

    확고한 소신을 가진데다 지역구에서 두 번이나 당선된 정형근 의원에겐 아직도 음습한 공작정치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본인의 정치 행태가 그런 측면도 있지만 안기부 출신이라는, 특히나 5·6공 때 굵직한 시국사건의 핵심에서 구설수에 올랐던 전력이 아직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동시에 정치인 정형근의 피해의식이 발동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미래산업 정문술 사장은 수십년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존경받는 기업인이 된 사람이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으로 전직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꼽는다. 중정 과장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되는 일도 없었고 사업상 보이지 않게 불이익이 따랐다는 것이다. 직원들조차 자신을 잘 믿지 못했단다.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고까지 표현할 정도니 그 고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기업가로 변신하는 게 그 정도였으니 대중정치인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형근은 지금도 자신이 폭로정치의 피해자고 공작정치의 희생양이라고 누누이 주장한다.

    95년 2월 당시 권노갑 의원이 안기부가 작성한 ‘지자제 연기’문건을 폭로해 하루아침에 안기부 2인자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DJ저격수’라고까지 불리는 자신의 위치 때문에 ‘정의를 지키는 부산의 아들’인 자신이 부당하게 공작정치의 희생양이 됐는데도 오히려 공작정치의 주도자로 몰린다고도 항변한다. 정치나 역사는 결국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정치 메커니즘을 감안한다면 정형근의 말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형근은 국회의원에게 부여된 면책특권과 언론의 메커니즘을 적절히 활용해 폭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정치 행태를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정치인이다. 99년 10월의 언론대책 문건 파동을 비롯해 폭로전의 앞뒤에는 언제나 정형근이 있었다. ‘오늘도 폭로의 외길을 걷는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물론 본인은 이런 표현에 심한 불쾌감을 나타낸다. 성실하고 치열한 의정활동을 폄하는 발언이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표현을 달리 해보자. 정형근 의원은 정치권을 긴장시킬 만한 소재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 최고의 전략정보통이다.

    ‘동아금고 불법대출 및 로비의혹사건’과 관련한 지난 10월26일자의 동아희평은 그의 명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의기양양하게 ‘폭로용 뻥튀기’ 기계를 돌리는 정형근 의원에게 ‘정치권’이란 이름의 사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꼭 이럴때 뻥 해야겠어?’라고 묻는다. 이럴 때 그가 폭로하는 내용의 실체적 진실은 둘째 문제다. ‘뻥’이라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그는 상대방의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뻥 하는 요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적절하게 가공해서 적시에 활용하는 능력 면에서 단연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다. 그는 안기부의 핵심정보를 접하는 기획판단국장과 대공수사국장을 거쳤으며 정계입문 후에는 ‘탁월한 정보력’을 인정받아 당의 주요 전략, 전술 수립을 총괄하는 기획위원장과 정세분석위원장을 역임했다. ‘정의원의 폭로에는 실수가 없다’는 이회창 총재의 믿음에 근거가 없지 않다. 게다가 그의 ‘정보공개’는 최종적으론 늘 정치권을 겨냥하기 때문에 파괴력면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이럴 때 정치권은 제비족의 폭로위협에 전전긍긍하는 탈선주부의 심리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정치라는 게 ‘그들만의 이해관계’라고는 해도 보기에 딱하다. 그는 대중정치인으로서 정보맨 냄새가 나는 보직들을 맡으면 손해가 나는 일인 줄 잘 알고 있지만, 당과 총재가 어렵고 정부와 여당이 하는 일이 자신의 정의감과 어긋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단다.

    그런 이유들 때문인지 정형근은 조순 총재와 이기택 총재 대행에 이어 이회창 총재로부터도 절대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99년 10월 언론대책 문건 폭로 후에 열린 한나라당 의원 총회에서 한 동료의원은 ‘언론자유 수호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정형근에게 노벨상을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를 노벨상 수상자로 추천하자고 했다. 술좌석이 아닌 의원 총회라는 공식석상에서 이런 얘기를 들을 만큼 정보맨 출신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이 정형근이다.

    탁월한 정보통으로서 존재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그의 정보수집 노력도 예사롭지는 않다.

    “정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갑니다. 밤에도 새벽에도, 산이나 들에서도 만나고 몇십킬로 떨어진 곳은 기차를 타고 가서도 접촉합니다.”

    정형근 개인을 위한 ‘사설정보팀’의 존재 여부가 정치 쟁점이 될 정도다. 폭로정치나 전력시비 등의 여론에 대응하는 패턴도 정보맨답다. 누군가 그가 폭로한 정보의 허구성을 지적하면 ‘여러 가지 확인할 수 있는 정황과 근거가 있다. 지금은 말할 단계가 아니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혹은 ‘진행상황 봐가며 결정하겠다’거나 ‘괜한 정치공세다.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 등이 그의 단골 멘트다.

    그의 주변인사들은 정형근의 이런 발언들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다. 얼마 전 정형근은 소위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되어 큰 곤욕을 치렀다. 80억원 수수설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돈을 받았는지 시인도 부인도 않겠다’는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치밀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좀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랬더니 동료의원을 비롯한 그의 주변 인사들의 반응이 더 재미있다.

    “그가 그런 답변을 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권의 공격을 유도해 자신과 관련한 엉터리 돈 수수설을 흘린 사람을 찾아 공격하려고 했을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속담이 절로 떠오르지만 그만큼 정형근의 정보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신뢰가 두텁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피해의식과 정형근의 안전판

    실제로 그는 자기관리나 보안의식이 철저한 사람이다. 그는 서너 개의 휴대폰을 사용하며 번호를 수시로 바꾼다. 휴대폰 번호는 그의 부인은 물론이고 이회창 총재조차 모른다. 그와 통화를 하려면 보좌진에게 부탁을 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아는 사람과 헤어져 택시를 타게 될 경우 미행자가 있나 없나를 확인하며, 차를 타고 집 주변에 도착하면 미심쩍은 구석이 없는지 면밀하게 살펴본 연후에야 집으로 들어간단다. 안기부 재직 시절 북한에서 자신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소문도 이런 스타일에 일조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지만, 어쩐지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정형근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그 자신도 공작정치의 희생양이 될지 모른다는 강도 높은 피해의식의 작동일까.

    그의 행동을 보노라면 한 인물이 생각난다. 살인수법이 잔인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서진 룸살롱 습격사건의 행동대원이던 김동술이라는, 당시 20대 중반의 인물이다. 그는 애인과 함께 길을 걸을 때도 늘 몸을 360도로 회전하면서 걸었다고 했다. 언제 반대편 조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늘 유사시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김동술은 걸핏하면 연장을 들고 반대편 조직을 습격하는 청부 폭력배였기 때문에 자신이 습격당할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과 방어행동이 몸에 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회의원 정형근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유별난 보안의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인가.

    “앞으로 이 정권이 날 어떻게 할지 손바닥보듯 잘 알고 있습니다. 아마 여론몰이를 할 것입니다. 친여단체를 동원해 정형근의 전력과 자신들이 조작한 비리, 비행 등을 공개하며 여론화하고, 그 여론에 기초해 정치적으로 매장하는 술책을 쓸 겁니다.”

    비장하기까지 한 그의 발언을 접하면서 먼저 떠오르는 건 그가 언급하고 있는 구체적인 시나리오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것일까. 스스로 공작의 전문가인 정형근은 모든 사안을 공작 차원에서 해석하는 게 체질이 된 모양이라는 한 언론사 논설위원의 지적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노태우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이유로 문민정부 초기엔 정형근이 숙청대상 1호였단다. 그런데 ‘지방선거 연기 검토 문건’파동 때 자기 혼자서 책임지는 것을 본 김영삼 대통령이 폭로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안기부를 떠난 자기에게 국회의원 공천을 주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으로 이어지는 동안 약간의 위기도 있었지만 늘 승승장구했는데 지금의 정권과는 심각한 불화만 겪고 있으니 피해의식이 커질 법도 하다. 그는, 자신이 이 정권의 공작정치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최소한의 정치도의조차 없이 한건주의식 폭로를 일삼고 있다는 평가에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언론대책 문건도 정치비리와 관련된 문건이었다면 폭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직적인 언론탄압 문제는 시시비비를 가려 이 정권에 경종을 울려야겠다고 생각해 고민 끝에 공개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김대통령의 친인척과 관련된 비리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런 것을 터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정치도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나를 건드리면 좋을 게 없다는 교묘한 메시지로 해석될 뿐이다.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정형근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안전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큐 150의 비상한 머리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집요한 노력으로 그의 말이나 일은 늘 일정 수준의 근거를 갖고 있다. 99년 말 김대통령에 대한 ‘빨치산식 수법’ 발언으로 고소를 당하자 그는 책자에 나와 있는 공산당 교조(敎條)를 인용하며 반박했다.

    “여기 보면 ‘공산주의는 법률위반, 속임수, 사실은폐 따위를 예사로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돼 있잖아요. 이 수법이란 말예요. 내가 말 잘못한 게 뭡니까.”

    그는 철저한 소신에 철저한 준비를 하는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5분간의 대정부 질문을 하기 위해 수차례의 실제 연습을 거쳐 상대당 의원들의 엄청난 야유 속에도 굴하지 않고 할 말을 정확히 5분 안에 쏟아내는 사람이란다.

    지난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국가연합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공통점이 있다는 합의가 나오자 김대통령이 쓴 통일관련 서적을 밤새워 읽고 당 회의에 참석했던 철두철미한 사람이 정형근이다.

    반면에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이나 가치에는 의외로 허술한 인식수준을 보여주기도 한다. 언론대책 문건 제공자인 이도준 기자에게 왜 1000만원을 주었는지에 대한 대답은 전혀 정형근답지 않다.

    정형근의 어린 시절 약속

    “나는 어릴 적에 대단히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아침 점심 굶기를 예사로 했고 고3 때는 집안형편 때문에 1년을 쉬어야 했습니다. 그런 사정 때문에 나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되도록 도우려고 합니다.”

    어려운 사람 누구에게나 그런 식으로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자신이 안기부에서 물러나게 된 지자제 연기 문건에 대한 해명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그저’ 다양한 여론을 조사해보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안기부라는 조직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한가롭게 말해도 되는 것인가. 길거리에 새끼줄이 버려져 있어 ‘그저’ 집에 가져왔을 뿐인데 재수없게 그 줄에 황소가 매달려 있어서 절도범이 되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실제로 국회의원 정형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린다.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깐깐하다거나 음모적이지 않으며 산만하고 너스레떨며 농담을 좋아하는 동네 아저씨의 편안함이 느껴진다고 한다. 재담이 뛰어나고 사람을 편견없이 대해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편인데, 그가 남들보다 특별한 정보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는 데는 그런 성격적요인도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평가다.

    “‘어제 사람을 보고 오늘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노력하면서 발전하고 훌륭한 가치를 위해 바뀌는 겁니다. 50이 넘어 정치권에 와서 이제 국리민복을 위해 일을 좀 해야죠.”

    92년 대선을 앞두고 간첩사건으로 김대통령을 직접 조사했다는 악연으로 해서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 정형근과 시대의 불화는 계속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피해의식도 끊임없이 증폭될 것이다. 99년 1월 정형근은 한 시사잡지 인터뷰에서 전혀 뜻밖의 말을 한다.

    “저에게는 기본적으로 가진 자, 힘있는 자에 대한 저항적 사고와 피가 지금도 있어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어려운 사람 편에 서겠다는 뜻을 품고 검사가 됐어요.”

    정형근의 그 말을 듣고 있으려니 이문열의 ‘약속’이라는 단편소설이 떠오른다. 그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정형근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자. 좀 지루하더라도 그만한 가치는 있을 것이다.

    머리는 좋지만 너무나 가난해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살아가던 한 소년이 꿈속에 억울하게 죽은 노인의 영혼을 만나 특별한 약속을 한다. 앞으로 소년이 힘있는 인간이 되도록 도와줄 테니 그 힘을 가지고 타살을 당하고도 자살로 처리된 자신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는 것이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소년은 목숨을 담보로 그 약속에 응한다. 그 약속을 하고 10여 년이 지난 후 소년은 우여곡절 끝에 검사가 된다.

    노인과 한 약속을 위해 다시 그 사건을 조사하다가 자기 친아버지와 장인까지 연루된 사실을 알고 재조사를 포기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 검사의 꿈속에 노인이 나타난다. 이제 오늘로 그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난다며 슬픈 얼굴로 검사를 쳐다보던 노인은 왜 힘있는 사람을 만들어주었는데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았느냐고 조용히 말한다. ‘이제 약속대로 가세.’ 다음날 그 검사는 서재에 앉아서 자는 듯이 죽어 있었다.

    거칠긴 하지만 이게 ‘약속’이란 소설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지금 이 사회의 파워 엘리트들은 일정한 의무를 담보로 절대자와 보이지 않는 약속을 통해서 지금 위치에 오른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어려운 환경에서 비상한 머리로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둔 정형근은 이제 힘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려운 사람편에 서기 위해서’ 검사가 되었다는, 자신과의 굳은 ‘약속’을 지키기 바란다. 자신에 대한 세간의 의혹에 대해서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전문적인 인권변호사 정형근이 되어 보는건 어떨까. 동문이기도 했던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정치야 정형근말고도 수많은 희망자들이 줄서 있지 않은가.

    마광수는 전혀 ‘야하지’ 않다. 아니 섹시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오십줄에 접어들어 듬성듬성 빠지기 시작한 흰머리가 그렇고, 175cm의 키에 한때 47kg까지 나갈 만큼 삐쩍 마른 몸매가 그렇다. 물론 그에 걸맞게(?) 의상도 전혀 패셔너블하지 않다. 대부분 윗단까지 채우는 티셔츠에 투박한 질감의 양복이 그의 대체적인 차림새다. 자신처럼 마른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끝이 직선으로 잘린 직물넥타이와 테가 반만 둘러진 독특한 안경디자인이 좀 남다른 정도다.

    20대 때부터 너무 빈약한 신체 때문에 옷을 많이 입을 수 없는 여름을 극도로 증오했고 그래서 멋내는 데 신경을 안 쓰게 되었단다. 20cm의 하이힐과 짧은 미니스커트, 목걸이 귀고리는 물론 팔찌에 배찌까지 화려한 보석들로 치장된 몸, 그리고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시스루 의상, 그가 소설 속에서 자주 묘사하는 ‘야한’ 여자의 외양은 말 그대로 소설 속의 얘기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걸핏하면 미모의 여인과 염문을 흘리는 것도 아니고 환각상태에 빠져 혼음파티를 즐기다 법망에 걸린 적도 없다. 그저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아마추어수준을 넘어선 그림솜씨가 있고, ‘윤동주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문학평론가이자 한 대학의 교수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마광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섹시하다. ‘성애문학’의 상징적 존재임과 동시에 ‘야한 남자’의 대명사-올해 초 한 잡지에서 마광수를 설명한 인터뷰 기사의 표제글이다. ‘성애문학’이라는 정체불명의 표현만 좀 참고 넘어간다면 마광수에 대한 세간의 인식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말이지 싶다.

    물론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야함’과 마광수의 그것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인터뷰기사의 표제글도 마광수가 주장하는 야함의 기준을 근거로 했을 터다. 마광수는 야하다는 말의 의미를 ‘벌판’이라는 개념의 ‘야(野)하다’로 정의한다. 말하자면 더 솔직하게 자신의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천진난만하고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가꿔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온몸에 울긋불긋 채색을 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벌거벗고 살듯이 말이다. 다분히 정신적이다.

    그러나 마광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몸’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인간의 불행은 쓸데없는 관념 때문에 생기는데, 그게 다 머리가 몸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야함은 ‘몸을 중심으로 한 열린 정신’이다.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멋을 내보고 싶은지에 대한 그의 꿈을 들어보자.

    “멋을 부리기 위해 우선 나는 머리부터 길게 기르겠다. 거기다가 나는 파마도 하겠다. 바지도 헐렁한 핫바지가 아니라 다리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 같은 것만 입겠다. 셔츠도 빨간색 우단처럼 야한 옷감으로 된 집시풍의 헐렁한 것만 입겠다. 그래도 외모상 내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손과 코니까 여자에게 손톱을 길게 기르라고 치사하게 구걸하지 않고 내가 직접 길러 보겠다.”

    전혀 ‘야하지 않은’ 마광수의 ‘야한’ 꿈이다. 겉은 전혀 야하지 않은데 속만 야한 사람이 마광수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광수라는 인물을 그의 속마음으로 인식한다. 한 사람이 대중에게 현상에 앞서 내용으로 인식되는, 쉽게 볼 수 없는 경우다.

    KAL기 폭파범 김현희를 본 사람들이 범죄사실에 앞서서 주목했던 건 그녀의 뛰어난 미모였다. 사람들의 인식이란 많은 경우 그렇게 1차원적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마광수는 특이하다.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작가라는 직업적 특성 때문일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대인 기피증

    사람들이 마광수를 ‘야한 남자’로 인식하는 이유를 필자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한다. 첫째는 소재이면서 동시에 주제이기도 한 ‘성애(性愛)’에 대한 솔직하고도 반복적인 집착이고, 둘째는 지난 92년에 일어난 모럴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마광수 습격사건’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즐거운 사라’ 개정판에 대한 외설시비 사건으로 부르지만, 법률적으로 표현해보면 현직 대학 교수이며 ‘즐거운 사라’의 저자인 마광수가 형법 244조 음란물 제조 혐의로 전격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한 사건이다.

    사건 조짐이야 그전부터 있었다. 90년 마광수의 소설 ‘광마일기’는 음란성을 이유로 간행물 윤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는다. 이어 91년에는 두 편의 소설로 관계당국이 제재결정 1회, 경고 2회를 내렸고 심지어 FM라디오에서 외설스러운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방송출연 금지’ 처분을 받기도 한다.

    91년 7월에 나온 ‘즐거운 사라’ 초판은 타의에 의해서 나온 지 한 달 만에 출판사측이 자진 절판을 하게 된다. 그러다 급기야 92년 10월29일에 외설시비로 사법적 제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사건 자체가 워낙 엽기적이어서 그랬는지 사람들은 그 후부터 마광수를 ‘성애문학의 상징적 존재임과 동시에 야한 남자의 대명사’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사건은 20세기 대한민국의 ‘문화적 촌티’를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마광수의 인식을 대표하는 사건이므로 그 전말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1992년 10월29일 ‘즐거운 사라’가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전격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마광수는 11월27일에야 풀려난다. 그해 12월28일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판결받고 항소했으나 94년 7월 2심에서 항소기각 판결을 받았고 95년 6월에는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상고기각판결을 받아 유죄가 확정되었다. 93년 연세대에서 직위해제된 마광수는 대법원 확정 판결 후 해직되었다가 98년 3월에야 사면, 복권이 되어 연세대교수로 복직한다.

    ‘야한 교수’라서 조교를 성희롱한 것도 아니고, 입시부정에 관련되어 뇌물을 받은 것도 아니며 그 무섭다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도 아니다. 단지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을 솔직하게 펼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학교수에서 전과자가 되어 6년여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교권과 표현의 자유를 유린당한 것이 속상해 그는 오랫동안 글을 쓰는 것은 고사하고 읽는 것에조차 무기력해져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자신을 변태성욕자나 다중인격자로 보는 사람들의 이상야릇한 시선 때문에 대인 기피증까지 생겼다. ‘시대와의 불화’라고 표현하기조차 민망하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피해의식이 안 생기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의 말처럼 마광수는 정치적 투사도 아니요, 그저 솔직해보려고 애쓴 선생이고 글쟁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라 사건 이후 지금까지 그는 투사 아닌 투사가 되어 심한 피해의식에 시달리면서 전투를 치르고 있다.

    그는 인생의 4고(苦) 중 첫 째로 병고(病苦)를 꼽고 둘째로 옥고(獄苦)를 꼽는다. 감옥에 들어갔을 때 경험한 괴롭고 끔찍한 공포심의 표현이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평생을 법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직업은 오직 ‘법관’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단다. 아울러 사람들과 사귀는 데 무관심했던 자신의 철저한 개인주의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이후 마광수는 작품 경향을 바꾸어보려고 노력한다. 막연한 피해의식과 자기검열이 심해졌기 때문이란다.

    “사라 사건 이후 제일 안타까운 것은 글 쓸 의욕이 사그라졌다는 사실이다. 아니 의욕이 사그라졌다기보다 피해의식과 겁이 많아졌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곁에서 마구마구 격려를 해준다고 해도 잘 쓸까 말까 한 게 글인데, 마치 글을 쓸 때마다 펜을 든 팔을 툭툭 차이는 상태가 수년을 이어졌으니 말이다.”

    처절하기까지 하다. 못썼다고 욕을 얻어 먹는 것까진 좋으나 ‘못썼으니까 잡아가도 된다’는 식의 발상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한다. 약간의 과장을 양해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글을 ‘못썼을’ 경우 작가를 구속하는 실정법이 있다. 작가 자신이 집행하는 ‘마음의 구속’이 아니라 실제로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글을 쓰고 있는 작가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는가. 배수의 진을 치고 쓰기 때문에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다는 해석은 너무 단순하다. ‘창조적 상상력’과 ‘하면 된다 정신’의 결합은 명백한 불륜 아닐까.

    만유인력 법칙은 뉴턴이 아니더라도 결국 누군가 발견했겠지만 ‘햄릿’은 셰익스피어라는 작가가 없었다면, 또 그의 독특한 상상력이 없었다면 절대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원칙은 마광수의 모든 작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잘쓰고 못쓰고는 그 다음의 문제다.

    솔직하게 발가벗기

    한 평론가에 의하면 마광수 작품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친근감 있는 구어체의 구사를 통한 ‘솔직하게 드러내기’에 있다. 다시 말해 재미있게 빨려 들어가 쉽게 읽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룻밤에 심심풀이로 쓴 줄 알고 작가를 우습게 보는 풍조가 있다는 게 마광수의 불만 섞인 진단이다. 가벼운 문장을 쓰는 게 훨씬 어렵단다.

    실제로 마광수는 소설을 쓸 때 문장에 가장 신경을 쓴다. 거의 운문처럼 읽히도록 운율에 신경을 쓰고, 에세이나 논문 등과 구별지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제는 ‘광마일기’같이 가볍고 솔직한 작품을 다시 써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한탄한다. 강요된 피해의식과 자기검열 때문에 결국 자신도 남들처럼 철학적 관념과 정치적 시각으로 포장된 무거운 설교조의 작품을 쓰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 때문이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허구적 소설이라도 글을 쓰는 작가의 심리상태가 반영되므로 모든 문학작품은 ‘작가의 하소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심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96년에 출간한 그의 장편소설은 제목부터가 ‘불안’이었다.

    “내가 요즘 느끼는 불안은 실존적 불안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불안도 아니고 형이상학적 불안도 아니다. 그저 막연한 불안이다.”

    솔직한 글쓰기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이다. 그는 모든 글쓰기의 기본 심리를 노출증에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솔직하게 발가벗기’가 글쓰기의 근본 동인이요, 좋은 글의 첫째 요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 중견작가의 수필 한 대목이 생각난다.

    데뷔 초기에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작품을 쓸 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었단다. 요란한 섹스장면이나 지극히 비윤리적인 대목을 묘사하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부모님이나 삼촌, 애인,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위축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닐까,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느냐고 의아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 면에서 마광수는 거리낌이 없다. 무한대의 상상력을 발휘한다. 마치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스하는 사람 같다. 그러니 상대방이 불편한 마음을 가질 만도 하다. 본능적인 장면과 마주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린다. 그렇지만 호기심을 억제하지 못해서 손가락을 벌리고 상황을 살핀다. 시야가 좀 불편하지만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해야 웬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광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며 이중적 자아분열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는 늘 인간의 내면적 이중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지식인이다. 요절한 지사형 인물에 대한 추모도 그들이 ‘변절할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할 만큼 극단적이다.

    시인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마광수는 윤동주를 저항시인이 아니라 순수한 휴머니스트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에게 진짜로 솔직한 시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내면적 이중성을 습관화하지 말고 ‘솔직함의 문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솔직한 담론이나 솔직한 주장은 대개 결론을 확실하게 내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어이없는 모럴 테러리즘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그림자(Shatten)’라고 하는 개념으로 이 상황을 설명해 보면 이렇다.

    ‘그림자’란 나(自我)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인 측면에 있는 자아의 분신인데,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 민간설화에 나오는 대극적인 인물들, 이를테면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백설공주와 마녀’ 등의 한 쌍이 바로 인간의 의식성과 무의식성,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고 있다.

    낮에는 점잖은 의사지만 밤마다 포악한 괴물로 변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한 인간 속에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좋은 예다. 지킬 박사의 그림자는 하이드인데 이 둘은 둘이 아닌 하나 속의 두 모습인 것이다. 살다보면 어떤 사람에 대해서 ‘왜 그런지 모르게, 공연히’ 혐오감이 들거나 미운 감정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그림자가 투사되고 있어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때 그 사람의 혐오스러운 부분은 바로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자신의 부정적인 무의식, 바로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마광수는 교수 재임용 탈락 논란 후 심사가 보류되는 우여곡절 끝에 휴직계를 제출했다. 주제넘게 교수 임용자격의 절차나 내용에 대해서 말할 처지는 못되지만 그 경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괜한 미운 털’이 박힌 것 같은 마광수의 모습이 보이면서, 짙은 그림자가 느껴진다.

    “21세기를 맞이한 지금에 있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내가 가장 뼈아프게 절망하고 있는 것은 한국사회가 여지껏 끌어안고 있는 ‘문화적 촌티’다. 이러한 ‘문화적 촌티’는 문화독재적 사고방식과 수구적 봉건윤리에 기인하는데, 이 ‘문화적 촌티’가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고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이 바로 ‘표현의 자유 억압’과 변화의 거부, 그리고 ‘성의식의 이중성’인 것이다.”

    때론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론 너무 선정적으로 보여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마광수 주장의 핵심이라 할 만한 말이다. 각각의 취향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난 돌은 나쁜 돌이 아니라 좋은 돌이다. 모난 돌이란 개성을 갖고서 시대를 앞서가거나 튀는 사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상징이라는 개념을 중요시한다. 비유는 하나의 뜻만 가지지만 상징은 다의적인 모호함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개방되어 있다. 다양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상징시학’이라는 문학이론서를 내기도 했지만 평자들에 의하면 그의 문학관을 총체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핵심개념은 바로 상징이란다.

    그는 상상력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적 문화관과 문화의 자유시장 원리의 확립만이 문화를 발전시키는 길이라고 역설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건 마광수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서 ‘괜한 미운 털’이 안 박히고도 살아갈 수 있는 풍토를 말한다. 그는 문화진흥 10개년 계획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발 제발 상상력의 자유를 달라’고 절규한다.

    한국의 외로운 에로티카의 장인

    타고난 체질이 ‘다혈질적 투쟁형’이라기보다 ‘우울적 회의형’인 마광수는 지금까지도 계속 시대와 불화를 빚으며 심한 우울증과 막연한 불안에 시달린다. 마음이 약하고 겁도 많은 성격이라니 당연히 더욱 심한 피해의식에 시달릴 것이다.

    사라 사건 직후 ‘인터내셔널 헤롤드 트리뷴’지는 마광수를 가리켜 ‘한국의 외로운 에로티카의 장인’이라고 표현했는데 2000년 현재 그 ‘외로움’은 ‘왜 나만?’이라는 또 다른 표현으로 마광수를 옥죄고 있다.

    “정말 묘하게도 우리 사회는 마교수의 육체와 정신에 중상을 입혀 놓고 사실 그가 표현한 이상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진단입니다.”

    마광수에 대한 동료교수의 평가다. 절륜의 정력이나 섹시한 외모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지겨울 만큼 반복적으로 ‘성의식의 이중성 타파’를 주장하는 이 사내의 이별 경험담을 들으면서 끝을 맺어 보자.

    “나의 경우 내가 버림받는 쪽에 섰을 때는 상대방 여자가 어느날 갑자기 영문모를 변덕을 부리면서 이별을 선언하고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여자를 버리는 쪽에 설 때도 있었는데, 나는 마음이 약한지라 졸지에 돌아서버리지는 못하고 계속 칭얼거려가며 ‘이별’을 애걸했던 적이 더 많은 것 같다.”

    이 여리고 솔직해서 너무나 ‘야(野)한 지식인’에게 막연한 피해의식을 안겨주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인가.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고 싶은 행동을 다할 수는 없는 게 세상입니다. 하지만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게 ‘시대와의 불화’를 겪을 만큼 ‘튀는’ 생각인가.

    피해의식은 나만 손해본다는 느낌이다. 당했다,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고 소외감을 느끼며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피해의식은 또 다른 피해의식을 불러일으켜 인간관계에 신뢰가 없어지고 불신이 팽배해진다. 그러므로 결국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된다.

    이유 없이 손찌검을 하는 남편과 오래 살아온 아내들 중에는 은연중에 ‘혹시 내가 맞을 짓을 해서 그런 건지 몰라’하는 터무니없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도 한 개인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피해의식을 갖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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