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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이기준 서울대학교 총장

“서울대 입시 우등생 줄세워 뽑지 않겠다”

  • 이형삼 hans@donga.com

“서울대 입시 우등생 줄세워 뽑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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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모든 대학이 세계적인 대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미국의 위스콘신주에는 14개의 주립대가 있는데, 이들 모두가 종합대학으로 가려다 낭패를 봤어요. 그런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위스콘신 메디슨만 종합대로 가고 나머지는 다 전문화하기로 한 겁니다.

우리나라도 대학 전부가 종합대학이 되려고 하는 게 문제지, 우리나라에 종합대학이 하나도 없어야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국가대표’ 격인 서울대까지 전문화하라는 것은 불합리한 주장이에요. 너희는 인문학을 잘하니까 인문대로 가라, 공학이 강하니까 공대로 가라고 하는 것은 포항공대 같은 규모의 특수한 대학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그 나라를 대표하는 대학에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총장은 소모적인 종합대학 논란 대신 학문의 ‘퓨전화’에 초점을 맞춰달라고 주문했다.

“이제는 ‘문어발’이냐 아니냐를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서울대가 앞으로 검증받아야 할 부분은 종합대학에 걸맞은 시너지효과를 내느냐 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학과가 50개든 100개든 이것들이 학문간, 학제간 시너지 효과없이 따로따로 간다면 ‘유니버시티’가 아니라 파편화된 ‘멀티버시티’에 불과합니다.

가령 미국 카네기 멜론대의 공과대학과 예술대학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세계 최고 수준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 것이나, 독일 베를린자유대의 생명공학 화학 컴퓨터 약학계열이 힘을 합쳐 ‘생명정보의학(Bioinfomedics)’이라는 새로운 연구분야를 창출한 것처럼 학문의 퓨전화를 이뤄나가야 합니다. 이제는 서울대 어느 학과에 신입생이 들어와도 그 학과의 종으로 만들지 않겠습니다. 학과와 학과, 계열과 계열 사이의 벽이 창의력을 죽입니다.”



─서울대에 학문의 퓨전화 사례로 들 만한 게 있습니까?

“전기공학부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어요. 전기공학과 전자공학과 제어계측공학과를 합쳐 한 지붕 아래로 넣었는데, 교수가 50여 명이나 되니 학문적으로 운신의 폭도 넓어졌고, 전공이 다른 교수나 대학원생들 간에 협조도 원활합니다. 특히 대학원생들은 서로 허물없는 친구처럼 어울려 함께 연구합니다. 교수 허락도 받지 않고 장비를 같이 쓰기도 하죠. 그러니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수밖에요. 세 학과가 나뉘어 있을 때와 지금의 연구업적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두뇌한국 21(BK 21) 사업을 계기로 자연대학의 생물분야 3개 학과가 한 학부로 뭉쳤는데, 여기에서도 몇 년 안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서울대의 여러 연구소들도 학문 퓨전화의 현장입니다. 예컨대 반도체연구소에서는 전기 전자 화공 재료 생물 등 다양한 전공 학생들이 함께 연구하고 있습니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한국학 연구가 활발해지면 사학 국어학 고고학 분야는 물론, 조선시대 서책들의 뛰어난 지질을 연구하기 위해 공대 학생까지 참여할 수 있어요. 이런 종합연구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교수회의=동문회?

─학문의 퓨전화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서울대에는 그것 못지 않게 인력의 퓨전화도 시급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군요. 서울대의 ‘순혈통주의’가 도마에 오른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이를 깨트릴 의지가 좀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98년부터 2000년 2학기까지 채용한 교수 172명 중 95%인 163명이 서울대 출신이었습니다. ‘대학 교원을 신규 채용할 때 특정 대학의 학사학위 소지자가 채용인원의 3분의 2를 초과하지 않아야 된다’는 교육공무원 임용령이 적용된 99년 2학기 이후에도 신규 채용자 75명 중 무려 73명이 서울대 출신이었습니다.

“하버드대의 총장을 지낸 엘리어트 같은 분은 ‘훌륭한 대학으로 성장하려면 학문적인 인브리딩(inbreeding·근친교배)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건 정말 문제가 많아요.

그런데 인브리딩이라고 하면 대개 최종학위를 보는데, 최종학위로 따지자면 서울대에는 철저한 도제식 교육이 실시되는 의과대학 외에는 학문적 인브리딩이 없습니다. 학부는 서울대를 나왔어도 박사학위는 대부분 다른 대학에서 따오거든요. 이렇다 보니 누군가가 뭘 연구하다가 나가면 그 사람이 하던 연구가 중단되는 형편이에요. 아마 의과대학도 전문대학원이 되면 다른 대학 출신들이 많이 들어와서 인브리딩 현상이 줄어들 것입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학문적인 인브리딩은 없어도 대부분의 교수들이 서울대에서 학부를 마쳤기 때문에 교수회의가 마치 동문회 같다는 겁니다. 이런 분위기에선 선배가 한마디 하면 후배는 아무 소리도 못하게 되죠. 이래서야 어떻게 의견을 제대로 수렴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음 임용 때는 반드시 교육공무원 임용령에 따라 3분의 1을 다른 대학 학부 출신으로 뽑겠다고 학장들로부터 다짐을 받았습니다. 일부 학장들은 ‘실력이 나은데도 서울대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안 뽑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했지만, ‘서울대 안 나온 사람 중에도 우수한 사람이 많을 테니 그런 사람을 찾아보자’고 했어요.

이제는 다들 수긍합니다. 몇 년 안에 사정이 많이 달라질 겁니다. 99년 2학기부터는 외국인도 교수로 뽑을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었어요. 한국말도 못하는 서울대 교수가 나올 판인데, 서울대 학부 안 나왔다고 서울대 교수가 못 된대서야 얘기가 안 되죠.”

─각종 교육예산이 서울대에 몰리는 데 대해서도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BK 21 사업에서도 과학기술 분야 예산의 58%, 교육개혁 지원비의 64%가 서울대에 지원돼 다른 대학의 불만을 샀습니다.

“하버드대나 도쿄대의 1년 예산은 우리돈으로 2조 원에 달합니다. 99년 중국은 베이징대와 칭화대를 집중 육성키로 방침을 정하고 2000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동아시아 4개 대학(서울대 베이징대 도쿄대 하노이대)의 학술교류 및 공동문화 창출을 위한 공동선언 직전인 지난 11월2일에는 중국 부총리가 교육부 장관과 과기부 장관을 대동하고 베이징대를 방문해 이 대학의 발전방안을 논의할 정도였어요.

서울대의 한 해 예산은 2400억 원 정도로, 세계 일류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전년도 예산에서 이월되는 예산은 36억원에 불과합니다. 서울대 교수의 월급은 국립대 중에서도 중하위권 수준이에요. BK 21 사업은 원래 서울대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추진과정에 과제별 경쟁지원 방식을 취했습니다. 경쟁 결과 서울대가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인문·사회계 적극 지원

─인문학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인문학 퇴조현상은 서울대도 예외가 아닙니다. 2001학년도 대학원 석·박사과정 모집에서 인문·사회계열에 미달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는데요.

“언론이 기사를 지나치게 키웠어요. 이번에 미달된 곳이 좀 많긴 했지만, 과거에도 대학원 정원이 꽉꽉 찼던 적은 드물거든요. 또한 이공계열에도 미달 학과가 많았는데, 인문·사회계열에만 초점을 맞췄더군요.

어쨌든 이런 현상은 인문·사회계열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줄었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간 정부, 특히 교육당국이 인력수급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학원 학생이 줄었다고 인문·사회학이 쇠퇴할 이유는 없습니다. 학문은 사람 수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웃푸트의 질이 중요한 것이죠. 누군가는 그러더군요. ‘인문학은 위기에 처할수록 아웃푸트가 좋아진다’고. 사람 사는 동네에서 어떻게 인문학이 없어질 수 있겠어요.

다만 연구비 지원이 이공계통에 집중되다 보니 인문학 하는 분들로선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연구비는 이공계통에 많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대신 서울대 자체 예산에서 나가는 연구비로는 인문·사회계를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 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 50억 원의 발전기금을 조성, 95년 이후 170여 명의 교수에게 해외 연수를 지원하기도 했죠. 앞으로도 공동 집담회나 한국학 연구, 그룹 및 개인에 대한 다양한 지원방안을 마련할 것입니다.”

신동아 200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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