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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인 성공학|조아스전자 오태준 사장

유럽에서 더 유명한 면도기 名家

  • 곽희자

유럽에서 더 유명한 면도기 名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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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시작한 사업은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추석시장을 겨냥해 여기저기에서 돈을 끌어다 만든 새 제품들이 화재로 잿더미가 된 것. 설상가상으로 그 전까지 꼬박꼬박 불입해온 보험이 화재 수일 전에 만기가 지나 보상을 한 푼도 받을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 그는 떠나겠다는 직원들을 붙잡고 잿더미 위에서 간곡하게 설득했다. “우리가 언제 돈 들고 물건 만든 적이 있었나. 그 동안의 경험을 살리면 다시 일어서서 더 잘할 수 있다. 지금껏 신용을 쌓아왔기 때문에 거래처에서도 외상으로 물건을 대줄 것이다. 우리 모두 젊으니 다시 한 번 해보자”고.

오사장의 말대로 그간 거래했던 부품업체 가운데 절반은 그를 믿고 외상으로 부품을 대주며 밀어줬다. 그는 이때부터 외국산 부품에 의지하지 않고 자체 기술로 부품을 만들어 쓰기 위해 기술 개발에 주력했다. 그는 부품을 만드는 외국 기업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워 왔다.

“연구를 하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기면 무작정 외국업체로 날아갔어요. 그냥은 배워올 수 없으니까 기계를 사려는 손님처럼 가장하고 들어가 상담을 하면서 핵심기술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물어봤지요. 그걸 메모해 와서 우리 용도에 맞게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써보고 결함이 나타나면 보완하고, 그래도 안 되면 또 나가서 비슷한 방법으로 배워오고… 10년을 그렇게 했어요. 그래도 끝나지 않습디다. 하면 할수록 어려운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사장은 그렇게 밤낮없이 일을 했지만 자체 판매망을 갖지 않은 상태에선 기업의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94년, 스스로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거래해오던 판매상에게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로선 30∼40년씩 실타래처럼 얽혀온 판매망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이때 거래하던 한 판매상이 자신의 거래처 장부를 인수하라고 제의했다. 오사장은 자기 힘으로 판매망을 구축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알고 거래처 장부와 함께 직원들까지 인수했다. 면도기 사업에 뛰어든 지 12년 만에 판매망을 갖게 된 것이다.



제품 생산과 판매를 독자적으로 하게 되면서 그 해 12월에 국내 최초로 전기 이발기를 개발해 시판했다. 이발기는 전기면도기와 기능이 비슷해 특별한 기술이 요구되진 않았지만 날을 개발하는 게 어려웠다. 이발기의 날은 가는 머리카락을 자유자재로 깎을 수 있을 만큼 섬세하면서도 강해야 하는데, 이 날을 자체 개발하면서 98년엔 수출 길도 열렸다. 현재 이 제품은 유럽에서 베이비리스 상표로 팔리고 있는데, 네덜란드의 필립스나 독일의 브라운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이렇게 생산품목이 늘어나고 회사도 커지자 오사장은 해외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회사를 개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95년 그는 소사장제를 도입해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4개의 생산라인을 만든 뒤 그때껏 핵심부문에서 기술을 개발해온 고참 기술진에게 각각 독립채산제로 협력회사를 만들어 내보냈다.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사람을 잘라낸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노하우를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재배치한 것.

그는 “우리 기업들은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직원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기술력은 무시하고 무조건 잘라내려고만 한다. 그러다 보니 100년 가까이 장인정신을 길러온 외국 기업들과는 경쟁이 안 된다”고 한탄한다. 현재 이렇게 내보낸 협력업체는 모두 7개.

수출로 활로 개척

그는 이렇게 세대교체를 이루면서 기술개발 기술관리 상품기획 상품관리 디자인 무역 애프터서비스 등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 작업을 마무리한 96년부터 해외시장 개척에 뛰어들었다.

“우리라고 안 될 게 뭐냐면서 조아스 브랜드로 제품 만들고 상자 만들어 무작정 외국 판매상을 만나러 갔어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어요. 세계 시장을 돌아보니 미국은 너무 저가 시장이고, 동남아시아는 우리보다 여건이 낙후해 시장이 없고, 일본은 너무 까다로웠어요. 그나마 유럽 쪽이 좀 만만해 보이더군요. 그래서 유럽을 가장 먼저 공략했습니다.”

3년 동안 매달 두 명씩 직원을 내보냈더니 저쪽에서 “좋다. 하지만 거래를 할 경우 애프터서비스는 어떻게 해줄래?” 하고 물어왔다. 오사장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해외 지사도, 해외 애프터서비스 조직망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직접 하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물건 팔면서 애프터서비스까지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줄 수 있는 업체를 찾아다녔다. 다행히 제조업과 영업을 겸하고 있는 한 회사를 찾아 뜻을 전했더니 자신들의 브랜드로 팔게 해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인증도 문제였다. 한번은 말레이시아에서 협상을 다 끝내고 일어서려는데 “인증서는 있겠지?” 하고 물었다. 그래서 KS 인증서를 내보이며 “이게 코리아 스탠더드다”고 했더니 그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세계 인증서를 꺼내 보이며 “우리가 원하는 건 이것이다”고 했다.

놀랍기도 했고 창피하기도 했다. 우리보다 경제여건이 못한 말레이시아도 유럽과 상호 인증을 하고 있는데,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라는 한국 기업이 그처럼 무지했다니….

수출보다 인증이 급선무였다. 그는 “다시 제출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오자마자 규격을 갖추고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 인증서를 만들었다. 조아스전자는 98년 CE(유럽 안전규격), 99년 ISO(국제표준화기구 규격) 9001, 2000년 UL(미국 안전규격), VDE(독일 안전규격)를 취득했다. 유럽 CE를 취득하고 비로소 프랑스 베이비리스사와 면도기와 이발기 수출계약을 맺었다.

외환위기로 내수시장이 얼어붙었을 때 수출의 물꼬가 터진 것은 행운이었다. 덕분에 직원도 늘렸고 지금의 공장도 짓게 됐다. 이는 차입경영을 하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믿을 곳도 없고 기댈 곳도 없었던 오사장은 평소에 유동성을 확보해뒀던 것.

요즘 주 5일제 근무를 놓고 한창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조아스전자는 13년 전인 87년부터 5일제 근무를 실시했다.

“82년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토요일 오전근무를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토요일 아침에 출근해봐야 겨우 서너 시간 일하고 가는 거예요. 그거 일하자고 토요일에 굳이 회사에 나오게 하느니 평소에 시간을 잘 활용하게 하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 5일 근무를 하는 대신 평일엔 출근시간 정확히 지키고, 출근 즉시 일 시작하고, 퇴근시간 되기 전에 미리 일 정리하지 말고 퇴근시간까지 정확히 일하라고 했어요.”

조아스는 99년 마케팅부를 신설했다. 기술 면에서는 해외 브랜드에 뒤지지 않는데도 이미지 관리에 미숙해 그만큼 빛을 못 보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 동안은 기술만 좋으면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광고 같은 건 낭비라고 외면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앞으로는 ‘이미지 업’ 하는 데도 투자를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정직과 성실, 기술력이라는 무기에 ‘날개’를 달겠다는 것이다.

신동아 200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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