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대통령도 될 뻔했던 4성장군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 콜린 파월 스토리

  • 이흥한 < 미 KISON 연구원 >

    입력2005-05-04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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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렘에서 태어나 사우스 브롱크스에서 자랐다. 대학 성적은 보통으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에 진출해서는 열심히 일했다. 인종차별의 벽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차별 때문에 가장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콜린 파월의 성공담은, 인종차별이 존재하긴 하지만 재능있는 소수 인종의 성공을 막을 만큼 사회 구조가 그렇게 부패하지는 않았다고 믿고 있는 미국인에게 용기를 주는 일화다.”

    1995년 7월10일자 ‘타임’의 글이다. 1995년 7월은 미국이 콜린 파월의 이름을 외치고 있을 때다. ‘타임’은 그 파월을 커버 스토리로 다뤘고,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디를 가나 콜린 파월은 사람으로 둘러싸인다. 몸에 찰싹 들러붙는 스판 옷차림으로 무장하고 워싱턴 시내를 누비는 자전거 급행 배달원들도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파월 앞에 와서 대통령에 출마하라고 조른다. 식당 웨이터들도 이 퇴역 장군에게 백악관을 노리라고 조언하고, 기업체 회장들은 은밀히 파월이 출마를 결심하도록 돈을 대겠다고 속삭인다. 어디를 가나 콜린 파월은 박수를 받는다.”

    괜한 박수가 아니었다. 한 여론 조사는 다음해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클린턴과 공화당의 보브 돌이 대통령 후보로 나와 맞서는 선거판에 파월이 무소속으로 끼여들어 3파전을 펼칠 경우, 유권자의 3분의 1이 파월을 찍겠다고 했다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았다. 또 파월이 만약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될 경우 클린턴을 근소한 차로 물리친다고도 했다. 공화당 내에서도 파월은 22%의 지지율을 보였다. 보브 돌의 43%에는 못 미쳤지만 워싱턴 정치판의 고참들인 팻 뷰캐넌이나 필 그램이 얻은 지지율 6%에 비하면 놀라운 수치였다.

    콜린 파월은 직업 정치가가 아니다. 백인도, 앵글로색슨도 아니다. 최연소 합참의장을 지냈다고는 해도 이미 2년 전에 은퇴한 퇴역 장성이었다. “나는 직업 정치인이 아닙니다. 나는 군인이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한발 물러서는데도, 미국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이 흑인 앞에 성조기를 흔들어댔다.



    미국 유권자들은 공화-민주 양당이 갈라 먹는 미국 정치에 식상할 대로 식상해 있었다. 이처럼 수십 년이 넘도록 해소되지 않는 불만은 공화-민주 어느 당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당파 독립 후보를 원하게 했다. 어느 당의 이름표도 달고 싶지 않다는 유권자 수가 골수 민주-공화당원의 수를 넘어서고 있을 때였다.

    이념적인 중도파 파월이야말로 이런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상적인 대통령 후보였다. 게다가 차기 대선에 나설 클린턴은 상처투성이였고, 보브 돌은 이미 두 차례나 대선 후보의 문턱에서 물먹은 낙오자였다.

    한편 파월은 이미 워싱턴 사람이었다. 현역 군인으로 영관급 제복을 입고 있을 때부터 펜타곤에서 백악관까지 워싱턴의 게임에 참여했으며, 손에는 훌륭한 성적표가 쥐어져 있었다. 레이건 때는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이었고, 12대 합참의장에 그를 임명한 사람은 부시 대통령이었으며, 클린턴 때까지 그는 합참의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화려한 경력과 대중의 인기는 그를 대통령 후보로 세우기에 충분했으며, 성품과 대인관계도 나무랄 게 없었다.

    철두철미한 계산가

    레이건 대통령은 파월과 함께 찍은 사진에 이런 글을 써주었다. ‘당신이 그렇다고 하면, 당신 말이 맞다는 걸 나는 알고 있소.’ 포드 대통령은 파월을 ‘미국 최고의 대중 연설가’라고 평했고, 국방부 차관이었던 폴 월포위츠는 ‘훌륭한 정치인이 국민과 소통하는 교신 기술을 파월은 터득하고 있다’고 했다. 카터 행정부에서 그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전 에너지부 장관 찰스 던컨은 또 이렇게 말했다. ‘그도 뭔가 잘못이 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그게 뭔지 꼬집어낼 수가 없다.’

    그러나 파월은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1996년 1월의 한 인터뷰에서 그는 대통령 불출마를 선택한 ‘열흘 간의 숙고’에 대해 이렇게 심정을 토로했다.

    “자선전을 펴낸 후,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 해야 일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35년간의 군 생활과 2년에 걸친 집필, 그 다음은 무엇을 할지 결정해야 했다. 가족들과 모여앉아 10일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 인생을 되돌아보고 결론을 내렸다. 대통령 출마는 나나 내 가족을 위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1995년 ‘미국의 햄릿’이었던 파월이 대통령 불출마를 결심하고 5년 후, 그는 정치인으로 다시 나타났다. 공화당 정권에서 미 역사상 최초로 흑인 국무장관으로 지명된 것이다. 1993년, 역시 미 역사상 최연소였던 합참의장 자리에서 은퇴한 지 7년 만이고, 1972년 백악관의 선발 연구원으로 워싱턴에 발을 디딘 지 28년 만이다.

    4년 전에 대통령 출마를 포기하고, 부통령 자리마저 버렸던 그가 국무장관 자리를 택했다. 왜, 어떻게 이런 선택을 했을까? 1995년 7월 파월을 커버 스토리로 다룬 ‘타임’의 제목은 ‘파월이라는 사람’이었다. 그 커버 스토리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파월은 그 자신도 인정하듯이 언제나 조심스럽게 위험과 보상을 견주는 철두철미한 계산가다. 그는 정치 장군으로서의 경계가 어디인지,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하지 않은지를 알아챔으로써 성공의 길을 달려왔다. 그는 인생을 통해, 미국 정치라는 참호 속에 수류탄을 던져 넣는 사람이 되기를 시사한 적은 없었다. 한편으로, 파월은 한번에 두세 개의 계단을 오름으로써 경력을 쌓아온 사람이다. 그는 아주 단호한 사나이다.”

    파월이 대통령 후보 출마 여부를 놓고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는 가장 큰 문제점은, 공화당 후보가 되든 무소속 독립 후보가 되든 자신이 대선에 뛰어든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 정치의 고착화된 기반을 뒤흔들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할렘에서 합참의장까지-이것이 콜린 파월의 대명사였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제 이 대명사는 ‘할렘에서 국무장관까지’로 바뀌었다.

    1937년 4월5일생으로 올해 64세인 콜린 파월은 뉴욕 맨해튼의 동북부 할렘 출신이다. 아버지 루터 파월과 어머니 모드 파월은 자메이카 이민자였고, 뉴욕의 사우스 브롱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콜린 파월은 평범한 흑인 아이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다. 스포츠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줄곧 평균 점수인 C만 받았다. 잠시 보이 스카우트 활동을 했으나 운동이라고는 길거리에서 노는 것이 고작이었다. 평범한 가정, 평범한 점수, 평균 아이,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평범한 집안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뉴욕시 공립학교에 다녔고, 모리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뉴욕시립대학(CCNY)에 진학해 지질학을 공부했다. ROTC였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58년, 조지아 주의 포트베닝에서 기본 군사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24세 되던 해인 1961년, 지금의 아내인 알마를 친구 소개로 만나 9개월 만에 결혼했다. ‘내가 살아온 미국(My American Journey)’이라는 자서전에 파월은 양가 부모와 함께 찍은 그의 결혼식 사진을 소개하면서, ‘장인이 포기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익살맞은 설명을 붙여 놓았다. ‘딸이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잘 몰랐음에 틀림없다. 결혼식을 하기 36시간 전에 나를 처음 만났으니까.’ 파월의 장인은 알마가 자란 앨라배마 주 버밍엄의 고등학교 교장이었다.

    아내 알마는 파월의 진정한 동반자였다. 결혼 전 중위였던 파월은 이미 베트남 행이 결정되어 있었고, 결혼하자마자 베트남으로 떠난다. 이후 35년간 군에 복무하면서 파월 부부는 근무지를 따라 24번 이사를 했다.

    파월은 한 인터뷰에서 군인의 아내 알마를 이렇게 묘사했다. “전출 명령이 떨어지면 난 집에 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알마, 이동이다’ 그러면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알겠습니다. 이동’이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파월은 1995년 대통령 출마를 놓고 고심했을 때, 아내의 의견을 가장 존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알마의 의견이 그의 불출마 결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품 넘치는 자태의 왕성한 사회활동가인 알마는 워싱턴의 대형 공연장인 케네디 센터의 이사로 일하면서, 여러 사회단체의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파월과 알마는 1남 2녀를 두었다. 그의 외아들 마이클은 그와 함께 독일에서 현역 군인으로 근무한 적도 있고 워싱턴 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또 큰딸 린다는 연극 배우, 둘째 딸 앤 마리는 ABC 방송국에서 일한다. ABC 워싱턴 지사의 저명한 앵커 테트 카플의 ‘나이트라인’ 팀이다. 또 친손자 제프리와 브라이언이 있다.

    파월이 첫아들 마이클의 탄생 소식을 들은 것은 베트남에서였다. 수송기에서 공중 보급된 꾸러미 속에 장모가 보낸, 아들 탄생을 알리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파월은 1962년부터 1년 동안 고문관으로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1968년 소령 계급장을 달고 두 번째로 베트남전에 참전, 아메리칸 사단의 제23 보병대대의 작전 장교로 근무한다.

    백악관에서 워싱턴을 배우다

    두 번째로 베트남에 갔을 때, 젊은 장교 파월은 첫 번째 베트남전 참전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낀다.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뎠을 때 가졌던 ‘끔찍한 공산주의로부터 세계를 구한다’는 열정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아직도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어제까지 같이 밥을 먹었던 전우가 오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기 일쑤였다. 베트남은 그렇게 삶과 죽음의 교차점이었다.

    파월은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돌아와 1971년 조지 워싱턴 대학 경영학 석사 과정에 진학해 MBA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72년 인생의 전환점이 된 백악관 연구원 프로그램의 연구원으로 선발되어 백악관으로 들어간다. 백악관 연구원이란 직책은 훌륭한 보병이 되기만을 힘쓰던 평범한 육군 장교가 워싱턴 사람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월은 나중에 자신이 백악관 연구원이 된 배경에 대해 “군 장교로서 뛰어난 업무수행을 인정받았고, 인터뷰 결과가 예상외로 좋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워싱턴을 배우기 시작한다. 운영예산처(OMB, Office of Man- agement and Budget)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연방 정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행정부 최고위급에서 정책은 어떻게 결정되며 의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현역 군인으로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워싱턴을 보고, 듣고, 냄새 맡아 가며 워싱턴을 공부하는 동안, 워싱턴은 워싱턴대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워싱턴은 사람을 골라내는 곳이다. 이후 파월 앞에 펼쳐지는 탄탄한 출세가도와 화려한 경력의 결과를 볼 때, 1972년에서 1973년까지 1년 남짓한 백악관 연구원 생활은 흑인 보병 장교였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분수령이었다.

    레이건의 1, 2기 행정부 국방장관으로, 후에 파월 장군의 펜타곤 보스가 된 캐스퍼 와인버거와 프랭크 칼루치와 인연을 맺은 것도 백악관 연구원 시절이었다. 펜타곤 인맥과 접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백악관 연구원 경력은 워싱턴의 파월을 길러내는 밑거름이었다.

    그는 백악관 근무 후 예정에 없던 한국 파견 명령을 받고 제32보병사단에 배치되어 2년 동안 근무했다. 36세 때다.

    30대까지의 군생활이 파월 인생의 전반기라면, 40대에 들어선 1977년부터는 오늘날 파월을 있게 만든 후반기 인생의 발아기였다. 카터 행정부 시절인 1977년부터 1981년 사이에 그는 현역군인으로 국방부차관보선임군사보좌관 등 고위직을 역임한다. 파월이 처음 ‘워싱턴의 군인’이 된 것은 대령 때였다. 1977년 카터의 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브레진스키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NSC 스태프가 된 것이 첫출발이었다.

    그는 고위직 제의가 들어올 때마다 늘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끝까지 군인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1976년 101 공수사단의 2여단장을 맡고 있었을 때 국방부 차관보선임군사보좌관을 맡으라는 제의가 왔을 때도 자신이 정말 원했던 것은 진급이었다고 자서전에 밝히고 있다.

    어쨌든 워싱턴의 펜타곤은 그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는 그 부름에 응했다. 1983년 레이건 행정부 때는 국방장관군사보좌관으로 와인버거 장관을 곁에서 지켰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미 육군 5군단장으로 잠시 펜타곤을 비웠으나, 1987년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부름으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이 된다. 처음으로 내각에 입각한 것이다. 현역 장성이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하는 것이 옳으니 그르니 말이 돌긴 했지만, 파월 개인의 능력에 대한 비난은 아니었다.

    군인의 길을 가겠다고 했던 그는 1989년 마침내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미 합참의장에 임명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갔을 때였고, 파월의 나이 52세였다. 최연소 합참의장은 개인의 명예였고,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광이었다.

    은퇴 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최초의 합참의장이 되었을 때의 기분이 어땠느냐고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파월은 자신의 임명권자였던 부시 대통령에 대한 감사 표시를 잊지 않은 후 대답 첫머리에 이렇게 말했다. “과거 나 이전에도 군복무를 했으나 인종차별과 인종주의 때문에 합참의장이 될 수 없었던 흑인 군인들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 내가 장교로 군 복무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밥을 먹으러 갈 수 없었던 식당이 있었고 잠을 잘 수 없었던 모텔이 있었다.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흑인임을 잊지 않았다. 잊지 않았다기보다 오히려 흑인이라는 것을 늘 강조했다. 공화당원이 되어 수천 명의 청중 앞에서 대중연설을 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무의식적으로 인종을 입에 올리곤 했다. 텍사스 주 샌 안토니오의 한 연설에서는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포드 대통령이 ‘미국 최고의 대중연설가’라고 칭찬했던 그다.

    “인종차별에 제가 어떻게 대처했느냐구요? 저는 내쳤습니다. 저는 인종차별이라는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지 않으려 합니다. 틀에 박힌 차별은 부숴버릴 겁니다. 저는 흑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당신이 이 차별의 짐을 지십시오. 왜냐구요? 제가 그 짐을 짊어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는 흑인으로서 갖는 독특한 이점을 알고 있는 듯했다. 백악관 연구원으로 결정이 나기 직전에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흑인으로 태어난 것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고.

    걸프전으로 영웅이 되다

    파월은 인종의 벽을 농담으로 넘는 여유도 보였다. 인종의 차이는 차별을 논하기 이전에 미국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다양성의 한 형태였고, 파월은 이 다양성을 차별에 맞서는 좋은 무기로 써먹었다. 샌디에이고의 대중연설에서, 그는 말 솜씨만 번지르르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공허한 말만 늘어놓는 한 백인 장교의 흉내를 낸 다음, 걸프전에 참전하러 가는 흑인 상사의 걸쭉한 목소리를 덧붙였다. “가서 본때를 보여주자. 그 다음엔 집으로 가는 거야.” 적나라한 ‘파월판’ 흑백의 차이였다.

    합참의장으로 치른 걸프전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워싱턴의 파월이 미국의 파월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모나지 않은 장군이었다. 그가 입을 열 때는 보수의 가치와 진보의 목소리가 적절하게 섞인 화음으로 들렸다. 또 이념을 논할 때는 어떤 견해든 쏟아부을 수 있는 빈 잔이었다.

    그는 대중 앞에 설 때마다 또 다른 강력한 무기를 들이밀었다. 제복의 강인함이나 철제 무기의 차가움이 아니었다. 그가 던진 화두는 가족이었다. 연설 때마다 걸프전의 다음 일화를 잊지 않고 소개하면서 가족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역설했다.

    쿠웨이트 진공을 코앞에 둔 18세의 한 흑인 병사 앞에 ABC 방송의 샘 도널슨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며 물었다.

    “지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질문을 받은 병사는 “천만에요”라고 대답하면서 주위의 같은 부대원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무섭지 않습니다. 무섭지 않은 이유가 있어요. 나는 내 가족과 함께 있거든요. 이 사람들은 내 가족입니다. 서로 보살펴주는 가족요.”

    이렇게 대답하는 그 병사의 주위에는 흑인, 백인, 히스패닉, 동양계 등 모자이크된 미국이 둘러쳐져 있었다. 파월은 18세 흑인 병사의 이 일화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이 18세 흑인 이병의 가슴속에 있는 가족 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8000마일 밖 아니라 어디라도 우리는 이 병사를 내보낼 수 있습니다.”

    다음 순간 파월의 메시지는 정치색을 띤다.

    “정계에서는 늘 목청 높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몇 가지 기본 원칙은 있어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미국은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미국 가족 중에 누군가가 고통을 겪고 있고, 도움이 필요한 가족이 있다면, 우리 가족은 한시도 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걸프전의 승리는 곧 파월의 승리였다. 파월은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으며, 1993년 합참의장에서 물러나 제복을 벗고 은퇴할 때는 백악관의 문턱에 다가가 있었다.

    1993년 은퇴하기 두 달 전에 그는 랜덤하우스 출판사와 자신의 자서전 계약을 한다. 은퇴 하루 전인 9월29일, 애써 찾은 자서전 작가 중에 조세프 퍼시코와 만났고, 다음날부터 파월은 군생활을 청산하고 작가로서 집필 생활에 몰두한다.

    자서전은 또 한 번 파월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책이 나오자마자 출판 사인회를 위해 5주에 걸친 북 투어에 들어가 25개 도시를 순회한다. 하루 2회의 사인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였다. 두툼한 640쪽짜리 자서전을 들고 저자의 서명을 받으려는 독자들이 가는 곳마다 장사진을 쳤다. 전쟁 영웅이자 흑인의 영광인 파월의 인기는 전미국을 휩쓸었다.

    서너 시간이 걸리는 사인회에서 그는 앉은자리에서 2000권에서 4000권까지 독자들이 가져온 자서전에 서명을 했다. 식사도 거르고, 사인회가 끝나면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 나중에 책 한 권당 서명에 2.9초가 걸렸다고 술회했다. 한 시간에 700명에서 900명의 독자들을 만났다. 한 시간에 최소한 900마디의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사인펜 15개를 다 써버리는 강행군이었다.

    자서전 출판

    파월은 1996년 1월 케이블 방송 C-SPAN의 북노트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진행자 브라이언 램과 가진 인터뷰에서 북 투어 때의 일화를 몇 가지 소개했다.

    “뉴욕 브롱크스에서 같이 자랐던 어린 시절의 친구들도 만났다. 뉴욕사인회 때였다. 한 우아한 흑인 여성이 내 앞에 책을 내밀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에 올려다보았다. 어릴 적 친구의 어머니였다. 내가 늘 그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모델로 삼았던 로니 브룩스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세상을 떴고, 친구 장례식 때 만나고는 얼굴을 보지 못했던 그 친구의 어머니가 줄을 서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내가 혹시 알아보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해서 내 앞에 와서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서 있었다고 했다.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있겠는가. 얼싸안고 그냥 울기만 했다.”

    파월의 책을 들고 줄서 있는 독자들 가운데에는 60년대 말 베트남 전에 같이 참전했다가 헬리콥터 추락 사고를 당했던 동료와 부하 두 명도 끼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자기 가족을 모두 데려 왔다. 파월은 “정말, 정말 감격적인 순간이었다”고 했다.

    그는 총 6만1권의 책에 서명했다. 마지막 한 권은 북 투어가 끝난 후 랜덤 하우스 출판사에 기증했다.

    자서전 출간의 인기는 돈으로 연결되었다. 항간에는 600만 달러의 저작권 선금을 받았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걸프전의 또 한 명의 영웅 아널드 슈월츠코프 장군과 더불어 파월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는 병사들의 피의 대가로 떼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비판도 일었다. 1회 강연에 6만 달러의 강연료를 챙긴다는 말도 나왔다.

    북노트와의 인터뷰에서, 공직 생활 끝에 큰돈벌이를 한다는 비판도 있다는 진행자의 짓궂은 질문에 파월은 이렇게 대답했다.

    “슈월츠코프 장군과 나는 35년 동안 군에서 복무했다. 은퇴하고 나면 우리는 일반 시민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군복무 기간에 부적절한 길을 걸은 적도, 불명예스러운 일을 한 적도 없다. 은퇴 후 방위 산업체 같은 곳에 취직하지도 않았다. 대중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을 할 뿐이다. 책을 쓰고 연설을 하고…. 그리고 책 출판은 시장의 원리대로 움직이는 것이며, 잘못된 일이 개입됐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의 인생에 흔히 영웅들이 연출해내는 극적 감동의 순간은 없다. 오히려 크고 작은 성취의 기쁨이 모여 성공이라는 큰 물줄기를 이루어낸다. ‘정치 군인’ ‘정치 장군’이라는 별명이 늘 붙어다녔지만, 그는 늘 ‘나는 근본적으로 군인’이라고 항변했다.

    공화당에서도 그에게 손을 뻗쳤고, 민주당에서도 그를 유혹했다. 국가안보보좌관이었을 때 정계로 나가라는 주위의 권고가 빗발쳤을 때도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군인이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늘 정치 냄새가 풍겼다. 그는 부인한다. “군복무 기간에 정치적 야망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군이라는 계급 사회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정치는 독특한 재주가 필요하고, 나는 그 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무시해본 적이 없으며,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재주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 역시 무시해 보지 않았다.”

    그는 공화당원이다. 왜 공화당원이 됐느냐는 질문에는 “내 가치와 맞는다”는 한마디로 답한다. 사회 가치를 평가하는 그의 눈은 다분히 보수적인 것이 사실이다. 올드 패션이다. 그는 여 군인이 전투에 파견되는 것을 반대하고, 동성애자가 군에서 공개적으로 복무하는 것도 반대한다. 클린턴 대통령이 군에서도 동성애자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합참의장 파월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군 최고통수권자에게 반대 의견을 내세웠었다.

    하지만 파월은 기본적으로 중도파다. 특히 몇 가지 민감한 사안에서는 중도파로서 그의 입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낙태를 옹호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고, 소수 인종에 특혜를 부여하는 어퍼머티브 액션도 지지한다. ‘불행한 일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인종 차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소수 인종에게는 특혜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파월은 평생 무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투쟁의 기질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물의를 일으킬 만한 마찰도 없었고, 겉으로 드러난 갈등도 없었다. 1995년 대통령 출마 얘기가 나왔을 때도 그는 큰소리 한번 없이 조용히 깃발을 접었으며, 또 조용히 국무장관 자리에 가 앉았다.

    중도파 실용 외교노선

    그를 두고 미 군부의 꼭두각시이며 권력에만 관심을 갖는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이 따라다니는 것도, 움직이지 않는 듯하면서 어느 날 뚜껑을 열어보면 한자리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그의 행동철학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미 보수파 군부 인사들을 호되게 비판하는 진보 진영의 목소리는 파월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는다. 1968년 베트남에서 미라이 사건이 터졌을 때, 미 군부에서는 적지 않은 수의 진보적인 현역 장교들이 스스로 옷을 벗고 미군의 도덕성을 질타하면서 평화 시위 군중에 섞였다.

    ‘파월은 이때 무엇을 했는가? 군부 주류 속으로 땅굴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가지 않았는가?’고 진보 진영은 파월을 몰아붙인다.

    진보 인사들의 파월 비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란 콘트라 사건 때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당시 소장이었던 파월 장군에게 무기 수송의 책임을 맡겼고, 파월 소장은 노스 중령과 사전 상의를 했다는 국가안보문서보관소의 기밀 서류도 진보 진영이 파월에게 해명을 요구하며 내놓는 기록들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파나마 침공 때인 1989년 12월 파월은 합참의장이었고, 걸프전 당시 미군이 이라크를 공습하면서 사막 한가운데 있는 ‘죽음의 고속도로’를 시체더미로 채웠을 때 파월은 그 전쟁을 지휘했던 4성 장군이었다. 파월은 이런 비난들에 대해 군복무 동안에 단 한 번도 불법적인 명령을 받아 이를 수행한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흑인 출신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른 것도 거대한 미 언론의 여론조작의 결과라는 비판에도 파월은 ‘흑인임이 자랑스럽다’고 반격한다.

    파월은 국무장관이 됨으로써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또 한 번의 성공담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이제 부시 공화당 정권이 추진하는 외교정책의 야전 사령관이 되었다. 군복 대신 양복을 입었지만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기본적으로 ‘군인’ 출신이다.

    미군이 필요한 곳에는 가야 하지만 불필요한 곳에는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폐쇄적인 고립주의도 맹목적인 팽창주의도 아닌 중도파 외교 실용주의다. 군이 필요없게 될 날이 온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군대는 필요하다고 본다. 군은 훌륭한 보험 정책이다.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으면 친구들이 안심을 하고, 잠재 적국이 말썽을 피우려다가도 두 번 생각하게 된다. 반대로 강력한 군대가 없으면 말썽꾸러기들이 우리를 시험해보려 한다. 이웃에 경찰이 있는 것과 똑같은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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