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지역별 합종연횡식 대권 쟁취는 안된다”

  • 송문홍 songmh@donga.com

    입력2005-04-27 14: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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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을 대여섯 명쯤 꼽아보라면, 한화갑(韓和甲) 민주당 최고위원(전남 무안·신안군)은 그 속에 반드시 낄 법한 사람이다. 집권 민주당의 뿌리인 동교동계의 리더, ‘리틀 DJ’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30여년 최측근, 작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 최고위원 경선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한 잠재적 대권주자…. 그래서 요즘 그의 주변에는 줄을 대보려는 사람들로 붐빈다고 하던가.

    그러나 자천타천 ‘포스트 DJ’를 노리는 인물들 중에서 한 최고위원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차기 대선까지 2년이 채 남지 않았으니만큼 누구처럼 언론 인터뷰에 적극 나서 볼 만도 하련만, 최근의 그는 오히려 사람들을 피해다니는 편이다. ‘DJ의 그늘’을 벗어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고 판단해서였을까?

    그런 그를 인터뷰하게 된 것은 (적어도 국내 차원에서는) ‘비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한 최고위원은 1월20일 부시 미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방미(訪美)했었는데, 그때 부시 행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을 미국측 인사들을 상당수 접촉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은 미국에 새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미관계의 변화 추이에 촉각이 곤두서 있던 기자의 호기심을 부쩍 자극했다.

    그러나 한 최고위원을 만나서 미국 얘기만 듣는다는 것도 우스웠다. 국내 정치의 핵심 인물을 만나서 미국 얘기만 하고 헤어진다면, 속된 말로 ‘앙꼬 없는 찐빵’ 격이 돼 버리지 않겠는가. 아무튼 약간의 우여곡절 끝에 그를 만난 건 2월12일. 장소는 여의도 국민일보 12층 클럽에서였다. 그는 “사람들이 하도 많이 찾아오는 바람에 국회 의원회관에는 잘 안 나가는 편”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워싱턴에서 있었던 일



    ―미국에서 많은 분을 만나셨다지요?

    “많은 분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 사람들에게 그분들과 만나서 나눈 얘기를 전해주고 왔어요. 제가 우리 외교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도 외교적 판단에 보탬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 최고위원은 가져온 봉투에서 명함을 펼쳐 보며 이름을 대기 시작했다. 리치 맥코넬 부시대통령 취임준비위원장,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 앤드류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내정자, 톰 릴레이 공화당 수석부총무, 토머스 허바드 국무부 동아태담당 부차관보, 하버드대 에즈라 보겔 교수, 리처드 솔로몬 미평화연구소(USIP) 소장, 찰스 카트먼 국무부 한반도담당 특별대사….

    ―부시 전 대통령 부처도 만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만났지만 악수만 나누고 헤어졌어요.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이 레이건 센터에서 주최한 만찬 때 일입니다. 거기엔 ‘JP 총리’(그는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를 이렇게 불렀다)도 함께 참석하셨어요. 거기서 앤드류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과 인사를 나눴는데, 제가 “김정일 위원장이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한·미 사이에 남북문제에 대한 조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미 정상회담이 조기에 열리는 것이 긴요한데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카드 실장이 ‘알겠다’면서 ‘라이스(백악관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에게 그 얘기를 전달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말로만 그러지 말고 반드시 도와줘야 한다’고 다짐을 받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제가 워싱턴의 한국 특파원을 만났을 때 얘긴데, 저는 사실 JP 총리 측에서 무슨 발표를 했는지 모르고 있었어요. 다만 제 경험을 얘기한 겁니다. 저는 부시 전 대통령과 JP 총리가 만나는 장면을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기자들에게 ‘그 쪽에 사람이 많아서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더니 JP가 거짓말을 한 걸로 보도된 거야. 제 입장이 곤란해졌지요.”

    (당시 JP를 수행했던 자민련 정진석 의원은 1월19일 “김 명예총재가 대통령 취임 만찬에서 부시 전 대통령에게 한미 정상회담 조기성사를 당부했다”고 밝혔는데, 한 최고위원은 그 후 워싱턴 특파원과 오찬을 하며 “JP는 당시 부시 전 대통령과 환담을 나눌 기회가 없었다. 내가 대신 앤드루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에게 조기 개최 필요성을 설명했다”고 말해 자민련측 주장을 뒤집었다. 이에 대해 언론은 JP의 ‘방미 외교 뻥튀기’라며 비판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 해명하셨습니까?

    “본회의장에 가서 사과 말씀을 드렸어요. 그 장면을 ‘한겨레’가 사진을 찍어서 보도했더라고요. 그 전에 하와이로도 전화를 드렸는데 직접 통화는 못하고, 비서실장에게 얘기를 전했어요. 국내에서도 변웅전 의원에게 얘기를 전했고. 그분이 저를 좋게 봐주시는데 설령 누가 시켰다고 해도 제가 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사실 제가 정치인으로 결격 사유가 있어요. 너무 정직하다는 것…(웃음)”

    ―한 최고위원께서 이번에 만난 미국인들이 앞으로 한미 관계에서 중요한 일을 할 텐데, 그분들은 대체로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제가 주로 듣고 싶던 얘기도 부시 새 행정부는 대북정책과 관련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흔히 공화당이라면 북한에 마냥 퍼주기만 하지는 않겠다는 상호주의를 얘기하는데, 국내에서 야당의 시각이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이번에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만난 사람 중에서 우리 야당과 생각이 가장 비슷한 이는 누구였나요?(웃음)

    “내 느낌으로는 리처드 솔로몬이 좀 그런 것 같았습니다. 솔로몬씨는 이번에 김정일 위원장이 군부를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한데 대해서, 군부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해석하더군요.

    국무부 부장관 내정자인 아미티지씨는 햇볕정책이란 말보다는 포용정책이라는 말을 쓰는 게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우리 정부도 이미 그렇게 쓰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미티지 말은, 햇볕정책이라면 김정일 위원장 쪽에서 화답이 있어야 효과가 있는 게 아니냐, 그런데 만약 화답이 오지 않을 경우에는 김대통령의 정책이 일방적인 것이 될 염려가 있다, 그러니까 김 대통령에게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용어를 그렇게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미국의 정책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라고 덧붙이면서요.

    그래서 저도 ‘김대통령께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드린다’는 부분에 주목해서 ‘일리있는 말이다. 북한 역시 햇볕정책이라는 표현을 싫어해서 우리도 이미 포용정책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내정자의 햇볕정책 용어 폐기 발언은 국내 언론보도를 통해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사실 그 얘기가 신문 1면 톱에 실린다는 말을 듣고, 제가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통사정을 했어요. 제가 흘린 얘기는 아니었지만, 외교통상부 쪽에서 보면 외교 책임자도 아닌 정치인이 분별없이 함부로 얘기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또, 이건 사적인 얘기 같지만, 대통령께서 볼 때 한화갑이가 사리분별이 있는 사람인데 저렇게 함부로 말을 하는가, 이런 인상을 받으면 나는 청와대 못 간다, 그러니 나를 좀 봐달라고 했어요. 참으로 곤혹스러웠어요.

    나중에 아미티지도 그 보도와 관련해서 한국측 외교 당국에 미안하다고 전해왔습니다. 마치 자기가 햇볕정책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도됐으니까. 그 일 뒤에 해리티지 재단 사람들이 서울에 왔는데, 제가 아미티지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거든요. 그 얘기가 전달됐는지 아미티지 측에서 연락이 오기를 ‘내가 오히려 한국 외교부에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전반적으로는 향후 우리 정부와 부시 행정부의 관계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나는 핵문제와 미사일 문제에서는 클린턴 정부 말기에 북한과 미국 사이에 상당한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랬기에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에 가려고 하지 않았겠어요? 그렇다면 결국 공화당 정부도 그 연장선상에서 문제를 풀어가지 않겠느냐….”

    ―부시 행정부가 결국 전임 행정부의 성과를 이어받을 것이라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화당 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봐요. 또, 우리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을 만나면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이번에 이정빈 장관이 미국을 다녀오는 등 그 사이 대북한 정책에 대해서 의견 교환이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김대중 대통령의 개인적인 자산, 노벨평화상을 받은 분으로서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도 작용해서 클린턴 대통령 때의 정책과 비슷한 쪽으로 기조를 잡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 최고위원께서는 중국에도 아는 분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특별히 중국 전문가는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94년 처음 중국을 방문하실 때 제가 먼저 중국에 건너가 방문을 추진했어요. 이 일을 계기로 마치 제가 중국통인 양 돼버렸지만 사실 우리 당에도 저보다 중국을 더 잘 아는 분이 많아요. 아무튼 그때부터 중국 문제에 관심을 가진 건 사실입니다.

    작년 12월17일에도 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베이징에 다녀왔습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제가 베이징에 있을 때 북한에서도 사람들이 와 있었답디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방문을 협의하러 나온 사람들이었다고 해요.

    사실은 제가 중국 사회과학원 명예교수입니다. 두 차례 강의도 했어요. 중국 심양시에 있는 요녕대학의 명예 경제학박사, 명예교수이기도 하고 심양시 명예시민이기도 합니다.”

    “때가 되면…”

    ―앞으로 국내 정치지도자에게도 미국과 중국의 네트워크가 더욱 중요해지리고 보는데, 그런 것들이 큰 자산이 되겠군요.

    “그래요. 제가 판단하기로는 미국이나 중국이나 공식 채널과는 별도로 비공식 채널이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우리 정부의 비공식 채널은 아니지만, 누구든 그런 비공식 채널을 갖고 있으면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그리고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우리가 중국과 주의, 주장이 같을 때에 한반도에는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중국은…”

    ―그 말씀은 앞으로 우리가 미국보다는 중국과 더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는데요.

    “그런 뉘앙스를 풍길 수 있겠지요. 아무튼 역사적, 전통적으로 보면 한중 우호가 주류를 이루어왔어요. 반면에 미국과는 1882년 한미수교조약 이후 양국 관계가 항상 좋은 상태로 유지돼온 것은 아닙니다. 가쓰라-테프트 조약에 의해서 미국이 일본에 한국을 넘겨준 사례도 있잖아요? 만약에 한미 수교 이래 줄곧 좋은 관계가 유지됐더라면 아마도 38선도 생기지 않았겠지요.

    그러니 미국, 일본과의 확실하고 강력한 협조체제를 맺고 그것을 바탕으로 중국 및 러시아의 협조를 구해서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고 통일의 길을 찾아야겠다, 이것이 제가 보는 한반도 주변 국제관계의 틀입니다.”

    ―미국에서 이인제 최고위원을 만나셨지요? 무슨 얘기를 나눴습니까?

    “정치인들이 서로 만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향후 정국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두 분이 미국에서 만났다니 호기심을 갖는 게 당연하잖아요?

    “특별한 얘기를 나눈 건 없어요. 부시 취임식장 얘기도 하고, 이인제 최고위원도 미국 사람들을 만났잖아요. 그런 얘기도 나누고, 국내정치 문제는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런 얘기를 할 상황도 아니었고…. 최고위원 경선 전부터 이인제 최고위원이 한번 식사나 하자고 했었는데 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거든. 그러던 차에 미국에 갔고 그 얘기가 나와서 만났던 겁니다.”

    ―김종필 명예총재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도 따로 만나지 않았습니까?

    “JP 총리와는 제임스 베이커 리셥션에서 나온 뒤에 다른 몇 사람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박근혜 부총재와는 취임식장에서 만났고…”

    ―그러니까 그런 회동에 어떤 정치적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그런 자리마다 다른 분들도 합석했는데 정치적인 얘기를 어떻게 합니까?”

    ―그분들을 국내에서 만나면 화제가 되고 언론이 따라다니고 하겠지만, 외국에서라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오히려 그런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깊은 얘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거 전혀 없어요. 어느 언론에는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나왔더라고요.”

    ―누군가 한 최고위원을 만난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글쎄, ‘일요신문’에 보니까 한화갑이는 킹메이커를 하기로 했다고 측근이 말했다고….”

    ―말이 나온 김에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는 것을 묻겠습니다. 한 최고위원께서 ‘킹’이 되려고 하느냐, 아니면 ‘킹 메이커’가 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때가 되면…”

    한화갑 최고위원은 원래 신중한 사람이다. 웬만큼 이름이 알려진 정치인치고 ‘폭탄 발언’ 어쩌구 하면서 신문지상을 어지럽히지 않은 사람이 없지만 한 최고위원에겐 그런 일이 별로 없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한 최고위원은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며칠 전 한 최고위원께서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안기부 자금 공방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나라당은 이 문제를 놓고 집권 여당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한 최고위원 주장은 ‘정권 창출은 정당의 기본 목표다, 이걸 자기네가 하면 정당하고 남이 하면 음모라고 몰아붙이는 건 잘못이다, 이렇게 말씀했거든요.

    “그때 내가 얘기한 게 두 가지입니다, 정당이 정권을 창출하는 것은 본래 임무다, 기업이 돈버는 것과 똑같은 거다, 다만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불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비난할 수 있다, 이게 첫째입니다. 그 다음이 안기부 자금 문제인데, 이건 한나라당이 법을 어기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자금 지출권한을 가진 사람이 그 돈을 당에 줬다고 얘기했는데, 그 이상의 증거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방송에서 여기까지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회창 총재가 법관 출신입니다. 법관 때는 소수 의견을 많이 낸 분입니다. 그런데 정당 총재로 있으면 법을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그건 말이 안 되는 얘기죠. 그래서야 어떻게 법대로 한다며 국민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안기부 자금 문제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서 합당하게 처리해야 하고, 야당도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국정조사를 해야 합니다. 나는 앞으로 이 문제를 국정조사하자고 주장할 거예요.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언론 세무사찰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김영삼 대통령도 언론 세무사찰을 하고 보니까 비리가 많더라, 세금도 감면해줬다, 내가 조금만 받으라고 했다, 이건 대통령이 초법적으로 권한 행사를 했다는 걸 스스로 밝힌 겁니다. 그러나 언론이 치외법권 지역입니까? 언론도 세금 낼 건 내야 하고, 당연히 그래야지요. 다른 곳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언론사만 세무조사를 한다면 불공정하다고 할 수 있어요.

    야당에 불리한 것은 뭐든지 야당 탄압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법집행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언론도 세무사찰 받겠다, 정확하고 공정하게 해주라, 이렇게 나오는 게 온당한 것 아닙니까? 야당의 주장과 똑같이 ‘탄압이다’라고 하면서 야당 주장만 기사화하고, 이러면 도대체 어느 대통령이, 어느 정권이 법을 집행할 수 있겠습니까?”

    ―정권 창출은 정당의 정당한 목표이고 정치인이 대통령 자리를 목표로 뛰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제가 질문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점에서 한 최고위원의 목표는 무엇인지 하는 겁니다.

    “내가 소극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차는 선로 위를 가잖아요, 선로에서 벗어나면 못가는 겁니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운명이 있다고 생각해요. 각자 자기 운명의 궤적을 따라가는 겁니다. 다만 최선을 다 했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어요. 최선을 다하면 자기 목표를 빨리 달성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살아가되 원칙과 정도, 순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성격적으로 정치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들어요. 아무리 불리해도 거짓말을 못하거든. 그런데도 지금 정치를 하고 있는데, 이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의 ‘운명론’을 한참 얘기했다. 고향 섬에서 1호로 대학, 그것도 서울대를 졸업하고 외무고시 공부를 하던 일, 사고무친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동가식 서가숙하던 일, 대학까지 나와서 빈둥거리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 고향에 연락을 끊었다가 입대영장이 나온 사실도 모르고 지나친 일, 그 바람에 외교관의 꿈은 사라지고 김대중 의원 선거운동에 나서게 된 일….

    “선거운동을 하고 다닐 때 주위에서 서울대 나온 놈이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핀잔을 주는데, 창피하더라고요. 유신 후에도 내가 동교동을 지키고 있으면 사람들이 서울대 나온 놈이 여기서 이 짓 하고 있다고들 했어요. 갈 곳이 없던 나로서는 거기에 있게 해준 것만도 고마운데, 그래서 정치를 하게 됐고, 오늘이 있게 된 겁니다. 이게 운명이라는 거예요.”

    “차기 대권주자, 공정한 룰로 경쟁해야”

    ―그렇지만 그 시절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운명이라는 것은 자기가 개척할 수도 있는 겁니다. 큰 줄거리를 따라가되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가려고 애쓰다보면 나의 조건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무슨 일이든 욕심이 앞서면 일이 안 됩니다. 욕심이 앞서면 주위 사람들을 방해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정한 경쟁이 안 돼요. 너도 그런 좋은 점이 있지만 나에게도 이런 좋은 점이 있다, 전체적으로 이런 분위기가 돼야 옆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자신도 성장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저는 지금까지 특정인을 꼬집어서 공격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어요.

    그러니까 내가 앞으로 국민과 당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는 과정에 당원과 국민들이 ‘당신은 할 수 있다’ 이렇게 됐을 때 내가 나설지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지, 지금 내가 어떻게 평가받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면, 만약에 그런 결정에 걸맞지 않다면 국민이나 당원이 좋은 평가를 해주겠어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금도 웬만큼 발판이 마련됐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주변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해줘야죠.”

    ―요즘 한 최고위원 주변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고 하더군요.

    “저를 돕겠다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그런데 저와 연락도 잘 안되고, 제가 조용히 있으니까…. 그리고 의원회관 제 방으로 찾아오는 분들은 99%가 민원 관련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요즘은 의원회관에 잘 안 갑니다. 그러다 보니까 ‘한화갑이가 성장할 때 내가 봐 줬는데, 이제는 나를 이렇게 대하는구나’ 이렇게 섭섭해하는 분들이 늘어나요.

    아무튼 요즘은 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게 두려운 거예요. 질문한 것처럼 밖에서는 저 자신보다 저를 높게 평가해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제가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데, 이런 환경에서는 그러기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공부하고, 사색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가능한 한 사람들과 약속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한 최고위원께서는 김중권 대표와 도움을 주고받는데, 지금 그분이 하고 있는 일을 평가한다면….

    “저는 특별히 도와드린 것이 없는데…. 사람들은 지난 최고위원 경선 때 연대한 것까지 얘기합디다만 저는 그분을 크게 도와드렸다고 생각지 않아요. 사람이란 모름지기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지 제 생각으로 뭐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분이 당 대표를 맡아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권 주자로는 어떻게 보세요?

    “당신은 대권 주자가 아니다, 이렇게 심사하는 무슨 위원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결국 당원들 요구와 국민의 뜻에 따라서 각자가 자기 생각을 정립해서 나올 때가 있겠지요. 아무튼 저는 민주 정당이니 당원들 의사에 따라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경쟁사회고, 경쟁의 룰은 공정해야 합니다. 룰을 어긴 사람은 경쟁에 참여할 자격이 없어요. 끝까지 룰을 지켜야 해요. 공정한 룰에 입각한 경쟁을 거쳐서 나오면 불만이 없는 거예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우리 정당이 인물 중심, 지도자 중심으로 운영돼왔잖아요? 그렇게 보면 역시 김대통령의 의중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물론 영향을 끼칠 수 있죠. 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회는 인물 중심이라고 생각해요. 민주주의의 표본이라고 하는 미국에서도 걸핏하면 인물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잖아요? 우리 나라에서 특히 그런 면이 부각되는 이유를 저는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우리 문화가 장유유서(長幼有序)를 기본으로 한 유교 문화라는 점, 둘째는 신세지고 도움을 받으면 충성하는 풍토라는 점.

    우리가 60년대, 70∼80년대를 살아오면서 정치적으로 최대 덕목은 민주화였습니다. 민주화에는 자기 희생이 따르고, 그 때 앞장 섰던 지도자가 김대중, 김영삼입니다. 당연히 그분들을 중심으로 뭉쳤던 겁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과거처럼 독재를 상대로 민주화 투쟁을 벌이는 시대도 아니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서 희생의 바탕 위에서 성장하는 정치 풍토도 아니기 때문에 패턴이 달라져야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앞으로 한국의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민주적인 절차와 조정능력을 꼽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욕구를 거르고 합치는 능력이 조정력이고, 화합력입니다. 또 이제는 옛날처럼 카리스마가 있는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투명한 조정능력을 가진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차기 대선이 이제 2년 조금 못 남았는데 한 최고위원도 이제 어떤 쪽이든 의사표명을 해야 할 타이밍 아닙니까? 좀 더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 얘기는 더러 듣습니다. 그러나 원인 없는 정권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주어진 여건에 충실해야 합니다. 앞에서도 운명론 얘기를 했지만, 김대통령과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저는 없어요. 그러니까 김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셨을 때 저도 나올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은 대통령을 충실하게 모시는 것이 제 소임입니다.

    한 사람의 당원으로서 저는 다른 사람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다른 분들은 그저 당원이고 개인입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하게 말해서 당원의 입장과 자기 입장, 그리고 대통령의 입장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 3자가 합일이 돼야 해요.”

    ―얼마 전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이 한 최고위원의 국회 대표 연설에 대해서 이제까지 들은 연설 중에서 가장 좋았다, 김대통령과 똑같더라고 했습니다만.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제가 칭찬받을 자격이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노 장관께서 언론에 대해서 한 발언이 요즘 화제인데요.

    “제가 보기엔 대단히 용기있는 발언이고, 다른 사람은 그런 말을 안 하니까 그분이 한 거라고 봐요.”

    ―이인제 최고위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일단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분이니까 당내에서 대권후보 경선이 있다면 유리하지 않겠어요?

    “그렇지요. 훌륭한 지도자 중 한 분이라고 봅니다.”

    ―요즘 정계의 화제인 ‘강한 여당론’과 관련해서 두 가지 정도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민련과의 공조를 강화하고, 이슈별로 현명하게 대처한다, 예를 들어 안기부 자금 문제에 대해서 야당에 전면 대응한다는 식으로…. 차제에 자민련과 공조 차원이 아니라 아예 합당을 해서 여당 몸집을 키우고 체질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는 듯 합니다만.

    “우리는 찬성인데, 자민련이 그걸 반대하잖아요. 그래서 안 되는 거예요.”

    ―김종필 명예총재는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실 JP 총리와 그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얘기를 어떻게 제가 합니까? 저보다 위에서 할 얘기죠.”

    ―지난 총선 때 동진(東進) 정책이라는 말이 있었지요. 그러나 선거 결과로 보면 동진정책은 실패했다…. 한나라당도 김중권 대표가 임명되자 동진정책에 실패한 인물이라고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민주당이 정권을 재창출하려면 동진정책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십니까?

    “기자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거지 우리는 동진정책이란 말을 써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국민 화합하자는 말을 했고, 영호남이 화합하자고 했어요.

    지역 대립이 왜 나왔느냐,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나왔어요. 내 지역에서 대통령을 내자, 이거예요. 그런데 지금 각 지역이 대통령을 배출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대통령이 네 분 나왔고, 충청도는 윤보선 대통령, 강원도는 최규하 대통령이 있잖아요. 김대중 대통령은 전라도고. 수도권은 모든 대통령이 수도권에 사니까 당선되면 다 서울 대통령인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런 것 갖고 싸우지 말자는 겁니다. 이번에는 과거의 모든 경험을 반영해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을 뽑아보자, 나는 정당들이 그렇게 주장했으면 좋겠어요.”

    “대권경쟁보다 먼저 당에 기여해야”

    ―그동안 4년 중임제 개헌론에 대해서도 몇 차례 말씀하셨지요?

    “제가 이번에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LA에 들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임제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해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 같다, 그렇지만 개헌은 시기와 국민의 여망이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추진하지 않으면 때를 놓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 듯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단임제를 보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건 앞서 말한 대로 시기와 국민들의 지지, 그리고 여야 합의를 전제로 합니다. 확실할 때 추진해야지 정치 쟁점화 차원에서 한다면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장기집권 음모를 꾸민다는 한나라당 주장은 보통 파렴치한 말이 아니에요. 한나라당의 뿌리는 50년 여당입니다. 정권교체한 지 만 3년도 안된 우리에게 장기집권을 하려고 한다니 도대체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야당도 나름대로 상당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던데요. 예를 들면 ‘이회창 포위론’ ‘영남포위론’ 같은 주장도 있지 않습니까?

    “어디서 어디를 포위하는 건 좋지 않아요. 앞으로는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앞서 얘기한 조정의 리더십이 통하는 것이지요. 안 그래요?”

    ―이제는 지역을 떠나서 가장 훌륭한 인물을 뽑아야 한다면, 내심 그 후보군에 한 최고위원 자신도 올려놓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요?

    “16대 국회가 끝나려면 앞으로 3년이나 남았습니다. 두고 봅시다. (제목거리를) 억지로 짜내려고 하지 마세요(웃음).

    가장 중요한 건 정권 재창출의 여건을 만드는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미 몇 가지가 나와 있잖아요? 김대통령 말씀처럼 누가 당의 발전에 기여하느냐는 것도 그중 하나고. 사실 우리 정치인들이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동원하지만 당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으로는 김대통령이 업적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곧바로 우리 당의 지지가 됩니다. 그 토대 위에서 우리 당 후보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차기 대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족적은 남기지 못하고 있어요.”

    ―2월7일 국회 대표연설에 대해서 호평이 많더군요.

    “제가 대중연설을 잘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내용이지요. 전문위원들이 정책 중심으로 자료를 낸 것을 이낙연 의원이 초고를 썼습니다. 그걸 갖고 국회의원 10여명에게 돌려서 보완했습니다. 이번에는 문장이나 내용을 완전히 제 스타일로 했어요.”

    ―한 최고위원 개인으로는 이번 대표연설이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봅니다만, 특히 앞머리에서 정부 여당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시작한 게 인상적이었다는 평이 많더군요.

    “오늘(2월13일) ‘한겨레’에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어요. 작년 12월에는 우리 당 대선 후보로서 내가 2.7%로 나왔더라고요. 제 인지도가 2.7%라는 건 지금까지 제가 자기 목소리를 내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2월10일 조사에는 4.5%로 나왔어요. 거의 2배가 오른 거지요.”

    ―앞으로 한 최고위원의 활동 범위가 좀 더 넓어지리라고 예측해도 되겠지요?

    “글쎄, 날씨도 따뜻해지는데 활동도 많이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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