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NMD는 세계를 향한 기만이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진단

  • 송문홍 songmh@donga.com

    입력2005-04-29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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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미 시카고대 교수는 영어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 학자다. 1981년에 첫 출간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전 2권) 제1권에서 그는 6·25전쟁이 기본적으로 혁명적 시민전쟁(Civil War)의 성격을 가진 전쟁이었다고 규정하면서 미·소간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남북한이 제각기 발전시켜온 정치·경제 구조를 치밀하게 분석, 해외의 한국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커밍스 교수는 또 수정주의적 시각으로 한반도 문제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월간 애틀랜틱’(The Atlantic Monthly) 1997년 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남북한 평화체제 전환을 전제로 한 주한미군 철수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1945년 광복 이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분단을 초래했고, 그 후 줄곧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경쟁을 벌여온 과정에서 한반도의 국민국가 건설에 심각한 장애를 발생시켰다는 비판의식이 깔려 있었다. 이른바 그는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시각과는 일정 거리를 두면서 나름의 ‘재야적’ 시각을 견지해오고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가 급변하는 현 시점에 ‘신동아’가 커밍스 교수를 인터뷰한 것은 이런 그의 ‘독립적인’ 목소리를 듣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는 이메일을 통해서 이뤄졌음을 밝혀둔다.

    커밍스 교수의 최근 저서로는 ‘한국의 몫: 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1997), ‘시차 : 세기말 미국·동아시아 관계의 이해를 위하여’(視差·Parallax Visions: Making Sense of American-East Asian Relations at the End of the Century, 1999) 등이 있으며, 지난 1월에는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주최한 학술 세미나에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

    -커밍스 교수는 한국학 분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미국 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우선, 1990년에 나온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 이후 커밍스 교수가 한반도 문제를 보는 시각에 혹시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교수의 학문적 작업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 교수의 한국관(觀)을 간략하게 소개해주시지요.



    한국 문제를 이해하는 데서 제 기본 시각에 특기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30년간 저는 한반도 분단과 한미관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관건은 1945∼50년 시기를 올바로 분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 시기에 남북한에서는 국가가 형성됐고, 미국이 한국 문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 후 30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이런 변화를 통해서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어 나가는지, 그리고 헤겔이 말한 ‘역사의 교묘함’(the cunning of history)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에 존재했던 남한의 제1공화국은 북쪽의 체제보다 훨씬 취약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인 이유는 북쪽의 체제가 그 이전 시기 전세계의 식민지역에서 등장했던 혁명적 민족주의 체제와 유사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반면에 만약 남북이 각자 자신의 수단(devices)만으로 경쟁했다면 당시 남한 정권은 결코 북한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 정도의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경제발전과 정치적 민주화를 위한 투쟁과정을 거쳐 이제 한반도에서 남한은 북한보다 훨씬 강력하고 극적인 주체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경제적으로는 중공업이 발전했던 1970∼80년대에, 정치적으로는 첨예한 갈등을 거쳐서 유사(quasi)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등장한 1979∼87년 시기에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재판에 회부하고, 김대중이 노동단체 등 소외됐던 집단을 정치체제에 편입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위한 약속은 충족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전략적 상황은 1940년대 후반 이래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돼 있으며, 미국은 40년대 후반 이래로 유지·발전시켜온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거의 4만 명에 달하는 미군을 여전히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일부 전문가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역학 구도가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 말합니다. 커밍스 교수는 남북 정상회담과 그 이후의 진전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리고 남북 정상회담을 미·일·중·러 등 주변 강대국이 내심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로 동북아 지역정치가 매우 크게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김대중 대통령의 영민함은, 이 지역에서 과거 50년간 유지돼왔던 안보구조의 틀 속에서 북한과 화해하려고 노력해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김대통령이 북한과의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이 부분적이나마 한반도에 미군의 계속 주둔을 용인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은 앞으로도 미국이 이 지역에서 전략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면서 극적인 긴장완화, 나아가 6·25전쟁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킬 평화협정까지 도출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국도 분명 이런 남북간의 화해와 워싱턴·평양 간의 관계개선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실 중국은 1980년대 이래로 그런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이 지역 국가들 중 남북한의 화해와 관련해서 가장 협조적이지 않은 나라입니다. 일본 지도자들은 북한을 다루는 데 줄곧 냉전적인 수단에 집착했고,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 진전을 거부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들은 김대통령에게서 거의 배운 것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요. 김대통령은 사소한 사안들뿐 아니라 심지어 군사적 도발때문에 자신의 햇볕정책이 좌절되는 것을 거부했으니까요.

    김정일 상하이 방문의 의미

    ─서울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커밍스 교수는 90년대 중반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대해서 얘기할 때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북한붕괴론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상당히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였지요. 커밍스 교수가 북한의 붕괴 가능성에 동의하지 않았던 주된 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북한의 90년대 상황을 전반적으로 평가해주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북한이 작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받아들인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이를 먹어가면서 얻게 되는 몇 안 되는 미덕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예측이 옳은지 틀린지를 분별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1989∼90년 동유럽 정권들이 붕괴한 이래로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붕괴를 점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북한은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첫째, 북한은 상당한 물리력의 독립적인 군대를 보유한 나라이고, 1989년 당시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과는 달리 자국 영토 내에 외국 군대가 주둔해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북한은 공산국가이면서 동시에 반식민주의적,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적 정체(政體)이며, 60년대 이래 정권 내에 토착적인, 혹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매우 강력하게 유지돼왔습니다.

    셋째, 동서독과는 달리 남북한은 전쟁을 겪었고, 이 경험은 남북한 관계가 동서독 관계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띠게 했으며, 이는 남북간의 갈등 해결을 매우 어렵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제 견해가 옳았고, 역사는 다른 모든 사람이 믿고 싶어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흘러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50년 전 정인보 선생이 미국인들에게 자주 설파했듯이,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의 공산주의는 반식민주의적, 민족주의의 피를 토양으로 삼아 성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북한과 중국, 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이 아직까지도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래 북한은 생존을 위한 모드(mode)로 전면 개편되었으며, 여기에 맞추어 정치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켜왔습니다. 북한이 서울과 외국에 원조를 요청한 것도 바로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기아로 이어졌던 극심한 경제적 곤궁에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 겹쳤습니다. 1994년 김일성 사망으로부터 1998년 9월 김정일이 전권을 이양받기까지 왕조의 쇠락과 엄청난 재난이 동시에 북한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작년에 김정일은 큰 폭의 정책 변화와 함께 새 천년을 맞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마치 김정일이 “20세기가 아버지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나의 세기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물론 21세기가 김정일의 세기가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평양의 이념가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북한은 2000년 1월부터 외교 면에서도 극적인 변화를 꾀하면서 서울과 화해를 유도하는 한편 상당수 서구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개설했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달 중국 상하이를 전격 방문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김정일 위원장이 향후 북한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전망이 나왔습니다만, 커밍스 교수는 이 일을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먼저, 김정일의 상하이 방문은 워싱턴에서 부시 대통령이 취임하던 때와 시기가 일치하는데, 이를 통해서 북한이 전하려 했던 시그널은 분명합니다. 즉 북한은 전반적인 개혁을 계속해갈 것이며, 특히 김정일이 중국의 경제개혁을 연구하고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김정일은 정보·컴퓨터 혁명과 관련된 신산업에 매료된 듯합니다.

    또 이 방문은 북한이 60년대 정책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 신년사에 뒤이은 것인데, 이런 점들로 볼 때 저는 북한이 다시금 고립주의로 돌아가지는 않겠다는 매우 중요한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래 변함없이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북한으로 하여금 남북 정상회담을 수용하게 했던 주된 요인이라는 데 많은 전문가가 동의합니다. 김대통령의 포용정책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제가 보기에 김대통령은, 서울이 북한의 위협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지만, 과거 남한 및 미국의 어떤 대통령보다 대북정책의 전환에 큰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1998년 2월 취임사에서 김대통령은 북한에 대해서 “적극적인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했고, 평양이 워싱턴 및 도쿄와 관계를 개선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그런 식의 조그만 움직임이라도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던 전임자들과는 매우 대조적인 자세였습니다.

    김 대통령은 또 1998년 6월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50년간에 걸친 대북 엠바고를 풀라고 미국에 요청한 최초의 국가 수반이었습니다. 그는 별다른 양보도 요구하지 않고 북한에 식량 등 원조물자를 제공했으며, 동시에 그 자신이 북한의 강경파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자제력을 발휘했습니다. 이로써 남북한은 지난 수십년간 남북관계에서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했던, 서로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치고 받기(tit-for-tat)’ 식의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현대그룹의 창업자이자 실향민인 정주영씨가 대규모 투자를 하게 하는 등 남한 기업들이 북한에 투자하도록 적극 권유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저는 김대중 대통령이 어느 누구보다 남북 화해를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며, 바로 이런 일들로 인해 노벨상 위원회가 그의 공적을 평가하게 됐다고 봅니다.

    ─남북한은 지금 경의선 철도 복원, 전력지원 등 경제협력 분야에서 대화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분야에서 전개된 대화 노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철도 복원사업은 지금까지 잘 진행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경제협력도 몇 년 전까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화되었습니다. 남한 기업들은 북한을 지원하고 경제협력을 하는 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고, 북한 노동력을 생산설비에 투입함으로써 세계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미국은 90년대 이래로 동북아 지역정치, 특히 북한 핵·미사일 문제에 대응하는 일에 핵심이 돼왔습니다. 그러나 작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런 상황을 역전시켰고, 그 후 한국이 미국을 대신해서 대북협상 테이블의 앞자리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상관성을 생각해볼 때, 양자는 상호 배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김대중 정부는 1998년부터 클린턴 대통령의 퇴임 때까지 대북정책에서 미국을 선도해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별 관심도 없었고, 북한에 관한 모든 사안을 핵비확산 정책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은 불량국가(불량국가라는 개념도 클린턴 행정부가 전임 부시 행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개념입니다만)라고 보는 데는 변함이 없었지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처음에 워싱턴에게 논쟁의 여지가 큰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1999년 9월 페리 보고서가 나오면서 클린턴 행정부는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정책으로 돌아섰습니다.

    워싱턴의 정권교체와 평양

    ─클린턴 행정부 전반에 걸친 대북정책을 평가해주십시오.

    1992년부터 1994년 6월까지는 매우 나쁜 정책을 펼쳤고, 그래서 영변의 북한 핵시설을 놓고서 제2차 한국전쟁까지 갈 뻔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지난 뒤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에 외교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고, 19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 등 상당한 성과를 얻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까지 대북관계에서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노력했고, 만약 앨 고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면 그런 노력은 계속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한국전쟁 이래로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의 대북정책을 바꾸는 데 어느 전임자보다 많은 일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과 관련해서 고위 관료들의 발언 등 몇 가지 시그널이 나오고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이런 것들을 어떻게 보십니까?

    사실 지금까지 한반도 정책에 관해서는 별다른 시그널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월 국무장관 등 몇몇 인사들이 한 발언, 즉 미국은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를 계속 유지할 것이며,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북한과의 관계개선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는 발언이 나왔을 뿐입니다. 따라서 부시 행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합니다. 다음달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고 나면 상황이 좀더 분명해지리라고 봅니다.

    ─부시 행정부 출범을 전후해서 미국에서는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즉 북한에 제공하기로 했던 경수로 2기 중에 1기 대신에 6기의 화력발전소를 지어주자는 안입니다.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고 보십니까?

    그건 그저 추측일 뿐이라고 봅니다. 부시 행정부가 1994년 기본합의를 재협상할 것인지 여부를 지금 논하기는 너무 이릅니다. 새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왜 평양과 그런 합의가 이뤄졌는지 이해하게 되고, 다른 여러 대안이 1994년 기본합의보다 못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면, 그들은 1994년 기본합의를 비롯해서 클린턴 행정부가 이뤄놓은 것들을 지지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북미간에 진행되고 있는 의제들, 예컨대 미사일 협상, 인도주의적 지원, 경제제재 해제, 테러지원국 해제, 제네바 합의에 따른 경수로 건설 문제 등의 의제를 사안별로 전망해주십시오.

    그런 것은 다 연관되는 문제들인데, 현재로서는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하기로 한 약속을 계속 지킬 것인가, 김대중 정부가 시작한 화해정책을 부시 행정부가 유지할 것인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상당한 보상을 받으면 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혀왔지만, 북한 당국이 DMZ 북쪽의 군사력 수준을 감축하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 한 부시 행정부가 이걸 수용할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렇지만 부시 행정부도 북미관계는 계속 진전시킬 것이라고 봅니다.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것도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작년 가을 미·북 양측은 이 문제에 관련해 거의 합의에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건 제 해석입니다만, 북한은 자국에 망명해 있던 일본 적군파의 송환에 기꺼이 응하려고 했는데, 이 문제는 그 동안 경제제재 해제를 가로막은 주된 장애 중 하나였습니다.

    경수로는 지금 건설중이지만, 북한이 전력 설비를 현대화하지 않는 한 그 경수로가 정말로 북한의 전력난 해결에 도움이 될지는 의문입니다. 전력설비를 현대화하는 데에는 상당한 외부 지원이 더 필요합니다. 따라서 경수로가 완성되고 난 몇 년 뒤까지도 실제로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러시아와 중국, 유럽 국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NMD 구축 의지를 거듭 천명했습니다. NMD는 잠재적인 군비경쟁을 비롯해서 동북아의 지정학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변수입니다. 커밍스 교수는 부시 행정부가 NMD를 끝까지 추진하리라고 보십니까?

    질문처럼 부시 행정부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NMD를 추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NMD에 대한 비판자들은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80년대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했던 스타워즈 프로그램을 따르는 NMD에 대한 이런 유의 비판은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납세자들이 내는 수십억, 수백억 달러의 세금을 슈퍼 컴퓨터나 통신, 레이저 등 첨단산업에 쏟아붓는다는 점이고, 일본과 중국, 그 외 첨단기술 국가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정부 돈을 쓸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이 바로 NMD라는 점입니다. NMD는 미국의 군산(軍産) 복합체에 엄청난 지원을 하게 될 것입니다. NMD가 실제로 작동하느냐 여부는 논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북한은 NMD가 자신을 겨냥하는 ‘적’이 되게 할 정도로 우둔하지는 않습니다. 북한이 미국에 호전적으로 나오면 그건 미 의회가 NMD를 통과시키는 빌미가 될 뿐이죠. 평양으로서는 미사일 문제와 관련해서 워싱턴과 협상을 계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겁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1995년에 “만약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한다면 미국은 북한을 ‘숯덩이’(charcoal briquette)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봅니다. 북한은 자기 나라가 완전 초토화되는 것을 감수하지 않는 한 미사일을 결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북한에게 미사일은 미국과 협상하는 데만 유용할 뿐입니다. 그리고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서) 미사일을 팔아버리는 것이 요격미사일 방어체제를 도입하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싸게 먹힌다는 겁니다.

    ─가까운 장래에 가장 중요하고도 뜨거운 이슈로 떠오를 것으로 보이는 것이 주한미군 문제입니다. 커밍스 교수는 최근 서울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북한 정권 역시 자신의 안보를 위해서 주한미군의 주둔을 원한다고 발언한 적이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제가 앞에서도 거론했지만, 북한은 몇 년 전부터 미국인들과 사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남한에 미군이 계속 주둔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해왔습니다. 북한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들의 취약한 전략적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작년 여름 푸틴의 방북 전까지 90년대 내내 러시아와 관계가 썩 좋지 않았고, 중국이 1992년 서울과 수교한 후로는 중국과도 별다른 교류가 없었습니다. 중국과의 관계는 2, 3년 전부터 개선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북한은 일본을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한으로서는 이렇게 전략적으로 취약한 안보 상황을 완화시키는 방편으로, 그리고 원조를 얻는 방편으로 미국과 관계개선을 도모해온 것입니다.

    미국이 ‘정직한 중재자’가 되기 위한 조건

    ─커밍스 교수는 논문에서 미국은 장래 동북아에서 ‘정직한 중재자’(honest mediator)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미국의 최우선적인 전략적 목표는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장차 미·중관계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리라고 봅니다. 커밍스 교수가 논문에서 지적한 대로 만약 미국이 중국에 대해서 일종의 봉쇄정책을 추구한다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대중정책의 하부구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향후 한반도에서 미·중의 경쟁이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상황에 미국이 진정으로 ‘정직한 중재자’가 될 수 있을까요?

    미국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만큼은 원죄가 있습니다(The U.S. is hardly ‘innocent’ in the Korean context). 그러나 근년에 들어와 미국은 남북한간의 브로커 혹은 중재자로서 훨씬 효과적인 구실을 해오고 있습니다. 왜?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할 필요가 없는 한 남북 화해는 한반도에서 긴장과 휘발성(volatility)의 대폭적인 완화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중국에 대해서 완만한(modest) 고립화 혹은 봉쇄를 유지하는 동시에 일본이 강력하고 독립적인 군사력을 키우는 것도 억제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과거 오랫동안 한국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것을 비판해온 사람입니다. 제가 그런 주장을 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미군이 1961년 이래 계속돼온 한국의 군사독재를 지원해왔기 때문이고, 둘째는 미군이 주둔하는 바람에 그 동안 남북관계에 어떤 실질적인 변화도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민주 국가가 되었으며, 햇볕정책은 지금까지 성공적이어서, 미국도 북한과 관계개선을 위해서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 남과 북의 한국인들은 미국을 중국이나 러시아, 일본과 관련해서 한반도 안보의 보증인(guarantor)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계속돼온 갈등과 대립의 국면에서 현재의 상황 전개가 미국의 냉전정책에 이익이 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익이 된다고 봅니다.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봐도, 이는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안보 관심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전략입니다.

    이것은 또 이 지역에 큰 변화를 동반하지 않으면서 통일을 도출해낼 수 있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은 미국이 동아시아에 구축한 장기적인 안보구조 속에서 통일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미국 정책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한국인들이 향후 수십년간 미군이 주둔하기를 바라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궁극적으로 한국인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위의 질문과 관련하여, 부시 새 정부하에서 미·중관계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혹은 그 전 아버지 부시 시절과 비교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 국가미사일방어(NMD)와 타이완 문제가 양국 관계에 주된 갈등의 원천이 되겠지요. 그러나 NMD가 실전에 투입되려면 앞으로 여러 해가 걸릴 것이고, 지난 몇 년간 타이완과 중국 본토의 관계도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6·25전쟁의 진정한 종결’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와 관련해 이런저런 논의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향후 논의될 평화체제로는 남북한간 평화협정과 북·미간 평화협정 두 가지가 있는데….

    북한은 이미 오래 전에 평양과 워싱턴 사이에 평화조약(peace treaty)을 체결해야 한다던 주장을 거둬 들이고, 대신 서울측이 참여한 가운데 ‘평화협정’(peace agreement)을 맺자고 요구했습니다. 이는 북한의 정책이 크게 변화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 내에 6·25전쟁을 최종적으로 종결시킨다는 희망을 실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평화협정이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국이 포함되는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데에 더 이상 장애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부시 행정부가 협정 체결에 열의를 보여야 가능하겠지요.

    ─향후 한미관계가 악화될 소지는 없을까요? 90년대 이후 한미관계를 평가한다면?

    물론 새로운 위기국면이나 다른 이유 등으로 한미관계가 악화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나 1995년 이전에 보았던 것 같은 양국간의 심각한 대립 상황을 다시 보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앞으로 어려운 시기도 있겠죠. 그러나 그런 어려움은 지난 5년간 남북간에, 그리고 워싱턴과 평양 간에 축적돼온 외교적 진전 덕분에 예전보다는 관리하기가 훨씬 쉬워질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서 지금 한국에서는 이런저런 논의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남북대화보다 남남대화가 더 힘들다고까지 얘기합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이 심하다는 뜻이지요. 김대중 정부와 한국민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장기간에 걸친 투쟁, 햇볕정책의 성공, 취임한 지 1년 만에 파산에 처한 국가를 다시금 강력한 경제성장으로 이끈 현명한 리더십 등으로 세계적인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항상 비판받고 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30년 전에 서울의 다방에 앉아서 한국인들이 정치지도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도 지금처럼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1945년 말 존 호지(John R. Hodge) 장군이 미 국무부에 보낸 전문을 보면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인 사람들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모든 행동과 결정을 그것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칠지와 연결시켜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성향이 장기간 계속돼왔다면 그건 분명 한국의 정치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점은 (국외자로 하여금) 한국정치에 흥미를 느끼게 만드는 측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노선과 정책은 ‘민족공조체제’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우리의 대북, 대미 정책의 근간이 민족 분단을 청산하고 전쟁 가능성을 소멸시키며, 강대국의 패권 전략에 민족의 운명을 맡기지 않는 자주적 통일국가의 평화적 건설에 있다고 한다면, 모든 대외정책의 판단기준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것에 봉사하는 대미 공조는 가치가 있으며, 이와 충돌할 경우 우리는 당당하게 대미 공조의 조율 원칙을 민족적 관점에서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를 내부적으로 받쳐줄 정치 역량이다. 우리는 이 역량의 결집과 연대의 확산을 국가보안법 개정을 둘러싸고 힘을 모으고 있는 여야 소장 개혁세력의 움직임에서 찾을 수 있다. 여야 지도부의 소극적 혹은 부정적인 자세와는 달리 이들 소장 개혁파는 당을 뛰어넘어 국가보안법이 인권유린과 남북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점을 인식, 법 개정 여론을 확산시키고 개정 절차를 공동으로 밟아 나가기로 하는 등 이 흐름을 대세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한편 여야 지도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이전에 국가보안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이것이 그의 서울방문을 의식한 정치적 선물이라는 여론의 비판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답방 이후에 국가보안법을 개정할 경우 정상회담에서 국가보안법 개정을 밀약했다는 식의 트집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다. 일단 국가보안법 개정을 반대하는 한 무슨 구실이든 내세워 개정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미 지난 수십 년간 인권을 유린하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며, 분단체제에서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지켜온 국가보안법은 개정에서 더 나아가 폐지돼야만 하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냉전수구세력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온 중요한 실정법이었다. 게다가 냉전 시절, 미국의 친미 군부정권 지지라는 요소도 국가보안법 유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국가보안법은 미국의 동북아 전략상 결정적인 관건인 한반도의 분단을 유지하는 군부 정권의 출현에 없어서는 안 될 제도적 장치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도 국가보안법의 개폐는 개혁적 통일지향 세력이 역사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일대 투쟁이자, 이로써 민족 문제를 자주적·평화적으로 풀어낼 내부 역량이 급성장할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이다. 정치권 내부의 소장 개혁파가 내심 이런 현실을 겨냥하고 연대를 통해서 국가보안법 개정을 가능하게 한다면 이것은 단지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그치지 않고 한국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만드는 기초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이 발전적인 역량으로 성장한다면, 민족사에 획기적인 전진을 이룩할 수 있는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정치에는 희망이 생기고, 대외정책에도 주권국가로서 자주적 면모가 일신되며, 통일조국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정치사회적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민족의 생명을 담보로 강대국의 군사주의가 정당화될지도 모르는 현실에 분노하고,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제동을 거는 일은 마땅하다. 세계를 몇 번이고 파괴할 수 있는 자기들의 핵무기는 인류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양 하는 강대국의 반인류적인 패권주의야말로 지탄의 대상이 돼야 한다. 노암 촘스키를 비롯하여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북한이 아니라 바로 미국이 인류를 위협하는 깡패국가 중에 거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군산복합체라는 대자본의 이익을 위한 목적은 은폐한 채 가난하고 작은 나라가 미국을 위협한다면서 강경 군사노선을 지향하려는 부시 정권의 대 한반도 정책은 결코 우리의 공조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부시 정권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대북 적대정책에 몰두하는 국내 강경 수구세력의 반민족적인 주장 또한 조율의 대상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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