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쏘나타를 타면 한국차가 보인다

  • 윤영호 yyoungho@donga.com

    입력2005-04-29 15: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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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자동차가 새해 벽두 쏘나타 시리즈의 전통을 이어받은 뉴 EF쏘나타를 내놓았다. 1월10일 판매에 들어간 이 모델은 EF쏘나타의 뒤를 이어 국내 중형차 시장을 리드하겠다는 현대차의 의지와 자부심을 담고 있다. 1999년 1월부터 개발에 들어가 24개월 동안 총 1600억 원의 개발비를 쏟아부었다는 게 현대차측의 설명이다.

    현대차는 이 모델이 1988년 첫선을 보인 쏘나타 시리즈의 결정판이라고 자부한다. 13년간 한국 중형차의 대명사가 돼온 쏘나타는 혁신을 거듭하면서 중형차 기술을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해왔고, 이런 기술축적을 바탕으로 뉴 EF쏘나타를 내놓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광고 카피도 ‘쏘나타 최고의 작품’이다.

    그러나 정말 ‘혁신’을 하고 ‘기술축적’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가령 새 모델에 장착한, 고연비(高燃比)에다 변속 충격이 없는 첨단 6단 무단변속기(CVT)만 해도 그렇다. 이 변속기는 유압기술 수준이 낮은 국내에서는 생산되지 못해 현대는 지난해 8월경 일본 미쓰비시자동차가 양산한 것을 들여와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현대의 주장대로 자동변속기에 비해 실제로 연비가 10% 향상됐는지도 의문이다. 현대는 실험 결과가 이를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자사 홈페이지에 “CVT와 가솔린 직접분사(GDI) 엔진을 함께 장착해야 연비가 10% 정도 향상된다”고 밝히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제대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쏘나타가 국내 중형차, 나아가 국내 자동차산업의 성장을 이끌어온 대표적 브랜드인 것만은 틀림없다. ‘쏘나타가 바뀌면 중형차의 기준이 바뀝니다’는 뉴 EF쏘나타 광고 문구에는 현대의 그런 자부심이 오롯이 깃들여 있다.





    한국 중형차 ‘대표선수’

    ‘국산 승용차 최장수 모델’ ‘베스트 셀링 카’ 등 그간 얻어낸 갖가지 기록과 명성만 봐도 쏘나타는 국산 중형차를 대표하는 차종이다. 최장수 모델이다 보니 ‘훈장’도 많다. 포니 스텔라 엑셀에 이어 현대차의 네 번째 고유 모델인 쏘나타는 판매를 시작한 지 꼭 12년 만인 작년 7월 말 200만 대 생산 기록을 달성했다. 12년 동안 연평균 17만 대 이상씩 팔렸다는 얘기다. 자동차산업 선진국에는 한 모델이 1000만 대 이상 팔린 차종도 있다지만 우리 현실에선 200만 대만 해도 대단한 기록이다.

    쏘나타 이전의 최장수 차종은 국내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 포니였다. 국내 자동차산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됐던 포니는 75년 12월에 태어나 90년 1월 단종될 때까지 14년 1개월 동안 생산됐다. 그런데 현대측은 쏘나타의 실제 나이가 99년 말로 14년 2개월이 되어 이 기록을 깼다고 주장한다.

    이는 쏘나타의 출발시점을 공식 시판시점인 88년보다 앞당겨 잡은 데 따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현대차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쏘나타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쓰인 것은 85년 10월 출시한 스텔라 최상급 모델(프로젝트명 ‘Y1’, 이때 표기는 ‘소나타’였다)에서였다. 쏘나타가 포니를 제치고 최장수 모델이 됐다는 것은 쏘나타의 ‘진짜’ 역사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1978년부터 새 중형차인 Y카 개발에 나선 현대차는 5년 만인 83년 봄에 스텔라를 선보였고, 85년 10월 스텔라의 최상급 모델인 소나타를 발표했다. 소나타는 스위치를 누르면 액셀러레이터를 밟지 않아도 일정 속도를 유지하는 오토 크루즈 컨트롤과 파워 스티어링 등 당시로서는 첨단 장비를 갖춘 중형차였으나, 디자인 등 여러 면에서 스텔라와 차별화하는 데 실패해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2년 만에 슬그머니 단종됐다. 이름 때문에 ‘소(牛)나 타는 차’라는 비아냥을 들어서였을까.

    이런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서인지 현대차의 일부 관계자들은 실질적인 1세대 쏘나타가 88년 7월에 나온 Y2 모델이라고 말한다. 북미 수출 전략형으로 개발된 Y2카는 국산 중형차로는 처음으로 앞바퀴 굴림방식을 적용하고 설계와 디자인까지 자체 해결한, 명실상부한 국내 첫 독자 모델이었다고 한다. 이후 91년 한 차례의 마이너 체인지를 거쳐 93년 쏘나타Ⅱ→96년 쏘나타Ⅲ→98년 EF쏘나타→2001년 뉴 EF쏘나타로 발전해왔다.

    역사가 오래다 보니 ‘변종’도 생겨났다. 기아자동차가 지난해에 내놓은 옵티마는 현대차와 기아차가 통합되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나왔을 것이다. 현대가 EF쏘나타 후속 모델로 개발하던 차의 디자인을 기아에 넘겨줘 옵티마를 만들게 하고 자신은 뉴 EF쏘나타 개발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옵티마는 EF쏘나타를 기본으로 해서 태어난 쏘나타의 ‘의붓자식’쯤 된다고 할까.

    ‘오너형 고급차’ 전략 주효

    88년 7월 공식 출시된 쏘나타는 나온 지 한 달여 만에 1만여 대의 계약고를 올려 대히트를 예고하더니 이듬해부터는 국내 히트 상품에 단골로 선정됐다. 쏘나타는 승용차 시장에서 94년 이후 96년과 98년을 제외하고 내리 판매 1위를 차지했다.

    쏘나타의 인기는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91년 7월, 대형차에만 채택하던 고급 사양을 갖춘 쏘나타 골드 모델이 나오자 다른 승용차 운전자들까지 금장 ‘GOLD’ 엠블럼을 부속품 가게에서 구해다 붙이곤 했다. 90년대 말에는 쏘나타의 ‘S’자 엠블럼이 서울대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대학입시를 앞둔 고교생들에게 집중적인 표적이 되기도 했다.

    ‘쏘나타’는 하마터면 공중으로 사라질 뻔한 이름이다. 당초 전 사원을 대상으로 한 신차 이름 공모전에 응모한 120여 개의 이름 가운데 최종 후보로 압축된 것은 ‘퀘스트라(Questra)’와 ‘쏘나타(Sonata)’ 두 가지였다. 하지만 많은 임원들은 쏘나타라는 이름에 부정적이었다. 한번 실패한 모델명(소나타)이기 때문에 신차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반면 미국 현지법인 240여 딜러들의 의견은 달랐다. 쏘나타가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다는 것이었다. 이 차는 수출 전략형으로 개발됐던 만큼 결국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쏘나타로 결정됐다.

    쏘나타는 현대차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들은 “쏘나타급 이하의 차종은 팔릴수록 손해를 보거나 겨우 손익분기점을 맞추고, 쏘나타급 이상 차종에서 수익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현대차가 판매한 승용차 31만3721대 가운데 쏘나타급 이상 차종은 17만4313대로, 절반이 넘는 55.6%를 차지했다. 쏘나타 덕분에 현대차가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쏘나타가 이토록 오래 인기를 끌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업계 관계자들은 86∼88년의 ‘3저 호황’을 타고 우리나라도 자동차 대중화 시대에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점을 현대가 재빨리 간파, ‘오너형 고급차’를 지향한 전략이 먹혀들었다고 평가한다. 고급 오너차에 대한 수요를 예상해서 적절한 시점에 쏘나타를 개발한 게 성공요인이었다는 것이다.

    현대는 이런 미래 수요를 이미 스텔라에서 감지했다. 스텔라는 지금의 쏘나타와 비슷한 크기였지만 엔진은 1.5ℓ급을 얹었다. 차 크기는 중형이지만 엔진은 준중형급을 탑재한 것이다. 당연히 언덕길 같은 데서는 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차는 그런대로 잘 팔렸다. 이 무렵부터 차에 관한 한 ‘큰 것이 아름답다’는 분위기가 싹트고 있었던 것.

    현대는 쏘나타를 개발하면서 ‘이왕이면 큰 것’을 좋아하는 국내 소비자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심하게 배려했다. 국산 중형차로는 처음으로 앞바퀴 굴림형으로 설계한 것이나 엔진룸과 트렁크를 짧게 만든 것은 실내공간을 넓혀 큰 차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여러 사람이 타는 패밀리 카의 장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일부에서는 현대가 앞바퀴 굴림방식을 채택한 것에 대해 ‘반 발짝 앞선 전략’이라고 평가한다. 처음에는 뒷바퀴 굴림방식과 앞바퀴 굴림방식 두 가지를 다 고려했으나 당시 도요타 캠리, 혼다 어코드, 마쓰다 626 등 선진 메이커 중형차들이 실내 공간을 넓히기 위해 앞바퀴 굴림방식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이를 따랐다.

    ‘반 발짝 앞선 전략’은 메이커 쪽에서는 모험을 피할 수 있고, 보수적인 소비자들을 흡수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를 두고 기술이 부족한 현대차의 숙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말이 좋아 ‘반 발짝 앞선’ 것이지, 선진 메이커들의 기술을 뒤늦게 채용, 국내 시장에 적용한 것을 좋은 말로 표현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쏘나타를 오너 드라이버가 탈 수 있는 최상의 자동차로 포지셔닝한 것 역시 주효했다. 당시 쏘나타의 광고 컨셉트는 ‘성공인의 상징 쏘나타’였고,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쏘나타의 엔진용량, 엔진출력, 차의 크기 등 과거의 소형차와는 차별화된 요소를 집중 홍보했다. 사회적으로 웬만큼 성취했고 경제적 능력도 갖춘 40대를 겨냥한 전략이 멋지게 성공한 셈이다.

    가격정책도 소비자를 끄는 요인이었다. 대우자동차 임진 상품기획팀장은 “현대가 명실상부하게 국내시장을 장악한 것은 쏘나타 모델 때부터였다”면서 “포니, 엑셀 때의 대량 생산기반을 활용, 쏘나타를 1000만 원 안팎의 가격으로 치고 나오면서 대우 로얄 시리즈 등을 저만치 밀어낸 게 결정적인 승인이었다”고 분석했다.

    더욱이 국내 중형차 시장이 소형차 시장보다 볼륨이 커진 것은 현대와 쏘나타엔 더없이 큰 행운이었다. 자동차 내수시장은 96년을 기점으로 중형차 시장이 가장 큰 시장으로 성장하는 급속한 변화를 겪는다. 소비자들의 소득이 늘어난데다 승용차 대체 수요가 신규 수요를 앞지르면서 중형차 시장이 자연스럽게 최대 시장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97년 중형차 시장은 전체 시장의 30.8%를 차지할 만큼 커졌다.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80년대 후반에 자동차 대중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두 번째 차’를 사려는 대체 수요는 시장 변화에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소형차를 타던 사람들이 대거 중형차로 차종을 바꿔가는 과정에 쏘나타는 자연스럽게 고객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중형차가 한국시장에서 갖는 장점은 또 있다. 오너 드라이버가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차라는 점이다. 대형차로 넘어가면 고용 운전사를 둔 자가용이란 인식이 강해 대형차를 살 만한 사람도 풀옵션을 갖춘 중형차를 타는 경우가 많다. 자칫하다간 운전기사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이것도 쏘나타가 많이 팔릴 수 있었던 사회적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쏘나타는 대다수 운전자, 특히 여성 운전자도 편하게 운전할 수 있는 성능을 갖춘 차로 평가된다. 쏘나타는 품질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가볍고 운전하기 편한 차’의 성격이 강하다. ‘무겁고 부담스러운 차’라는 이미지 때문에 여성 운전자들이 대우차를 기피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고비마다 경쟁차 제압

    쏘나타의 아성을 무너뜨리려는 경쟁업체의 ‘도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쏘나타는 그때마다 도전을 물리쳤다. 최대 고비는 96년 무렵이었다. 당시 대우차는 DOHC 엔진을 얹은 뉴 프린스를 내놓았고(대우는 97년에 레간자까지 내놓았다), 기아차의 크레도스는 페이스 리프팅(face lifting·주요 디자인은 그대로 두고 차의 ‘얼굴’만 살짝 바꾸는 것)이 예정돼 있었다. 이에 대한 현대차의 대응이 96년 2월에 선보인 쏘나타Ⅲ였다.

    그 이전에도 기아 콩코드, 대우 프린스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쏘나타와 대적할 만한 상대가 못 됐다. 특히 콩코드의 경우 일부 마니아가 찾긴 했지만 판매량을 늘리는 데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일본 마쓰다 자동차의 구형 모델을 베이스로 개발된데다 크기도 쏘나타에 비해 작은 편이어서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기 힘들었다.

    하지만 크레도스와 레간자는 달랐다. 이들은 쏘나타와 대등한 상품성과 품질로 중형차 시장을 파고들었다. 특히 레간자는 ‘쉿! 소리없이 강하다’는 광고를 통해 중형 세단의 새로운 가치 기준을 내세우면서 한때 쏘나타를 맹추격했다. 게다가 현대차에 다소 싫증을 느낀 소비자들도 뭔가 다른 것을 찾고 있던 터라 현대로선 위기를 느낄 만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대우차의 도전은 거품이었음이 외환위기 이후 확연하게 드러났고, 크레도스는 디자인이 너무 얌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쏘나타Ⅲ의 최대 화제는 디자인이었다. 공격적이고 볼륨있는 외모가 파격으로 받아들여졌고, 곡선이 풍부하게 들어간 헤드 램프와 선명한 보닛 굴곡, 삼각형 테일 램프 등이 강한 인상을 줬다.

    더욱이 크레도스는 론칭 단계에서 새 차의 이미지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됐다. 1만㎞ 정도 주행한 뒤부터 급브레이크를 밟으면 차체가 심하게 떨리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기아차에는 비상이 걸렸고, 거의 1년 남짓 만에 이 문제를 해결했으나 그때는 이미 크레도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굳어진 이후였다.

    또 한 번의 고비는 98년 3월 삼성자동차가 SM5 시리즈를 내놓았을 때였다. 현대차는 이 모델에 대항하기 위해 EF쏘나타를 내놓았다. 당시 삼성쪽에서는 “성능 면에서 삼성차와 비슷하게 느껴지게 하고 내장이나 스타일에서는 삼성차보다 더 호화롭게 보이도록 개발한 차가 EF쏘나타”라는 얘기가 나왔다.

    현대차 관계자들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이는 현대차가 이미 SM5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대차는 SM5의 베이스 모델이었던 닛산의 맥시마를 미국에서 들여와 분해해보는 등 충분한 조사·연구 작업을 마쳤다. 그 결과가 EF쏘나타 개발에 반영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차는 삼성차도 결국 쏘나타의 적수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좋은 차를 만들어낸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자동차 회사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 정세영(鄭世永) 현대차 명예회장은 97년 말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성이 좋은 차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수많은 인원을 일본에 보내 훈련시켰고, 수많은 일본인을 불러 시운전을 거듭한데다, 부품을 만드는 데도 돈을 아끼지 않으니 그렇게 하고도 좋은 차를 만들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옛 소련처럼 수지타산을 따지지 않고 돈을 들인다면 누구라도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다. 정말 어려운 것은 큰돈을 들이지 않고 좋은 차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르노가 삼성차를 인수, 품질에서 쏘나타를 앞선다고 평가되는 SM5로 쏘나타 추격에 나섰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우차 해외 매각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또 하나의 강력한 경쟁차종이 등장할 수 있다. 지난해 현대가 대우차 인수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던 것도 절박한 상황임을 현대가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쏘나타는 현대차가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차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것 또한 쏘나타였다. 89년 캐나다 브로몽에 쏘나타 생산공장을 열었다가 불황과 판매 부진으로 4년여 만에 문을 닫은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그로 인해 현대차로서는 첫 번째 세계 진출이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현대차 관계자들은 “당시 브로몽 공장에서 생산하던 쏘나타는 울산에서 조립한 쏘나타보다 품질이 훨씬 좋았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실패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세계시장의 흐름을 내다볼 수 있는 경영자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당시 그곳에서 엑셀을 생산했다면 그런 낭패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80년대 중반 이후 세계경제는 오일쇼크에서 벗어나 서서히 호황으로 접어들면서 자동차 수요도 늘었다. 일본은 이때 미국과의 무역마찰을 줄이기 위해 대미 수출 승용차 대수를 자율규제하고 있었다. 대신 일본차 메이커들의 현지 생산이 급증해 북미시장은 심각한 공급과잉 상태였다.

    더욱이 캐나다에 소량 수출했던 일본차는 85년부터 엔고로 고전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84년부터 캐나다에 들어간 현대의 포니2가 일본차를 앞지르며 잘 팔리기 시작했고, 86년부터 미국에 들어간 엑셀은 첫해에 16만 대 넘게 팔리는 기록을 수립했다. 현대로서는 북미시장에 중형차를 내놓아도 자신있다고 착각할 만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중형차 시장은 북미에서도 경쟁이 가장 치열하기로 유명하다. 이런 시장에 기술력이 그리 높지 않던 현대차가 뛰어든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다. 현대 임원들 중에도 이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엑셀도 잘 팔리는데 무슨 소리…” 하는 분위기에 밀려 힘을 얻지 못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4억3000만 달러의 손실도 손실이었지만, 현지에서 현대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확산된 게 더 문제였다. ‘고용창출’을 최우선으로 삼는 그들에게 공장폐쇄는 곧 고용기회의 박탈로 인식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쏘나타는 90년대 후반 이후 미국시장 수출이 늘고 있다. 품질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쏘나타는 미국 소비자들의 자동차 구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JD파워’의 초기 결함지수 조사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순위가 계속 올라갔다. 물론 아직도 평균 이하이긴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하위권을 맴돌던 것에 비하면 미국 소비자들의 평가가 매우 높아졌다는 얘기다.

    그러나 쏘나타를 비롯한 현대차가 현재 미국에서 선전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파워 트레인(엔진, 트랜스미션 등 동력전달장치) ‘10년/10만 마일’ 무상 보증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현대차 관계자들 이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현대차가 이런 정책을 취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현대차의 품질이 안정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기아차 관계자의 말이다.

    “지난해부터 기아차도 미국시장에서 현대차처럼 ‘10년/10만 마일’ 무상 보증을 해주고 있다. 문제는 이에 앞서 정몽구 회장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한 차례 연기된 끝에 뒤늦게 ‘10년/10만 마일’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기아차의 내구성이 현대차보다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도 기아차 실무진에서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기아차 내부에서는 현대차가 무슨 배짱으로 이 정책을 먼저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환경규제 대비 기술력 시급

    쏘나타의 독주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자동차 SM5가 다시 본격 판매되면서 개인택시 기사 등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쏘나타 판매를 앞지르기엔 물량 공급에 한계가 있다. 대우의 새 주인이 결정된다 해도 쏘나타의 아성을 공략할 새 모델을 투입하기까지는 인수 후에도 2∼3년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현대차가 방심할 수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자동차는 이미 국내시장이라는 말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세계화돼 있기 때문이다. 선진 업체들과 겨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기술력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내세울 만한 엔진 하나 없는 게 현대차의 기술수준이다.

    특히 미국시장의 까다로운 환경규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기술력을 높여야 한다. 극단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현대차의 현재 기술수준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엄격한 배기가스 규제기준을 적용하는 캘리포니아 지역 수출을 포기해야 하는 사태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

    당장 2003년식(2002년 7월경 출시하는 모델)부터 캘리포니아주에 자동차를 수출하려면 SULEV(Super Ultra Low Emission Vehicle) 규정을 만족시켜야 한다. 쉽게 말해 가스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전기자동차보다 약간 가스를 배출해야 맞출 수 있는 기준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차를 생산하려면 지금부터 개발에 착수해야 하지만 현대차에는 벅차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현대차의 기술담당 고위 임원도 “솔직히 걱정이다”고 토로했다.

    쏘나타는 잘 팔린 만큼 소비자들의 불만도 많이 사고 있다는 점도 쏘나타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요인이다.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쏘나타는 구매력이 높은 백인들로부터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지난해 엔진오일 일부 누출로 리콜 논란이 일고 있는 등 품질에도 문제가 적지 않다는 비판을 받는다. 장수모델이라고는 하지만 모델 변경주기가 너무 잦다는 지적도 현대가 귀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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