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돈키호테형 소신파 박종웅 vs 햄릿형 소신파 유시민

  • 정혜신

    입력2005-05-02 15: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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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웅 한나라당 의원과 시사평론가 유시민씨는 소신(所信)이 남다른 사람들이다. 박종웅의원은 김영삼 전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소신이 남다르며 유시민씨는 자유주의에 대한 믿음이 남다르다.

    소신이란 말 그대로 ‘자기가’ 확실하다고 굳게 믿는 바다. 지극히 주관적인 말이다. 옳고 그르고의 개념을 함부로 적용하기 어렵다. 유시민씨의 소신에 별 한 개짜리 평가를 한 사람이 박종웅의원의 소신에는 별 다섯개 만점을 줄 수도 있고, 박종웅의원의 소신에는 별점을 하나밖에 주지 않은 사람이 유시민씨의 소신에는 네개의 별점을 줄 수도 있다.

    별점매기기의 단순성을 감안해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편차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흔쾌히 기립박수를 보내는 명화가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만점을 줄 수 있는 ‘소신’이란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 한 개인의 소신이 보편타당성을 획득할 때 그렇다. 상식에 근거하지 못하거나 대중의 공동감각과 지나치게 유리된 믿음은 독선이나 망상으로 발전한다. 종말론에 심취한 사람의 믿음이 아무리 확고해도 ‘현실 검증력(Reality Testing)’을 갖지 못하면 종교망상으로 취급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들의 생각은 당대에는 마녀사냥의 대상이었지만 후대에는 정당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예수도 당시의 로마인들에겐 지금의 종말론을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로밖엔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의 소신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일은 참 어렵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있다. 그들은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몇 안 되는 종교집단 중 하나로 의롭게 인식되었지만, 군사정권시절에는 이적행위 의혹까지 받았다. 똑같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징병을 거부했을 뿐데도 시대상황에 따라 독립투사가 되기도 하고, 범죄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소신이란 것이 부질없다는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자기가 믿는 바’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일은 때론 소름이 끼칠 만큼 아름답고 숭고하다.

    문제는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한 지나친 자기몰입이다. 무리한 자기몰입은 끓는 물을 보고서 ‘저 물이 끓는 것은 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기 때문’이라는 식의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게 한다. 물이 끓는 것은 섭씨100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꼴통을 자처하는 정치인

    필자는 박종웅의원과 유시민씨의 소신을 ‘돈키호테형 소신’과 ‘햄릿형 소신’이라 별칭해본다.

    ‘돈키호테형 소신’이란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절대 뒤돌아보지 않고 최면을 걸듯 자기강화를 공고히 하는 믿음이다. 저돌적이고 전투적이며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이다. 반면 ‘햄릿형 소신’이란 공동의 선을 위한 것이라는 소신이 있어도 혹시 그게 나만의 생각은 아닌지 늘 따져보는 ‘의심(?)’을 동반한 믿음이다. 부드럽고 철학적이며 무엇보다 신중하다.

    두 유형의 소신 중 어느 것이 더 우등하고 열등하다는 식의 물리적 비교는 잠깐 보류하고, 그 사람들의 소신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정도에서 생각해보자. 먼저 박종웅의원에 대해서 살펴보자.

    “흔히들 그를 일컬어 ‘또라이’라고 한다.”

    지난 10월 박종웅을 인터뷰한 한 시사주간지의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왜 ‘꼴통’을 자처하는 것일까.”

    이건 비슷한 시기에 또다른 잡지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의 일부다.

    박종웅은 현재 3선의 지역구 국회의원이다. 그런 사람에게 권위있는 시사주간지들이 ‘또라이’니 ‘꼴통’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 건 매우 특별한 일이다. 그런 표현은 일반사람에게도 대단한 결례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기 십상이다. 하물며 박종웅 같은 중견 정치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그런 기사를 쓰는 쪽이나 거론된 당사자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덤덤하다.

    박종웅은 자신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틀림없이 대학도 안 나왔을 거라고 손가락질한다는 얘기도 스스럼없이 한다. 물론 사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얘기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수재다.

    그가 사람들에게서 ‘또라이’나 ‘꼴통’이라는 소리를 듣는 건 순전히 김영삼 전대통령과의 관계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98년 9월 김영삼 전대통령이 한나라당 의원들을 상도동으로 초청하는 ‘만찬정치’를 시작한 이후부터다. 그때부터 박종웅은 ‘상도동 대변인’이라는 비공식 직함을 갖고 활동해왔다. 지금은 ‘대변인’격이라는 공식명칭(?)으로 통일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전례가 없던 일이라 언론에서도 “YS의 ‘입’” “YS의 ‘대변인’처럼 활동하고 있는” “YS의 복심(腹心)으로 불리는” “YS의 비서출신” 등 표현이 제각각이었다.

    박종웅은 이제 동전의 양면처럼 YS와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대중의 인식도 그렇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김영삼 전대통령’이며, 그의 취미는 ‘등산과 조깅’이다. 우선 명쾌하게 답을 내면서 설명하는 어법마저 YS와 흡사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런 이유 때문에 박종웅의 소신을 말하는 글인데도 어쩔 수 없이 YS가 중심소재로 등장하는 걸 피할 수 없다. 박종웅의 생각이나 가치관은 대부분 YS와 관련된 발언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발언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홈페이지를 찾은 한 젊은이는 ‘전직 대통령을 따라 다니며 직언 하나 못하고 개인 비서질을 하고 다니는 한심한 현직 의원’이라고 그를 비난한다. ‘YS의 똘마니’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등장한다. 그나마 호의적인 측의 반응이래야 ‘쓸 만한 사람이 망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도동 대변인으로 활약하기 이전만 해도 그는 정치권에서 꽤 괜찮은 국회의원으로 꼽히던 사람이다. 관련사안의 맥을 짚어내는 성실한 의정활동으로 여러 매체에서 국감스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국회문광위에서 ‘싸움닭’으로 통하는데 국감 때마다 쟁점사안에 대한 대정부 공세를 주도해서 피감기관의 ‘기피인물 1호’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정치성 질의에 치중하면서도 나름의 평가를 받는 것은 ‘각론’을 무시하지 않는 그의 집요함 때문이라는 게 한 언론의 평가다. 그는 93년에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그동안 ‘성역’으로 여겨오던 언론과 종교계의 문제를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연간 조단위를 넘어선다는 종교계 헌금문제를 제기하면서 종교계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고, 현재 현안이 되고 있는 언론개혁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과 척지면 안된다는 정치권의 금기를 깨고 언론사 기업공개, 언론사 세무조사, 언론인 재산공개, 족벌, 재벌언론의 소유구조를 집중 거론해 일부 언론에 밉보이기도 했단다.

    상임위별로 평가하는 베스트의원에도 여러번 선정됐고, 특히 전체 의원의 40% 가량이 한달에 한 번 꼴로 회의에 빠진다는 국회상임위의 최다 참석의원에 포함돼 성실한 의정활동의 증거를 보여주기도 한다. 일부 정치부 기자들의 평가처럼 학벌도 좋고 능력도 있는 국회의원이었던 것이다.

    YS에 대해서만은 예외지만 그는 반골기질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박종웅은 1953년 부산 출신으로 경남중·고교를 졸업했는데, 경남고 2학년 재학시절에는 3선개헌 반대데모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해서는 당시 서울대 5대 패밀리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이념성이 강한 경제법학회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다.

    “금배지는 이총재가 준 게 아니다”

    그가 YS와 인연을 맺은 건 그의 나이 27살 때 신민당 총재 기획실 총무를 맡으면서부터다. 그는 이후 민추협 기획위원, 통일민주당 총재공보 비서,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보좌역, 민자당 총재 보좌역 등을 맡아 YS를 보좌했는데 특히 87, 92년 대선 때는 YS의 연설문 작성을 도맡을 정도로 YS의 신임을 받았다.

    문민정부 출범 후 민정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그는 한 달 만에 국회의원으로 변신하는 행운을 잡는다. 93년 3월 부산 사하구에서 보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때 YS는 자천타천으로 거론되던 10여명의 후보를 제쳐놓고 박종웅에게 공천장을 준 것이다.

    특별한 지역적 기반도 없는, 당시 갓 마흔을 넘긴 젊은 비서관 박종웅 공천은 당내외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출마지역 지역구 사람들의 집단적 반발로 선거 기간 초창기에는 지역구 조직조차 접수하지 못하고 악전고투를 벌여야 할 정도였다. 더구나 대중적 지명도가 거의 없었던 박종웅은 자신이 YS와 함께 조깅하는 광경이나 청와대에서 업무 보고를 하는 장면 등을 담은 홍보전단을 통해 당시 국민적 지지율이 80%를 넘던 YS와 ‘밀접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이 선거에서 박종웅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YS의 절대적인 후광에 힘입어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 행운의 과정을 거치며 박종웅은 YS를 절대적인 존재로 마음에 아로새긴다.

    “YS가 가는 길이 낭떠러지거나 누가 뭐라고 비난을 하더라도 나는 YS와 같이 갈 수밖에 없다. 그건 나에게 그런 ‘엄청난 인간적 배려’를 해준 ‘정치적 아버지’에 대한 당연한 의리이기 때문이다.”

    그 심정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박종웅의 이런 인식은 다분히 탄력적이다. YS와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는 이회창총재에게 박종웅이 ‘배은망덕하다’는 비난까지 퍼붓자 한 기자가 그에게 묻는다.

    “이총재가 공천을 해줘 당선했는데 이총재를 향한 질타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쾌하다.

    “금배지는 총재가 던져주는 게 아니다. 총재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사람부터 공천을 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엄밀히 지역주민이 뽑아준 것이지 당에서 뽑아준 것은 아니라고 본다.”

    93년 당시 민자당 총재이던 YS가 자신을 공천한 것은 ‘엄청난 인간적 배려’고 지난해 이회창총재가 자신을 공천한 것은 지역주민의 힘이라는 게 박종웅의 생각인 모양이다.

    그의 정치적 위상이 예전과 다르니 그럴 수도 있기는 하겠다.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때 쌀 한말을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먹고 살 만한 시절에 쌀 한말을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은 양적으로는 같아도 질적으로는 전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로렌츠의 ‘각인(Imprinting)’ 실험이란 것이 있다. 새끼오리가 알에서 깨는 순간 어미오리가 아닌 닭을 보여주었더니 새끼 오리는 어미오리가 옆에 있어도 맨처음 본 닭을 계속 쫓아다녔다. 심지어 알에서 갓나온 새끼오리에게 ‘진공청소기’를 먼저 보여주었더니 그 오리는 죽을 때까지 진공청소기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처음 본 것에 대한 강력한 집착은 왜 생기는 것일까. 알에서 갓 태어난 상태란 그 생명체의 일생 중 가장 무기력한 순간이다. 무기력할 때 눈앞에 나타난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무조건 절대적 의존의 대상이 된다. 집착의 발원지는 눈앞의 대상이 아닌 생명체의 ‘무기력함 그 자체’인 것이다.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각인’에 따른 집착은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YS는 박종웅의 정치적 ‘각인’ 대상으로 보인다.

    물론 YS의 정치이력을 돌이켜볼 때 그는 많은 사람에게 ‘각인’의 대상이 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박종웅만 YS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 살길을 위해서 도회지로 떠난 형들과는 달리 시골에 있는 노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효성 지극한 아들처럼 박종웅만 YS에 대한 끝없는 의리를 강조한다.

    “79년에 상도동 막내로 정치에 입문한 후에 YS 밑에서 정치를 배웠고 2번이나 국회의원을 했다. 그런 내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그분을 외면하고 마음이 편할 수 있나. 비판받지 않고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비난받더라도 마음이 편한 게 낫다고 생각했다. 의리라기보다는 내 마음이 편한 길을 택한 셈이다.”

    떠난 형들에 대한 심리적 우월감과 분노의 감정도 튀어나온다.

    “김전대통령을 모신 사람이 많고 혜택받은 사람도 많은데 왜 나만 끝까지 남아 모시느냐고 묻는데 남아 있는 사람한테 묻지 말고 떠난 사람한테 물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몸을 사리면서 ‘내가 언제 민주계였냐’는 듯 행동하는 인사들을 접할 때면 유감을 넘어 분노까지 느낀다.”

    그가 유난히 ‘소신’을 강조하는 정치인이 된 심리적 근간이기도 하다. 그는 ‘사람에게는 소신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YS 때문에 욕을 먹는다고 해도 절대 기죽지 않는다. 정치인이 여론에 끌려가다 보면 아무 일도 못한다. 옳다 싶으면 소신을 갖고 밀어붙여야 한다. 내가 YS을 모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주춤거리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YS를 닮은 불퇴전의 용기

    YS를 꼭 닮은 듯한 불퇴전의 용기, ‘돈키호테형 소신’이라 할 만하다. 그의 믿음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나약함도 엿보이지 않는다. 씩씩해서 좋기는 하다. 문제는 자기확신이 지나치면 맹목이 되고 맹점(blind point)이 생기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균형감각을 상실하게 한다.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지금까지 자신있게 내놓을 만한 개혁조치가 거의 없다는 게 박종웅의 진단인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YS가 대부분의 개혁을 다 해버려 더 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려대앞 용변문제나 독재자 발언, ‘김정일회장 김대중전무’등의 발언은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어 자신이 ‘예의없이’ YS에게 브레이크를 걸었단다. 물론 YS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내질러’버렸다. 그러자 박종웅은 YS의 깊은 뜻을 헤아려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YS대통령은 그냥 막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생각을 하시고 하는 얘기예요. 대통령이 그렇게 말씀하실 때는 그냥 질러버리는 말씀이 아니라니까. 나름대로 다 계산이 있어서 하시는기라.”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민국당이 출범하자 부산출신 의원들은 좌불안석으로 박종웅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가 바로 YS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그의 탈당여부에 관해 많은 사람이 질문을 했지만 자기 배우자를 고르는 일에 나 몰라라 뒷짐을 진 채 오로지 부모님 의사에 따르겠다는 사람처럼 그는 모든 것을 YS의 처분에 맡겨버린다.

    “YS가 침묵하기 때문에 나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나는 각하가 민국당에 가라면 갈 것이고 그냥 한나라당에 남으라면 남을 것이다. 그러나 각하가 입장표명을 할지 안할지, 한다면 어느 시기에 어떤 방법으로 할지는 전혀 모르겠다.”

    단두대에 목을 내밀고 칼날만 바라보는 꼴이다.

    이 부분이 박종웅의 소신과 대중의 인식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지점이다. 박종웅은 YS의 비서출신인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세비(歲費)를 받는 3선 국회의원이다. 세비란 국가기관이 1년간 쓰는 비용을 말한다. 그러니까 박종웅은 그 자체로 국민을 대표하는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말이다.

    국회의원을 예우하는 데 소요되는 간접비를 제외하고도 국회의원 1명이 연간 소요하는 국민의 혈세는 직접비만 2억2000만원 정도란다. 의원의 세비와 의원을 보좌하는 5명의 보좌관에 대한 인건비만 그렇다. 이런 ‘독립된 헌법기관’이 YS라는 개인의 ‘비서’노릇에 더 충실한 듯한 느낌이 든다면 누구든 분통과 짜증이 생기기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박종웅 자신의 소신을 충분히 존중할 테니까 국회의원은 그만두고 YS의 대변인 노릇만 하라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의거하여 YS의 곁에서 YS를 보좌하는 일만으로 나랏돈을 받는 사람이 몇 명씩이나 있는데 왜 박종웅이 국회의원 자격으로 ‘비서질’을 하느냐는 것이다.

    한나라당 동료의원들도 3선의원이 여의도에 근거지를 두고 전직 대통령에게 정치권 안팎의 동향을 보고하고, 정치권 및 국민에 대한 YS의 의견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상도동 대변인’역을 수행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박종웅은 나름의 논리를 내세워 자신의 입장을 해명한다.

    첫째는 자신이 YS의 대변인 노릇을 하면서 한번도 의정활동을 소홀히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매일 상도동에 출근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어떤 때는 전화 한통화로 끝나기도 한다. YS도 내가 바쁘다는 걸 감안해 웬만하면 전화로 해결한다. 7시 아침식사로 끝나는 때가 많다. 급한 일이 있어도 10분, 20분이면 끝난다. 한 주에 골프 한번 치는 시간보다 적다.”

    그러나 YS를 수행하는 일과 국정이 겹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나면 YS 일을 먼저 할 것이라고 말한다.

    불이익과 고통도 감수

    둘째는 자신이 YS를 돕는 것은 인간적인 의리뿐만 아니고 정치적인 소신과 대의에 따른 일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국회의원인 동시에 정치인인데, 야당이 약해서 여당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는 걸 YS가 대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걸 돕는 것은 정치인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논리다. 어느 네티즌의 격려처럼 아무 표시도 나지 않는 보조의 자리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이 가져야 할 자세라는 것이다.

    YS 옆에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YS를 수행하는 박종웅을 보고 있노라면 70년대 어느 재벌기업 회장의 운전기사 생각이 난다. 오랫동안 회장님을 충실하게 보좌한 공으로 그 운전기사에게 중역의 직책을 주었단다. 당시 그 재벌사의 중역들에게는 운전기사가 딸린 자동차가 지급되었다니 당연히 뒷얘기가 궁금해진다. 회장님 전속 운전기사는 자신의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회장님 집까지 출근한 후 그때부터 회장님 차를 운전했다는 것이다.

    전설 속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그 운전기사를 희화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단지 YS와 박종웅의 관계가 연상되어서 해보는 얘기다. 아무리 박종웅이 강변해도 YS라는 전직대통령의 대변인 노릇을 하기엔, 국회의원이라는 자리가 너무 무겁다. 혹시 박종웅은 자신의 비서들이 YS의 비서노릇을 하고 있는 그들의 보스를 바라보면서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YS에 대한 정치적 소신을 지키기 위해서 박종웅이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이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3선의 중진의원이지만 한나라당의 당직과 국회직 인사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 상임위 인선에서도 1순위로 지망했던 통일외교통상위원회 배치에 물을 먹고 2순위인 문화관광위도 간신히 확보할 정도로 설움을 톡톡히 당했다.

    그러나 그는 이총재가 YS를 예우하지 않으면 한나라당과 타협할 생각이 추호도 없으며, 당직이나 국회직 같은 조그만 것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큰 정치를 지향하겠다고 말한다.

    짜증과 분노가 섞인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으면서 YS를 변호하는 일에 ‘혼자서 수비도 하고 공격도 하느라’ 힘들기는 하지만 그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단다. 안팎의 박해(?)를 받을수록 그의 소신은 점점 굳건해진다. 순애보적인 사랑을 하는 두 남녀는 주위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칠 때 그들의 사랑이 더 진실되고 견고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대가 많다고 해서 그 사랑이 반드시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닐 터. 혹시 박종웅은 이 ‘역의 논리’를 진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가 없는 아기는 음식물을 주면 그대로 삼킨다. 그러나 이가 있는 어른은 음식물이 입으로 들어오면 잘게 씹어서 삼킨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타인의 생각이나 견해를 그대로 삼키는 사람이 아니라 잘게 씹어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사람이다.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키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복통이 생기는 법이다. 미성숙한 아기처럼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키는 행위까지 ‘정치적 소신’이라고 우기는 건 정말 곤란하다.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의 인품이나 가치관을 흠모하여 그와 동화하려는 희망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와 남의 경계도 없는 사람이 돈키호테식으로 자기 확신을 남에게 밀어붙이는 일을 지켜보는 건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박종웅은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질 때면 ‘만약의 경우 YS를 모시고 이렇게 가다 가 잘못되면’ 자신도 정치판을 떠날 것이라고 비장하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박종웅이 이런 군신지의(君臣之義)나 ‘정치적 소신’을 강조하는 일보다 더 먼저 할 일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이번에는 유시민에 대해 살펴보자.

    유시민은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다. 양심의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어느 정도 자의식이 형성된 스무살 이후에 자신을 지탱한 삶의 에너지는 슬픔과 노여움, 부끄러움이라고 고백한다. 슬픔과 노여움이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란다.

    대학 신입생 시절, 그는 구로공단 봉제공장의 열 여섯 꽃같은 처녀가 매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 달치 월급이 대학촌의 하숙비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뒤로는 밥을 남긴다거나, 예쁜 여학생과 고고미팅을 한다거나, 첫시간 강의에 지각을 하게 되면 문득 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말한다.

    나이가 먹을수록 슬픔과 노여움이 줄어드는 대신에 부끄러움은 자꾸만 커지는데,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세상에서 느끼는 슬픔과 노여움을 제대로 터뜨리지 않아서일 것이라는 게 유시민 자신의 진단이다. 유시민은 그런 사람이다.

    요즘 유시민은 ‘MBC 100분토론’의 진행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전에는 매주 한두 편 이상의 글을 어느 매체엔가 기고할 만큼 날카롭고 인상적인 시사칼럼 필자였지만 지난해 7월 ‘100분토론’의 진행을 맡고 나서는 일간지 등에 칼럼쓰는 일을 중단한다. 여러 가지 문제를 다뤄야 할 토론프로그램 진행자로서 개인적인 견해를 미리 밝히면 공정성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그럼에도 자기의 견해를 숨기고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토론사회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토론자들간의 견해차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방화범’노릇을 하는 그의 진행방식은 자주 구설수에 오른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면서 8개월 가량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만 그의 ‘경력’ 등을 들어 진행이 편파적이라는 주장도 심심찮게 제기된다. 유시민 자신도 자신의 외모나 사투리가 비디오용이 아니라는 단점 이외에 자신의 ‘진보적 성향’에 대한 패널들의 선입견을 문제로 꼽는다. 도대체 유시민이 어떤 ‘경력’을 가진 ‘진보적 성향’의 사람이기에 그러는 것일까.

    유시민에게는 80년대 학생운동권의 핵심인물, 운동권, 좌파, 진보주의자, 자유주의자, 아웃사이더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는 주로 수도권에서 살았지만,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란 ‘토종 TK’다. 78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는데, 80년 ‘서울의 봄’ 당시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서울역 시위를 주도해 그 해 5월17일 계엄포고령 및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 제적된 뒤 3개월 만에 풀려나 같은 해 9월 군에 강제징집됐다.

    83년 5월 제대, 같은 해 말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정부의 복교조치에도 불구하고 “교수, 기자, 근로자들은 복직이 안되는데 학생들만 복학할 수 없다”며 재야활동에 주력했다. 84년 9월 대학자율화 바람을 타고 총학생회가 부활하자 경제학과 3학년으로 복학한 유시민은 복학생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다 서울대에 들어온 외부인을 ‘프락치’로 알고 집단구타한, 이른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두 번째로 제적됐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폭력과격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깡패두목처럼 포승줄에 묶여 구속되는 광경이 연일 텔레비전 뉴스를 장식하는 바람에 첫 번째 유명세를 타게 됐다. 그는 1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옥중에서 작성한 ‘항소이유서’는 서슬퍼런 기개와 논리정연한 문장, 진솔한 내용으로 유시민이란 이름을 전설로 만들었다. 수많은 히트곡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돌아와요 부산항에’란 노래와 짝지워지는 조용필씨처럼,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유시민하면 그의 항소이유서를 떠올린다.

    85년 10월 만기출소한 유시민은 민청련 등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다가 88년 여름 재복학하였다. 약 2년 동안 당시 평민당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5공 청문회 광주특위 등에서 활약했고, 91년 8월 13년 만에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7개월 정도 한국 학술진흥재단이란 정부 산하단체의 기획실장으로 근무하던 유시민은 ‘젊은 시절엔 용기 하나만으로도 사회에 봉사할 수 있으나 역사발전에 의미있게 참여하기 위해서는 좀더 정확하고 깊이있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독일 마인츠요하네스 구텐베르크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박사과정을 공부하다가 ‘IMF 귀국 유학생’이 된 98년 이후에는 시사평론가라는 타이틀과 자유기고가라는 직업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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