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돈벌고 환경지키는 아스팔트 재활용 개척자

  • 곽희자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5-03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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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을 벌고 싶다고? 그렇다면 쓰레기더미를 뒤져라!”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다. 한국아스텐엔지니어링(전화·02-3438-7500) 문재식 사장(文在植·46)은 말 그대로 쓰레기더미에서 연간 500억 원의 매출을 일궈낸다. 더욱이 이 회사는 부채율이 0%다. 지난해엔 신기술을 바탕으로 코스닥 시장에 상장되기도 했다.

    많은 중소기업이 일감 부족으로 공장 가동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느니 문을 닫느니 울상인데도 이 회사는 최근 중국과 3년간 9000만 달러어치의 ‘슈퍼 아스텐 쿡’(廢아스팔트 재생기) 3000대를 수출키로 계약했다. 수출물량이 너무 많아 아예 중국 현지에 공장을 지어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다. 그래서 중국측과 각각 20억 원씩 투자, 오는 4월부터 지린성 창춘(長春)에 공장을 짓고 공장이 완공되는 대로 생산에 들어갈 계획이다. 국내에서는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주차장 공사를 앞두고 있다.

    1994년 7명의 직원으로 서울 뚝섬 야적장에서 컨테이너를 사무실 삼아 출발한 이 회사는 설립 6년 여 만에 이렇듯 급성장했다. 한국아스텐은 지난해 서울 삼성동에 4층짜리 새 사옥을 마련했고 충북 음성에 대지 8000평 규모의 공장을 지어 이전했다. 여기에다 나이 마흔다섯에 늦둥이 아들까지 봤다는 문사장은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와 꿈만 같다”는 말로 기쁨을 표현했다.

    문재식 사장은 남들이 외면한 곳에서 길을 찾았다. 그는 불법매립이다, 토양오염의 주범이다 해서 걸핏하면 골칫거리로 거론되던 폐아스팔트를 100% 재활용해 자원절약과 환경오염 방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독창적인 기술로 다른 이들이 가지 않는 길을 공략, 국내 폐아스팔트 시장을 석권한 그는 96년 환경부로부터 ‘신한국인상’을 받았고, 98년에는 10대 벤처기업으로 선정되면서 벤처대상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기름때 묻은 벤처사장

    흔히 벤처기업이라고 하면 깔끔한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 자판이나 두드리는 화이트칼라를 연상하기 쉽지만, 문사장은 그런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그는 1년 365일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공사 현장을 누비는, 자칭 ‘공돌이’ 벤처기업가다. 쓰레기를 자원으로 여기고 이를 바탕으로 환경산업을 일궈낸 창의적인 사고가 도전적인 벤처정신을 짐작하게 할 따름이다.

    한국아스텐엔지니어링이 생산하는 제품은 슈퍼 아스텐 쿡 043(1t), 086(2t), 7000F(7t) 등. 이 밖에 대형 공사에 사용되는 20t, 30t형도 만들고 있다. 슈퍼 아스텐 쿡은 고정식인 30t짜리 외에는 모두 이동식으로 공사 현장 어디에나 가지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하다.

    특히 겨울철 공사에 이점이 크다. 아스팔트 시공에 적절한 아스콘 온도는 150∼170℃. 그런데 영하의 날씨에선 공장에서 아스콘을 만들어 현장으로 싣고 가다간 도중에 식어버려 아스팔트를 깔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슈퍼 아스콘 쿡은 현장에서 바로 제품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어 전천후 시공이 가능하다.

    문재식 사장은 아스팔트가 있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든 달려간다. 전쟁터도 예외가 아니다. 96년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일 때도 카탈로그 한 장 달랑 들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니 도로가 파괴됐을 것이고, 파괴된 도로는 언젠가는 복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예상대로 그는 두 대의 기계를 팔고 나왔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고 ‘독종’이라고 했다. 문사장의 성공신화를 들은 중국 동북사범대학은 최근 그에게 3년간 객원교수로 강의해달라고 제의하기도 했다.

    폭력조직 전전

    문사장은 1955년 광주 양동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 부친이 위암으로 세상을 떴는데, 그때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을 임신하고 있었다. 결국 서른여덟의 어머니는 유복녀까지 1남 4녀를 혼자 떠맡았다. 쌀장사를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던 그의 집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 됐다.

    그는 차츰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키워갔다. 왜 내겐 남들에게 다 있는 아버지도 없고, 함께 싸워 줄 형제도 없고, 거기에다 가난하기까지 하단 말인가. 그는 골목에서 싸움질을 일삼는 반항아로 성장했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끝까지 덤벼들었다. 그래서 그가 유년시절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배가 고팠다거나 싸우다 맞은 장면뿐이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집 텔레비전에서 김기수 선수의 권투경기를 보게 된다. 글러브를 끼고 주먹을 날리는 걸 보는 순간 바로 저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날 체육관에 달려가 등록했다. 자신을 방어할 목적으로 배운 권투는 훗날 학업까지 중단하고 건달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권투를 배우면서 그는 싸움판에서 ‘맞는 아이’가 아니라 ‘때리는 아이’로 변해갔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엔 뒷골목 주먹패들이 탐내는 인물로 자랐다.

    그는 광주의 5년제 공업고등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2학년을 다니다 말고 중퇴했다. 그 후에는 폭력조직에 들어가 건달 생활을 시작했다. 아예 집을 나와 여관을 전전하며 밤낮이 바뀐 삶을 살았다. 그러던 74년, 그에게 방위소집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항상 자신의 삶에 회의를 갖고 있던 그는 ‘지금이 손뗄 기회’라는 생각에 서둘러 입대했다.

    1년 6개월을 복무하고 76년 다시 광주로 돌아왔지만 딱히 배운 것도, 기술도 없다보니 갈 곳은 과거에 몸담았던 조직뿐이었다. 그는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갔다. 그렇게 또 몇 년을 보내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에 이어 신군부의 대대적인 폭력조직 소탕작전이 벌어지자 ‘건달 문재식’은 일본으로 피신했다.

    일본에서 도망자 문재식을 기다린 것은 힘겨운 노동과 외로움이었다. 오사카에 짐을 푼 그는 교토, 나카야마 등지를 돌며 웨이터 일에서부터 용접, 선반, 재단, 재봉, 피혁가공 등 먹고 살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고통이 더 컸다. 그래서 늦은 밤 숙소에 돌아오면 자신과 대화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하루 12시간씩 진이 빠지게 일해봐야 자신의 삶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약을 먹고 죽으려고 수면제를 사러 갔는데 말이 돼야지요. 손짓 발짓 해가며 말했는데도 약사가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해요. 그러다 나중엔 신경질을 내면서 쫓아내더군요. 결국 약을 못 사서 죽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택한 방법이 물에 빠져 죽는 거였어요. 그런데 오사카에 있는 다리 위로 올라가 뛰어내리려 했더니 환한 달빛 아래로 시퍼런 물 속이 그대로 들여다 보이는 겁니다. 겁이 나서 도저히 못 뛰어내리겠더군요. 아마 그날 밤에 달만 안 떴어도 뛰어내렸을 거예요.”

    이렇듯 힘든 생활로 절망에 빠져 있던그는 한 동포의 소개로 한국인 교회를 찾는다. 그는 이곳에서 만난 목사에게 위로와 힘을 얻었다. 걸핏하면 “죽고 싶다”고 하니까 “죽는 거야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거니까 죽을 용기로 뭐든 한번 해보기나 하고 죽어라. 죽으려는 놈이 뭘 못 하겠느냐”고 새벽마다 불러 기도해주며 용기를 줬다. 덕분에 그는 포기했던 삶을 다시 추스른다.

    당시 그는 ‘1억 원만 벌면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고 기도했다. 이 약속은 훗날 노숙자 쉼터로 결실을 보게 된다. 이 쉼터에선 지난해 현재 사옥으로 옮길 때까지 3년 6개월 동안 200여 명의 노숙자에게 점심을 제공했다.

    그 후 문씨는 피혁원단 가공공장에서 가죽옷을 재단해 만드는 봉제공장으로 직장을 옮겨 열심히 일했다. 사장에게 성실성을 인정받은 문씨는 86년부터 3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한국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일본으로 나르는 일을 맡았다. 그러다 회사가 이 업무를 중단하자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직접 일본 피혁회사들의 주문을 받아 국내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 납품했다. 그렇게 돈을 좀 모으자 그는 한국에서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해볼 계획을 세우고 91년 귀국했다.

    1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0년 전 낯설고 물선 일본땅에 홀로 던져졌던 것처럼 학연과 지연, 인맥 하나 없는 서울에 다시 홀로 섰다. 일본에서 벌어온 돈으로 자코라는 회사를 세워 가죽옷과 가방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했다. 그러나 불량품 사고가 크게 두 차례 나면서 회사는 문을 닫아야 했다. 얼마 후 다시 동도인터내셔널을 만들어 피혁사업과 폐아스팔트 재생사업을 함께 벌인다.

    “앞으로는 정보통신산업이나 환경산업이 각광받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일거리를 찾던 중에 일본에서 폐아스팔트 재생기를 보게 됐어요.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선 폐아스팔트의 70∼80%를 재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죠.”

    기대에 부푼 그는 일본에서 100kg짜리 폐아스팔트 재생기 3대를 사들였다. 하지만 카탈로그를 들고 관공서를 찾아가도 설명을 들어주려는 이들이 없었다. 아이템은 좋았지만 그때만 해도 환경에 대한 인식이 극히 낮았기 때문에 사업전망이 불투명했다. 기계 용량이 적다 보니 사업성도 떨어졌다.

    그런데도 문사장은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분명 가능성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하며 대용량 기계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는 폐아스팔트 재활용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위해 피혁사업을 정리하고 94년 7월 한국아스텐엔지니어링을 설립, 7명의 직원들과 함께 기계 개발에 들어갔다. 모아둔 3억 원과 일본의 지인들에게서 빌린 3억 원을 보태 6억 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성수동 뚝섬 야적장에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고 그 안에 처박혀 기계에 매달렸다.

    아스팔트가 쏟아지다

    당시 일본의 재생기는 자체 동력을 사용했던 탓에 많은 양의 폐아스콘을 구울 수도 없었고 아스콘도 잘게 부숴 넣어야 했다. 문사장은 1t짜리 재생기를 만드는 데 LPG 가스를 이용했다. 재생기는 드럼통처럼 생겼는데, 내벽에 4∼6개의 바이트가 부착돼 아스콘이 잘 섞이게 한다. 통을 돌리면서 열을 가하는데, 이때 버너의 온도는 1200℃쯤 된다. 1t의 폐아스콘을 굽는 데는 18∼20분이 걸린다. 폐아스콘을 재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폐아스콘이 연소되지 않게 하는 것. 이때 회전속도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너무 빨리 회전하면 재생이 제대로 안 되고 너무 느리게 회전하면 아스콘이 탄다.

    아스콘의 주 성분은 아스팔트유와 자갈, 석분 등. 아스팔트유는 원유 찌꺼기이므로 정지 상태에선 라이터 불만 갖다대도 타버린다. 이렇게 쉽게 타버리는 아스팔트유를 1200℃의 열에서도 연소되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재생 아스콘을 만드는 기술이다. 만약 아스팔트유가 타버리거나 녹지 않으면 접착력이 없어져 아스팔트를 깔 수 없게 된다. 문사장이 이 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시간, 회전속도, 열의 온도, 그리고 재료가 떨어지는 각도까지 정확해야 제대로 된 아스콘이 나온다. 이 모두가 맞아떨어지는 조건을 찾아내기까지 문사장과 직원들은 김포 쓰레기 매립장에서 폐아스콘을 실어와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밤낮없이 부수고 구워댔다. 그렇게 구워낸 폐아스팔트가 수백t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던 95년 말, 마침내 김이 무럭무럭 나는 아스팔트가 쏟아져 나왔다.

    기술 개발이 끝나자 기계를 만들기 위해 성수동에 500평 건물을 얻었다. 직원도 더 뽑았다. ‘회사를 위해서 가정을 버린다. 회사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전투적인 사훈을 내걸고 30명의 직원과 함께 제품 생산에 돌입했다.

    문사장은 전 직원이 관리와 영업, 애프터서비스, 현장공사까지 모두 치러낼 수 있게끔 교육했다. 직원이 들어오면 누구나 6개월간 공장 근무부터 시켜 기계에 대한 기본지식을 쌓게 했다. 그런 다음에는 현장으로 내보내 실습을 받게 한 후 영업이나 관리를 맡겼다. 사장인 자신도 기름때에 전 작업복을 입고 공장과 현장을 뛰어다녔기 때문에 아무도 불평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전 직원의 일당백 능력경영’을 시도하자 적은 인원으로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기계가 만들어지자 카탈로그를 들고 다시 관공서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이번에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무원들에게 “폐아스팔트를 버리는 데도 돈이 들고 아스팔트를 새로 까는 데도 돈이 든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아스콘 재생기를 사용하면 폐아스팔트가 나오는 즉시 그 자리에서 새 아스콘으로 재생해 바로 깔 수 있다. 그러니 돈도 절약하고 환경오염도 막을 수 있다”고 열을 올렸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료로 폐아스팔트를 처리해주겠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문사장이 이 사업에 뛰어들면 기존 폐아스팔트 처리업체와 새 아스팔트 생산업체 모두 타격을 입게 될 뿐 아니라 일부 담당공무원들 이들과 얽혀 있었기 때문. 그는 그제서야 중소기업은 아무리 아이템이 좋아도 관(官)을 못 뚫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사장은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사람 사귀기에 나섰다. 이렇다 할 인맥도 없던 그는 한번 안면을 튼 사람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웠다. 상대방 역시 자신을 잊지 않게 만들었다. 그래서 카드 한 장을 보낼 때도 받은 사람이 오래 기억하도록 직접 글을 썼다. 지난 연말에도 그는 600장의 카드에 각기 다른 글을 써 보냈다고 한다.

    막대한 돈을 들여 기계는 만들어 놓았지만 전혀 팔리지 않자 직원들에게 월급도 줄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아내의 패물을 전당포에 맡기고 빌린 돈으로 월급을 주기도 했다. 당시 아스텐 쿡은 건설교통부로부터 ‘건설 신기술’로, 환경부로부터 환경친화기업으로, 조달청에서도 우수제품으로 지정됐지만 판로는 열리지 않았다. 물건은 안 팔리는데 어음 결제일은 자꾸 돌아오니 국내시장만 보고 있다가는 언제 공장문을 닫아야 할지 모를 판이었다. 생각 끝에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우선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일본으로 날아가 문을 두드렸다. 카탈로그와 제품시연 장면을 비디오 테이프에 담아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 기계보다 용량이 크고 가격이 싼 것은 물론, 무엇보다 재생 아스콘의 질이 일본 기계보다 좋다보니 반응이 좋았다. 일본에서 주문을 받은 데서 힘을 얻은 문사장은 현대종합상사를 판매원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수출시장 개척에 나섰다.

    개방으로 대대적인 개발붐이 일고 있던 헝가리, 체코 등 동구권 국가를 비롯해 통일 후 개발수요가 증가한 독일, 전쟁이 할퀴고 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전국적으로 개발 여지가 많은 태국, 아르헨티나 등 시장은 넓었다. 내전중이던 보스니아에 들어가 수출계약을 따온 것도 그때였다. 생사를 건 시장개척은 그를 자신감에 넘치게 했다. 97년 태국에서 겪은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군사령관을 비롯, 군장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제품 시연회를 하려는데 갑자기 기계가 작동되지 않았어요. 사전에 철저히 점검을 했기 때문에 아무리 검사를 해도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날 시연회가 잘 되면 300대를 팔 수 있을 텐데, 기계가 꼼짝도 하지 않으니 속이 바짝바짝 타더군요. 한참을 지켜보던 군장성들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떴습니다.”

    ‘여기에서 포기하면 끝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딜러에게 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딜러는 “사령관이 얼마나 높은 사람인데 만나겠다는 거냐”며 포기하라고 했다. 어렵게 설득해서 사령관실에 전화를 걸었더니 마지못해 오라고 했다. 사령관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었다. “내가 잘못했다.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면서. 사령관은 일어나라고 했지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겠다. 기계를 팔겠다는 게 아니라 우리 기계가 어떤 기계인지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다”고 버텼다.

    결국 사령관이 손을 들고 말았다. 그는 일주일 후 같은 장소에서 시연회를 갖겠다고 했다. 허락을 받은 문사장은 방에서 나오자마자 쓰러졌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일주일 후 그는 기계를 공수해 철저하게 점검한 후 완벽한 시연에 성공했다. 그 길로 1차분 50대를 주문받아 나왔다.

    그 후로는 환경보전에 관심이 많은 미국, 캐나다 등 선진국 시장으로 진출했다. 가는 곳마다 반응이 좋아 주문을 받아 나왔다. 품질검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 8군에서도 자국 제품 대신 문사장의 제품을 납품받을 정도로 품질 면에서는 확실하게 인정받았다.

    돈·환경 함께 지킨다

    이렇게 20여 개국으로 수출 판로를 열었을 때 외환위기가 터졌다. 수출에 주력하던 한국아스텐은 환율이 급등한 덕분에 매출이 크게 늘었다. 경기가 악화되자 에너지 절약이니 자원절약이니 하며 재활용 바람이 불면서 환경에 대한 관심도 고조됐다. 덩달아 아스텐 쿡에도 많은 관심이 쏠렸다. 제품도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공사 제의도 여러 군데서 들어왔다.

    지난해 서울시는 폐아스팔트 재활용을 의무화했다. 서울시가 폐아스팔트를 재활용할 경우 연간 100억 원의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 향후 지방에서도 폐아스팔트 재활용을 의무화하면 국내 유일의 폐아스팔트 재생업체인 한국아스텐은 내수에서도 성장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폐아스팔트는 연 800만t. 이를 100% 재활용하면 4000억 원의 예산을 아낄 수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폐아스팔트와 원자재 운송에 드는 물류비와 매립지 조성비용(1000t의 폐기물을 매립하려면 10m 높이로 1만3000여 평의 매립지가 필요) 절감, 토양 및 수질오염 방지기능까지 생각하면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이익을 가져온다.

    문사장은 “폐아스팔트 재활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장소의 공사를 같은 기간에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야 예산과 교통체증을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 긴 안목 없이 가스공사니 전기공사, 전화공사를 한다고 같은 도로를 서너 번씩 벗겨대는 것은 예사이고, 심하게는 8번까지도 벗겼다 입혔다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문사장은 “전세계 도로의 80%를 차지하는 아스팔트 시장을 5년 안에 석권하겠다”는 다부진 꿈을 꾸고 있다. 평생을 환경산업에 바치겠다는 그는 현재 환경오염을 유발하지 않는 1회용 종이 용기를 생산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일본 회사에 용역을 줘 박테리아로 음식물 쓰레기를 해결하는 ‘슈퍼 박테리아’ 배양법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가 끝나는 대로(5∼6월) 음성 공장에서 배양해 시판할 계획이다. 한 사람의 창의적인 생각과 땀의 결실이 환경을 살리는 생명운동으로 번져가고 있는 것.

    문사장은 경기도 구리시의 18평 아파트에서 노모를 모시고 다섯 식구가 함께 산다. “집 없는 직원도 많은데 사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넓은 집에서 살겠느냐”는 것. 그는 돈을 벌면 사회와 직원들에게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진정한 성공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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