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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man’ DJ의 딜레마

ABM·NMD 문제로 미 ·러 틈바구니에 낀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this man’ DJ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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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성명은 대개 회담이 있기 한두달 전부터 방문을 하는 나라의 외무부와 초청을 하는 나라 대사관이 창구가 돼, 초안을 주고 받으며 문구를 다듬는다. 한·러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러시아 외무부와 모스크바 주재 한국대사관이 이러한 창구가 되었다.

소식통들에 따르면 러시아는 처음부터 ABM 제한조약 개정과 NMD망 구축에 반대하는 문구를 넣은 초안을 들고 왔다고 한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2000년 7월19일부터 20일 사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갖고 11개 항으로 된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러시아는 이 때 발표한 조·로 공동선언 수준으로 NMD와 ABM제한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문구를 한·러 공동성명에도 넣자고 주장한 것이다.

조·로 공동선언은 2000년 7월21일자 노동신문 등에 실렸는데, ABM 제한조약과 NMD에 대해 북한과 러시아가 합의한 사항(6항)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는 전략적 및 지역적 안정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국제 관계에서 힘의 사용 요소를 보다 약화시킬 것을 주장한다.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전략공격무기를 가일층 축감(縮減)하기 위한 기초인 1972년 요격미싸일 제한조약(ABM 제한조약의 북한식 표기)을 유지 강화하면서 전략공격무기축감조약(START의 북한식 표기)-2가 조속히 효력을 발휘하여 완전히 이행되도록 하며…

이 대목에서 눈여겨볼 것은 북한과 러시아가 ABM 제한조약을 ‘전략적 안정의 초석’으로 인정하고, 이를 ‘유지·강화’하기로 했다는 부분이다. 계속해서 6항을 옮겨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는 국제적 현실에 대한 분석 결과가 1972년 요격미싸일 제한조약 수정 계획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일부 국가들의 이른바 ‘미싸일 위협’을 구실로 삼는 것이 완전히 무근거하다는 것을 확증한다고 간주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기의 미싸일 강령이 그 누구도 위협하지 않으며 순수 평화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확언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로씨야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쁠럭형의 폐쇄적인 전역미싸일방위(NMD) 체계를 배비(配備)하는 것이 지역적 안정을 심각하게 파괴할 수도 있다고 간주한다.

이 대목의 첫째 문장은, 미국이 불량국가(공동선언에는 일부 국가로 표기)의 미사일 위협을 구실로 ABM 제한조약을 개정하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데 대해 북한과 러시아가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둘째 문장은 북한은 미국이나 한국을 위협하기 위해 미사일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순수 평화적인 목적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것을 러시아가 인정해주었다는 뜻이 된다. 셋째 문장은 미국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NMD망을 구축하려는 것은, 이 지역에 전쟁을 포함한 기타 불안정 요소를 불러오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

‘strengthen’과 ‘preserve’ 의미

정상회담을 제안한 러시아가 이러한 수준의 초안을 들고와 합의하자고 드니 한국 외교부는 고민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이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에 응한 이유 중 하나는 ‘경의선을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까지 잇는다는 명분을 만들어, 북한이 복구 작업에 나선 경의선 공사를 훗날 중단시킬 명분을 차단하자’는 데 있었다. 그리고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 가스전에서부터 북한을 거쳐 한국으로 이어지는 파이프 라인을 건설해, 북한을 한국 및 국제 사회와 연결시키겠다는 복안도 깔고 있었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것’이 외교인 만큼, 외교부는 줄 것의 한계에 대해 장고에 들어갔다. 묘안을 찾기 위해 외교부는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이 과거 러시아와의 회담에서 발표한 공동선언문을 구해, 분석에 들어갔다.

그중 하나가 2000년 6월4일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발표한 ‘전략적 안정에 관한 공동성명’이다. 이 성명 5조에는 “미국과 러시아는 ABM 제한조약을 이행하는 것이 전략적 안정을 이루는 초석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란 문구가, 8조에는 “미국과 러시아 대통령은 ABM 제한조약을 강화하고, 이 조약이 미래에도 존속하고 또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노력을 계속한다는 것을 재확인했다”는 문구가 있었다.

불량국가를 제압하기 위해 ABM 제한 조약 개정을 노리는 미국의 대통령이, 러시아 대통령과 회담하며 ABM 제한조약 이행을 ‘전략적 안정을 이루는 초석’으로 인정하고, 이 조약을 ‘강화’하기로 합의한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2000년 9월6일 미국과 러시아는 양 정상이 합의한 ‘전략적 안정에 관한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양국은 ABM 제한조약을 유지하고 강화하기로 했다”와 “전략적 안정의 초석으로 ABM 제한조약을 이행할 것을 재확인했다”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전략적 안정의 초석’을 뜻하는 영문은 cornerstone of strategic stability이고 유지는 preserving, 강화는 strengthening이다. NMD 구축을 노리는 미국은 왜 이러한 문구를 사용하는데 동의한 것일까. 이유는 미국과 러시아가 이 문구를 각기 다르게 해석하는 데 있었다.

먼저 우리 말로는 강화(强化)로 번역되는 strengthen부터 살펴보자. 러시아는 이 단어를 말 그대로 강화로 사용한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미국은 NMD망 구축을 미사일 방어를 목적으로 한 ABM 제한조약의 정신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때문에 NMD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 조약을 강화하는 쪽으로 개정하자는 뜻에서 strengt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니까 미국은 ABM 제한조약을 개정할 목적으로 강화란 단어를 사용했고, 러시아는 강화를 ‘유지’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미국측 주장에 동의해주는 대신, 이 단어가 개정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preserve라는 단어의 삽입을 주장했다.

그런데 preserve에 대한 미국의 해석은 또 다르다. 미국은 ABM 제한조약이 영구 조약이라 이 조약을 유지하는 데는 동의할 수밖에 없어 preserve란 단어를 넣는데 동의했다. 이렇게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양국은 ‘이 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라는 사실도 인정한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오보

어쨌든 미국과 러시아가 단어에 대한 타협점을 찾아내자, 2000년 7월23일 미국과 러시아 정상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G8회담은 “ABM 제한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 되도록 유지하고 강화하기로 했다”는 문구를 공동 코뮈니케에 집어넣었다.

남북한이 군사적인 대치관계에 있듯이, 일본과 러시아는 전통적인 라이벌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러시아를 꺾고 남(南) 사할린을 할양받은 바 있다. 그러나 1945년 2차대전에서는 러시아가 포함된 연합국에 굴복하면서, 남 사할린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일본이 영유해온 북방 4개 섬마저 러시아에 빼앗겼다. 때문에 두 나라는 오래 전에 국교를 맺었으나, 평화협정은 아직도 체결하지 못하고 있다(평화협정이란 양국이 싸울 의사가 전혀 없을 때 맺는 것이다).

2000년 9월5일 일본과 러시아는 ‘국제문제 협력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도 “ABM 제한조약을 유지 강화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숙적관계인데도 ABM 개정조약을 유지·강화하는 데 합의한 것이다. 2000년 12월18일 이뤄진 러시아와 캐나다 간의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도 ABM 제한조약을 유지 강화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무대에 명함을 내밀 수 있는 나라라면, 미국과 러시아가 합의한 수준에서는 ABM 제한조약에 대해 언급해도 된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외교통상부는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한·러 공동성명에 “대한민국과 러시아 연방은 1972년 체결된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라는 문구와 “양측은 ABM 제한조약을 보존하고 강화하는…”이라는 문구를 넣는데 동의했다.

그런데 이 성명이 발표되자, 그 날로 ‘뉴욕타임스’의 타일러 기자는 ‘한국이 NMD 문제와 관련해 러시아를 편들었다’는 기사를 날렸다. 타일러 기자의 보도는 오보임이 명백한데도, 한국 언론은 오보라는 사실을 명시하지 않았다. 한 전문가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추론했다.

“첫째는 한국 언론의 무지다. 한국 언론은, 미국은 ABM 제한조약을 개정하려고 하고 러시아는 유지하려고 한다는 2분법적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미국이 말하는 strengthen과 러시아가 말하는 strengthen이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차에 ABM 제한조약을 유지 강화한다는 내용의 한·러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뉴욕타임스’의 보도까지 이어지자, 한국이 러시아를 지지했다고 보도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김대중 정부와 언론의 관계다. 김대중 정부는 때마침 주요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단행해 언론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이런 차제에 외견상으로 러시아를 지지하는 문구를 담은 한·러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뉴욕타임스’ 보도까지 이어지니, 한국언론은 한국 정부의 해명을 듣거나 더 이상 알아보지 않고 한국이 러시아를 지지했다고 보도한 것 같다. 그렇다면 주요 신문에 대한 공격에 앞장선 방송이나 한겨레·대한매일 등이라도 한국은 러시아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는 보도를 내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겠지만 때마침 언론에 대한 세무조사를 단행한 것이 정부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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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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