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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화제

18세 이세돌이 빚어내는 盤上의 질풍노도

  • 손종수 < 전 ‘바둑세계’ 편집장· 바둑평론가 >

18세 이세돌이 빚어내는 盤上의 질풍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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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든 천재가 그 재능을 활짝 꽃피워 대성하기까지는 필연적인 요소가 있다. 우연히 대가의 눈에 띄는 경우는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흔한 스토리이고 현실 세계에서는 대부분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나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인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무사독학(無師獨學)의 대명사로 불리는 서봉수처럼 예외도 있지만, 비율을 따져보면 역시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이다. 전남 신안 앞바다 비금도에서 자란 섬소년 이세돌도 거기에 속한다.

세돌의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아버지(이수오·1998년 타계)다. 광주교대를 나와 목포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아버지는 세돌이 젖먹이였을 때 비금도로 귀향, 농사를 하게 됐는데 거기서 틈틈이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친 것이다.

아마추어 4, 5단 실력이던 아버지는 곧 슬하의 3남2녀 중 두 아이의 재능이 남다름을 알아보았고, 큰아들 상훈(26)을 먼저 서울로 올려보내 프로수업을 시켰다. 상훈이 서울에서 프로수업을 받는 동안 막내 세돌은 섬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밭일을 나가면서 사활문제를 내주고 일을 마치고 돌아와 채점을 하고 실전훈련을 시키는 방식이었다.

아버지의 눈은 정확했다. 세돌은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지 불과 2년 만에 아버지로부터 백을 빼앗는 재능을 보인다. 초고속의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실현한 어린 천재는 곧 서울의 형에게 보내졌다. 한발 앞서 상경한 상훈은 이미 90년에 입단의 관문을 돌파하고 ‘권갑룡 바둑도장’의 지도사범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세돌의 나이 아홉 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섬소년의 입단은 쉽지 않았다. 번번이 간발의 차이로 탈락의 아픔을 겪었는데, 3전4기로 입단에 성공한 95년의 일화는 그 절박한 상황이, 6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68년 열한 살 입단의 신기록을 세운 조치훈의 그것과 흡사하다.

세돌의 보호자였던 상훈의 입대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와, 세돌이 입단을 하지 못하면 돌봐줄 사람이 없어지는 곤경에 처한 것인데, 이 상황이 일본에서 ‘늦어도 열 살까지는 입단할 수 있다’는 기대를 받고 있다가 열 살을 훌쩍 넘겨 ‘이번에도 실패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막다른 길에 몰렸던 조치훈과 거의 같았던 것이다.

‘이번에도 입단하지 못하면 고향으로 돌아간다.’

68년의 도쿄, 95년의 서울에서 똑같이 절박한 상황에 몰렸던 두 어린 천재는, 27년의 시공을 사이에 두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막 기회에 극적으로 입단의 관문을 뚫는다.

95년 7월2일 제71회 입단대회. 당시 세돌의 열두 살 입단은 한국기원 사상 최연소입단 3위(1위 조훈현 9세, 2위 이창호 11세)에 랭크된 자랑스러운 기록이었다. 그 이틀 뒤 형 상훈은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입영열차에 몸을 실었다.

상훈과 세돌이 차례로 프로의 관문을 돌파하면서 가족들이 하나, 둘 서울로 모였다. 큰누나 상희가 세돌의 새 보호자가 되었고, 둘째 누나 세나는 이화여대에 재학하면서 여류입단대회를 노크하기 시작했다.

세돌의 가족을 보면 문득 ‘사과는 나무에서 먼 곳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첼리스트 요요마의 말이 생각난다. 음악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나 재능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임을 비유하는 이 말은 세돌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버지가 아마추어 5단의 실력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슬하의 아이들에게 재능의 우열을 따지지 않고 바둑을 가르친 아버지의 마음이다.

안정 뒤의 질주

감히 짐작하건대, 아버지가 바둑을 가르친 것은 상훈과 세돌을 프로기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화목과 단란함을 위해서 아이들에게 하나의 공통어를 가르쳐주려 했을 것이다. 바둑은 말 그대로 ‘손으로 나누는 대화(手談)’이고 이 말 없는 말은, 과다한 말의 오해로 빚어지는 갈등을 해결하는 데 아주 유용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상훈과 세돌의 재능은 그 과정에 우연히 걸러진 결과였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하지만 이 생각은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재능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들 5남매가 하나같이 바둑을 알고 즐기는 수준에 올라 있다는 게 그 근거다.

프로에 입단한 상훈과 세돌을 빼면 둘째 누나 세나의 바둑이 가장 세다.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각종 여류대회에서 상위권을 유지하는 아마추어 6단 수준의 강자.

만화가를 꿈꾸는 큰누나 상희나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재학중인 둘째 형 차돌(21)이 비교적 약하지만, 그렇다고 밖에서까지 하수 취급을 당할 만큼 기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상훈이나 세돌, 세나와 비교할 때 그렇다는 말이지 이 둘의 기력도 프로에게 5, 6점을 깔고 버티는 아마추어 3단 정도의 실력은 된다. 이들 5남매가 서울 행당동에 둥지를 틀고 단란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니 아버지의 마음에 있던, ‘말 없는 말’이 제대로 전해진 것 같다.

이 단란한 가족의 힘이 세돌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95년 입단 이후 세돌은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며 성장했으나 99년까지는 그저 ‘일류가 될 가능성을 가진 유망주’였을 뿐 정상을 위협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비금도의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살게 되고, 큰형 상훈도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세돌의 급성장이 이 시기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생활의 안정이 가정을 꾸린 성인에게만 힘을 주는 게 아니다. 정신적인 안정으로 이어지는 그 힘은, 정신의 안정이 절대 전제로 작용하는 바둑을 직업으로 가진 세돌에게도 의식, 무의식적인 힘이 되었을 것이다.

2000년 벽두부터 세돌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창호의 철권통치 10년에 열광하는 한편 식상해 있던 바둑팬들은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재규어처럼 내달리는 어린 영웅의 32연승에 환호했다. 32연승은 반백년 한국기원 사상 역대 3위의 연승기록(1위 이창호 41연승, 2위 김인 40연승)이다.

그러나 세돌의 질주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기록은 32연승에서 멈췄지만 잠시 브레이크를 밟았던 세돌의 질주는 다시 이어져 2000년도 마지막 달력을 떼낼 때까지 계속됐다. 그 과정에 정상의 조훈현이 꺾이고 이창호가 밀려났으나 ‘토네이도 이세돌’에 휩쓸린 최대 피해자는 유창혁이었다. 제8기 배달왕기전 도전 5번기 최종국에서 세돌에게 패해 타이틀을 잃는 바람에 세계타이틀(제5회 삼성화재배)을 따고도 ‘2000바둑문화상 최우수기사상’까지 세돌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창호의 6년 독주를 저지하며 MVP가 된 세돌은 최다승 1위(75승 20패), 연승 1위(32연승), 최다대국 1위(95국)를 기록하며 연간수입 1억원을 넘기는 빅스타의 반열에 올랐고, 이날 고향 비금도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고 한다.

세돌은 2000년의 영광을 새해에도 계속 이어갈 생각인 것 같다. 제5회 LG배 세계기왕전 본선 16강전부터 결승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강의 여류 루이나웨이(芮乃偉), 중국의 1, 2인자인 창하오(常昊), 저우허양(周鶴洋)를 차례로 격파했다는 사실은, 2000년도에 누린 세돌의 영광이 결코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결승 5번기 1, 2국에서 세계최강자 이창호를 연파한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팬들이 이창호의 10년 통치를 무너뜨릴지도 모르는 이 ‘N세대혁명’의 과정에 뜨거운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곳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의 아버지도 크게 기뻐했으리라 믿는다. 요요마의 말처럼 ‘사과는 나무에서 먼 곳으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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