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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사 100년 비화 · 1

단성사! 기생들의 무대에서 서편제 신화까지

  • 박은경 < 자유기고가 >

단성사! 기생들의 무대에서 서편제 신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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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환을 들여 단성사에서 제작, 상영한 ‘의리적 구토’는 완전한 무성 극영화 이전의 연쇄극 형태를 띤다. 기차와 서울역, 한강 다리 등 극장 무대에 올릴 수 없는 실사를 직접 촬영해 영화로 보여주는 한편, 무대에서 연극이 동시에 진행되는 형식을 취했다. ‘의리적 구토’가 첫 상영된 1919년 10월27일을 기념해 오늘날 ‘영화의 날’로 제정한다.

본격 활동사진이 경쟁적으로 제작되면서 예전에 30전, 50전 하던 영화제작비가 200환, 1000환으로 껑충 뛰었다. 영화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일부 제작사나 극장들은 흥행을 노린 애정물을 앞다투어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초창기 활동영화는 일본 신파극을 모방하거나 그대로 옮겨온 번안물이 대부분이어서 자극적인 내용, 통속적인 내용 등이 ‘풍기문란’의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도덕관에 비춰 풍기문란은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러한 윤리관은 지금까지 뿌리가 남아 ‘외설시비’로 이어지고 있다.

단성사에 ‘부인전용석’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풍기문란 혐의에 떠밀린 결과였다. 단성사 건물이 처음 올라갈 때 기생이 드나드는 모습을 보고 “도대체 저게 뭐 하는 곳이냐?”며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수군댔다. 개관 후 공연이 시작되자 “남녀가 깜깜한 데 모여서 뭐 하는 짓들이냐” “상스러운 짓거리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어쩔 수 없이 극장 개축 때 2층을 새로 지어 여자만 들어갈 수 있는 부인전용석을 만들었다.

연예 공연단에 속한 기생들이 극장 무대에서 춤을 추면 환등기를 이용해 조명효과를 살렸는데 붉은색 푸른색 빛이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자 “장내 분위기를 문란하게 한다”해서 경고를 받기도 했다. 다동기생조합의 ‘춘향전’ 공연을 보고 나온 매일신보 기자는 1917년 10월17일자 기사에서 풍기문란 죄(?)를 맹렬히 성토했다.

“극장 문 안에 들어서니 좁은 장내에 관객은 가득 차 만원이 되고, 담배 연기는 자욱하여 숨이 막힐 듯하다. (중략) 미숙한 기술을 개량치 못하고 무대 위에서 질서 없는 행동과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노래를 하니 그 더러운 노래를 듣고 여염집 부녀자는 놀라 퇴장을 하겠고 사나이도 얼굴을 붉히고 귀를 막겠다. (중략)”



무성영화 시대 충무로통은 일본인이 소유한 극장이 많아 일본말 영화가 종종 상영됐다. 그 영향으로 흥행을 노린 일본인 극장주는 본국에서 유행하는 ‘교갱(광언)’을 재빨리 들여왔다. 가부키 공연 막간을 이용해 우스갯소리로 관객을 웃기는 1인극 교갱은 당시 일본에서 인기 절정에 있었다. 총 18개 레퍼토리로 짜인 교갱이 국내 일본인 극장에 들어와 인기를 끌자 단성사도 막간을 이용해 교갱을 선보였다. 그런데 레퍼토리 중 욕설이 빌미가 되어 “풍속을 교란한다”는 경고를 받자 공연자료까지 모두 없앴다.

1923년 영화제작부를 설립한 단성사는 동시에 서너 편의 무성영화를 찍는 등 영화제작에 열을 올렸다. 당시 수입되는 외화 프로그램은 영화가 매우 길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 제작한 무성영화가 풍부한 단성사는 매주 1개 프로그램을 상영하던 타 극장과 달리 2개 프로그램을 동시에 상영했다. 또 특등석과 일반석을 구분해 특등석 50전, 1등석 30전, 2등석 20전, 3등석 10전으로 관람료를 차별화했다. 당시 설탕값이 10전인 것에 비해 영화관람료는 비싼 편이어서 일반서민이 부담없이 구경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부유층이 온갖 연줄과 ‘백’을 동원해 공짜로 입장한 뒤 특등석표를 가진 사람을 내쫓고 대신 특등석을 차지하는 바람에 관객의 원성을 샀다.

특등석은 물론이고 당시 단성사 극장은 바닥에 다다미가 깔려 있어 신발을 벗고 입장해야 했다. 입구에서 신발주머니와 방석을 받아 정해진 구역으로 가 앉는 식이었다. 날씨가 추워지면 정해진 1등석, 2등석 구역은 무의미해진다. 서로 화롯가를 차지하려고 밀고당기는 싸움을 벌였다. 극장마다 빈번하게 벌어지는 자리다툼으로 겨울이면 화재를 피할 수 없었다. 한국 최초의 공연장인 원각사와 광무대가 불탔고, 인사동 초입에 위치한 조선극장은 화재로 36년 문을 닫았다.

단성사도 자리다툼과 난로 과열로 인해 두 번이나 화재를 치렀다. 그 가운데 1915년 새벽 세 시에 발생한 화재는 신축한 지 불과 일년 밖에 안 된 건물을 뼈대만 앙상하게 남기고 전소시켰다. 워낙 큰불이라 여러 지역 소방서에서 한꺼번에 출동한 불자동차 소리가 온 시내를 깨웠고, 극장 안에서 단잠에 빠져 있던 배우 네 명은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이날 불은 2층 ‘엽방’에서 발생했다. 요즘 휴게실 같은 엽방은 차를 팔던 곳으로 종업원이 퇴근하면서 깜박 잊고 화롯불을 끄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과열된 난로 열기가 바닥 다다미에 불로 옮겨 붙으면서 삽시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던 것이다.

72년에는 단성사 바로 옆건물 2층에 위치한 다방에서 인질극 소동이 빚어진 가운데 불이 나 인근 건물 등 19개 점포를 태운 사건이 발생했다.

“단성사 터는 기가 센 곳”

일제강점기 때 영화상영 도중 발생한 만세사건은 총독부로부터 극장폐쇄와 함께 ‘10일 휴관’ 조치를 받게 했다. 서울 전역의 소요를 촉발한 만세사건은 3·1운동이 발발한 지 불과 20일 뒤에 일어났다. 밤 11시경, 막간 휴식을 이용해 무대에 뛰어오른 학생이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만세’를 부르자 일시에 관객의 합창소리가 극장을 울렸다.

종로에서 시작된 만세사건은 이튿날 동대문, 아현, 마포, 녹번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종로통을 지나던 전차에 돌멩이 세례가 쏟아져 유리창이 깨졌고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소요에 참가한 100여 명이 종로경찰서와 용산헌병대로 끌려가 고통을 당했다. 불과 일 년 뒤 단성사는 또다시 만세 사건에 휩싸여 며칠간 강제휴관 조치됐다.

극장마다 경쟁적으로 외화상영에 열을 올리던 20년대 초반, 단성사는 황금관과 ‘쌍방고소’까지 간 외화 쟁탈전에 휩싸였다.

미국 유나이티드아티스가 제작한 ‘나이아가라 대폭포’를 배경으로 넣은 대모험극 영화 ‘동쪽길’이 수입배급사의 혼선으로 황금관과 단성사 두 곳에 나란히 걸리는 상황이 빚어진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단성사가 승리해 첫 개봉하던 날 극장 아래위층은 ‘송곳 꽂을 틈도 없이 만원사례’를 이루었다.

70년대 말 단성사 뒷골목을 순찰하던 방범대원이 피살되는 등 단성사와 그 주변 지역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자 극장 사람들 입에선 “단성사 터가 세서 그렇다”는 푸념이 흘러나왔다. 조선시대 말 경성(서울)은 한성 5부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단성사는 그중 중부에 속했다. 단성사 터는 옛 중부의금부 자리였다. 지금의 경찰청에 해당하는 조직이 당시는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포도청이 양민과 서민의 죄를 묻던 곳이라면, 의금부는 죄지은 양반들이 끌려와 고문을 당하던 장소였다. 뿐만 아니라 단성사 바로 옆에 위치한 종로소방서 앞에는 ‘최시형 순교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단성사 건물을 세우기 불과 10년 전,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이 끌려와 무참히 처형당했던 것이다.

전쟁 직후부터 60년대까지 서울 시내 극장 주변은 두 가지 이유로 관객과 상이군인이 진을 쳤다. 관객이 몰린 건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극장쇼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만담가, 코미디언, 가수, 배우가 출연하는 극장쇼는 지금의 10대 스타팬 못지않은 열성팬들로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시절 이름을 날린 사람들 중 ‘뚱뚱이와 홀쭉이’ 콤비로 유명했던 코미디언 양석천·양훈, 김희갑, 송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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