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7월호

김정일·김정남 愛憎의 父子관계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5-05-20 1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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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을 둘러싼 궁금증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5월1일 그가 일본에서 체포된 이래 일본 정부는 김정남의 지문을 확보, 역추적 조사를 하고 있다. 일본 법무성과 외무성은 동남아 국가는 물론,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 김정남이 위조여권으로 일본 입국 비자를 신청할 만한 나라의 일본대사관, 총영사관에 김정남의 지문을 보내 정밀조사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5월18일자 1면 톱기사를 통해 “김정남이 5월1일 일본에 불법 입국하려 한 것은 미사일 판매 대금을 운반하기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 높으며 김정남은 김정일의 지시를 받는 미사일 판매책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날 ‘아사히’ 신문도 “김정남이 위조여권으로 미국을 다녀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이미 김정남 추방 사건이 터지기 전에 발매된 홍콩의 시사월간지 ‘광각경(廣角鏡)’도 4·5월호에서 “모스크바와 스위스에서 유학한 김정남은 컴퓨터에 정통하고, 일어 학습을 위해 일본에도 다녀오는 등 서방세계를 왕래했으며, 현재 군부 내 비밀경찰부대인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요직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또 이 월간지는 “김정일 위원장이 상하이 및 베이징을 방문할 때 김정남이 비밀 수행하는 등 장남으로서의 그의 존재가 점차 부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5월1일 김정남 사건이 터지기 이전부터 북한의 움직임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국제사회는 이미 김정남의 존재와 그의 최근 행각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보도들은 신동아 6월호의 ‘작은 장군 김정남의 비밀행각’기사를 뒷받침해준다.

    중국에서의 김정남 흔적

    일본 수사당국은 김정남의 지문을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차근차근 캐고 있다. 그런 와중에 김정남이 도쿄 아카사카(赤坂)의 한국술집 ‘금강산’에서 자신이 재미동포라고 이야기하며 돈을 잘 썼다는 제보가 나오기도 했다. 일본 수사당국은 한국술집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종업원들을 상대로 김정남의 ‘흔적’을 계속 추적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김정남의 흔적은 드러나고 있다. 김정남 일행이 나리타 공항에서 체포 추방되었을 때 텔레비전을 통해 이를 지켜본 베이징의 한국인과 조선족 사회에서는 낯익은 얼굴이라는 반응이 많이 나왔다.

    베이징 차오양구(朝陽區)의 한국상점 밀집거리에 있는 한 한국식품점 주인은 “김정남 일행 중 일본 정부가 부인이라고 발표한 뚱뚱한 여인(신정희)이 자주 가게를 찾아온 단골”이라며 “지난해 붉은색 BMW를 타고 와서 된장 등을 잔뜩 사가 식구가 많은가보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베이징 시내 쿤룬호텔내 한국음식점인 ‘신라’에서도 김정남이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김정남은 수시로 베이징을 드나들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김정남 사건의 핵심은 그가 북한 내에서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그의 위상이 바로 그의 역할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는 김정일의 후계구도와도 연결되는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엇갈린다.

    첫째, 김정남은 골치 썩이는 망나니일 뿐 미사일 수출 책임자나 정보통신산업 총책 등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이 해석을 따르는 이들은 김정남의 도쿄 밀입국이 어떤 대단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방문이 아니라 단순히 디즈니랜드에 놀러 가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둘째, 장자론(長子論)이다. 누가 낳았든 유교 전통이 지배하는 북한사회에서 장자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김정남은 이번 망신에도 불구하고 곧 현업에 복귀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남을 애지중지한 김정일

    김정남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출생 이후부터 지금까지 김정일과 김정남의 부자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김정일에게는 장남 김정남이 처음부터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김정일이 유부녀 성혜림을 데리고 산 것부터가 북한에서는 극비사항이다.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의 첫째 남편은 이평(당시 김일성종합대 연구사)이었고, 시아버지는 작가동맹위원장 이기영(월북)이다. 일제시대 카프(KAPF)를 대표했던 유명작가 이기영은 김정일이 자기 며느리를 강탈해가자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이후 평생 붓을 꺾었다.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사상이 그 어느 나라보다 짙은 공산국가지만 전통 유교문화권의 윤리관이 강조되고 있다. 북한정권의 창시자인 김일성 주석 자신도 유교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김정일은 극비리에 성혜림과 살았으며 자연히 아들 정남의 존재도 초기에는 공개할 수가 없었다.

    김정일은 김정남을 낳은 사실을 김일성에게도 숨겼다. 이 문제로 김정일과 성혜림은 늘 싸웠다. 성혜림은 김일성에게 정식으로 이야기하고 며느리로 떳떳하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김정일은 이를 막아야 하는 처지였다. 성혜림이 신경성 질환에 걸린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이 문제로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김정남을 자신이 키우겠다고 한 적도 있었는데, 성혜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정남을 빼앗기면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다툼은 성혜림의 병을 부채질했다. 더욱이 김정일이 김영숙과 결혼하고 고영희 등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자 성혜림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김정일은 성혜림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군보위사령부(사령관 원응희) 요원들을 모스크바에 보내 김정일과 성혜림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유학생들을 모조리 불러들였다. 탈북자 김길선씨 수기에는 자신이 왜 국가보위부에 붙들려 갔는지 나와 있다. 그의 죄목은 사석에서 김정일과 성혜림의 관계를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일과 성혜림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다.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큰손자 김정남의 존재를 처음 알린 것은 김일성의 담당 간호원이 김일성의 아들 ‘김현’을 낳았을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남몰래 아이를 낳았으니까 김정일은 자기에게도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때가 1975년 경이었다. 김일성은 처음에는 이 소식을 듣고 당황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귀여운 손자가 태어난 것을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故 이한영씨(97년 피살)에 따르면 김일성은 김정남이 살고 있는 관저에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1975년 이후 할아버지를 보기 위해 김정남이 주석궁으로 갔다. 부모 손을 잡고 가거나, 혹은 김일성이 김정남을 찾을 때는 부관과 같이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이한영씨는 증언했다.

    첫손자인만큼 김정남에 대한 김일성의 사랑도 대단했다. 한 일화가 있다. 김정남은 총을 무척 좋아해서 언젠가 김정일이 벨기에산 권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약속한 날짜에 권총이 도착하지 않자 김정남은 화가 나서 밥도 안 먹고 계속 울면서 심통을 부렸다고 한다.

    그런 때 김일성과 김정일이 통화하다가 김정남 얘기가 나왔다. 김정일이 약속을 못 지켜 정남이가 울고 있다고 하자, 김일성은 “큰일났구나. 알았다. 내가 달래주마”고 얘기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그 때 외국 국가원수를 만나고 있었는데 담화중 김정일에게 급히 의논할 일이 있어 전화했다가 그런 소리를 들은 것이다.

    김일성은 그 국가원수에게 “우리 손자가 무슨 일 때문에 화가 나서 밥을 안 먹고 있답니다. 내가 가서 달래주고 와야갔시오. 우리 밥 먹고 오후에 만납시다”고 말했다고 한다.

    방문객을 내보낸 김일성이 김정남을 주석궁으로 불렀다. 김일성은 김정남에게 “할아버지가 약속을 꼭 지키마. 총 늦게 가져온 사람은 이 할아버지가 혼내주마”라며 김정남을 달랬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키운 아들이지만, 김정일은 이 세상의 어느 아버지보다 어린 김정남을 사랑했다. 김정남을 직접 키우는 외할머니 김원주씨와 이모 성혜랑씨를 우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정남의 이종사촌인 이한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남이 서너 살 때 쉬하고 싶다고 하니, 내의 바람의 김정일이 우유병을 들고 아들의 오줌을 직접 받아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혼자 밥을 먹을 때 대여섯 살 때까지 김정남을 밥상 위에 올려놓고 식사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당시 식탁 위에 앉은 김정남은 “빠빠 맛있니?” 하는 등의 애교 있는 말투로 김정일의 혼을 빼놓았다고 한다.

    김정남의 생일 행사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정남의 생일은 5월10일인데 매년 4월 중순에 호위사령부 2국9부에서 김정남의 생일선물구매단을 외국에 파견한다는 것이다. 이한영씨는 그 선물구매액이 100만달러 정도였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김정남이 태어난 1971년부터 스위스 유학을 떠날 때까지 홀아비처럼 김정남만 끼고 자면서 ‘15호 관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집을 비울 때는 출장 간다며 아들 정남에게 못 들어오는 사연을 알리곤 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다리며 애태우는 것을 염려해서였다.

    김정남이 세 살되던 무렵부터 김정일에게는 김일성이 정해준 여자(김영숙)가 있었고 또 고영희 같은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김정일은 장남 김정남이 있는 15호 관저를 와해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증축 보수하고 호위병력도 증강 배치했다.

    김정남이 열 살 때인 1980년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자 김정일은 딸 시집 보내는 어머니보다 더 슬퍼했다고 한다. 김정남의 가정교사였던 성혜랑씨에 따르면 김정일은 술을 마시고 아이처럼 울었다는 것이다. 1980년 3월 김정남이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한 뒤에 김정일은 매일같이 김정남에게 전화를 했다. 성혜랑씨에 따르면 이 부자는 그리움 때문에 전화선을 통해 서로 울었다고 한다.

    김정일의 여자와 자녀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김정일의 ○○댁(宅)으로 불리는 여자들을 부인이라고 보면 된다. 현재 ○○댁으로 불리는 여자는 김영숙, 고영희, 그리고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댁이 있다. 이들 세 명은 정실이라고 볼 수 있다. 개념상으로는 김영숙은 공식 ‘왕후’, 고영희와 ○○댁은 ‘빈(嬪)’으로 보면 된다.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은 공식 부인 개념에는 끼지 못하는 동거녀로 보면 된다. 우리 정보기관이 확인한 김정일의 여자들은 다음과 같다.(자세한 내용은 김정일 가계도 참조)

    ● 성혜림(동거녀): 성혜림은 김정일의 첫사랑이며 장남인 김정남을 낳았다는 점에 의미가 깊다. 1968년께 김정일은 노동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이었고 영화제작을 지도하면서 영화배우 성혜림을 만났다. 당시 성혜림은 딸을 하나 둔 유부녀인데다 김정일보다 다섯 살 위였다. 성혜림은 서울사대부속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풍문여중을 다니다 부모를 따라 월북, 1960년 평양연극영화대학을 나왔다.

    1960년대 북한 영화계를 주름잡던 여배우는 성혜림, 우인희, 김현숙이었다. 당시 남한은 문희, 남정임 등이 인기였다. 성혜림은 미인인데다 예절에 밝아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상냥한 서울 말씨여서 대학 다닐 때부터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혜림은 첫 남편 이평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해 영화에만 몰두했고, 그 틈새를 김정일이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 김영숙: 김정일의 정식 부인이다. 김정일이 성혜림과 동거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김일성은 “서른 살 넘도록 장가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며 김정일을 다그쳤다. 1974년 김정일은 김영숙과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곧 딸을 낳았다. 김일성은 처음에는 김영숙이 낳은 딸 설송을 첫 손주로 여겼다. ‘설송(雪松)’이라는 이름도 김일성이 지어주었다.

    그러나 김영숙이 정식 부인이라고 해도, 서방세계에서 보는 것처럼 퍼스트 레이디와는 거리가 멀다. 김정일과 20여 년을 같이 지낸 성혜랑씨에 따르면 중앙당 김정일 집무실의 타자수 출신인 김영숙은 어느 초대소에서나 볼 수 있는 관리원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영숙의 인격이나 됨됨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김정일이 그렇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김정일의 시야 밖에 있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1974년생인 큰딸 설송도 김정남처럼 평양에서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고, 관저에서 가정교사를 데려다 공부했다. 설송은 고등학교 과정도 일반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았다. 김설송을 가르친 가정교사가 황장엽의 부인 박승옥이다.

    박승옥은 2대에 걸쳐 김정일 집에서 가정교사를 했다. 박승옥은 김일성의 조카로 평양연극영화대학과 사회안전부 고급군관학교에서 러시아어 교관을 지냈다. 김정일이 이처럼 2세들을 평양의 일반학교에 보내지 않은 것은 내부 비밀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고영희: 김정일의 애첩으로 무용수 출신이다. 말하자면 김정일의 ‘기쁨조’였다가 고정 파트너가 된 것이다. 고영희는 북송 재일동포 고태문의 딸인데, 어린 나이에 일본에서 부모를 따라 북으로 왔다. 고태문은 북한 유도의 창시자다.

    김정일이 고영희를 집에 들어앉힌 것은 1976년경이다. 김정일의 파티에서 김정일 옆에 앉던 고영희는 1977년부터는 파티에 나오지 않았다. 아예 살림을 차린 것이다. 김정일의 관저 중 창광산 관저가 고영희 차지가 되었다. 고영희는 지금까지 김정일의 여인중 가장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

    고영희는 1981년에 아들 김정철과 둘째아들 김○○을 낳았다. 현재 김정일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 김정철로 알려져 있다(스위스 유학). 북한전문가들은 만약 북한이 또다시 세습체제에 들어간다면 김정철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 ○○댁: 아들 하나를 낳았다.

    ● 임경옥(김일성종합대 어문학부 출신): ○○댁으로 불리지는 않으나 아들이 하나 있다.

    이 밖에도 이름도 모르는 소생이 적지 않다. 이는 김일성도 마찬가지였다. 김정일이 고교-대학 시절에 김일성 주석관저에서 일하는 여성복무원들을 자주 겁탈하는 바람에 말썽이 나서 당시 김정일 숙소에는 여성 복무원을 배치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의 특각에 배치되는 여자가 적지 않다. 특각은 각 지방의 명승지에 있는 일종의 별장으로 이 여자들은 특각에 근무하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긴다. 특히 김정일의 비밀 연회에 참석하면 정말로 대단한 영예로 여기는데, 고영희·임경옥이 술파티에서 낙점된 여자들이다. 비밀연회는 70년대, 8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가 90년대에 들어와서 시들해졌다. 의사가 김정일의 건강에 주의를 주었기 때문이다.

    ‘신동아’는 미국의 한 북한전문가로부터 김정남이 아버지 김정일과 함께 살았던 ‘15호 관저(북한에서는 일오호 관저라고 부름)’ 도면을 입수했다. 김정남의 이모인 성혜랑씨와 김정남의 이종사촌인 이한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남은 15호 관저에서 김정일, 어머니 성혜림, 이모 성혜랑, 외할머니 김원주와 함께 성장했다. 이 도면은 성혜림, 성혜랑 자매가 1996년 모스크바에서 탈출을 시도할 무렵, 모스크바 현지에서 파악된 내용이다. 5년 전의 모습이기 때문에 각 공간의 쓰임새는 달라졌겠지만, 구조는 그대로일 가능성이 크다.

    김정일은 여러 곳의 관저를 사용하지만 평양 중심가에 있는 중성동 15호 관저가 중심 관저다. 이 15호 관저는 김정일의 중앙당 집무실과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100m 정도 내려가면 집무실과 통하는 지하도가 나온다. 이 지하도를 김정일은 운동삼아 걷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한다. 지하도는 대리석으로 돼 있는데, 폭은 4∼5m, 높이는 3m 정도다. 관저에서 김정일 집무실까지는 걸어서 6분쯤 걸린다고 한다.

    원래 100평 규모였던 중성동 15호 관저는 1973년에 500평으로 늘어났고, 1978년 1년간의 공사를 거쳐 지금의 2000평 규모로 증축되었다. 김정일과 김정남, 성혜랑, 이한영, 김정남의 외할머니 김원주씨는 70년대 내내 15호 관저에서 생활했다.

    80년대에는 성혜랑도 모스크바로 나가고, 김정남도 스위스 모스크바 등 외국에 유학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은 빈집 같은 15호 관저를 이용하지 않았다. 이 당시에 김정일은 둘째 아들 정철을 낳은 고영희가 살고 있는 창광산 관저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82년 이한영씨가 한국으로 탈출한 이후에도 15호 관저는 줄곧 성혜랑씨와 김정남, 성혜림, 외할머니 김원주씨가 거주했다. 김정남은 제네바와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다 잠시 귀국하면 이 집에 묵었다. 80년대에 모스크바에서 치료받던 성혜림이 평양으로 들어오면 김정일도 그때마다 이 집에 머물렀다.

    1989년 7월 평양에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을 때, 마침 성혜림이 평양에 와 있던 터라, 김정일은 이 ‘15호 관저’에 거주하며 축전을 진두지휘했다. 1990년까지 김정일은 이런 식으로 이 집에서 살았으나 성혜림이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가면서 김정일은 이 집에 발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한영씨와 성혜랑씨가 낸 책 내용과 ‘신동아’가 입수한 도면을 맞추어보면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이 관저의 특징은 대응접실, 대형 오락장 등 큰 방의 벽마다 책이 가득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외할머니가 장서 정리

    이 관저에 있는 김정일 서재는 사다리를 놓고 책을 꺼내야 할 정도로 책이 꽉 차 있다. 15호 관저는 단층으로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가 7∼8m나 된다. 이 관저의 장서를 분류하고 정리한 사람은 김정남의 외할머니 김원주였다. 김원주는 로동신문 국제부장을 지낸 인텔리 출신. 그가 어린 외손자 김정남을 키우기 위해 이 집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15호 관저의 장서를 꾸리는 일이었다. 책은 분기마다 김정일이 일본과 남한의 출판목록을 보고 한아름씩 들여왔다. 김정일은 자기 차에 책을 싣고 와서 현관서부터 “할머니! 할머니!” 하고 김원주를 찾았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15호 관저의 이 책 때문에 아버지 김일성에게 크게 점수를 딴 적이 있다. 독일 여류작가 루이저 린저가 처음 북한에 온다는 소문이 있었을 때 김일성은 미리 작품을 읽어 보기 위해 아들에게 루이저 린저의 책이 북한에 있는지 물었다. 책은 학습당(중앙도서관)이나 비공개도서실에도 없었다. 김정일은 김원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책은 관저에 있었다. 김원주는 자기가 꼼꼼히 분류하여 관저에 정리해 놓은 책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고 김정일은 바로 이 책을 김일성에게 전할 수가 있었다.

    도면에 보이는 대형 오락실은 김정남의 놀이방인데 규모가 300평쯤 된다. 이 공간은 기둥이 없이 확 터져 있어 운동장같은 느낌을 준다. 오락실 한가운데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포켓볼대가 있고, 사방벽에는 전자오락기가 죽 붙어 있다. 김정남의 어린 시절, 오락실은 5월10일인 그의 생일을 기준으로 매년 새로운 놀이기구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그가 새로운 장난감들을 잠깐씩 만져보고 살펴보는 데도 하루 이상 걸렸다는 것이다.

    300평 대형 오락실

    김정남의 생일선물이 도착하면 오락실에 진열되는데, 생일 당일까지는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남은 5월10일 원수복을 입고 명예위병대를 사열한 뒤 김정일의 손을 잡고 오락실에 들어가서 선물을 둘러보곤 했는데, 김정일은 대충 돌아보지만 김정남은 하나하나 만져보고 움직여 본다는 것이다.

    이날 15호 관저에서는 김정일과 친지들의 오찬이 베풀어지곤 했는데 어른들이 벌이는 생일축하 파티는 술을 곁들여 오후 서너시까지는 갔고, 그 동안 김정남은 부관이나 경호원과 함께 오락실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이 관저에서는 한국의 텔레비전을 볼 수 있다. 개성의 수신탑에서 남한의 전파를 잡아 평양 중계탑으로 보내고 거기서 김정일의 관저와 집무실로 전파를 보내는 것이다. 이한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관저에서는 오락실 등 가는 곳마다 텔레비전을 켜면 남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나왔다. 일본 NHK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송출하는 러시아방송도 나왔다.

    김정일이 이 관저의 정문을 통과하면 “선생님께서 들어오십니다”라고 연락해준다. 관저 안에서 수행원이나 관리원은 김정일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정문을 통과해서 현관까지 오는 데도 한참 걸릴 정도다.

    그래서 관저 내 청소요원이나 관리요원들은 골프장에서 타는 배터리카를 이용한다. 이한영씨가 집 안을 구경하는 데만 한나절이 걸렸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금고실이 재미있는 곳이다. 금고실은 도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정일의 서재를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한영씨는 이 금고실에는 김정일과 성혜림이 사용하는 것 이외에 김정남의 금고 등 모두 5개 정도의 대형 금고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중 김정남의 금고에는 총알이 들어 있지 않은 각종 권총과 김정일이 선물한 보석이나 돈, 금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15호 관저는 2중 콘크리트 담으로 보호되어 있다. 맨 안쪽 담 안에 관저가 있고, 담과 담 사이에 부속건물이 있다. 2층으로 된 이 부속건물에는 이발소와 재단실로 불리는 양복부, 그리고 관리과장실이 있다. 관저의 울타리는 높이가 4m나 되는데다, 그 위에 전기 철조망이 쳐 있고 고압 전기가 흐르고 있다. 때문에 울타리 밖에 사병들이 서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관저 안에는 의무실도 있다. 이한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1980년 초)에는 의사는 없고 간호원만 두 명 배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간호원들은 예방주사 시즌이 되면 예방주사를 놔주고, 김정일과 성혜림이 먹을 약품도 관리했다. 도면에 나오는 약실에 가면 김정일과 성혜림이 복용하는 약이 있고, 각 지방에서 올라온 산삼이나 사향 같은 귀한 보약도 있었다고 한다.

    이 관저에서 청소하는 사람들은 하얀 가운을 입고 다닌다. 전구를 닦을 때면 관저의 천장이 워낙 높아 사다리를 이용한다.

    식당은 김정일의 침실 쪽에서 김정남의 대형 오락실을 건너가면 오른쪽에 있다. 여기에 놓인 지름 2.5m쯤 되는 둥근 식탁에서 김정일과 성혜림, 김정남, 성혜랑, 김원주 등 가족들이 식사를 했다. 주방은 관저에 붙어서 한쪽으로 튀어나와 있는데, 관저와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주방에는 침실이 따로 있어 요리사 두 명이 교대로 항상 대기한다.

    15호 관저 외에도 대동강변에 있는 동평양관저(85호)는 경치가 뛰어나다. 면적이 어마어마해 정문을 통과해 한참을 지나야 건물이 나오는데 이중으로 된 울타리 사이에는 백두산에서 잡아온 사슴들이 뛰어논다. 또 연못과 낚시터, 인공폭포도 있는데 폭포 밑에는 양어장과 분수시설이 돼 있다.

    창광산 관저도 있다. 창광산 관저는 김정일의 애첩 고영희가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정일은 1979년부터 창광산 관저에서 고영희와 동거를 시작했다. 보통강 구역인 서장동에도 관저가 있는데 앞서의 관저보다 규모가 훨씬 작다.

    김정일은 또 전국 각지에 특각을 갖고 있다. 특각은 일종의 별장 개념인데, 특이한 점은 김일성 특각과 김정일 특각이 각각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유학 후 버림받은 김정남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김정남이었지만, 1989년 유학생활을 마치고 평양에 돌아온 이후부터는 아버지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김정남이 모스크바로 제네바로 떠돌다 평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귀여운 어린아이가 아니라 18세의 떠꺼머리 총각이 된 것이다. 그 사이에 김정일은 딴살림을 차리고 아들 딸을 보는 등 한창 재미를 보고 있었다.

    고영희가 낳은 김정철이 이 무렵 10살 남짓이었으니 한창 재롱을 부릴 나이였다. 어린 김정남에게 쏟아졌던 김정일의 애정이 다른 자식들에게 옮아간 것이었다.

    더구나 사춘기를 외국에서 보낸 김정남은 여자친구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놀러다니고, 여성과 동거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다 공부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돌아왔기 때문에 김정일은 영 탐탁해하지 않았다. 성혜랑은 저서 ‘등나무집’에서 김정일의 심정을 이렇게 분석했다.

    ‘총기가 멀쩡한 정남이가 돌아오자 그(김정일)는 자기 속이 들키는 것 같은 멋쩍음과 아들이 배신했다는 갈등을 느꼈다. 숨어 시작한 신접살림이 이 큰아들에게 들키는 꺼림칙함이 있었다. 또 모처럼 길 닦은 유학에서 최우등생으로 끝까지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것도 유감인데 그 이유라는 게 사내끼를 피운 것이라는 게 몹시 못마땅했다. 자신의 체험으로 이제 그 아들이 휩쓸 청춘의 ‘방랑’이 염려롭기 짝이 없었다.’

    90년대 초반 김정일은 평양에 돌아온 20대 초반의 김정남을 동평양관저(85호 관저)에 묶어두고 바깥으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미 다른 살림을 차리고 있었기 때문에 김정남이 사는 관저로 잘 오지도 않았고 그를 돌보지도 않았다.

    이 무렵 김정남은 이한영의 여동생인 이남옥과 성혜랑, 외할머니 김원주와 같이 살고 있었다(이종사촌형 이한영은 이미 1982년 서울로 망명했다). 김정남의 말벗이라고는 이종누이 이남옥뿐이었다. 이남옥은 김정남의 말벗일 뿐만 아니라, 김정남의 생활을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통제역이었다.

    당시 생활을 성혜랑은 이렇게 회고한다.

    ‘생활이 없는 우리는 화제도 없었다. 묵묵히 찻잔을 들고 내려다보는 죽은 마당은 우리를 세상과 차단시키고 있는 공간일 뿐이고, 이 막힌 생활을 열어줄 사람은 김정일 비서뿐인데 그에게는 아무 방안도 관심도 없었다. 우리는 잊혀진 땅이고 아무런 전망도 없었다. … 옵바위 집은 고급 감옥, 우리는 모두 무기수였다.’

    하지만 김정남은 저녁마다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다 놀았다. 그러다 1991년 5월18일 밤 1시경 불시에 집을 방문한 김정일에게 이 장면을 들키고 말았다. 김정일은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시 성혜랑은 울면서 용서를 빌었고 85세 된 김정남의 외할머니도 같이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당시 성혜랑은 다 자라서도 바깥 출입을 못 하고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하는 김정남이 불쌍해서 설움에 겨워 흐느꼈다고 한다.

    김정일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자신을 너무나도 빼닮은 김정남이 싫었던 것 같다. 김정일 자신이 ‘주량이 도량이다’고 할 정도로 술과 여자를 좋아했다.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김정남의 방황은 더욱 심해졌다.

    일화가 있다. 김정남은 1993년 어느날 밤 외국인 관광객이 숙박하는 평양의 일류호텔인 ‘고려호텔’에 벤츠를 타고 들어가, 지하 나이트클럽에 나타났다. 거기서 다른 손님과 여자를 둘러싸고 입씨름이 벌어지자, 김정남은 토카레프TT33을 본떠 만든 북한제 58권총을 꺼내 갑자기 천장을 향해 두 발 발사했다는 것. 이 권총 난사 사건을 보고받은 김정일은 허리띠로 김정남을 때렸다는 소문이 평양시민 사이에 퍼졌다고 한다.

    90년대 초반 내내 아버지의 관심 밖에서 울분을 삭이던 김정남은 다시 김정일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1996년 2월 성혜랑의 서방탈출 사건이 그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초 한국이나 일본의 언론은 김정남의 생모인 성혜림도 언니와 함께 망명했다고 전했다.

    사건 이후 김정남은 가뜩이나 어려운 처지 때문에 전전긍긍했다. 그가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였을 것이다. 다행히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은 모스크바에 머물고 탈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정일은 전처의 망명이라는 수치를 당하지 않아도 됐던 것. 이 사건 이후 김정일은 ‘나에게만 충실하면 별일 없다’는 한마디로 김정남을 위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정남은 아버지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혜랑 탈출사건 직후 터진 것이 성씨의 아들인 이한영씨 피살사건이다. 이 사건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사건 이후 몇 달 동안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자, 수사 당국은 범인이 북한 공작원이라고 결론짓고 잠정적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확인할 수 없지만 김정남은 이 사건의 배후인물로 알져져 있다. 이한영씨가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이라는 책에서 김정일의 난잡한 비밀 파티 등 일가의 사생활을 낱낱이 공개했기 때문에 남파공작원을 시켜 복수했다는 것이다. 북한 내부에서는 김정일 일가의 사생활을 공개한 것이 들통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이한영 피살 사주설이 사실이라면 김정남은 이를 통해 김정일의 신임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 체제가 자리를 잡는 가운데, 1998년 7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열렸다. 그 당선자 명단에 ‘김정남’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당시는 다른 사람이라는 분석도 있었으나, 현재까지는 김정남 본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97년 이후 신임 회복

    김정남은 스위스 유학에서 프랑스어를 거의 완전하게 마스터하고 영어도 상당 수준 습득했다. 또 러시아어와 일본어도 말하는 데 불편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인터넷을 익힌 그는 현재 ‘국가컴퓨터위원회 위원장’으로 북한의 IT정책을 추진하는 책임자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1999년 10월 중순 북한을 방문한 중국 조선족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텔레비전 뉴스는 ‘김정남 동지’가 군부대를 시찰했다고 보도하면서, 장관급 부인이 경례로 김정남을 맞는 장면도 나왔다고 한다(1999년 12월7일자 홋카이도신문 조간). 또 김정남은 ‘국가안전보위부 지도원’ 또는 ‘인민군 보위사령부 간부’ 그리고 최근에는 ‘당조직지도부 과장’이라는 요직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난 5월1일 김정남 일행을 체포한 일본 공안조사청·경시청·내각조사실·법무성·출입국관리소 등 5개 부서 합동조사반은 김정남이 일본뿐 아니라 세계 곳곳을 여행다닌 사실을 밝혀냈다. 김정남이 이처럼 해외여행을 하고 다니는 것은 아버지 김정일의 승인과 신임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한영과 성혜랑이 쓴 책을 보면 북한의 로열 패밀리는 직계가족일수록 김정일의 재가 없이는 해외여행을 하지 못한다. 심한 경우 국내 여행과 급식과 생활용품 공급조차 김정일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주목되는 김정남의 운명

    1990년대 초반 김정일이 김정남을 동평양관저에 가두어놓고 바깥출입을 못하게 한 것이 그 실례다. 또 이 무렵 김정남과 성혜랑 일행이 원산 해수욕장에 내려갔을 때는 해수욕장에 가두어놓고 몇 달 동안 평양에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 이때 김정일은 식료품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는 모욕을 주었으며, 김정남에게 탄광에 노동하러 갈 준비를 하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도쿄 밀입국 사건 이후 김정남은 다시 한 번 큰 위기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의 분석대로 그는 고영희가 낳은 아들 정철(20)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러나 96년 성혜랑씨 망명 이후처럼 극적으로 회생할 수도 있다.

    일본은 김정남 체포 사건에서 처신을 잘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김정일에게 망신은 망신대로 주고, 중국에게 넘겨 북·일 관계도 나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내의 한 정보기관 관계자에 의하면 김정남은 도쿄 사건 이후 평양에 돌아가지 못하고 베이징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이 관계자의 말이 사실이고 김정일이 화를 풀지 않는다면 김정남은 아마도 아버지에게 “살려달라”는 애원의 편지를 계속 보낼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번 위기를 어떻게 돌파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김정남의 운명을 김정일의 후계 구도와 연결해서 분석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섣부른 판단인 것 같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언론이 지금 시점에서 김정일의 후계구도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김정일이 아직 건강하고, 나이도 젊기 때문에 그럴 단계가 아니다. 그가 1인자 자리를 물려받은 지 몇 년 되지도 않는다. 또 북한의 국내 사정이 그만큼 여의치 않기 때문에 북한에서 후계 구도를 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고 하면서 후계구도 논의 자체를 일축했다. 김정남의 운명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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