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이른바 한비사건으로 한국비료를 정부에 헌납한 1967년, 호암은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며 장남 맹희씨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삼성을 이끌어갈 권리를 부여한다고 발표했다. 예상대로 장자 승계가 이뤄지는 듯했다. 그러나 호암은 1970년 무렵부터 그룹 복귀 신호를 보냈다고 한다. 맹희씨가 쓴 ‘묻어둔 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73년 여름, 아버지는 나를 부르더니 ‘니 지금 직함을 몇 개나 갖고 있노?’라고 물었다. 내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열댓 개 되는 것 같다’고 했더니 ‘니가 다 할 수 있나?’라고 되물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밝질 않았다. 그 전부터 뭔가 낌새를 채고 있었기에 ‘다 잘할 수는 없심더’라고 했더니 ‘그라모 할 수 있는 것만 해라’고 말을 잘랐다….”
호암은 그렇게 삼성으로 돌아왔고, 3년 후인 1976년 9월 암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 밤 가족회의에서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호암은 이어 78년에 이회장을 삼성그룹 부회장에 임명, 승계구도를 공식화했다.
그러나 호암이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구상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듯하다. 이회장에 따르면 호암은 1961년 이회장을 와세다대로 보내면서 “네 성격엔 기업이 안 맞는 것 같다. 매스컴은 어떠냐?”면서 중앙일보 창간을 시사했다. 이회장이 좋다고 하자 “경영학을 하면서도 매스컴에 신경 써서 공부해라”고 당부했다는 것. 66년 이회장이 일본과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호암은 그를 동양방송으로 보내 경영수업을 받게 했고, 68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로 선임했다.
호암이 이회장을 염두에 두고서 중앙일보를 만들고, 공부를 마친 그를 맨 먼저 중앙일보로 보낸 데는 그가 ‘기업에 안 맞아’서가 아니라 더 깊은 뜻이 있었다는 게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이들의 얘기다. 그때 벌써 호암은 향후 기업의 미래가 문화적 개명(開明), 가치체계의 변화, 인재 육성에 달려 있다고 봤고, 그래서 중앙일보와 성균관대에 특별한 애정과 기대를 가졌을 만큼 안목이 남달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이회장을 눈에 띄게 귀여워했던 호암이 그를 중앙일보로 보낸 것은 삼성의 내일을 이회장과 연결지어 보려는 포석이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중앙일보에는 호암의 평생 사업 동반자인 홍진기(洪璡基·1917∼1986) 회장이 있었다. 법무부·내무부 장관을 지낸 후 1965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이끈 그는 호암과 더불어 이회장에게 최고의 스승이었다. 이회장은 홍씨의 장녀인 라희씨와 결혼, 장인과 사위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회장은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선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으셨다. 현장에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다’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한편 장인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결국 나는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배운 셈이다….”
21년간 경영수업
이회장은 그렇게 21년 동안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호암은 점심시간에 계열사 사장들을 불러 업무를 보고 받았는데, 이 자리에는 홍진기 회장과 이회장이 고정멤버로 배석했다. 78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회장실 바로 옆방에 대기하고 있다가 호암의 스케줄에 맞춰 그림자처럼 그를 수행했다.
호암은 시계추 같은 사람이었다. 출·퇴근시간은 칼처럼 지켜졌고, 시계도 보지 않고 일하다가 ‘탁’ 하고 펜을 놓으면 정확하게 12시 25분, 점심시간이었다. 목욕물 온도도 일정해야 했는데, 온도가
1℃만 달라도 몸을 담그자마자 알아차렸다. 계절에 따라 골프 티오프 시간도 분 단위로 다르게 했다.
그처럼 까다로운 부친 앞에서 이회장은 혈기 넘치는 20대 중반부터 자세 한번 흐트리지 않고, 그 좋아하는 담배 한 대 못 빼 물고 꼬박 20년 넘게 경영수업을 받았다. 계열사 사장들이 “점심때 두 시간만 불려갔다 와도 오후에 일을 못할 만큼 무너져 내렸다”는 호암 앞에서.
하지만 덕분에 이회장은 모직, 합섬, 제당, 중공업, 항공, 보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열사들의 사정을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길렀다고 한다.
삼성생명 이수빈 회장이 1985년 미국에서 돌아와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사장으로 발령받았을 때의 일이다. 이사장이 당시 이건희 그룹 부회장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생명으로 가신다면서요? 보험회사는 모집인(설계사)이 전붑니다” 하고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보험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없는 이사장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거니와, 당시 동방생명은 지금처럼 생명보험업계에서 수위를 달리지도 못했고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미미했기 때문에 ‘경영수업중인 부회장이 보험에 대해 뭘 안다고 저러시나’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새겨들은 이사장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눈여겨보니 과연 보험회사 경영을 좌우하는 것은 모집인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파격적으로 대우해줬더니 2∼3년 후부터 실적이 급증하더라는 것. 계열사 돌아가는 형편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다가 단 하나의 문장으로 핵심 경영전략을 귀띔해준 이 부회장을 그 후부터 다시 보게 됐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은 선대 회장 앞에서는 ‘정규수업’을 받았지만, 선대 회장 뒤에서는 ‘자율학습’에 골몰했다. 퇴근 후에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쪽으로는 취미가 없었던 이 회장은 그럴 시간에 주로 기술관련 서적을 탐독하거나 전자제품, 각종 기계류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관련 전문가들을 집으로 불러다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삼성 부회장 시절 사석에서 “주말에 우리집으로 초청해 한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 명이 넘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NEC, 도시바, GM, 휴렛팩커드 등 세계 유수 기업의 CEO들도 방한시 이회장 자택을 주요 방문지로 잡는다.
그의 한남동 자택을 자주 찾는 한 재계 인사는 “이회장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반면 미래과학,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등 이·공학 관련서적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데, 전집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 책들은 이회장이 직접 한 권 한 권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전한다.
자동차 마니아인 이회장은 유학 시절부터 중고차를 사서 엔진까지 샅샅이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곤 했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콩알만한 부품의 기능 차이까지 꿴다. 국산 제품과 외국산 제품을 갖다놓고 부품 하나하나를 비교하며 품질 격차의 원인이 된 부품을 밝혀낸 뒤 계열사 기술담당 임원을 불러 그것을 쥐어준다. 부품업체인 삼성전기의 매출액이 1996년 1조4000억 원에서 외환위기 파고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4조2000억 원으로 4년 만에 3배나 늘어난 것도 이런 사정에 힘입은 바 크다. 이회장은 경영수업을 받던 시절에도 전자·정보·통신 계열사 임원들만큼은 무시로 불러올려 지시를 내렸다. 직접 해외에 나가 배워온 선진 기술을 임원들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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