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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 회장 인터뷰

“재용이는 준비된 경영인, 대견하다”

  • 이형삼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ns@donga.com

“재용이는 준비된 경영인,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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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리에선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지식, 기술의 두뇌 경쟁력이 형편없는데도 정부, 기업, 국민 모두 준비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가 소홀하다는 것인지 설명해 주시죠.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가장 아쉬운 게 사람입니다. 삼성이 사업만 생각하고 이익만 염두에 둔다면 기술수준이 높으면서도 임금이 싼 러시아, 인도 등지의 인력을 대거 데려다 쓰면 되지만, 이것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두뇌 잠식’을 초래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고민이 많습니다.

사실 국내에서 학교를 갓 졸업한 인력은 그대로 써먹을 수가 없습니다. 시대가 어떤 인재를 요구하는지에 따라 교육의 내용과 질이 달라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죠. 세상은 벌써 정보사회에 진입했는데도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산업사회에나 맞는 아날로그 인력을 키워 내고 있어요.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는 아날로그는 물론이고 디지털도 잘 알아야 합니다. 아날로그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디지털 지식을 모르면 지식 불구자가 됩니다. 삼성이 이 사람들을 다시 교육시키는 데 해마다 1000억 원 정도를 쏟아붓고 있어요.

우선 시급한 것이 영재교육입니다. 100년 전에는 10만 명, 20만 명이 왕과 귀족을 먹여 살렸지만, 지금은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 20만 명을 먹여 살리고 있어요. 천재가 소프트웨어 하나를 개발하면 1년에 몇십억 달러를 간단히 벌어들이고 수십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제2 위기설’이 끊이지 않을 만큼 우리 경제의 앞날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미국 경제 전망이 썩 밝지가 않고 일본 경제도 장기 침체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인지 우리 경제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껏 우리 경제를 둘러싼 여건은 좋은 때보다 나쁜 때가 더 많았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오늘날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 전체에 기업가정신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봐요.

우리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특유의 저력과 끈기, 아이디어로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새 시장을 개척해 온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여건이 나쁘더라도 국민과 정부, 기업이 삼위일체가 되면 얼마든지 활로를 열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IMF체제를 슬기롭게 극복했다고 보십니까? 해외자본에 경제주권을 내줬다고 보는 이들도 있고,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적극적인 외자유치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부실 금융기관 정리, 기업 구조조정으로 국가 대외 신인도를 높이는 등 비교적 슬기롭게 대처해 왔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과 경제구조가 이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근의 어려움으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글로벌 컴퍼니가 되려면 혼자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제대로 활동하려면 해외 자본을 들여오는 것이 주가를 높이고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이와 관련, 국내 일각에선 기업의 국제 신인도를 높이기 위해 빨리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하고 해외자본 비중을 계속 높이라고 요구하는데,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게 누가 모여서 표준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저마다 체질이 다른데,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무작정 많이 쓰다 보면 오히려 몸을 해칠 수도 있는 겁니다. 해외 자본을 들여오는 것은 좋지만 경영권이 흔들릴 정도가 되면 그 기업은 물론 국민경제 전체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국내 기업들이 남의 나라 자본으로 넘어가면 그게 곧 경제식민지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행정은 서비스산업

-1995년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이른바 ‘베이징 발언’으로 파문이 일었는데, 지금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정부가 기업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불합리한 규제를 없애는 등 공정한 ‘심판’ 노릇을 다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5월10일 전경련 회의에서 “선진국일수록 규제가 없고 기업 하기도 좋다”고 하신 것은 한국에서 기업하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앞과 뒤에 있는 말을 다 자르고 전달하면 왕왕 참뜻이 왜곡되고 오해를 빚게 됩니다. 그때 베이징에서 했던 얘기는 21세기 초일류 국가가 되려면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이었어요. 지금이라도 진의가 제대로 전해졌으면 해요.

제가 보기에 현 정부는 ‘경제 살리기’를 초미의 과제로 삼고 출범했고 지금도 나름대로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치든 행정이든 정부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 국민과 기업을 고객으로 하는 서비스산업이라는 생각을 좀더 해줬으면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선진국으로 접어드느냐, 아니면 이대로 주저앉아 2류, 3류 국가가 되느냐 하는 분수령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국력의 의미가 예전에는 강한 군사력이었지만 이제는 강한 경제력으로 바뀌었잖습니까. 강병(强兵)에서 부국(富國)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죠. 부국이 되려면 세계 일류 기업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이런 기업은 규제가 없는 곳에서 육성됩니다.

가령 빠른 시일 내에 영종도든지, 서해안이든지 입지조건이 좋은 땅을 마련, 규제가 없고 세제, 금융, 행정이 기업활동을 최대한 지원해주는 ‘국제자유기업도시’를 만들어 국내외 기업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해야 일류 기업도 나오고, 우리나라가 21세기 경제강국으로 성장하는 데도 탄탄한 기반이 될 것으로 봅니다.”

-현 정부 초기에 사실상 정부 주도로 강행됐던 대기업간 빅딜과 부채비율의 일률적 축소 같은 조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당시 기업인들의 불만이 컸던 것으로 아는데요.

“모든 일에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기 때문에 그때의 일에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업들이 시장의 무서움을 절감하고 있으며 양적 경영의 폐해에 대해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원리에 따라 업계 자율에 맡겨도 될 것입니다.”

-삼성가(家)에는 정계로 진출한 사람이 없는데, 회장께서도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까? 관심이 없으시다면 그저 ‘정치 무관심’입니까, 아니면 ‘정치 혐오’입니까?

“정치는 결코 혐오의 대상이 아닙니다. 정치는 사회 각 분야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해 가면서 나라를 앞서 이끄는 부문인 만큼, 정치인은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지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삼성 집안에서 아무도 정계에 진출하지 않은 것은 정치와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하려는 가풍 탓도 있지만, 기업논리와 정치논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 같습니다.”

선친의 큰 가르침은 ‘경청(傾聽)’

-삼성은 이미 60년대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는데, 우리의 기업 현실에서 가장 바람직한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기업인이라면 경영능력이 중요한 것이지, 오너냐 전문경영인이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굳이 차이점을 들라면 대주주인 오너는 아무래도 자기의 전재산을 기업에 거는 만큼 전문경영인보다는 더 많은 고민을 하겠지요.

저는 지금까지 직접 경영 전면에 나서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대주주로서, 또한 경영자의 한 사람으로서 미래의 전략과 방향 등 경영의 큰 줄기에 대해 가끔씩 상의하고 조언하는 데 그치고, 일상적인 경영활동은 전문성과 능력을 갖춘 각사 사장들이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자율적으로 하게 해왔는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노동조합 없는 삼성’은 앞으로도 변함없는 원칙입니까?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회사 발전에 조력하는 동반자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노사분규를 보니 노조한테도 도움이 안 되고, 회사나 국가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삼성에 노조가 없다고 하지만 노조 이상의 기능을 하는 노사협의회가 있고 서로간에 믿음이 아주 깊습니다. 삼성이 구조조정을 무리없이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평소에 이처럼 튼튼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노조와 회사가 갈등하고 대립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회사 발전을 위해 쓰면 그만큼 종업원의 복지도 좋아지고 개인이나 회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선대 이병철 회장께선 경영 일선에 항상 이회장을 동반하고 다니며 ‘현장경영’을 습득케 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회장께선 여느 경영인처럼 현장을 자주 찾아 독려하시진 않는 것 같은데, 그 때문에 ‘현장감각’이 떨어질 우려는 없습니까?

“그 당시에는 선친이 시켜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 현장을 찾아 다니면서 꼼꼼히 챙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대부분의 업무가 시스템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상당한 권한이 현장에 위임되어 있습니다. 현장에 있는 사장들 이 잘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회장이 나설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다 바로 눈앞의 일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어서 그런 큰 흐름을 찾아내 제대로 방향을 잡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현장감각’은 일선 경영자에게 맡기고 저 자신은 ‘시대감각’을 익히는 데 신경 쓰고 있다고나 할까요?”

-경영수업 시절 선대 회장께서 특히 강조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또한 회장께서는 아드님인 이재용 상무에게 어떤 점을 강조해 가르치십니까?

“선친께선 제가 부회장이 되자마자 직접 붓으로 쓰신 ‘경청(傾聽)’이라는 글귀를 선물로 주시더군요. 그래서 그 후엔 회의할 때나 현장에 갈 때 가능하면 한마디도 말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건희는 말을 못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합니다. 당시 제 짧은 생각에도 참으로 좋은 가르침인 것 같았어요. 그렇게 10년 가까이 말없이 지내는 동안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고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재용이는 올해부터 현장에서 경영수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특별히 해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껏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자식을 키워왔기 때문에 스스로 잘 해내리라고 봅니다. 또한 주변에 훌륭한 스승이 많이 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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