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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학계의 명문 ‘張在植 패밀리’

  • 윤영호 <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 noname01@freechal.com

정·관·학계의 명문 ‘張在植 패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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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 전사장의 이런 뜻은 도리어 정치적인 오해를 낳았다. 김씨가 김영삼 정권 시절 포스코 회장으로 있을 때, 포항제철의 산 증인으로 당시 정치적 낭인생활을 하고 있던 박태준(朴泰俊) 전총리의 손때가 곳곳에 묻어 있는 포스코에서 ‘박태준 지우기’를 시도했다는 게 박 전총리측의 시각. 따라서 박태준 당시 자민련 총재는 ‘김만제의 한전행’을 곱게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

장 전사장은 김씨를 한전 상임고문으로 영입하면서 사전에 사정당국의 양해를 구했기 때문에 이런 시각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생각은 정치판의 게임 논리로 봤을 때는 지극히 ‘순진한’ 발상이었다. 당장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불쾌감을 표시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할 수 없이 김씨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장영식·재식 형제 외에 장진섭 씨의 손자 가운데 장손인 경식 씨를 빼놓을 수 없다. 장진섭 씨의 큰아들 병준 씨의 외아들로 태어난 경식 씨는 고향에서 조부를 모시면서 장산중학교(현재는 공립) 이사장을 지냈다. 장산중학교 설립에 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나 생전에 장홍염 씨를 수차례 만났던 정일화 전 한국일보 북한부장은 한 칼럼에 이렇게 쓰고 있다.

“…홍염은 광복 직후 선친에게서 논 1500마지기를 물려받자 바로 그날로 소작인을 모아놓고 500마지기를 무상으로 넘겨주고 나머지 1000마지기는 소작인들의 주관하에 판매한 후 그 돈으로 광복 후 사단법인 제1호가 된 장산중학교를 설립케 했다.”

경식 씨의 자녀들(6남2녀)은 사업가, 샐러리맨 등 평범한 생활인들이다. 이들 중 막내 하운 씨는 고려대 운동권 출신으로 현재 서울시의회 의원. 자산운용사를 경영하는 하석 씨도 고려대를 10년 만에 졸업했던 운동권 출신. 그의 후배들에 따르면 그가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후배들을 자상하게 챙겨줘 따르는 후배가 많았다고 한다.



병상 씨의 자손들 가운데는 학자가 많다. 아들 4형제 가운데 큰아들 정식은 전남대 의대 안과 교수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하종 씨도 조선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병상 씨의 둘째 아들인 충식 씨는 부부가 함께 4·19 유공자이자 한국은행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는데, 그의 자녀 2남1녀는 우리에게 낯익은 얼굴들이다.

최근 여성개발원장에 취임한 딸 하진(夏眞·50) 씨는 학생운동권 출신의 시민운동가이자 학자. 이화여대 69학번으로 민주당 이미경 의원, ‘내일신문’ 최영희 사장과 함께 이화여대 초기 학생운동의 트로이카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여성학자 모임인 ‘여성연구회’를 ‘한국여성연구소’로 발전시켰고, 1999년에는 여성을 정치 세력화하기 위해 ‘여성 정치세력 시민연대’ 창립을 주도했다.

장하진 원장의 남편은 조선대 총장을 지낸 김홍명(金弘明·56) 교수다. “주위 소개로 만나 처음에는 별 감정이 없었는데,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생했다는 얘기를 듣고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는 게 장 원장의 회상. 장 원장은 취임 전후 여러 차례 가진 인터뷰에서 집안 얘기에 부담을 느낀 듯 자신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봐달라”고 거듭 밝혔다.

장 원장의 동생인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시민운동의 ‘중심’. 그가 참여연대에서 처음 소액주주운동을 주창할 때는 “시민운동을 하면서 무슨 소액주주운동이냐”는 비판의 소리가 시민운동권 내부에서 있었지만 지금은 소액주주운동이 시민운동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때 아시아를 변화시키는 지도자 50인 중 한 명으로 꼽혔을 정도로 그의 소액주주운동은 정치·사회적인 영역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장 원장의 또 다른 동생 하원 씨는 KDI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6년부터 KDI에 근무하고 있다. 현재 국가 산업정책의 장기 비전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촉망받는 학자 형제

장영식 전사장의 1남1녀는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고, 장 장관의 아들 형제는 해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소장 학자. 큰아들 하준(夏準·38) 씨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유학,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기 1년 전인 27세 때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로 취임, 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가 1991년에 쓴 박사학위 논문 ‘산업정책의 정치경제학’은 산업정책을 분석하는 데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 요소를 함께 고려한 것으로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는 이후로도 잇따라 주목받는 논문을 발표해 ‘신경제학의 샛별’로 불리고 있으며, 한국인 가운데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사로 꼽힌다. 그의 동생 하석(夏碩·34) 씨 역시 영국 런던대 과학철학과 교수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장홍염 씨는 슬하에 1남5녀를 두었다. 아들 웅식 씨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교직에 몸담았다가 현재는 사업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홍염 씨의 사위 다섯 명 가운데 서울 출신인 넷째 사위만 제외하고 모두 경상도 출신이라는 점. 그의 둘째 사위는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의 박경석(朴敬錫·64) 전의원(현 배재대 초빙교수)인데, 박 전의원은 고향 포항 출신의 2대 국회의원이었던 최원수 씨의 중매로 결혼했다. 최씨와 홍염 씨는 2대 의원을 역임하면서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박 전의원은 결혼 전에도 물론 장인을 알고 있었다. 1959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자마자 정치부로 발령받았던 그는 이듬해 4·19 직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혁신계 정당 취재를 담당하면서 장인과 인연을 맺었다. 장인 홍염 씨는 당시 사회대중당에 참여했다가 장건상 등과 함께 혁신당을 결성, 조직위원장과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지주 진섭 씨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데는 아버지의 교육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진섭 씨는 큰아들 병준과 둘째아들 병상을 일본으로 유학 보내 넓은 세상을 체험하게 했는데, 당시로선 장산도뿐 아니라 전국 어느 곳의 부자라 해도 두 아들을 일본에 유학 보낸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장진섭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들 형제의 독립운동 노선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형제간의 나이 차이로 인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점이 달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첫째 병준 씨가 우파 민족진영을 대표한다면 30년대 이후 중국에서 무장 투쟁을 벌였던 홍염 씨는 생전에 “나는 민족주의자요 사회주의자로 자칭하고 살아왔다”고 말하곤 했다.

병준 씨 형제들 사이에 형성된 이런 사상적 스펙트럼은 우리 현대사의 명암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광복 후 좌우 대립의 혼란기에 가족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을 법도 하지만 그런 흔적은 없다. 다만 아나키즘 쪽에 기울었던 홍염 씨는 나중에 반 이승만 투쟁이다, 혁신계 활동이다 해서 뛰어다니는 신난한 삶을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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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호 < 동아일보 주간동아 기자 > noname01@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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