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이한림의 울분 “박정희가 말뼈다귀냐 개뼈다귀냐”

  • 김준하

    입력2005-04-08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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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의 청와대는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의 청와대 건물은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헐렸지만 서울시청 본관 건물 3분의 1 크기의 개인 집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1급 별정직인 비서실장 밑에 두 명의 이사관과 두 명의 서기관이 각각 총무 공보 정무 등을 맡아 일을 했다. 가구나 책상 등 모든 비품은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하던 그대로였다. 악명 높았던 경무대 경찰서는 장면 내각 수립 이후 즉각 해체되고 시경 산하 100여 명의 경찰관이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 청와대 경비 문제로 청와대와 총리실 사이에 분쟁이 일기도 했다. 대통령 취임 후 어느날 돌연 시경국장 명의의 공문이 왔다.

    청와대 경비원 전원 교체 공문

    청와대 경비원 전원을 교체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은 물론 비서실에 일언반구 사전 연락도 없었다. 섭섭하게 생각한 대통령은 장면 총리를 만나 경비원 전원을 원상 복귀토록 조처할 것을 내게 지시했다. 장총리는 나에게 시경국장을 만나보라고 했다. 시경국장은 “경무대 경호원들은 모두 4·19 때 발포한 경찰관들이니 마음대로 하라”고 불평을 늘어놓고 나서 하루 만에 ‘전원교체’를 ‘전원복귀’로 바꿨다.

    또 경비대 문제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대통령은 경비대장으로 조병옥(趙炳玉) 내무장관 때 총경이었던 민정기(閔貞基) 씨를 내정해 총리가 임명하도록 요청한 바 있었다. 며칠이 지나도 감감소식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민정기씨가 민주당 구파 소속으로 장면씨의 총리인준을 반대한 게 원인이 되어 청와대 경비대장 임명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장면 정권에서 ‘신·구파’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 대통령이 이화장(梨花莊)으로 이사 한 후 오랫동안 비어 있던 경무대(景武臺)는 문자 그대로 빈 집이었다. 공과 사의 구별 없이, 심지어 일부 커튼까지 이화장으로 옮겨졌고 대장에 기록된 많은 기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청와대 뒤편에 자리잡았던 화원에서는 꽃 한 송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주위환경이 난장판이었다. 윤대통령이 청와대 주인이 된 후 안국동 자택 화원의 꽃과 나무를 모두 청와대로 옮긴 후에야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통령은 헌법상 정당에 가입할 수 없었고 행정부의 장관들이 대통령에게 업무를 보고할 의무가 없었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정보’는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신문이나 방송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윤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이후 청와대를 국무총리 공관으로 이용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상징적인 직위인 대통령이 경비원이 많이 필요한 청와대에 거주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는 생각에서였다. 더욱이 장총리가 조선호텔을 총리공관으로 이용하려 하자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청와대를 떠나 대통령 공관을 덕수궁 ‘석조전’이나 안국동 자택으로 옮길 생각까지 했다.

    윤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청와대를 일반에서 공개, 일반 시민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내각책임제하의 청와대는 조용하고 한가한 상징적 권부였을 뿐 5·16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허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기붕 비서 출신의 구조 요청

    윤대통령과 나의 인연은 3대 국회에서 시작됐다. 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처음으로 국회에 등장한 국회의원 윤보선씨는 특출하게 눈에 띄는 정치가는 아니었다.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나는 조용하고 신사적이며 단정한 윤대통령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 장택상(張澤相) 이기붕(李起鵬) 의원 등이 리드하던 당시의 국회는 초선의원인 윤대통령을 부각할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4대 국회에 들어서서 윤대통령이 민주당 최고위원에 당선되고 안국동 자택에서 최고위원회가 자주 개최되었기 때문에 그와 접촉할 기회가 생겼다.

    최고위원이었던 윤대통령은 민주당 내 구파에 속했지만 언제나 중도파로 구분 됐다. 신·구파가 극렬히 대립하는 국면이 벌어지면 중재를 담당하는 자리에는 으레 윤최고위원이 있었다. 7·29선거(5대 국회의원 선거)를 2개월 앞둔 어느날 나는 안국동에서 열리는 민주당 최고위원회에 불려갔다. 뜻하지 않게 최고위원 전원의 찬성으로 내가 민주당 공천자로 결정됐다는 것이다.

    그 후 고향인 철원(鐵原)에서 출마했으나 실패하고 나는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그러던 어느날, 자유당 시절 이기붕 국회의장 비서였던 전영배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시 전씨는 4·19혁명세력이 색출과 체포 대상으로 지목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이기붕 의장 내외가 돈암동에 있던 그의 집에서 잠시 은신했던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필사적인 도피생활을 하다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는 “김형! 나는 시내 모처에 숨어 있는데 이제 먹을 것도 떨어지고 허기를 못 참고 우는 어린아이들 보기에도 지쳤습니다. 이젠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막판 기로에 섰습니다” 하며 애원했다. 옛정을 생각해서 살려달라는 부탁이었다.

    그의 말은 자기 처가가 온양에 있으며 거기에 가면 양식을 살 돈을 구할 수 있는데 온양까지 가는 것이 문제가 되니 자기를 살려주는 셈치고 동행 해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나는 참으로 난처했다. 당시 이기붕씨의 비서를 돕는 것은 4·19혁명에 역행하는 행동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 친구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마음을 정하고 낚시꾼으로 변장해 그와 같이 온양까지 가기로 했다.

    온양에 도착해보니 해가 중천에 떠있어 사람들 눈을 피해 우선 낚시터에서 시간을 보낸 후 해진 후에 그의 처가로 가기로 했다. 낚시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경찰 지프가 낚시터에 나타났다. 우리는 놀라서 기절할 지경이 었다. 누가 밀고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피할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만 것이다.

    마침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경찰 한 사람이 “여기 김준하란 분이 계십니까?” 하며 예상외의 겸손한 태도로 필자를 찾았다.

    “납니다.” 대답이 끝나자 그 경찰관은 거수경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어찌된 일일까?

    사연을 알아보니 이날 아침 청와대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고 내 아내는 온양에 낚시 하러 갔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온양경찰서에 연락해 나를 찾아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청와대로 나오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전영배씨와 나는 청와대 덕분에 경찰차를 타고 당당하게 전씨 처가까지 갈 수 있었고 전씨는 처가의 도움을 받아 다음날 아침 나와 같이 상경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청와대에 갔더니 대통령은 나에게 공보비서관으로서 청와대 대변인을 맡아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나는 뜻하지 않은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매우 놀랐다. 하루만 기회를 달라고 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계로 복귀하려던 나는 뜻을 꺾고 청와대에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일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마음자세를 꼼꼼히 설명했다. 그때 그가 내세운 것이 ‘상식’이었다.

    “민주주의 종주국인 영국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헌법이 따로 없다. 그들은 상식을 헌법으로 대치하고 있다. 사고와 행동의 잣대를 상식으로 삼으면 나라일이건 개인 생활이건 정상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첫날 그의 가르침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통령이 공보비서관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과 상의했는데 민관식(閔寬植) 의원과 정성태(鄭成太) 의원이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언론계에서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 나에게 군인들의 쿠데타는 너무나 큰 짐이 아닐 수 없었다.

    “불상사가 발생하면 안 된다”

    5·16으로 바빴던 하루가 지나갔다. 나는 전날 밤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받은 친서의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또 하룻밤을 새웠다. 대통령이 일선 지휘관들에게 친서를 보내기로 마음을 정한 것은 자의가 아니라 장도영 혁명위원회의장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소장이 16일 아침 말한 바와 같이 수도 일원은 쿠데타군이 장악했다고 하지만 ‘미군의 출동설…’ ‘일선의 동요설…’ ‘후방의 동요설…’ 등으로 혁명주체들은 몹시 불안해했다.

    바로 그 시각 청와대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칼멜수녀원에 몸을 숨긴 장면 총리는 미국 대사관에 수시로 전화를 걸고 있었으며 마셜 그린 대리대사는 장면 총리와의 전화내용을 수시로 본국에 보고하고 있었다(이상은 미국 국무성에서 밝힌 내용). 매그루더 8군 사령관과 만난 제1군사령관 이한림(李翰林) 중장은 박정희 장군에 대한 불신(박정희 장군의 과거 경력에 대해) 때문에 확실한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사태의 귀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작성한 친서문안을 가지고 청와대에 출근해보니 유동준(兪東濬) 비서관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친서 초안을 만들어왔다. 대통령은 먼저 유비서관의 친서 초안을 읽어본 다음 내가 작성한 초안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대통령은 전에 없던 이상한 말을 했다. 비서실장과 나를 불러놓고 친서를 다시 작성해오라고 했다. 물론 사안이 중요했던 만큼 신중을 기하자는 뜻이었지만 문안을 다시 작성하라는 지시는 전례없는 일이었다.

    친서를 다시 작성해서 대통령에게 제출했을 때 대통령은 일부 내용을 수정했다. 원문에 “우리나라가 이 중대한 사태를 수습하는 데 불상사가 발생하거나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라는 문장에서 ‘불상사가 발생하거나’를 ‘피를 흘리는 일이 발생하거나’로 손수 고쳤다.

    후일 “피를 흘리지 말라는 대통령의 친서 때문에 5·16혁명이 성공했다”는 비난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비서실장과 나는 ‘피를 흘리는 일’이라는 구절에 이의를 제기했다. 먼저 외교관 출신인 이재항 비서실장은 ‘피’라는 말이 너무 강한 이미지를 준다며 이의를 달았다. 나도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대통령은 즉시 우리의 의견을 수렴해서 본인이 수정한 내용을 지워버리고 원문 그대로 회복시켰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일까?

    대통령이 수정하려 했던 ‘피를 흘리는’ 운운의 단어가 청와대에서 새나가 온 세상에 알려졌다. 40년이 흐른 오늘에 와서도 있지도 않은 ‘피를 흘리는’이라는 단어가 마치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전용되고 있는 것이다.

    유언비어는 그뿐이 아니었다. 1군사령관과 5개 군단장에게 보낸 대통령의 친서는 도합 여섯 통이 작성되었는데 모 일간지가 발행하는 월간지에서는 6통 이외에 별도로 한 통을 더 작성해 극비리에 모 사단장에게 전달된 것처럼 보도했다. 대통령의 친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전달했던 내가 아직도 생존해 있는데 말이다.

    말썽 많았던 친서 내용은 지극히 평범하고 훈시적이었다. 대통령은 친서에서 “작금 돌발적으로 발생한 사태에 처해서 우리 군의 행동은 국내외적으로 큰 파동을 주었으며 이 사태를 우리가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라고 5·16의 중대성을 강조하고 “더욱이 우리나라가 이 중대한 사태를 수습하는 데 불상사가 발생하거나 조금이라도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경고했다.

    끝으로 친서는 “귀하는 이 나라 국민을 생각해 이러한 면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군의 정신적인 안정을 도모해주셔야 할 것이며 휴전선 방위에 만전을 기하고 이 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귀하의 충성심과 노력이 발휘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또한 전국민에 대해서 이 중대한 사태를 수습하는 데 불상사가 없도록 걱정하고 진력할 것을 부언하는 바입니다”라고 강한 사태수습 의지를 다짐했다.

    어느 구절을 찾아봐도 쿠데타를 지지하라든지 반대로 쿠데타를 반대하라는 내용은 없다.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할 말을 한 것뿐이지 않은가. 그런데 장면 정권 당시 민주당 신파 소속으로 국회 국방위원장이었던 이모씨는 2001년 4월 모 월간지에 등장해 “윤대통령은 매그루더의 요청을 듣지 않고 비서 김준하(필자)를 전방1군 예하 부대에 보내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하지 않았어…” 운운하는 대담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이모씨는 5·16 당시 국내에 있지도 않았다. 후세 사가들은 편리한 대로 말하는 사람들의 증언은 귀담아 들어서는 안 된다.

    정신없이 5월16일 하루를 보내고 밤새워 작성한 ‘대통령 친서’도 정서가 끝났다. 17일 중에 일선에 가서 친서를 전달할 일만 남았다.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은 거의 완벽하게 쿠데타 세력에 포섭된 듯했다. 그가 쿠데타 전선 전면에 나섬으로써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쿠데타 세력이 ‘힘’을 과시하는 데 큰 도움이 된 듯했다. 문제는 5개 야전군단을 거느린 제1군사령관 이한림(李翰林) 중장이었다.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쿠데타의 성패를 가르는 요체인 것처럼 보였다.

    17일 청와대로 출근하자마자 이장군에게 전화를 걸고 오후 2시까지 김남 비서관과 내가 원주에 있는 1군사령부를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이사령관은 면담 장소로 자신의 군사령관 관사를 원했다. 김남 비서관은 군에 있을 때부터 이중장과는 절친한 사이였다. 김비서관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한림 중장이 쿠데타 소식을 확인한 것은 16일 새벽 3시30분 경으로 육군참모차장의 전화를 받고 알았다는 것이다.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나 1군사의 참모들은 쿠데타에 찬반 양론으로 갈라져 격론을 벌였다고도 했다.

    김남 비서관이 육군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장군은 자기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킨 데 대해 몹시 불쾌해했을 뿐 아니라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고 있는 군인들이 쿠데타 세력에 포함된 사실을 적시하면서 불만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아침 10시가 되자 두 대의 군대 지프가 청와대에 도착했다. 우리를 안내할 두 명의 중령이 따라왔다. 나와 김남 비서관은 이한림 중장과 민기식 최석 군단장을, 그리고 윤승구·홍규선 두 비서관은 다른 세 명의 군단장을 방문하도록 계획이 짜여 있었다.

    “박정희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청와대를 떠나기 직전 대통령은 서재로 나를 불렀다. “여보. 어제 당신도 박정희란 사람 보았지만 아주 간단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이한림 장군은 그를 잘 알고 있을 테니 이장군을 만나거든 박정희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고 오라고” 하며 신신당부를 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검은 안경을 쓰고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던 5월16일 아침의 박정희 소장에 대해 대통령은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던 모양이다.

    40년 전의 일이지만, 5월16일 다음날 태도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선의 군단장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위험도 하려니와 생사를 점칠 수 없었던 만큼, 솔직히 무섭기도 했다. 지프가 삼각지를 막 돌았을 때 나는 안내하던 장교를 보고 “여보 중령, 어차피 늦었으니 어디서 점심이나 들고 가면 어떻겠소” 하고 운을 뗐다.

    중령은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대답했다.

    중령과 우리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나는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심약한 아내가 걱정할 것 같아 일선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위험한 곳에 가게 된 이상 아내에게 꼭 한마디를 남기고 싶었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고 나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요. 지금 대통령 친서를 가지고 일선에 가는 길이오. 아무런 걱정할 필요없소.” 아내는 몸조심하라고 했다. 그 말 끝에 나는 농담조로 “여보 만일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 재가(再嫁)해도 괜찮아” 하고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내 나이 서른하나, 아내는 스물여덟 젊은 때의 일이다. 농담조로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후련한 것 같았다.

    지프가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하니 L19헬리콥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원주 1군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1시 반이 넘어서였다. 권총으로 무장한 대령 한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대뜸 하는 소리가 “이 비행기가 국군 비행기입니까? 혁명군 비행기입니까?”였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이자가 쿠데타를 찬성하는 사람이라면? 반대로 쿠데타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내 답변에 따라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 대령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여보 대령! 나는 대통령 특사입니다. 우리 나라 대통령은 어느 나라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까?”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고 대령은 약간 기가 죽은 듯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령관님께 안내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앞장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닌가?

    분명히 이한림 장군은 아침에 자기 관사에서 우리를 만나기로 약속한 바 있는데 대령이 안내하는 곳은 비행장 옆에 위치한 KMAG(미국 ‘고문단’ 막사)였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1군사령부의 불안한 분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김비서관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좀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이한림 장군은 큰방에서 혼자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친서를 전달하기에 앞서 1군단 산하 5개 군단에 대한 현황을 물었다. 이 장군은 “여기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서울 이야기나 해주시오” 했다.

    나는 16일 아침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장군이 청와대를 방문한 일부터 청와대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대통령께서 박정희 소장에 대해 자세히 알아 오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이장군은 “그가 우마노호네까 이누노호네까, 알고나 있습니까?” 하며 일본어를 섞어가며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우리말로 하자면 “박정희가 말뼈다귀인지 개뼈다귀인지 알고나 있습니까?”라는 뜻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한림 장군이 박정희 소장의 성분을 의심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박정희는 별것도 아닌데 왜들 야단이냐?’ 하는 식으로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16일 아침의 참모장회의에서 이한림 장군은 박정희 소장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장군과 막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 출입문이 열리면서 “메이 아이 컴인(May I come in)?” 하는 소리가 들렸다.

    1군사령관 이한림 중장과 회담을 마치고 L19편으로 2군단장 민기식 장군을 만나러 춘천으로 향했다.

    1군사령부가 있는 원주와 춘천은 자동차로 30∼40분 거리다. 1군사령관으로부터 “여기(1군)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장담을 들은 것이 한 시간 전의 일이었건만 2군단에 도착한 순간 이한림 장군의 장담이 얼마나 허무맹랑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민기식 군단장은 KMAG이 아닌 군단장 관사에서 만나자고 했다. 군단장관사는 소양강을 굽어볼 수 있는 별장과 같이 호화로웠다.

    민군단장은 이한림 1군사령관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군단장은 우리를 만나기가 무섭게 장면 정부를 터놓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여보, 김형.”

    그는 나를 김형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장면 정부는 안 됩니다. 신·구파가 매일 싸움질만 하고. 그리고 횃불 데모가 다 뭡니까?”

    “서울 시내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놈이 있다면서요?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장면이가 약해서 안 됩니다”라고 막말을 했다. 명색이 국군통수권자에 대해 “장면이가”라고 반말로 운운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정치색이 짙은 군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면이가 약해서…”

    숨쉴 사이도 없이 민장군이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돌연 노크도 없이 덜컥 하고 출입문이 열렸다. 철모를 쓰고 권총으로 무장한 ‘원 스타’ 장군이 양해도 구하지 않고 들어왔다. 나는 무례한 ‘원 스타’ 장군을 나무랄 용기조차 없었고 무슨 불상사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만 들었다.

    “나 사단장 박춘식(朴春植)이라고 합니다.” 그는 거수 경례를 하고 난 다음 큰 소리로 자기 소개를 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나 박춘식은 누구의 명령도 안 듣습니다. 나는 혁명을 지지합니다.”

    군통수권자인 장면 총리를 가리켜 “장면이가” 운운하는 군단장이 있는가 하면 직속 상관인 군단장 바로 앞에서 “나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겠다”고 장담하는 사단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캄캄한 절망감에 빠졌다. ‘이제 우리나라 군인들이 막가는 길로 들어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춘식 사단장이 소란(?)을 부리자 민기식 군단장은 “나는 저 사람과 생각이 같습니다” “저 사람과 생각이 똑같다니까요” 하고 두 차례나 되풀이해 말했다.

    “여기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던 한 시간 전 이한림 1군사령관의 모습이 또다시 내 눈에 아른거렸다. 1군사령부의 최단거리 직속군단이 바로 2군단이 아닌가?

    내가 내민 대통령 친서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민군단장은 박춘식 사단장을 내보낸 다음 또다시 장면 정권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김남 비서관이나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사태를 큰 사고 없이 수습해달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쿠데타가 헌정을 중단시키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상명하복을 생명으로 하는 군대 조직까지 허물어버린 것이 아닌가?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민기식 군단장과 나 사이에는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장면 정권 당시 대통령이 민정 시찰을 하기 위해 민기식 장군의 관할 지역을 통과한 일이 있었다. 민장군은 나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직할공병대를 시켜 군사도로를 완전 보수했으니 대통령에게 자랑 좀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어렵고 해서 지프를 타고 가면서(지프에는 대통령과 민장군 그리고 내가 타고 있었다) “이 근처의 도로가 다른 곳에 비해 정돈이 잘된 것 같다”고 슬며시 민장군 편을 들었다.

    대통령은 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금세 알아차린 듯했다. 국회의원 선거를 몇 번이나 치러본 대통령이 아닌가.

    “지역 책임자가 자기 관할을 잘 챙기니까 그럴 수밖에.”

    대통령의 말에 민장군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 후부터 민장군은 나를 보면 “김형”이라 불렀다.

    또 하나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민기식 장군은 예편 후 국회로 진출해서 선수(選數)를 쌓아가다가 한때 공화당 공천에서 탈락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지 10여 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5·16 이후 한번도 연락이 없었던 그가 느닷없이 만나자고 연락해왔다. 나를 만나자는 이유는, 그를 중상하는 측에서 5·16 당시 내가 민군단장과 대담할 때 박춘식 사단장은 “쿠데타를 지지한다”고 태도를 분명히 했으나 민장군은 “나는 저 사람과 같다” 운운하는 정도로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며 문제를 삼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청와대에 증언을 해달라”는 것이 그의 부탁이었다. 웃기는 얘기였으나 그가 딱해 보여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인 유혁인(柳赫仁)씨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민씨는 결국 공천에서 탈락했는데 그 이유는 5·16 당시의 미온적 태도(?) 때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건에 연루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민기식 군단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나는 또다시 L19편으로 경기도 일동에 있는 5군단장 최석(崔錫) 장군을 만나러 춘천 군용 비행장을 출발했다.

    최석 장군은 나와 김남 비서관을 군단장실로 안내했다. 그와 대좌하는 순간 나는 군단장 옆자리 벽면에 서울 지도가 걸려 있고 지도에 빨간 펜으로 부대 배치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처음부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최장군은 이한림 장군이나 민기식 장군과는 달리 외모나 행동에서 직업군인 냄새를 물씬 풍겼다. 그는 우리가 좌정하자 약간 흥분된 어조로 군인의 본분론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군인은 국토를 방위하는 것이 본분의 전부”라고 말하고 “군인이 본분 이외의 딴길로 들어서는 것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시원시원한 태도였다. 최장군은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정희 소장의 쿠데타 행위는 찬성할 수 없으며 자신은 그들을 진압할 계획을 이미 세워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어서서 서울 지도를 가리키면서 “미아리에 몇 연대” “청량리에 몇 연대” 하는 식으로 예상되는 부대배치 상황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나갔다.

    두 시간 전 “누구의 명령도 안 듣고 쿠데타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던 박춘식 사단장과는 전혀 반대되는 태도였다. 목전에 인민군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의 군단장과 사단장이 이토록 상반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춘천에서 경기도 일동으로 연결되는 전선은 수도 서울과 최근접 지대인 중부전선이다. 그 선이 무너지면 서울은 한 시간 거리가 아닌가?

    “반란군 진압 출동명령 내려달라”

    5·16 당일 미 8군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이 “일선에서 4만명만 동원하면 서울에 들어온 3600명의 반란군을 소탕할 수 있다”고 대통령 앞에서 공언한 일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지를 일선의 군단장들을 만나면서 실감했다.

    최군단장은 “빨리 서울에 가서 대통령이 군단에 출동 명령을 내리게 해달라”고 우리에게 부탁까지 했다. 민기식 장군이나 최석 장군은 우리나라 중부전선 방위의 두 기둥이 아닌가.

    적전에서 그들을 분열시킨 쿠데타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석 장군은 대통령 친서를 다 읽고 나서도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만일 당시 북한군이 중부전선을 타깃으로 군사행동을 일으켰다면 어떠한 사태가 벌어졌을까? 쿠데타를 강행한 정치 군인들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귀경하던 헬기 안에서 1군사령관 과 군단장들의 대화 내용을 자세히 메모했다. 헬기가 여의도 공항에 도착한 것은 저녁 7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야간통금이 실시되고 있어 청와대로 가는 길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청와대에 도착해보니 박정희 소장이 대통령과 우리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서 헬기 안에서 메모한 대로 보고를 시작하려는 순간, 느닷없이 의전비서관이 들어와서 “최석 군단장이 급한 일이라고 하면서 김비서관과의 통화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나가서 전화를 받아보라”고 했다.

    전화기를 들어보니 약 두 시간 전에 헤어진 최석 장군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 최석입니다. 아까 내가 말한 것 전부 취소하겠습니다.”

    “비서관님. 꼭 부탁합니다. 내가 말씀드린 것 전혀 없었던 일로 해주십시오.”

    최장군은 “나 최석이는 혁명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꼭 그렇게 보고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뒷머리에 누군가 권총을 들이대고 있을 법한 환상이 머리에 떠올랐다. 명색이 장군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돌변할 수도 있는 것일까?

    서재로 돌아와서 나는 최석 장군이 부탁한 대로 대통령과 박소장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말뼈다귀 개뼈다귀…” 운운은 아예 보고에서 제외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최석 장군은 나와 헤어진 직후 혁명을 지지하는 부하들에게 구속돼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다.

    윤승구 홍규선 두 비서관이 방문했던 3개 군단장들은 거의 혁명을 지지하는 쪽으로 보고가 됐다. 그러나 윤·홍 두 비서관이 만난 박임항 김웅수 임부택 군단장 가운데서 김웅수 장군만 쿠데타에 미온적 태도를 취했다고 하는데 김장군은 그 후 서울로 연행되는 신세가 됐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친서 문제는 5·16 이후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끝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내가 소상하게 친서의 경위를 설명하는 이유도 독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고 싶기 때문이다.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들이라고 하지만 5·16 쿠데타는 군인의 본분을 무참하게 짓밟고 말살해버렸다. 그리고 군대를 지리멸렬 상태로 분열시켰다.

    미국의 눈치를, 그리고 혁명군의 눈치를 살피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것이 5·16 당시 일선 장군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전군에 침투해 있던 쿠데타 세력의 무력 행사만이 일선 장군들의 행로를 결정한 길잡이가 된 것이다.

    박정희 소장의 말대로 목숨을 걸고 일선을 순회하며 전달한 대통령의 친서는 글자 그대로 친서로 끝났을 뿐, 힘없는 대통령의 친서가 혁명의 향방을 좌우한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내 보고를 받고 나서 박정희 소장은 약간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수고가 많았습니다”라고 인사했다. 박소장의 인사 한마디가 목숨을 건 친서 전달의 성과라면 성과라고나 할까?

    우리가 일선 군단장들을 만나고 다니던 17일. 칼멜수녀원에 숨어 있던 장면 총리는 수시로 미국대사관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며 마셜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시시각각으로 본국에 대화 내용을 보고하고 있었다는 것이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밝혀졌다.

    장총리는 “유엔군 사령관이 책임지고 상황을 처리해야 한다”고 주한 미국대사관에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 국무성은 렘니처 합참의장이 16일 밤 매그루더 대장에게 보낸 전문 내용과 똑같은 내용의 전문, 다시 말해서 “장면 총리를 위해 싸운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17일 아침 마셜 그린 대리대사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 국무성은 “장면 정부가 상처 없이 회복될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상황이 명확해질 때까지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자세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붕괴될지도 모르는 장면 내각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장면 정권에 대해서는 최후 통첩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때 이미 장정권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5·16 쿠데타의 미스터리는 앞으로 더욱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나는 이 순간 누구를 비난하거나 변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한국군의 지휘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고 원조 형식을 통해 국가 재정까지 거의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던 미국의 국방성와 국무성이 5·16을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대처했는지에 대한 진실이 차츰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5·16이 ‘어떻게 해서’ 또는 ‘누구 때문에’ 성공했는가의 문제는 시간을 두고 해답을 구해야 할 것 같다.

    “이한림은 지휘권을 잃었다”

    일선 방문을 마치고, 대통령과 박정희 소장 앞에서 결과보고도 끝났다. 17일 밤 8시30분경 나는 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났다. 박정희 소장 앞에서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대통령에게 추가로 보고했다. 이한림 1군사령관이 박정희 소장을 불신한다는 것, 민기식 군단장이 장면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것, 최석 장군은 민장군과는 정반대로 언제든 명령만 떨어지면 쿠테타 진압에 나설 것 같다는 등등. 보고 들은 대로 보고했다. 그리고 나는 야전군에 대한 나름의 결론도 진언했다.

    첫째, 1군사령관인 이한림 장군은 “1군은 아무 걱정이 없다”고 호언하고 있으나 그는 예하 군단장에 대한 지휘권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했다는 것.

    둘째, 군단장들도 예하 사단장에 대한 확고한 지휘권을 확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처신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다는 것.

    셋째, 군 내부는 혁명 지지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일촉즉발의 위험이 감지되었다는 것.

    넷째, 현재 군의 상황은 누구도 지휘할 수 없는, 다시 말해 미8군사령관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지휘권을 상실한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고 보고했다.

    나는 인민군을 눈앞에 둔 야전군이 지리멸렬 상태에 빠진 것으로 판단했다고 내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대통령은 내 보고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면서 “장면 총리가 빨리 나와야 할 텐데…” “아마 빨리 나오게 될는지 모르지” 하며 약간의 기대를 거는 것 같기도 했다. 전날 밤 자신이 중앙방송을 통해 방송한 데 대해 가냘픈 희망을 가진 듯이 보였다.

    내가 보고를 끝내고 청와대 본관을 떠날 무렵 경비원이 달려와서 이상한 말을 했다.

    “대변인께서 일선에 가신 동안 성명을 밝히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수차례에 걸쳐 전화가 왔다”는 것이며 “내일(18일) 아침 10시에 꼭 대화할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신문기자가 전화를 한 것으로 간단히 생각하고 집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 10시, 문제의 사람이 또 전화를 했다고 하기에 수화기를 들어보니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주요한 부흥부장관의 전화였다.

    “아니,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대뜸 먼저 말을 걸었다.

    “김형! 그건 말할 수 없고… 우리를(장면 내각의 각료를 뜻하는 듯했다) 살려줄 사람은 당신뿐이야.”

    이어 그는 “김준하씨! 우리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당신은 우리를 꼭 살려줘야 해”라고 덧붙였다.

    처참하다고 할까, 비참하다고 할까. 나는 그 순간 필절로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요한 장관…. 그분은 최남선·이광수씨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문호이기도 했다. 그분은 내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시절 논설위원으로 동아일보에 함께 있었다.

    그는 민주당 신파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정치문제, 특히 민주당이 관련된 논설을 쓸 경우에는 반드시 나를 논설위원실로 불렀다. 현장 출입기자의 의견을 참조해 공정한 논설을 쓰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동아일보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잘못 쓰는(오식 사건) 바람에 1개월간 정간 처분을 받은 일이 있었다.

    한 달 후 복간되던 날 주요한 논설위원이 ‘복간에 즈음하여’라는 사설을 썼는데 신문이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경무대(청와대 전신)에서 전화가 왔다. “만일 그 사설을 실으면 정간 취소를 다시 취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였다.

    신문사는 소동이 벌어졌다. 마침내 사설을 다시 쓰기로 결정했다.

    주요한 논설위원은 편집국에 앉은 채로 10분도 걸리지 않아 “교육 5개년 계획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

    누가 보더라도 그 사설은 명문 중에 명문이었다. 사설에서 지적한 내용은 문교부장관도 감히 생각할 수 없을 만한 새로운 지식과 방향이 제시되어 있었다. 그분은 그만큼 박식하고 총명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전화 수화기에서 주장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김준하씨! 우리 목숨을 구해줄 사람은 당신과 윤대통령뿐입니다. 대통령께서 방송을 통해 우리보고 빨리 나오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혁명군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혁명 군인들이 방송국에 직접 나와 그들의 목소리로 우리를 해치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해야 합니다. 이 일이 꼭 실현되도록 당신이 애를 써주어야 하겠습니다. 대통령이 혁명 군인들을 부르도록 꼭 해주셔야 합니다.”

    나는 주장관에게 또 물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다른 장관들은 모두 무사하십니까?”

    주장관은 대답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말할 수 없고 우리끼리는 서로 연락하고 있으며 모두 건강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열두 시 정각에 또 전화할 테니 그때 결과를 알려달라”는 것이다.

    “옛정을 생각해서…” 운운했던 주장관의 말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는 상태에서 나는 대통령을 만나 주장관과 나눈 대화 내용을 그대로 보고했다.

    대통령과 주장관은 예전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대통령은 민주당 구파에 속했고 주장관은 신파의 핵심 멤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비록 파벌은 달리했지만 모두 온건파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신·구파가 격하게 대립하는 일이 생기면 서로 이해시키고 타협을 이루도록 중간 역을 담당했던 사이이기도 했다.

    내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가슴 아픈 표정으로 서재 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말이다. 숨어 있는 장면 총리를 빨리 나오게 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을 기울였던 대통령으로서 이보다 좋은 찬스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대통령은 그렇게 무겁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좀체 이해할 수 없었으나 시간이 조금 흐른 다음 대통령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바로 이틀 전 5월16일 아침,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계엄령 선포 인준과 혁명지지 성명을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던 대통령이 아닌가.

    이제 와서 그들(박정희 소장 등 쿠데타 세력들)에게 장면 총리와 각료들의 목숨을 보장하라는 성명을 육성으로 발표하라고 부탁하는 것은, 그것을 간청한다는 것은 대통령으로서는 체면에 관계되는 문제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빚을 졌으면 빚을 갚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닌가? 만일 박정희 소장이 대통령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 대가로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해달라고 하면 어찌할 것인가? 대통령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마침내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장도영 혁명위의장을 불러달라고 했다. 잠시 후에 장도영 의장은 박정희 부의장과 같이 청와대로 왔다.

    하나 둘 나타나는 각료들

    대통령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장도영 의장은 “좋습니다. 청와대에서 마음대로 성명서를 작성해주십시오. 한 자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방송하겠습니다” 하고 즉답했다.

    그들도 장총리 문제로 무척이나 골치가 아픈 모양이었다. 대통령은 “그럴 것 없이 성명서는 그쪽에서 기안을 하되, 다만 절대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말을 꼭 넣어달라”고 못박았다.

    장도영 혁명위의장은 곧바로 중앙방송을 통해서 대통령과 약속한 대로 장면 정부 인사들에게 절대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전국에 방송했다. 국민들은 군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나는 주요한 장관과의 약속을 지켜 더없이 기뻤다. 주장관은 후일 “김형, 그때 참 고마웠어” 하고 인사를 잊지 않았다.

    방송이 나간 이후 꼭꼭 숨었던 국무위원들이 속속 중앙청에 나타났다. 장면 내각의 마지막 국무회의가 18일 오후 열린다는 보고를 받고 청와대는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다.

    5·16이 발생하고 3일 동안 주마등처럼 흘러간 가지가지 사건들이 옛이야기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조를 쓰러뜨렸던 과정과 왕건의 쿠데타, 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내몰았던 쿠데타는 5·16쿠데타와 어떻게 달랐을까? 같은 방법이 아니었을까? 꿈에서나 일어날 법한 생각을 이리저리 해보았다.

    속속 정보가 들어왔다. 조재천 법무장관은 부산 여행중 여관에서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고, 부총리격인 오위영 무임소장관도 자택에 연금됐다가 헌병들에게 압송됐다는 것이다.

    칼멜수녀원에 몸을 숨겼던 장총리는 그의 운전사로 인해 거처가 드러나 장도영 혁명위의장으로부터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받고 중앙청에 모습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기타 국무위원들은 헌병들에게 끌려오기도 하고 친구들의 설득으로 나온 사람도 있고 방송을 듣고 자진해서 중앙청으로 나왔다는 사람도 있었다.

    장내각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에서 역사적인 마지막 국무회의를 중앙청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그런데 개인 일도 아니고 나라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아무리 군인들이라 해도 좀체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었다.

    그것은 쿠데타를 감행한 혁명위원회가 첫날 ‘포고’를 발동해 장면 정권을 인수하고 민·참의원을 해체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을 뿐 아니라 전 국무위원과 정무위원의 체포를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국무회의나 헌법까지도 공중 분해한 것으로 간주했던 것인데, 새삼스럽게 공중 분해된 국무회의를 열어 국사(?)를 결정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됐다.

    그러나 총칼로 헌법을 무찌른 사람들에게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찌됐건 장총리가 주재한 이날의 국무회의는 혁명 당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선포된 비상계엄령을 헌법 제 72조에 의거해 추인하기로 결의하고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느껴 내각 총사퇴를 결의했다.

    비운의 장면 내각은 이로써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각의를 마치고 장총리는 청와대로 대통령을 만나러 왔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현관에서 나는 장총리를 직접 영접했는데 총리는 나에게 “여보 나는 좀 쉬어야겠어”라고 했다. 장총리는 대통령에게 “심려와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고 인사를 했고 대통령은 진심으로 그를 위로했다.

    대통령은 관례를 깨고 현관까지 그들을 배웅하면서 작별을 아쉬워했다. 나는 두 분이 악수하며 헤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인생이 더없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이승만 정권과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두 노정객이 젊은 군인들의 군화에 짓밟혀 허무하게 ‘꿈’을 접는 모습이 한없이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장총리는 그 후 순화동 자택에서 칩거하면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그런데 여기서 꼭 후세 사가를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장면 총리는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이라는 회고록에서 “내가 사임을 결정하게 된 동기는 윤대통령의 태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윤대통령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태도를 처음에 몰랐으나, 그가 쿠데타를 지지할 뿐 아니라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쓰고 있음을 알고는 쿠데타가 진압된다는 희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참모총장 장도영까지도 쿠데타에 가담하게 되고 보니 총리 사임은 필연적 귀결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장총리를 존경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의 책임을 전적으로 윤보선 대통령에게 돌리는 그의 태도에는 동조할 수 없다는 것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의 나의 믿음이다.

    혁명 전야의 어지러웠던 사회상은 모두 접어두더라도 5·16 쿠데타 다음날 나로서는 목숨을 걸고 장총리가 믿고 있던 1군사령부와 각 군단장들을 직접 만나고 다녔다. 그것도 대통령 특사로 말이다.

    무너진 군 통수권

    내가 만난 일선의 고위 장성들은 장면 정권의 실정과 무능에 대해 모두 등을 돌린 것 같았다. 군 조직은 와해되고 무너지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독단적인 판단이었는지 모르나 장총리가 태산같이 믿고 있던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이나 또 그렇게도 의지했던 매그루더 미 8군사령관이 명령을 내리고 싶어도 그 명령을 들을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국군통수권을 가진 장총리는 16일과 17일 이틀에 걸쳐 인편을 통해, 또 전화를 통해 미 대리대사 마셜 그린과 연락을 취했으면서도 한국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던 8군사령관에게 반란군의 진압을 왜 명하지 못했던가? 나는 지금도 의문을 지울 수 없다. 헌병대에 의해 5·16 새벽 포위되어 꼼짝하지 못하고 포로(?)신세였던 대통령이 무슨 힘이 있어서, 또 누구에게 쿠데타를 분쇄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단 말인가? 또 가령 명령을 내렸다고 가정했을 때, 그의 명령을 수행할 사람이 어디에 얼마나 있었겠는가?

    고인들을 위해 참으로 영원히 덮어두고 싶은 사실이지만 이 지면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17일 장총리가 인편으로 마셜 그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 초조해진 장총리는 대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당시 장총리가 보낸 편지엔 “미국 정부는 우리 정부를 지지하고 있습니까? 매그루더 장군이 쿠데타군을 진압할 것인지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이러한 점이 분명해야 현 사태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 미국에서 취재한 방송사에 의해 알려졌다.

    “‘한국인의 힘으로 알아서 하라’는 것이 장총리 질문에 대한 미국 대사 마셜 그린의 최종 답변이었고, 장총리는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는 사실도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문화방송(MBC)에 의해 알려진 내용의 전부다.

    과연 누구 때문에 5·16 반란군이 진압되지 못했을까?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승자의 그늘에 가려진 진실을 후세 사가에게 맡기자고 제안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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