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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경상도 경주땅 對馬島를 생각한다

  • 신영길 < 한국장서가협회 회장 >

경상도 경주땅 對馬島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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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선사시대 부터 한반도 동남쪽 해안에서 실종된 물건은 해류를 따라 자연스럽게 대마도로 흘러들었다. 남해를 흐르는 해류가 한반도 동남쪽과 대마도를 이어준 ‘다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해류 때문에 한반도의 문화는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의 논농사(稻作)는 야요이(彌生)시대 한반도에서 전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도작은 단순한 기술만으로는 전파되지 않는다. 도작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야만 전해질 수가 있다. 도작 문화가 전파됐다는 것은 고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대마도를 거쳐 규슈 지역으로 집단 이주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대마도는 고대 이래 근세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이어주는 중계지였다.

삼국 통일을 달성해 가던 시절 신라는 왜에 대해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대마도에 있는 천연 요새 가네다성(金田城)이다. 서기 663년 백제 부흥군을 후원하려고 온 일본군이 백강전(白江戰·백마강 전투)에서 전멸했다. 그러자 일본은 665년 대마(對馬)와 이키(壹岐)·규슈·봉화(烽火)에 변방 수비대인 ‘방인(防人)’을 두었다. 그리고 이듬해 백제에서 망명해온 달솔(達率·백제의 벼슬 이름) 억례복류(憶禮福留)와 사비복부(四比福夫)를 규슈 대재부(大宰府)로 파견해, 대야(大野)와 연(椽)에 두 개의 성을 쌓게 했다.

그리고 2년 후 대마도 천해만(淺海灣)에 가네다성을 쌓았다. 가네다성은 백제산성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들어졌다. 한반도를 향하고 있는 표고(標高) 274m의 바위산을 이용해 지어진 이 산성은 그야말로 천연 요새다. 가네다성이 완성됨으로써 대마도는 신라군의 공격에 대비한 최전방 방어선이 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 문종 3년(1059) 대마도로 표류해온 고려인을 고려로 압송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 그 후에도 거듭된다. 문종 36년(1082)에는 대마도에서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공민왕 때 萬戶벼슬 내려

고려와 대마도가 정식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공민왕 17년(1368)이다. 이때 대마도주는 고려로부터 만호(萬戶) 벼슬을 받은 처지에서 사신을 파견했고, 고려는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대마도로 파견하였다. 같은해 11월 대마도 만호 숭종경(崇宗慶)이 보낸 사신이 고려에 왔기에 고려 정부는 쌀 1000석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주는 고려의 지방 무관직인 만호 벼슬을 받았고 쌀까지 얻어가는 처지였던 것이다.

일본 헤이안(平安)시대부터 가마쿠라(鎌倉)시대 초까지 대마도의 실권자는 아비류(阿比留) 집안이었는데, 1246년부터는 종(宗·처음에는 惟宗) 집안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니까 고려 문종으로부터 만호 벼슬을 받은 이는 아비류 집안이고, 공민왕으로부터 만호 직함을 받은 것은 종(宗) 집안인 것이다.

고려 말부터 대마도와 일본 근처에 있는 이키시마(壹岐島)·송포(松浦) 등지에서 발호한 왜구가 한반도 남해안을 약탈하고 때로는 육지 깊숙이 침입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대마도주 종(宗)씨와 규슈의 탐제(探題) 이마가와(今川)·오우치(大內) 등 호족에게 사신을 보내, 왜구를 금압(禁壓)하고 고려와는 평화적으로 교역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 말 왜구가 횡행하게 된 근본 원인은 1218년과 1274년 두 차례에 걸친 여원군(麗元軍)의 일본 원정이 있은 후, 일본과 고려·중국의 통교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일본은 남북조(南北朝)의 쟁란(爭亂)에 빠져 있어, 규슈와 대마도 등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했다. 이곳에 사는 변방민들은 부족한 주·부식을 획득하기 위해 왜구로 나선 것이다. 더욱이 대마도주 종정무(宗貞茂)가 죽고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정성(貞盛)이 집권했는데 종정성은 너무 어려 왜구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러한 왜구의 발호에 대해 고려 조정과 조선 조정은 회유와 무력 응징으로 대응했다. 조선 왕조는 왜구 근절에 훨씬 능동적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은 ‘이선치선이무제도(以善治善以武制盜·착하게 행동하면 좋게 다스리고, 도적질을 하면 무력으로 다스린다)’의 대책을 내놓았다. 조선 태조 5년(1396) 대마도인 구륙(六)이 선박 60척과 왜인 수백 명을 이끌고 투항하자, 조선 조정은 구륙에게 ‘선략장군용양순위사행사직 겸 해도관민만호(宣略將軍龍巡衛司行司直兼海道管民萬戶)의 관직을 제수했다. 이듬해 구륙이 등륙(藤六)으로 이름을 바꾸자, 다시 종4품인 ‘선략장군행중랑장(宣略將軍行中郞將)’이란 관직을 제수했다.

태조 6년(1397)에 왜구의 한 우두머리인 임온(林溫)이 병선 24척을 이끌고 투항하자,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제수했다. 이 일을 계기로 망사문(望沙門)·곤시문(昆時門)·사문오라(沙門吾羅)·삼보라평(三寶羅平)·현준(玄准) 등 대마도에 거주하는 많은 왜구 두목이 투항해 관직을 받았다. 이러한 투항자 중에는 평원해(平原海)·등차랑(藤次郞)·간지사야문(看智沙也文)처럼 의술이나 조선술·제련술이 뛰어난 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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