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生이 불가능한 사회 좌우 이념논쟁은 계급사회인 자본주의체제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대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좌파건 우파건 자신의 정체와 실제 활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야 한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열변을 토하듯이 ‘이념과 정책으로 말하는 정치’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조의 자유, 다양한 사회세력들의 정치세력화가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한반도의 특수성이 여전하며, 여기에는 한반도의 주요 갈등 축인 지역대립구도와 분단구도가 뒤얽혀 있다.
인간사회에서 말이 좋아 상생(相生)이지 그것의 실현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사회처럼 대립과 갈등의 구도가 복합적으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경우 ‘윈-윈전략’이니 ‘포지티브섬 게임’이니 하는 것은 십중팔구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기는 측이 있으면 지는 측이 있는 것이 인간사회의 원리인데, 한국은 지나치게 치열한 대결사회로 치닫고 있다. 실제로 이념논쟁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승패는 더욱 명확해지고 있으며, 승패에 따른 차이도 하늘과 땅처럼 벌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류가 지혜를 모으고 실천을 통해 공멸이 아닌 상생의 보편적 가치를 향해 나아가자는 열망은 어디에서나 소중하다. 한국은 특히 그렇다. 상극을 해소해 인간의 얼굴을 한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열망이 한국만큼 절실하고 소중한 곳도 없을 것이다. 지역대립구도, 분단구도, 외세의 부단한 압박이 중첩적인 무게를 발휘하는 사회인 만큼 그 열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노선의 모색이 긴급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타협과 절충의 미덕에 기반한 ‘중도노선’을 대안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정치적 의미, 이념적 의미에서 중도노선일 뿐더러, 다수 대중의 경제생활 양상, 강대국들에 에워싸인 지정학적 위상을 고려한 새로운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등 제반 영역에서 중도노선의 구축을 대안으로 삼자는 생각이다.
첫째, 정치적으로 중도노선이 다수파이면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와 더불어 보수, 진보가 나름의 목소리와 입지를 갖는 정치지형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다. 한국정치의 부정적 면모들을 청산하지 못하면 한국사회는 절대 살맛 나는 공동체를 꾸릴 수 없다. 선진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가 지금과 같은 소모성과 약탈성을 넘어 일대 쇄신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대 수구반동’, ‘친북 대 냉전세력’의 대립구도는 한국의 정치지형을 과거로 되돌리는 불행한 이념논쟁이다. 권력투쟁에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이념논쟁이 동원되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그것도 원색적인 색깔론이 아니라 내용과 형식에서 건전성을 확보하는 형태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 사실 개혁이 가장 아쉬운 영역이 바로 정치다.
둘째, 다수 대중의 경제생활 목표를 중도적 생활로 정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지나치게 일류주의와 물질적 성장주의에 집착해 왔으며, 지금도 그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사실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는 상당한 정도의 물질적 여유를 보장할 수 있는 부(富)를 상징한다. 한국사회는 이것을 두 배, 세 배 늘리는 데 골몰해 있지, 그 정도의 규모로 여유롭고 의미있는 생활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은 궁색한 것보다 낫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물질적 풍요가 수단이 아니라 목표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문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정도의 물질적 여유를 바탕으로 얼마만큼 평화롭고 가치있는 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때가 왔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경제적으로 다수 대중이 중도적 생활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재 급진전되고 있는 양극화를 막고, 중간층을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 ‘환란’ 이후 추진한 김대중 정부의 여러 정책 탓으로 인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졌다.
여기서 인간사회를 볼 때 분배를 중심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의미를 갖는다. 세계적·지역적·일국적 수준에서 분배가 열쇠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생산력이 증가하는 사회체계이기 때문에 인류 전체에 필요한 물질적 가치가 줄어들 수 없다. 그러나 세계는 소수의 선진국과 다수의 후진국으로 나뉘어 있다. 세계의 여러 지역을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아시아를 예로 들자면, 일본이 너무 많이 갖고 있으며 다른 다수의 국가들은 궁핍한 상황이다.
한 국가의 이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국사회를 보자. 소수의 상층과 다수의 하층으로 양분되어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영호남 대립구도와 남북 대립구도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한쪽으로 너무 쏠렸으니 좀 나누어달라는 분배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는 반(半)주변, 즉 중간지대를 다시 회복하는 과제이고, 지역적으로도 극단을 최소화하는 일이며, 한 국가적으로는 중간층을 두텁게 하는 과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양극화 현상을 반전시키고 중간층 복원을 실현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며, 정치도 이런 측면에서 전개해야 한다. 모든 수준에서 중간이 두터워지고 건실해져야 하는 것이다. 총론적으로 말해서 개혁의 목표도 여기에 있다.
사실 한국기업들은 일류를 지향하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업뿐만 아니라 대학도 일류를 지향하며, 그런 일류주의가 사회 전체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하지만 현실은 기업이건 대학이건 세계일류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그런데 턱없는 일류지향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의 팽배가 진짜 일류로 나아가는 데 장애가 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내부의 왜곡된 일류의식이 진정한 일류로 발전해가는 것을 저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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