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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女帝’ 캐서린 그레이엄

  • 김택환언론학 박사 < 조지타운대 방문학자 >

‘언론女帝’ 캐서린 그레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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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은 1946년 장인의 권유로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으로 취임한다. 초기에는 발행인으로서 성공적인 길을 걸었다. 특히 1954년 조간 경쟁지였던 ‘헤럴드’를 인수·합병함으로써 워싱턴 5개 신문사 중 만년 4등의 꼬리표를 떼고 선두 ‘이브닝스타’를 앞지르게 되었다. 플로리다 TV방송국도 인수해 경영 다각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필립은 조울증에 시달렸고, 자사 여기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1963년 8월3일 권총자살로 48세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자서전에 “남편 필립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노라”고 적고 있다.

캐서린은 남편의 죽음으로 “워싱턴포스트를 매각하든지, 다른 사람을 내세우든지 혹은 자신이 직접 뛰어드는 것” 중 한가지를 택해야 하는 운명을 맞는다. 그녀는 직접 맡기로 결심하고 1963년 9월20일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으로 취임한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채 헤어나기도 전에 발행인의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행사해야 했던 그녀는 자서전에서 “눈감은 상태에서 일을 시작해 눈을 뜨니 어느 정도 발을 디디고 정착해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녀에게는 전통적인 가정주부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발행인으로 변신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그녀는 여러 스승과 조언자를 구했다. 뉴욕의 법률가인 F. S. 비비에게는 사업에 관한 자문을, 당시 뉴욕타임스 워싱턴 총국장이던 제임스 레스턴과 유명한 칼럼니스트인 월터 리프만에게는 저널리즘에 대해 자문했다. 캐서린은 죽기 전까지 빌 게이츠,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 비펫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조언자와 친구를 만들어가면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해갔다.

캐서린은 발행인이 되기로 한 자신의 첫 결정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특히 브래들리라는 걸출한 인물을 편집장으로 영입할 수 있었던 점을 펜타곤 자료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보다 더 높이 평가했다. 그가 있었기에 펜타곤과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가 가능했으며, 오늘날의 워싱턴포스트와 자신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주로서 그녀가 능력 있는 언론인을 어떻게 아끼고 평가했는지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캐서린의 장례식에서 브래들리의 추도사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장면이 전 세계 언론에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다. 위대한 편집국장으로서 브래들리의 삶은 그의 저서 ‘A good life’에 기록되어 있다. 캐서린은 브래들리에게 매료된 가장 큰 이유로 그의 강직함과 건실한 보도 태도, 기자로서의 훌륭한 품성을 들었다.

워싱턴포스트의 펜타곤 문서와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만큼 미국 정치와 저널리즘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도 없을 것이다.

펜타곤 사건의 핵심 쟁점은 국민의 알 권리를 대신하는 언론의 자유와 기밀보호라는 정부의 권리가 충돌한 것이다. 펜타곤 사건은 뉴욕타임스가 국방부 비밀문서인 베트남 전쟁 관련 펜타곤 보고서를 입수·보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당시 닉슨 정부는 법원을 통해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중단시키는 조치를 취한다. 하지만 워싱턴포스트는 그 내용을 기어이 보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때 보여준 결단력

물론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법률 고문들은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보도를 유보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편집국장 브래들리와 베테랑 기자였던 프리츠 비비 등은 보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 사안은 워싱턴포스트의 존폐가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민감한 문제였다. 만약 대법원이 이 보도행위를 간첩법 위반으로 판결할 경우 각종 악영향과 더불어 텔레비전 방송국 허가권 갱신 취소, 주가 폭락 등의 문제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서린이 최종 판단을 내렸다. 그녀는 ‘go ahead’, 즉 발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워싱턴포스트가 펜타곤 페이퍼를 보도한 지 2주가 지나 대법원은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1년 후 일어난 워싱턴포스트의 또 다른 충격적 보도의 그늘에 가려진다. 바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을 사임케 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사건은 1972년 6월17일 토요일에 시작됐다. 워싱턴포스트는 전날 밤 전국민주당중앙위원회가 있는 워터게이트 빌딩 한 사무실에서 남녀가 소파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이 건장한 남자 5명이 문을 부수고 침입했다 체포됐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미 펜타곤 페이퍼 보도로 닉슨 정권과의 관계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 워싱턴포스트는 다시 정권과의 싸움에 사운을 걸게 된 것이다.

이로써 캐서린은 닉슨 정권이 가하는 여러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세무조사, 방송국 허가권을 갱신해 주지 않겠다는 협박, 제3자로 하여금 워싱턴포스트 주식을 사게 해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시도나 주가 폭락 유도 등.

C. 번스타인과 함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의 영웅인 B. 우드워드는 당시 닉슨의 선거본부장이자 나중에 법무장관이 된 존 미첼로부터 “보도하면 캐서린의 젖가슴을 큰 세탁기에 넣고 짜버리겠다”는 협박과 욕설까지 듣는다. 그러나 캐서린은 편집국에서 “우리는 이제 물살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며 브래들리와 기자들을 격려했다. 또 방송국 허가권 갱신도 포기할 수 있다며 강경하게 밀고 나간다. 그녀의 결단에 워싱턴포스트의 많은 기자가 감동했음은 물론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마침내 닉슨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입수해 대통령에게 결정타를 먹인다. 이후 워터게이트 보도로 퓰리처상을 탄 우드워드는 캐서린에게 10달러짜리 빨래 짜는 건조기를 선물했고, 캐서린은 그것을 자기 사무실에 전시해 두었다.

펜타곤 페이퍼와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가 미국 역사 및 저널리즘의 방향을 바꾸는 데 기여했지만, 캐서린은 그 찬사들 가운데서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다. 기자들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해이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일까. 캐서린과 워싱턴포스트는 그 이듬해인 1975년 노조의 방화 및 사보타주로 최악의 위기를 맞는다. 일부 기자들이 노조원들의 폭력에 쓰러지는가 하면 139일 동안 계속된 파업으로 회사는 만신창이가 됐다. 캐서린은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녀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폭력에 가담한 모든 노조원을 해고하고, 새로운 기계들을 구입하고, 인력을 대체하는 등 강력한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이 위기를 넘기면서 워싱턴포스트는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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