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에 당 태종이 정관(貞觀) 14년(640)에 국자감(國子監)을 확장하여 학사(學舍)를 1200칸으로 늘리고 학생 수를 3260인으로 증원하며 천하에 이름난 명유(名儒)들을 초빙하여 이들을 가르치게 하니,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이 모두 자제를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청했다 한다.
그러니 진덕여왕 2년(648)에 김춘추(金春秋, 603∼661년)가 당나라에 가서 태종에게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 공자에게 봄·가을로 올리는 제사)대제를 지내는 것과 강론(講論)하는 모습을 보여달라 하여 당 태종을 감격시켰을 것이다. 김춘추는 귀국한 다음 당나라 문물제도를 본뜨는 과정에 국학 설치도 서둘렀던 듯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8 직관(職官)상의 국학(國學)조에서 진덕왕 5년(651)에 박사(博士) 약간명과 조교(助敎) 약간명 및 대사(大舍) 2인을 두었다고 한 것으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통일 후인 신문왕 2년(682) 6월에는 국학의 위상을 정비하기 위해 이를 예부(禮部)에 소속시키면서 경(卿) 1인을 두어 그 책임을 맡게 하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선(文選)’ ‘논어(論語)’ ‘효경(孝經)’(도판 1) 등을 박사와 조교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였는데 제생(諸生; 학생)은 그 능력에 따라 3품(品)으로 나누어 배출하였다.
‘춘추좌씨전’이나 ‘예기’나 ‘문선’과 같은 책을 읽어 그 뜻에 능통하고 겸해서 ‘논어’와 ‘효경’에 밝은 사람을 상품으로 하고, ‘곡례(曲禮)’와 ‘논어’ ‘효경’을 읽은 사람은 중품으로 하며, ‘곡례’와 ‘효경’을 읽은 사람을 하품으로 하였다. 만약 5경(五經; 詩經·書經·周易·禮記·春秋)과 3사(三史; 史記·漢書·後漢書) 및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겸해서 능통한 사람이라면 차례를 뛰어넘어 뽑아 썼다.
학생 신분은 제12위 관등인 대사(大舍)에서 무위(無位)에 이르는 귀족 자제들로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소년들이었다. 9년을 시한으로 하되 가르쳐서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은 쫓아냈다. 그러나 재주와 그릇이 장차 이루어질 만하면 9년을 넘긴다 해도 재학(在學)하게 하여 지위가 제10위인 대내마(大奈麻)나 제11위인 내마(奈麻)에 이른 다음에 내보냈다.
신라의 이런 교육열은 김문왕(金文汪, 631∼665년)이나 김인문(金仁問, 629∼694년) 같은 숙위왕자(宿衛王子)들로 하여금 일찍부터 당나라 국학에 유학하여 수학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가서 황제 측근에 숙위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숙위왕자들은 당의 국학 출신이라는 영예를 겸대(兼帶; 겸해서 차지함)하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부러워한 신라의 귀족 자제들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학에 입학하기를 열망하자, 신라에서는 성덕왕 27년(728)에 왕이 직접 당 현종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얻어낸다. 성덕왕과 현종이 융기(隆基)라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서에서 현군으로 군림하며 특별한 교분을 쌓아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연소신예(年少新銳; 나이가 젊어 새롭고 날카로움)한 신라의 귀족자제들이 끊임없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국학에 재학하며 숙위의 임무를 겸하다가 귀국해 역대 조정의 문한(文翰)을 전담하는 듯하다.
그 규모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헌덕왕 17년(825) 5월에 왕자 김흔(金昕, 803∼849년)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서 당 선종(宣宗)에게 주청(奏請; 임금께 상주하여 청원함)을 올려 동행한 12명의 신라 자제를 당나라 국학에 국비 장학생으로 입학시켰다는 내용으로 보면, 그 규모가 1회에 10여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권10 헌덕왕 17년 5월조의 기록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왕자 김흔을 당나라로 보내 이렇게 상주해 말했다. ‘먼저 대학에 재학했던 최이정(崔利貞), 김숙정(金叔貞), 박계업(朴季業) 등은 신라로 돌려보내기를 청하며 새로 조정에 도착한 김윤부(金允夫), 김입지(金立之), 박양지(朴亮之) 등 12인이 머물러 숙위할 것을 청합니다. 거듭 청하건대 국자감에 배속하여 학업을 익히게 하고 홍려시(鴻寺;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관청)가 양식을 공급하도록 해주십시오.’ 황제가 이를 따랐다.”
그런데 이 시기까지는 아직 신라가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지 못해 신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당나라 조정에 보내는 사행선단(使行船團; 사신 행차를 태운 배의 집단)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유학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김흔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고 오면서 이와 같이 새로운 당나라 유학생들을 싣고 가서 내려놓고 먼저 와 있던 유학생들을 다시 싣고 돌아왔던 것이다.
청해진과 유학승(留學僧)
유학승(留學僧)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종선(南宗禪)의 조사(祖師)로부터 직접 인가(印可)를 받아 일문(一門)을 개설할 수 있는 조사 자격을 얻으려는 야망에 찬 선승들은 한결같이 사행선단에 의지하였다. 그래서 남종선의 선구자인 도의(道義)선사도 건중(建中) 5년(784)에 사신 김양공(金讓恭)을 따라 당나라로 갔다 하고, 사자산문의 초조인 철감(澈鑑)선사 도윤(道允, 798∼868년)도 조정사신(朝使)에 끼어 당나라에 갔다고 했다.
성주산문의 초조인 낭혜(朗慧)화상 무염(無染, 800∼888년)은 바로 12명의 유학생을 태우고 갔던 왕자 김흔의 배에 동승해서 중국으로 건너간다. 이들은 모두 신라조정에서 인정한 인재였기에 특별대우를 받은 것이지만, 조정의 인정을 받지 못했던 하급 귀족 출신인 진감(眞鑑)선사 혜소(慧昭, 774∼850년)는 정원(貞元) 20년(804), 즉 애장왕 5년에 세공사(歲貢使)에게 가서 그 배의 노 젓는 노꾼이 되기를 자원하여 겨우 당나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어려웠던 당나라 유학길이었지만 장보고(張保皐, ?∼846년)가 흥덕왕 3년(828) 4월에 조정으로부터 빌린 1만 군사로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여 제해권을 장악하고 나자 그 상황이 일변하게 되었다. 그래서 장보고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던 때인 문성왕 2년(840) 4월에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던 신라 유학생 105인이 한꺼번에 귀국했다는 기록을 ‘삼국사기’ 권11 문성왕 본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 청해진 설치 이후에 유학생의 내왕이 얼마나 활발하고 자유스러웠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태화(太和) 4년(830), 즉 흥덕왕 5년에 진감선사 혜소가 귀국하고 개성(開城) 2년(837), 즉 희강왕 2년에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이 당나라로 건너가며 같은해 9월12일에는 원감(圓鑑)선사 현욱(玄昱, 987∼868년)이 본국 왕자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장보고 선단의 배를 타고 청해진을 거쳐 무주(武州) 회진(會津, 영산포 부근)으로 귀국한다. 개성 4년(839) 2월에는 적인(寂忍)선사 혜철(慧徹, 785∼861년)이 역시 무주 회진으로 귀국하여 부근의 쌍봉사에서 여름 안거를 보냈고, 개성 5년(840)인 문성왕 2년 2월에는 보조선사 체징이 평로사(平盧使)를 따라 회진으로 귀국했다. 회창(會昌) 5년(845), 즉 문성왕 7년에는 낭혜화상 무염이 회창폐불(會昌廢佛; 회창 5년 8월에 당 무종이 도사 조귀진(趙歸眞)의 말을 듣고 절 4만여 곳을 부수고 승니 26만명을 환속시킨 일)을 만나 외국 승려의 귀국 명령을 받고 돌아오고 있다. 모두 그 내왕의 자유로움을 증명해 주는 자료들이다.
그러나 장보고가 신무왕과 문성왕 부자를 도와 왕위를 차지하게 하고 난 다음 그 공으로 진해장군(鎭海將軍)이라는 파격적인 직위에 오르고 나서 이에 만족치 않고 그 딸을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들여보내 중앙으로 진출하려다 진골귀족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좌절하고 이를 힘으로 극복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한 문성왕 8년(846) 이후부터는 장보고의 해상세력이 일시 침체되는 현상을 보이는데 특히 문성왕 13년(851) 2월에 청해진을 혁파하고 그 무리를 곡창지대인 벽골군(碧骨郡, 김제)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던 때가 가장 큰 위기였다. 결국 뱃사람들은 농사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바다로 돌아갔고 신라 조정도 청해진 세력의 억압이 제해권 상실로 이어져 국익에 결정적인 손상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달아, 문성왕 17년(855) 정월에 국왕이 사신을 보내 이들을 선무(宣撫; 백성을 달래어 어루만짐)함으로써 대타협이 이루어진다.
이에 청해진 세력은 차츰 안정을 되찾아 흔들리던 제해권을 바로잡아 나가게 된다. 이미 ‘신동아’ 본 연재기 제25회에서 언급한 대로 적인(寂忍)선사 혜철(慧徹)이나 철감(澈鑑)선사 도윤(道允),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같은 남종 선문조사(禪門祖師)들이 장보고 피살 후에 이 부근으로 모여들어 이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어주었다는 것도 청해진 세력 재건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 선사들은 모두 당나라를 내왕하면서 청해진 선단의 편의를 제공받은 사람들로, 제해권을 장악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몸으로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유학승들과 함께 당 유학생 출신들도 관료가 되어 이곳으로 모여들었던 듯하다.
보조선사 체징의 비문을 보면 비문을 지은 김영(金穎)의 벼슬은 수변부사마(守邊府司馬)로 이곳 서해안 일대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인물인 듯하다. 그런데 조청랑(朝請郞) 사비어대(賜緋魚袋)라는 벼슬 이름으로 보면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 그곳에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또 글씨를 쓴 수무주곤미현령(守武州昆湄縣令) 김원(金) 역시 당나라 유학생 출신이 분명하다. 유림랑(儒林郞)이란 직함을 첫머리에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곤미현은 지금의 영암군에 포함되어 있는 구림 일대다. 비석의 하반부를 쓴 장사부수(長沙副守) 김언경(金彦卿) 역시 입조사(入朝使)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라 하여 유학생 출신임을 나타내는데, 장사현은 지금 보림사가 있는 장흥의 옛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