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맞추어 청해진 세력은 당나라가 내란에 휩싸여 바다에 신경 쓰지 못하는 틈을 타 장보고 시절 못지않은 세력을 키워 바다를 호령하며 중국과 일본을 제압하고 있었다. 경문왕은 이들의 세력 신장을 묵인하여 밀월(蜜月)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간파할 만큼 현명한 군주였다.

최치원은 왕경(王京)인 서라벌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겨우 12세 때인 경문왕 8년(868)에 해박(海舶; 바닷배니 청해진 세력 휘하의 배였을 것이다)을 따라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그의 부친 최견일(崔肩逸)은 당나라로 떠나는 어린 아들 최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10년 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 역시 아들이 있다 하지 않겠다. 가서 부지런히 해라. 떨어지지 않으려면 노력해야 한다(十年不第進士, 則勿謂吾兒. 吾亦不謂有兒. 往矣勤哉. 無墮乃力).”
이처럼 비장한 가르침을 받고 떠난 최치원은 당나라에 이르러 스승을 따라 학문을 연마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아 6년 만인 건부(乾符) 원년(874) 갑오 식년시(式年試; 4년에 한 번씩 치르는 정기시험)의 빈공과(賓貢科; 외국인들에게 보이는 과거 시험)에 단번에 급제한다. 18세 때의 일이다. 이때 지공거(知貢擧; 시험관)는 예부시랑 배찬(裵瓚)이었다.
그래서 헌강왕 2년(876)에는 20세로 선주(宣州) 율수현(水縣)의 현위(縣尉; 縣丞 아래 직책, 현의 부책임자, 연봉이 200석에서 300석에 이름)가 된다. 율수현은 현재 중국 강소성(江蘇省) 금릉도(金陵道) 율양현(陽縣)의 옛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때부터인가 율수현(水縣)을 표수현(漂水縣)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선주에 표수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 전토에서도 표수현을 찾을 수 없으니 아마 율()자가 어느 때인가 표(漂)로 오자(誤字)가 나서 이런 실수를 반복하게 되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다음해(877) 겨울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율수현위직을 사임한다. 그러나 녹봉이 끊겨 글 읽을 양식이 떨어졌기 때문에 독서를 포기하고 일시 관역순관(館譯巡官) 자리에 나가기도 한다. 다행히 율수현위 시절 문명(文名)을 떨쳐 이미 ‘중산복궤집(中山覆集)’ 5권을 저술했으므로 곧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겸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으로 황소(黃巢)의 반란(875∼884년)을 토벌하러 나선 고변(高騈, ?∼888년)의 눈에 들어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발탁된다. 그래서 건부 6년(879) 정월부터 중화(中和) 4년(884) 6월까지 6년 세월을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문장으로 대공을 세운다.
특히 황소의 반역을 꾸짖는 ‘격황소서(檄黃巢書; 황소를 꾸짖는 글, 880년 7월8일 지음)’의 문장력은 탁월하여 당나라 천지를 진동시켰으니 그 한 대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천하 사람들이 모두 죽여 내놓고자 생각할 뿐만 아니라 문득 또한 땅 속의 귀신들도 이미 몰래 죽이자는 말을 의논해 놓았다(不惟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之語).”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글을 읽던 황소가 모골이 송연하여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다. 최치원은 이 공으로 황소의 난을 평정하고 나서 도통순관승무랑시어사내공봉사자금어대(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의 벼슬을 받는다. 이 시기에 저술한 공사간의 문장을 모은 것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이다.
헌강왕 10년(884) 6월에 황소의 난을 평정하고 나자 최치원은 고변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뜻을 말한다. 그러자 고변은 희종황제에게 상주하여 회남입신라겸송국신조서등사(淮南入新羅兼送國信詔書等使)의 자격으로 최치원을 금의환향(錦衣還鄕;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감)하도록 주선한다. 이해 10월의 일이었다. 신라국입회남사(新羅國入淮南使)로 온 김인규(金仁圭)와 부친의 서신을 가지고 환국을 재촉하려고 온 사촌아우 최서원(崔栖遠)도 동행하는 귀국길이었다. 물론 이 귀국선편이 청해진 세력의 호위와 안내를 받았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겨울에 출발한 뱃길은 순탄치 않아 풍랑을 만나 곡포(曲浦)에 갇히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남은 겨울을 보낸 다음, 다음해인 헌강왕 11년(885) 초봄에 출발하여 3월에야 서라벌에 돌아올 수 있었다. 최치원이 고국에 돌아올 시기에 신라는 마지막 단풍을 찬란하게 불태우고 있었으니 ‘삼국사기’ 권11 헌강왕 6년조에 이런 기록이 있을 정도다.
“헌강왕 6년(880) 9월9일에 왕이 좌우를 거느리고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백성들의 집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악기가 소리를 잇는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요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띠로 하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로 하지 않는다 하는데 그러한가?’ 민공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도 일찍이 그렇게 들었습니다.’ 이로 인연해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상감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이 고르고 풍우가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먹는 데 풍족하고 변경이 고요하니 시정(市井)이 기쁘고 즐거울 따름입니다. 이는 성덕(聖德)이 깨치신 바입니다’.”
이런 호시절에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불과 18세에 진사급제하여 20대 초반부터 문명을 떨치다가 당나라 사신 자격으로 29세에 금의환향하였으니 헌강왕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헌강왕은 곧바로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의 벼슬을 주어 좌우에 시종하며 문한(文翰)을 전담하게 하고 이어서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의 벼슬을 내려 문무의 권한을 총괄하도록 위임한다. 당나라 진사 출신으로 당에서 도통순관승무랑시어사내공봉사자금어대라는 벼슬을 지낸 이력을 참작하고 황소의 반란을 명문장으로 진압한 그의 능력과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베푼 예우였을 것이다.
최치원이 지은 선사들의 비문
이런 예우와 더불어 헌강왕은 곧바로 그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해에 중창을 마무리하고 대숭복사(大崇福寺)라고 절 이름을 고친 원성왕의 원찰에 사적비를 세우게 하면서 그 비문을 최치원에게 짓도록 명령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헌강왕 8년(882) 12월19일에 입적한 지증(智證)대사 도헌(道憲, 824∼882년)의 탑비문 찬술도 하명하였다.
이에 최치원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29세 된 청년의 기개답게 최고의 문장력을 과시하기 위해 참고가 될 만한 기왕의 비문을 모으고 역대 사적(史籍)을 섭렵하는 등 착실한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미처 이 비문들을 짓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헌강왕은 그 12년(886)에 옥천사(玉泉寺; 쌍계사의 옛이름) 진감(眞鑑)선사 혜소(慧昭, 774∼850년)의 시호와 탑명을 내리면서 그 탑비문의 찬술을 다시 명령한다. 그리고 이해 7월5일에 돌아간다. 그러니 진감선사 혜소의 대공령탑비(大空靈塔碑)의 비문 찬술 명령은 유명(遺命)이 되고 말았다.
최치원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현군 헌강왕의 권우(眷遇; 사랑하여 돌보고 대접해 줌)에 감격하여 찬란하게 물든 단풍을 한껏 더 빛나게 하려는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난 지 1년여 만에 갑자기 국왕이 돌아가니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그 아우인 정강왕도 등극한 지 1년 만에 뒤따라 돌아가고 여동생인 진성여왕(眞聖女王, 887∼896년)이 등극하여 어지러운 정치를 계속하여 신라를 망국으로 몰아감에서랴!
찬란하게 물든 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이려 하는 찰나에 설한풍(雪寒風; 차가운 눈바람)이 불어닥쳐 하루아침에 산천초목을 얼려 떨어지게 한 격이었다. 최치원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의욕을 상실하여 한동안 비문 짓는 일을 중단하고 팽개쳐 둔 듯한데 정강왕의 재촉 때문이었는지 곧바로 정신을 수습하여 우선 헌강왕이 유명으로 부탁하고 간 진감선사 혜소의 비문부터 완성해낸다.

이 비석 양식은 한 해 앞서(886) 세워진 양양 (도판 4) 양식과 방불하다. 이수 정면 용트림 조각이 전액판 좌우에서 서로 머리를 들고 입을 벌린 채 대결하고 있는 것이나 귀부의 용머리 형태에서 이빨만 보인 것 등이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진감선사비의 귀갑무늬가 홑겹으로 크게 표현되었다거나 비신꽂이 주변으로 운룡문만 장식된 것 및 이수 중앙에 위로 피어난 연꽃 받침 위에 동그란 구슬이 장식된 것은 선림원지 홍각선사비와 서로 다른 양식이다.

“대저 도(道)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멀리 있지 않듯이 사람도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거나 서로 다름이 없다. 이로써 동쪽나라 사람의 아들들이 승려가 되기도 하고 유학자가 되기도 하여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를 떠가서 통역을 거듭하여 좇아 배우려 하였다. 목숨을 배에 맡기고 마음을 중국에 두어 빈 채로 가서 채워 돌아오며 먼저 고생하다가 뒤에 얻으니 또한 옥 캐는 사람이 곤륜산의 높은 것을 꺼리지 않고 진주 찾는 사람이 검은 용이 사는 골짜기의 깊은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겠다(夫道不遠人, 人無異國. 是以東人之子, 爲釋爲儒, 必也西浮大洋, 重譯從學. 命寄木, 心縣寶洲, 虛往實歸, 先難後獲, 亦猶采玉者, 不憚丘之峻, 探珠者, 不辭驪壑之深).”
당나라 유학에 대한 자부심을 피력하여 진감선사와 자신의 위상을 극명하게 밝히면서 불교와 유교가 추구하는 도에 차등이 있을 수 없고 신라 사람과 중국 사람의 인성(人性)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자존 의식을 분명히 표출하고 있다.
진감선사 혜소(774∼850년)는 이미 최치원(857∼?)이 탄생하기 7년 전인 문성왕 12년(850) 1월9일에 77세로 돌아간 분이다. 그 유계(遺戒; 돌아가면서 남긴 경계하는 말)에 따라 부도와 탑비를 세우지 않았다 하는데 이제 36년이 지난 뒤에 헌강왕이 그 모법제자(慕法弟子; 법을 사모하는 제자)들인 내공봉(內供奉) 일길간 양진방(楊晋方)과 숭문대(崇文臺) 정순일(鄭詢一)의 청으로 진감(眞鑑)이라는 시호와 대공령탑(大空靈塔)이라는 탑명을 내려 부도와 부도비를 세우게 했다고 한다.
유계라고 했지만 사실 진감선사가 전주 금마 출신의 한미한 하급 귀족이었기 때문에 시호와 탑호가 내려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감선사가 세공사(歲貢使)의 노꾼이 되기를 자원하여 겨우 중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던 것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문명을 떨치고 돌아와 최씨들의 위상이 높아지자 헌강왕이 뒤늦게 이와 같은 배려를 하지 않았나 한다.
진감선사의 속성이 최씨이고 금마인이라 한 것과 최치원이 옥구(沃構) 사람이라는 전설이 따라다니는 것과도 어떤 관련이 있을 듯하다. 왕도에 살던 최씨 중 일부가 일찍이 통일 과정에 옥구와 금마 일대에 자리잡아 살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치원은 비석의 첫머리에 “도불원인(道不遠人)이요 인무이국(人無異國)”이라는 함축적인 표현을 써서 도법(道法)의 종류와 출신지의 상이가 차등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혀 진감선사가 시호와 탑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피력했던 듯하다. 최치원이 귀국하자마자 처음으로 짓기를 명령받았던 봉암사 지증대사(智證大師) 도헌(道憲)의 비문이나 숭복사비문을 뒤로 미뤄두고 한 해 뒤에 명령받은 진감선사 혜소의 탑비문을 서둘러 먼저 지은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을 듯도 하다.
(도판 8)은 현재 쌍계사 산내 암자인 국사암(國師庵) 동쪽 봉우리 중턱 명당자리에 터잡고 있다. 이런 복잡하고 황급한 건립 배경 때문인지 부도 양식은 매우 단순하다.
바로 한 해 앞서 정강왕 원년(886)에 조성한 (도판 3)가 처음으로 기단 하대에 복련대(覆蓮臺)를 중복해 기단을 한 송이 연꽃으로 상징하던 초기 의도를 파괴하는 실마리를 열었다는 얘기는 이미 홍각선사부도에서 밝혔다. 그 다음 해에 만들어지는 이 에서도 바로 그런 양식이 계승되어 하대에 복련 표현이 더해져 있다. 그러나 중대석은 모양으로 팔면에 각각 안상만 새겨놓았는데 북통 모양의 배흘림 표현은 하지 않았다. 아울러 의 운룡문 돋을새김이나 상촉하관의 원통 모양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앙련으로 장식된 연화상대 위에 바로 탑신석을 올려놓지 않고 씨방 모양의 받침돌을 하나 더 얹었는데 그 표면이 권운문(卷雲文; 뭉게구름 무늬)으로 장식되어 있다. 수미좌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868년경에 조성된 (제26회 도판 9)에서는 맨 하단 지대석 바로 위에 표현되던 구름무늬가 874년경에 만들어진 (제25회 도판 9)에서는 기단부 하대까지 올라가고 그것이 다시 886년에 조성된 에서는 기단 중대석으로 올라오더니 이제는 마침내 상대 앙련 연화대석 위로 올라가 탑신석을 직접 받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때는 이미 기단부에 대한 의미가 망각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한다. 맹목적인 부재의 이동 배치가 의미없이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이런 현상이 빚어졌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단 중대석의 팔각기둥 크기와 탑신석의 팔각기둥 크기가 비슷해졌고, 장차 이 양식은 남포 이나 충주 으로 이어졌던 듯하다. 옥개석 상부에 상륜부를 얹으면서 노반(露盤) 부위에 구름 장식을 더한 것도 의미없는 장식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