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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쌀의 운명

大豊에 멍들고, 쌀값에 울다

<농촌현장르포> 2001년 가을 農心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大豊에 멍들고, 쌀값에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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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나주시는 인접한 해남군 간척지가 개발되기 전까지 남도땅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나주지역의 쌀값은 전남지역의 표준이 된다는 점에서 해마다 관심을 모으곤 했다.

10월8일 오전 9시. 전라남도 나주농민회는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11시부터 ‘특별한’ 기자회견이 열리기 때문이다. 나주지역에서는 RPC 수매가 결정을 앞두고 농민회장이 직접 조합장을 찾아다니며 해결책을 모색해왔다. 그 결과 4개 농협RPC와 농민회가 시가수매를 거부하기로 최종 합의한 것이다. 박원기 나주농민회장과 농협 조합장이 합의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농협RPC에서 잠정적으로 결정했던 40kg당 5만원을 철회하고, 추후 정부의 특단 대책이 없는 한 시가수매를 포기하기로 결정하며, 이러한 내용을 농민회와 함께 조합원들에게 선전, 설득하기로 한다.”

농협RPC가 농민회의 수매거부 주장을 받아들인 것은 한마디로 고육지책이다. 정부의 지침대로 시가수매를 하면 농민들의 집단반발이 확실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엔 적자와 농협중앙회의 문책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일단 공을 정부로 넘긴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RPC를 책임지고 있는 조합장들이 정부의 정책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나주농민회 구정철 사무국장은 10월 현재 990만섬에 달하는 쌀 재고량이 결코 많은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사무국장은 “990만섬 가운데 172만6000섬은 MMA물량(UR협정에 따라 매년 외국에서 수입하는 쌀)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순수 재고로 보기 힘들다. 또 앞으로 북한에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는 물량이 200만섬 이상이다. 그걸 빼면 600여 만섬인데, FAO (식량농업기구)는 한국의 적정 재고로 600만섬을 권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전 11시30분. 나주시 다시농협 2층에서 기자회견이 있었다. 수매가 중단됐다는 소식을 듣고 수십명의 농민들이 조합으로 몰려왔다. 조합장과 농민회장이 나란히 앉아 기자회견문을 검토하는 사이 나이가 지긋한 두 농민의 넋두리가 들려왔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이가 정치를 못했다지만, 그래도 그때는 농사만 열심히 지으면 가을에 땅을 살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땅을 팔아도 빚을 다 못 갚아부러. 농민은 다 죽게 돼부렀어.”

“10년 전에 공무원 때려치울 때 우리 부부의 월급을 따져보니까 60마지기 농사면 타산이 맞겠더라고. 그런데 이젠 100마지기를 지어도 대학생 한 명 가르치기가 힘들어. 죽을둥 말둥 뼈빠지게 일해도 빚만 늘어부러.”

농민표 줄었다고 무시하나

기자회견은 농민회와 조합의 연대를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구정철 사무국장은 “조합장님들을 농민들이 도와줘야 합니다. 앞으로 농민회, 농협, 농민단체가 힘을 모아 대정부 투쟁을 벌여나가야 쌀을 지켜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재명 동강조합장도 “우리는 농협중앙회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다. 농민들에게 시가대로 쌀을 내놓으라고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수매를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8일 오후 나주시 동강면 버스정류소 옆 가건물 안에서는 이동화(36) 쌀전업농 전남도연합회 사무국장이 후배 김영남(36·나주농민회 회원)씨와 걱정스럽게 쌀값 하락 문제를 얘기하고 있었다. 이사무국장은 “1년 사이 산물벼 가격이 2만6000원이나 떨어졌다”며 “전남지역 농민들의 불안감이 날로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올 농사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돼부렀습니다. 나락을 만져보면 남 주기가 아까울 정도인데 본전도 안된다니까 속이 터지는 거라. 더러워서 다 갈아엎고 싶다는 농민들이 쌔여부렀오. 하지만 빚은 갚아야 하니까 어쩔 수 있습니까? 저도 사실 개인 도정업자에게 일부를 싸게 넘겨부렀오. 수매거부 운동을 벌이는 분들께는 정말 죄송스럽지만….”

전라남도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다. 이런 까닭에 김대통령이 야당 총재로 활동하던 시절, 전남지역의 농민들은 대정부 투쟁에서 야당과 보조를 잘 맞추었다. 하지만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는 지적이 많다. 한마디로 전남지역이 ‘친여성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김영남씨는 “대통령에게 기대했던 건 사실이지만, 잊어버린지 오래 돼부렀오. 그 자리에 올라가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라며 아쉬워했다.

이동화씨와 김영남씨의 대화는 어느덧 농업정책의 문제점으로 넘어갔다. 먼저 이씨가 농림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정부는 자꾸 애매하게 말을 흘리지 말고 확실한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증산정책을 포기하고 미질 중심으로 갈 거면 제대로 평가해서 좋은 쌀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지불해야죠. 지금처럼 아무 쌀이나 마구잡이로 사들여서 뒤섞어 팔면 죽도 밥도 안돼요. RPC도 그래요. 어차피 RPC가 쌀값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면, 정부가 계속 지원을 해줘야지, 알아서 먹고 살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정부가 최소가격만 정해주면, 쌀값은 누가 뭐라 해도 떨어지지 않을텐데, 그걸 못하겠다고 이 난리를 꾸미고 있으니….”

반면 김씨는 쌀값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치경제학적 요인을 거론했다.

“농촌 인구가 계속 줄어드니까 정치적 비중도 떨어지는 거예요. 만일 농민표가 대통령을 결정한다면 이렇게 막 대하진 않을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덴마크는 50년 거치 100년 상환 같은 영농자금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2년 거치 3년 상환이에요. 그러니 빚이 또 빚을 만드는 거죠. 중국에 반도체 팔아먹으려고 마늘농사를 다 망쳤으면, 반도체로 돈 번 기업이 마늘농가에 보상금을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부실기업 구조조정에 쏟아부은 돈의 10%만 투자해도 농민이 지금처럼 고생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주시에서도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진 동강RPC는 조용했다. 조합과 농민회가 수매거부를 선언한 탓이다. 김재명 동강농협 조합장은 “예전 같으면 지금쯤 우리 면에서 20대 이상의 콤바인이 작업할텐데, 아침에 확인해 보니까 4대만 탈곡을 하더라고요. 저장할 곳이 없어 누렇게 익은 벼들을 마냥 바라만 보고 있는 농민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라고 말했다.

“밥값이 껌값이라예”

경상남도는 농업보다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부산에서 울산으로 이어지는 남동임해공업지역은 1960∼70년대 경제개발의 중추를 맡았으며, 마산·창원공단은 우리나라 최대의 제조업 생산기지다. 경남지역의 쌀농사는 주로 서부쪽에 집중돼 있다. 김해평야를 중심으로 동쪽이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시설채소에 주력하는 반면, 서쪽은 벼농사가 많다.

경남지역의 농민조직은 진주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일반적으로 농민단체들이 도청소재지에 도지역 본부를 두는 것과 달리 전농 경남지부는 진주농민회와 같은 사무실을 쓰고 있다. 9월15일 창원에서 열린 영남농민대회엔 모두 3300여 명이 참여했는데,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500여 명이 진주지역 농민이었다. 쌀문제가 진주지역에서 얼마나 민감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10월8일 밤. 진주시 금산면 진주농민회 사무실엔 서너 명의 상근자들이 모여 있었다. 역시 화제는 정부의 농업정책이었다. 경상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한 젊은이는 쌀문제를 계급갈등 차원에서 파악했다. 그는 “정부가 반민중적 행태를 보이는데 보수 언론은 기득권층과 결합해 민중을 억압하고 있다. 결국 민중들은 투쟁을 통해서만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월9일 아침. 진주지역의 날씨는 잔뜩 찌푸려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비가 온다는 예보가 흘러나왔다. 이런 날은 추수가 어렵다. 진주시 지수면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는 정관화씨(57)도 일손을 놓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정씨는 논농사 45마지기(9000평, 본인 소유 1400평)를 짓고 있는데, 서부경남 지역에서는 정씨처럼 개인 농토가 영세한 농민이 많다. 그는 쌀전업농 진주시연합회장도 맡고 있다.

김씨는 9월25일 진주시에서 열렸던 농림부의 ‘쌀문제 설명회’부터 떠올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날 농림부에서 사무관이 내려와 쌀재고 증가와 수입개방의 불가피성 등을 얘기했는데, 교육내용이 농민들의 정서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똥인지 오줌인지도 모르고 떠들더라고예. 화가 난 농민들이 대책을 물으니까 아무 소리도 못하는 거라예.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고 폼을 잡는지…. 아무리 농민이 무식하다지만 농림부가 이렇게 농민을 무시해서야 되겠능교?”

정씨의 불만은 끝없이 터져나왔다.

“우리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쌀 한 말을 지고 20리를 걸어가서 시장에 나가면, 과자 사고 신발까지 사들고 왔어예. 그런데 지금은 택도 없어예. 밥 한 공기가 껌 값만도 못한 거라예. 일요일에 예식장 한번 나가려면 쌀 한 가마니 팔아야 하는 세상이 됐다니까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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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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