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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권 古書 수장한 한국 최고의 민간 아카데미

대구 남평문씨 萬卷堂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2만권 古書 수장한 한국 최고의 민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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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평문씨들의 문중문고인 ‘인수문고’는 8500책(2만권 분량)을 수장, 민간으로서는 고서를 가장 많이 갖고 있다. 전국의 문인, 달사들이 이곳에 찾아와 책을 열람하고 학문을 논한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2만권 古書 수장한 한국 최고의 민간 아카데미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적선(積善)을 많이 하거나, 선(禪)을 하거나, 명당에 묘를 쓰거나, 독서를 많이 하면 된다는 게 그것이다. 이 가운데 누구나 실천할 수 있고 가장 보편적인 방법을 꼽으라면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일 터다.

아무튼 독서를 많이 하면 나쁜 팔자를 좋은 팔자로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믿음이었다. 불가(佛家)나 도가(道家)보다도 상대적으로 유가에서 독서를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유교 선비는 책을 좋아한다. 아울러 독서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한국의 지적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 집안으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경북 대구에 고서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집안이 하나 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에 있는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안이다.

인흥리에 세거하는 남평문씨들은 ‘인수문고(仁壽文庫)’라 불리는 특별한 문고를 가지고 있다. 인수문고는 문씨 집안 공동의 문고를 일컫는 이름인데, 이러한 형태의 문고를 통상 문중문고(門中文庫)라고 칭한다.

현대적 의미의 도서관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으로 네 가지 유형의 도서관이 있었다. 첫째는 조선조 정조 때에 세워진 규장각과 같은 왕립도서관이고, 둘째는 성균관·향교·서원 등의 교육기관에 설치되었던 학교도서관이고, 셋째는 문중에서 자녀교육을 위해 설치한 문중문고이며, 넷째가 개인문고다. 이 가운데 문중문고는 그 성격이 특이하다. 특정 성씨의 구성원만을 위한 문고라는 점에서는 사적인 용도지만, 개인이 아닌 문중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문중문고는 공사(公私) 합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만권 보유하고 있는 인수문고

현재 인수문고가 소장한 장서는 대략 8500여 책에 달한다. 1975년 인수문고가 설립되기 전에 그 전신인 만권당(萬卷堂)과 수봉정사(壽峯精舍)에 소장되어 있던 6948책과 1975년 이후에 추가로 수집된 1500여 책을 합한 수치다.

보통 고서의 경우 1책(冊)이 2∼3권(卷) 분량이 되므로, 8500책을 권 단위로 환산하면 2만권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서원 가운데 가장 많은 장서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장서가 약 4400책이다. 그 양적인 측면만 가지고 따져본다면 영남학파의 본산인 도산서원보다 문씨들의 인수문고가 더 많은 장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한국의 국·공립 도서관 또는 대학도서관을 제외하고 인수문고가 민간으로서는 가장 많은 고서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인수문고의 8500여 책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고대 중국에서는 고서의 내용을 분류할 때 ‘광내(廣內)’와 ‘승명(承明)’이라는 분류기준을 사용하였다. 광내는 주로 각종 경전들을 가리키고, 승명은 고금의 역사에 관한 책들이다.

또 황제가 거주하는 궁궐의 좌측으로는 광내전(廣內殿)이라는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고, 우측으로는 승명전(承明殿)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표현이 ‘좌통광내 우달승명(左通廣內 右達承明)’이다. 좌우통달(左右通達)이란 말 역시 여기서 유래한 것이며, 따라서 ‘통달’했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제가의 경전과 고금의 역사에 밝다는 뜻이다.

좌통광내 우달승명이라는 기준보다 더 확대되어 통용되던 분류기준은 사부(四部), 즉 경(經)·사(史)·자(子)·집(集)이었다. 경은 교과서 격에 해당하는 경전을 가리키며, 사는 역사에 관한 책이다. 자란 유(儒)·병(兵)·법(法)·도(道)·석(釋)의 각 가(家)와 기예(技藝)·술수(術數)·소설(小說)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집은 학자들의 개인문집을 가리킨다. 인수문고의 기반이 된 만권당에 소장된 6948책 가운데 경부(經部)는 536책이고, 사부(史部)는 1813책, 자부(子部)는 588책, 집부(集部)는 4011책이다.

인수문고의 전체적인 특징에 대하여 전문가들은 이렇게 평가한다. “기호(畿湖) 본위로 모은 규장각 도서관, 이왕직 도서관, 한림서림 등의 서적 목록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상당수 볼 수 있다” “장서의 양뿐 아니라 어느 책도 낙질(落帙)이 없는 것이 특징” “우리나라 도서관사상 그 유례가 드문 문중문고”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이러한 평가 외에도 필자가 덧붙이고 싶은 인수문고의 특징은 역사서를 유달리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부 1813책이라는 분량이 그 점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 2책)’ ‘고려사(高麗史, 70책)’ ‘여사제강(麗史提綱, 13책)’ ‘편찬려사(編纂麗史, 25책)’ ‘국조보감(國朝寶鑑, 28책)’ ‘해동역사(海東繹史, 6책)’ ‘한력대사략(韓歷代史略, 3책)’ ‘소화외사(小華外史, 6책)’를 비롯해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 2함16책)’ ‘한서(漢書, 30책)’ ‘후한서(後漢書, 2함16책)’ ‘진서(晋書, 3함20책)’ ‘송서(宋書, 2함16책)’ ‘남제서(南齊書, 1함6책)’ ‘요사(遼史, 2함12책)’ ‘금사(金史, 4함20책)’ ‘원사(元史, 8함40책)’ ‘명사(明史, 8함80책)’ 등을 망라하고 있다.

왜 이렇게 역사책을 많이 모아 놓았는가? 역사서는 인간사의 다양한 판례집과 같다. 판례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많이 알아야만 복잡한 상황에서 시비를 제대로 가릴 수 있고, 자기 처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역사책을 섭렵하면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고, 위기상황에서 욕먹지 않는 처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대체로 깐깐해서 불의를 보고 어물쩍 넘어가지 않는 경향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인수문고에 이처럼 유달리 역사책이 많이 수집되어 있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투철한 역사의식을 요청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경기가 불황일 때 TV 사극을 많이 본다는 속설처럼, 시대가 혼돈 상황일 때 남다른 역사의식이 요청되는 법이다.

인수문고의 모태 만권당

인수문고의 기반이 된 만권당의 설립 시기는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 무렵이다. 나라가 망하던 시기에 세운 문고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고 하였던가, 나라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 있고 백성들은 그 산하에서 어찌되었던 살 수밖에 없다. 경술국치를 당했을 때 역사의식이 강한 사람은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벌판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결과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역사의식이 결여된 사람은 일제에 굴복하고 협력해서 그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런데 만주에 가서 총 들고 싸우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일제에 비굴하게 협력하기도 싫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인흥리의 남평문씨들은 그 방도로써 만권당을 세우지 않았나 싶다.

만권당의 일차적인 목적은 남평문씨들의 자녀교육이다. 일제의 한국 병탄 이후 신식 교육기관이 대거 설립되는 상황에서 문씨 집안에서는 일제가 세운 신식 학교에 자녀들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일본 사람이 세운 학교에 자식들을 보내면 결국 자식들은 일본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독자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가지고 설립한 사립학교이자 도서관이 만권당인 셈이다.

학문을 제대로 하려면 책이 많아야 된다. 책을 널리 수집하자! 서울 대구 등지에서 수집한 만권당 책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고가의 책들이었다. 낱권이 아닌 전집으로 이루어진 책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떤 책을 구입하느냐 하는 문제는 수집가의 학문적 수준과 관심 분야에 따라 다르다. 서가에 꽂힌 책들의 종류와 명칭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 분야와 깊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만권당 장서 중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책들을 선별해준 인물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년)이다. 그는 구한말의 유학자요 문장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한국소사(韓國小史)’ ‘한사계(韓史)’ 같은 저서를 남겼다. 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에 건너가서 살았는데, 남평문씨 집안과는 평소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중국 상해에서 머무를 때 만권당 주인의 부탁을 받고 이 책들을 추천해준 것이다. 중국에 망명해 있던 김택영이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역사 분야였던 것 같다. 인수문고에 역사책이 특히 많은 이유도 김택영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때문일 것이다.

김택영이 추천, 구입한 책들을 상해의 배편에 실어보내면 전남 목포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당시 상해에서 목포까지 왕래하는 선편이 있었던 모양이다. 배가 도착했다는 기별을 받으면 문씨 집안에서는 사람을 목포에 보내서 책을 가져와야 했다.

변변한 도로가 없던 시절에 수백권의 책을 운반하는 일도 큰 일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라도 한쪽 끝인 목포에서 경상도 대구까지 서에서 동으로 횡단 운반하는 일은, 서울에서 대구로 운반하는 코스보다 몇 곱절 힘이 더 들었다고 한다. 한반도의 지형적 조건상 영호남 간에는 첩첩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88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도로가 없었음을 감안해두자.

당시 책을 운반하는 수단은 다름 아닌 소달구지였다. 수백권의 책을 실은 소달구지는 목포에서 출발하여 털털거리면서 일단 지리산 남원으로 왔고, 남원에서 다시 함양, 거창의 첩첩산길을 힘들게 넘어 대구 인흥리 남평문씨 만권당에 도착하였다. 당시 열악한 도로사정을 감안할 때 소달구지로 짐을 싣고 오는데 아무리 빨라도 보름은 너끈히 걸렸을 것 같다. 만권당의 책들은 이렇게 모아진 것이다. 엄청난 돈과 시간과 정력이 투자된 결과다.

인흥사 터에 자리잡아

이러한 작업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남평문씨 집안은 어떤 집안인가를 살펴볼 차례다. 만권당 설치는 돈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 자기 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기백, 그리고 당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세상에서 복(福, 재물)과 혜(慧, 지혜)를 모두 갖추기가 어려운 법인데, 남평문씨들은 그런 복과 혜를 다 갖추었던 것같다.

인흥리에 사는 남평문씨들은 시조가 문다성(文多省)이다. 문다성은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장자못가에 솟은 천길 높이의 바위에서 태어났다는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남평면 풍촌리 장자못가에는 시조가 태어났다고 하는 바위인 ‘문암(文巖)’이 우뚝 솟아 있다. 본관인 남평 역시 문씨들이 나주의 남평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남평 문씨의 중시조는 고려말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년)이다. 남평 문씨가 대구에 살기 시작한 것은 문익점의 9세손인 문세근(文世根) 때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500년 전 경기도 파주에서 대구로 옮긴 것이다.

대구에서 다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 현재의 남평문씨 세거지에 들어와 터를 잡은 것은 문익점의 18세손이자, 문세근의 9세손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 1812∼1874년) 때부터다. 160년 전인 1840년대 전후에 인흥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흥에 새롭게 터를 잡은 개기조(開基祖)는 문경호다. 입향(入鄕)이라 하지 않고 개기(開基)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1840년대 당시에 인흥 세거지에는 사람이 사는 동네가 없었고, 문경호가 들어오면서부터 처음으로 문씨들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흥은 조선후기 당시 폐사지였다. 원래 고려시대 인흥사(仁興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가 폐사가 된 상태였던 것이다. 인흥사는 고려시대 일연(一然)스님이 11년간이나 머물렀던 사찰이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여기서 작성하였다고 하며, ‘삼국유사’의 상당 부분과 불경까지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인흥사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현재 남평문씨의 종손인 문정기(文定基)씨가 살고 있는 집터는 인흥사의 대웅전 자리라고 전해진다. 종가의 문간채 앞에 있는 우물 이름이 고려정(高麗井)인데, 고려시대 인흥사 시절부터 사용되던 우물이다. 세거지 앞의 밭 가운데 있는 석탑도 인흥사 유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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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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