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女難에 빠진 윤씨, 수지킴 家의 죽음, 안기부의 인격살인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입력2004-11-15 1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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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의 신상옥-최은희 납치 사건이기를 기대했던 안기부 ● “윤씨는 북한대사관에서 탈출해 온 것이 아니라, 미국대사관에서 데려왔다” ● 사건 당시 북한대사관은 범행을 부인,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 싱가포르 주재 외교관들은 윤씨의 행적을 의심, 안기부 직원들과 갈등 ● 안기부가 윤씨 기자회견을 열라고 하자, 李長春 대사가 결사 반대 ● “윤씨는 안기부 조사에서 횡설수설한다는 이유로 상당히 맞았다.” ● 진실을 알고도 은폐한 정보기관, 김여인의 人權을 방기한 안기부 ● “안기부와 홍콩 경찰의 對北 커넥션이 윤씨 수사를 막았다.” ● 윤씨는 방송사 PD, 교도소 敎化활동가 등 여러 여성과 동거 및 결혼 ● 윤씨는 여성의 도움으로 일어나, 그 여성과 갈등을 빚으면 헤어졌다. ● 윤씨, 臺灣 여가수의 도움으로 上海 浦東지구 분양사업 펼치기도 ● 윤씨, 모 언론사 사장의 도움으로 지문인식시스템 개발 회사 인수 ● 윤씨 회사는 한때 전직 경제부처 장관을 회장으로 영입했다. ● 김여인 오빠의 비극적인 죽음, “나와 우리 가족은 정말 억울하다” ● 법률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윤씨는 무죄로 석방될 가능성이 높다. --------------------------------------------------------------------------------------

    형법 제250조는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15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살인할 의도를 갖고 사람을 죽였더라도 15년 동안 수사기관을 잘 피해다녀 기소되지 않으면, 그는 ‘합법적으로’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공소시효 만료를 두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서울지검 외사부(박영렬 부장검사)에 의해 살인죄로 기소된 ‘불행한 사나이’가 있다. 윤대직(가명·43)씨가 바로 그 장본인.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에 따르면 윤씨가 살인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5년 전인 1987년 1월2일부터 3일 사이다.

    윤씨는 결코 단순한 살인 용의자가 아니다. 기소되기 전 그는 ‘미래의 빌 게이츠’로 불릴 정도로 주목받는 벤처사업가였다. 그가 이끄는 회사는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이모씨를 회장으로 모셨다(현재는 퇴직). 그의 회사는 지문인식이라는 신기술을 개발해 왔는데, 이 기술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이 기술로 인해 그는 여러 차례 국내 언론에 보도됐고, CNN과 AP 등 외신에도 보도됐다. 이 벤처사업가가 살인혐의 시효 만료를 채 두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기소된 것이다.

    살인죄 시효 만료 51일 前에 기소

    내년 1월3일만 되면 영원한 자유인(無罪)이 될 수 있었을 윤씨는 왜 살인혐의로 기소된 것일까. 윤씨 사건에는 5공 시절 서슬이 시퍼렇던 안기부의 위세가 숨어 있다. 안기부와 관련된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윤씨 사건을 덮고 있는 것이다.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와 연결돼 있는 윤씨 사건의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해, 기자는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취재수첩을 다시 열었다. 윤씨 사건과 기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윤씨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한국 현대사를 살펴보자.



    윤씨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보름 전인 1986년 10월14일 신민당의 유성환(兪成煥) 의원이 “88서울올림픽에 동구국가를 참여케 하려면 우리의 국시(國是)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86년 5월3일 인천에서는 대규모 노동자 시위가 있었는데(5·3 인천사태), 정부는 배후자로 문익환(文益煥) 목사를 지목해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문목사 사건은 1986년 하반기 한국의 핫이슈가 됐다. 문목사 구속과 유의원의 국시 발언은 한국사회가 권위주의적인 5공의 종말을 고하고 민주화로 가는 거대한 진통의 시작이었다.

    그 이듬해인 1987년 1월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에서는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군이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민주화의 봇물을 터뜨렸다. 그해 6월 한국은 민주화운동으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마침내 6·29선언을 발표한다.

    윤씨 사건은 민주화세력과 권위주의 정권세력이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점에 일어났다. 북한에 납치됐던 신상옥(申相玉)·최은희(崔銀姬)씨 부부가 1986년 3월13일 오스트리아 빈 주재 미국대사관으로 극적으로 탈출해 왔다. 신상옥·최은희씨 탈출사건은 남북대결을 핑계로 정권을 재창출하려 한 권위주의 정권의 ‘방패’가 됐다. 이러한 사건이 또 한번 일어난다면, 권위주의 정권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대북공작은 물론이고 정권 재창출을 위한 국내 정치공작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윤씨 사건은 이러한 정치적 구도에서 발생했다.

    윤씨 사건은 북한 공작조직에 의한 윤씨 납북 미수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서울지검 외사부가 추정한 김옥분씨 피살 시점(1987년 1월2일)으로부터 6일째 되는 1987년 1월8일자 국내 신문을 통해 처음 보도되었다. 국내 신문은 1면 혹은 사회면 사이드 톱으로 ‘홍콩 교민(윤씨를 지칭), 납북중 극적 탈출’ ‘우리 상사원(윤씨), 납북중 극적 탈출’ “살아서 돌아온 게 꿈만 같다” 등의 제목을 붙여 윤씨 사건을 보도했다.

    (注: 이때 윤씨는 살인 혐의를 전혀 받지 않은 때라 실명과 함께 그가 관계한 회사 이름 등이 전부 공개됐다. 지난 11월13일 서울지검 외사부는 윤씨를 기소하면서 연 기자회견에서 윤씨의 실명과 그가 관계한 회사 이름을 공개했고, 언론 역시 사실대로 적었다. 그러나 현재 윤씨는 피의자 신분이므로 여기에서는 가명으로 표기한다. 그와 관계된 사람과 그가 관계한 회사 이름도 이니셜로 처리한다).

    포트빌 포트가 19번지

    당시 언론에 보도된 북한의 윤씨 납북 기도 미수사건을 상세히 살펴본다.

    법인 설립후 윤씨는 사업자금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김여인이 일본의 친구에게서 빌려왔다며 500만엔(당시 환율로 약 4000만원)을 주었다. 윤씨는 이 돈으로 홍콩 주재 한국총영사관이 들어 있는 코리안센터(韓國大廈) 103호에 ‘유나이티드 모션 픽쳐’의 사무실을 준비했다. 이 사무실은 1987년 1월15일 개업할 예정이었다.

    김여인이 윤씨에게 사업자금을 제공한 것은 윤씨의 사무실을 한국 총영사관에 접근하는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창 사무실 개업을 준비하던 1987년 1월2일 일본에서 온 조총련 공작원 두 명이 윤씨의 아파트로 찾아와, 김여인을 데리고 사업 이야기를 하겠다며 김여인과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다른 방에 있던 윤씨를 불러 담배를 사다 달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윤씨가 담배를 사갖고 돌아오니 세 사람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1월3일) 사라졌던 조총련계 남자 한 명이 아파트로 찾아와 윤씨에게 “김여인이 부채를 갚지 않아 싱가포르로 데려갔으니, 당신이 싱가포르에 와서 대신 부채를 갚겠다는 각서를 쓰고 부인을 데려가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윤씨는 부인을 찾아올 생각으로 그 다음날(1월4일) 유나이티드 에어(UA) 805편을 타고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했다. 싱가포르 공항에는 한 여인이 윤씨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마중나와 있었다. 김여인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여인은 윤씨를 샹그리라(Shangri-La) 호텔로 안내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월5일 이 여인이 샹그리라 호텔로 윤씨를 찾아와 ‘포트빌 포트가(街) 19번지(19 Fortville Fort Rd.)’라고 씌어 있는 쪽지를 주며 찾아가라고 했다. 이 주소지로 찾아가자, 그곳에는 북괴대사관이 있었다. 북괴대사관임을 확인한 윤씨가 들어갈 것을 망설이자, 안에서 그 여인이 나타나 들어오라고 해 따라들어갔다. 이 여인은 북괴대사관 공관원의 부인으로 보였다. 북괴대사관 안에서 윤씨는 리창용이라고 하는 북괴 대사대리를 만났는데, 리창용은 이렇게 협박했다.

    “부인을 만나려면 평양에 가야 한다. 그전에 당신은 유고로 가서 우리 안내원을 만나 스위스로 가라. 그리고 스위스에서 ‘나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문익환 목사와 유성환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그런데 검찰이 두 사람을 구속하고 수사를 확대해 홍콩으로 피신해 있다가 이렇게 정치 망명을 하게 된 것이다. 최근 서방으로 탈출한 신상옥·최은희는 남조선에서 살해되었다’고 밝혀라.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부인을 만날 수 없고, 한국에 있는 당신의 가족도 죽는다.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부인을 다시 만날 수 있고, 홍콩에서의 사업자금도 지원해 주겠다. 탈출할 생각은 아예 말라.”

    이러한 협박을 받고 나온 윤씨는 숙소를 좀더 작은 콕피트(Cockpit)호텔로 옮기고, 다시 리상용 북한 대사대리를 만나 유고행 비행기를 예약하러 여행사에 갔다. 그러나 표가 없어 사지 못하고 호텔로 되돌아왔다. 그러다 그날 오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윤씨는 콕피트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

    북한대사관은 범행 부인

    윤씨의 부인 김옥분은 윤씨보다 여섯 살이나 많지만 체구가 작고 예쁘장했다. 일부 언론은 이런 사실에 주목해 북한이 미인계를 써서 윤씨를 납치하려 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보도를 진실로 믿은 것으로 보였다. 외무부의 김흥수(金興洙) 대변인이 “과거 북괴는 영화배우 윤정희(尹靜姬)씨 납치 기도, 신상옥·최은희씨 납치 등 수많은 불법 납치를 자행했다. 이러한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을 즉각 중단하라”는 논평까지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은 전혀 달랐다. 북한대사관은 “윤씨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우리는 어떠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당시 신문 보도). 하지만 북한의 주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윤씨가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해온 것은 1월5일 오후고, 국내 신문이 윤씨 사건을 보도한 것은 1월8일이다. 이 3일간 윤씨는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에서 여러가지 조사를 받았다. 윤씨 사건에는 북한이 개입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안기부도 조사에 참여했다. 그런데 윤씨 조사에 참여했던 외무부 직원들에 따르면 이 3일 동안 싱가포르 대사관에서는 안기부와 외무부 직원들 사이에 엄청난 의견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언론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외무부와 안기부 직원간의 대립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윤씨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인 1월8일 안기부는 윤씨를 태국의 방콕으로 데려가고, 홍콩에 있는 한국 특파원들을 방콕으로 불러 윤씨 기자회견을 가졌다. 안기부가 윤씨에 대한 기자회견을 한다면, 상식적으로 기자회견지는 사건 발생지인 싱가포르여야 한다. 그런데 안기부는 방콕으로 옮겨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이에 대해 싱가포르대사관에 근무했던 외교관들은 하나같이 “이장춘(李長春) 대사를 비롯한 외무부 공무원들이 윤씨 기자회견을 싱가포르에서 여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방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윤씨는 “북괴의 리창용 대사대리는, 이름을 ‘현정길’로 바꾸고 외출시에는 안경을 끼고 다니고 수염을 길러 일본인 행세를 하라고 요구했다.” “당신(윤씨)은 이미 우리 돈을 썼고 우리 조국에 왔으니 서울에 가도 죽는다고 협박했다.” “한국에서 요즘 벌이고 있는 평화의 댐 건설 모금에 대해 (리창용은) 돈 없는 정부의 인민 착취라고 비방했다.” “그들은 내 처가 지상낙원인 평양에 있다고 말했다. 내가 처의 소재지가 어째서 일본·싱가포르·평양 등으로 종잡을 수 없냐고 묻자, 그들은 미안하게 됐다고 얼버무렸다”고 말했다.

    1월9일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한 윤씨는 귀빈실에서 또 기자회견을 갖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반공(反共)의 참 의미를 이해 못했는데, 이번 일로 반공은 바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수염을 깎지 않은 텁수룩한 모습으로 기자회견을 한 윤씨는 회견 내내 오른손으로 가슴을 문질렀다. 기자들이 “왜 가슴을 문지르는가”라고 묻자, 윤씨는 “그동안 너무 공포에 질려 심장이 울렁거린다”고 대답했다. 이날 기자회견을 끝으로 윤씨 납북 미수사건에 관한 기사는 신문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윤씨가 서울에 도착한 날로부터 17일째 되는 1월26일, 김옥분씨가 윤대직씨와 함께 살았던 홍콩 침사추이 감파리도(道) 러푸아파트(樂福大廈) 9층 13-A호의 안방 침대 밑에서 목 졸려 숨진 시체로 발견되었다. 김여인은 얼굴에 베개 커버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목 부분이 여행용 가방을 묶는데 쓰는 끈으로 졸려 있었다. 홍콩 경찰은 사망 원인을 교살(絞殺, 목을 졸라 질식사시키는 것)로 판단했다. 김여인은 옷을 입은 채였고, 집안에는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1월27일자 국내 언론은 ‘납북 미수사건 윤대직씨 처 김옥분 여인 홍콩서 피살체로 발견’ ‘홍콩의 아파트 침대 밑에서’ ‘홍콩 경찰 2주 이전에 타살된 것으로 추정’ 등의 제목을 붙이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덮혀

    윤씨의 진술대로라면 김여인은 홍콩을 떠났어야 하는데 그녀는 자신의 여권과 함께 윤씨와 살던 아파트에서 피살체로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북한 공작조직(혹은 조총련 조직)은 윤씨가 김여인을 찾아 싱가포르로 출발한 후에 김여인을 죽여 아파트로 옮겨놓은 것일까? 북한 공작조직이 김여인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면, 이들이 김여인을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윤씨 납북 미수사건을 크게 보도한 언론들은 김여인 피살사건에 대해 갖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김여인이 피살된 이상 윤씨를 데려온 안기부는 한국 및 홍콩 경찰과 협조해 김여인 피살 부분에 대해 수사했어야 한다. 그러나 윤씨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언론이라도 추적에 나섰어야 하는데, 언론마저도 후속 보도를 하지 않았다. 이로써 윤씨 납북 미수 및 김씨 피살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까맣게 잊혀지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잊혀지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김여인이 피살체로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있기 11일 전인 1월16일 동아일보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받다 사망했다는 것을 특종보도했다. 이 보도를 계기로 민주화세력과 권위주의정권은 치열한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해 4월13일 5공 정부는 “13대 대통령 선거는 현행 헌법에 의해 간접선거로 하겠다”는 내용의 ‘4·13호헌(護憲)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민주화세력은 직선제로의 개헌(改憲)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에 들어갔다. 이 시위 도중 연세대생 이한열(李韓烈)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돼, 그 유명한 6월 시민투쟁이 전개되었다. 친(親)정부적인 언론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언론은 지면을 통해 민주화세력을 지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윤씨 납북 미수 사건과 김여인 피살사건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쉽게 잊혀졌을 가능성이 높다.

    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만 8년 4개월이 지난 1995년 5월 초 한 선배 언론인으로부터 요동치는 한국 현대사 속에 묻혀버린 이 사건을 취재해 보라는 귀띔을 받았다. 1987년 1월, 기자는 4학년 진급을 앞둔 대학 복학생이었다. 따라서 웬만한 사건은 기억할 수 있는데,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이 사건은 기억나지 않았다. 1987년 당시 이 기사를 썼던 홍콩 특파원들도 “그런 기사를 쓴 것 같은데,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이 사건은 까맣게 잊혀져 있었다.

    미국대사관에서 “데려가라” 연락

    기자는 1987년의 신문을 뒤져 납북 미수사건으로 시작됐다가 살인사건으로 변질된 후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확인했다. 구미가 당긴 기자는 취재를 결심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기자는 외무부를 찾아가 1987년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했던 외교관부터 찾았다. 기자는 두 명의 외교관을 만났는데 그들은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말이다.

    “윤대직은 종합상사에서 파견된 상사원(S통상 홍콩본부장)인 것처럼 보도됐는데, 그것은 엉터리다. 그는 무역회사 상사원이 아니다. 당시 우리는 한국대사관으로 온 윤대직을 여러 각도로 조사했는데, 그는 횡설수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공무상 취득한 일이라 다 말할 수 없지만, 또 지금은 증명할 증거도 없는 상태지만, 아무튼 당시 우리는 윤씨가 김여인 피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로 인해 외무부는 싱가포르에서 윤씨 기자회견을 열라는 안기부와 크게 마찰을 빚었다. 김여인이 피살체로 발견된 후 윤씨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안기부의 입김 때문이다.”

    윤씨가 김여인 피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안기부는 왜 윤씨를 경찰에 넘겨 수사하게 하지 않았나. 질문은 이어졌지만, 이 외교관은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며 입을 닫았다. 기자는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했던 또 다른 외교관을 만났다. 그의 말이다.

    “윤씨는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바로 한국대사관으로 도망쳐 왔다고 주장했고 언론 또한 그렇게 보도했는데,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윤씨는 북한대사관이 아니라 미국대사관에서 왔다. 당시 우리는 미국대사관으로부터 ‘부인을 찾기 위해 북한대사관에 갔는데, 북한이 자기를 납치하려고 해 미국대사관으로 도망쳐왔다고 하는 한국인 남자가 있으니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고 미국대사관에 가서 윤씨를 데리고 왔다. 나는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윤씨를 미국대사관에서 데려온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윤씨는 횡설수설 일관성 없는 진술을 했는데, 특이한 것은 그가 갖고 있던 한국 여권에 홍콩 출국 도장이 두 개 찍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윤씨는 1월4일 싱가포르에 도착했으니 그가 홍콩을 떠난 것은 1월4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의 여권에는 1월3일 홍콩을 출국했다가 그날 입국하고, 다시 1월4일 홍콩을 출국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우리는 윤씨에게 ‘1월3일 홍콩을 출국했다 다시 입국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윤씨는 ‘원래는 1월3일 싱가포르로 오기 위해 홍콩공항에서 출국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런데 비행기가 고장이 나 출발이 하루 늦춰졌다. 그래서 입국 도장을 찍고 다시 홍콩 시내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날 나는 항공사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인 1월4일 싱가포르에 왔다’고 해명했다(그러나 서울지검 외사부는 이 호텔이 두 사람이 살던 집에서 불과 2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밝혔다).

    여기서 우리들은 ‘비행기 출발이 하루 늦춰졌으면 집에 가서 자지, 왜 호텔에서 잤느냐?’라고 물었다. 윤씨는 ‘아내를 데려간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올지 몰라 호텔에서 잤다’고 대답했다. 우리가 ‘아니, 연락이 오면 집으로 오지, 아내를 데려간 사람들이 항공사에서 잡아준 호텔을 어찌 아느냐’라고 묻자, 윤씨는 ‘연락은 호텔로 오게 돼 있었다’고 우겼다. 윤씨의 진술은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윤씨의 주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외무부 직원들은 윤씨의 진술을 신뢰하지 않았으나, 안기부는 윤씨의 진술을 믿으려고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윤씨의 진술을 믿으려 한 것은 남모씨를 비롯한 싱가포르에 있는 안기부 직원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안기부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싱가포르 주재 안기부 직원들에게 윤씨의 진술이 사실일 수도 있으니 좀더 알아보라고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본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안기부 직원들은 윤씨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그러자 이장춘 대사가 강력하게 제동을 걸고 나섰다.

    김여인의 가족 추적

    이에 대해 안기부는 이대사 앞으로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 명의로 된 공문을 보내 기자회견을 열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대사는 총무처에 ‘안기부장이 외무부 직원(이대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지 유권해석을 해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면서까지 맞섰다. 때문에 윤씨의 기자회견은 싱가포르가 아닌 방콕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외무부 직원들의 기억이다(이대사는 2000년 2월10일 문화일보에 외교통상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게재하는 글을 쓰고 사퇴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대사는 매우 꼬장꼬장한 사람이다).

    기자가 이 사건을 취재할 때인 1995년 5월 이대사는 필리핀 주재 대사를 맡고 있었다. 기자가 이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찾아가겠다”고 하자, 그는 “오지 마라. 그 사건의 주역은 우리가 아니라 안기부다. 나는 그 사건의 주인공도 아닌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하며 끊었다. 당시 안기부장은 장세동씨고, 해외와 북한을 담당하는 2차장은 이학봉(李鶴捧)씨였다. 기자는 이들에게도 전화를 걸었으나 이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을 전해왔다.

    외무부 취재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기자는 취재 범위를 확대했다. 1987년에 나온 기사 중에는 윤씨의 주민등록 주소와 김여인의 본적지 주소가 실린 것이 있었다. 기자는 먼저 김여인의 가족을 찾아보기로 했다. 김여인의 본적지가 있는 군청의 호적계로 전화를 걸어 본적지 주소를 불러주고 “호주 이름을 알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직원은 “그 본적지는 지금은 충주시로 바뀌었다”며 “호주(김여인의 부친)는 1974년에 사망했고, 호주의 아들이 한 명 있다. 아들 이름은 김만식이다”라고 알려주었다(당시만 해도 이 정도는 협조해 주었다).

    ‘김만식이라는 이름은 알았는데 이 사람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기자는 무작정 충주시 전화국으로 114를 돌려, 김만식이라는 이름을 대고 그 이름으로 등록된 전화번호를 전부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전화국 직원은 12명의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이 번호를 들고 하나씩 다이얼을 눌러 “김옥분씨의 오빠 되는 분의 집입니까?” 하고 물어갔는데, 다섯번째로 다이얼을 돌렸을 때 “왜 김옥분에 대해 물어요” 하는 날카로운 외침을 들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김만식씨의 부인(李明水)이었다. 이 부인은 쌓인 한을 쏟아냈다.

    김만식씨의 抱恨

    “우리 시누이를 간첩으로 몰 때 충주시 경찰서에서 얼마나 우리를 못살게 굴었는가. 우리 애들은 ‘간첩의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남편은 매일 술만 마시고 다녔다. 그러다 시누이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니까 못살게 굴던 사람들이 나타나 손을 싹싹 빌고 돌아갔다. 그후로는 단 한번도 얼씬하지 않더라. 우린 너무 억울하다. 그런데 뭐 더 조사할 게 있다고 기자가 전화를 거느냐. 우린 정말 억울하다!”

    기자는 부인을 달래 집주소를 알아내고, 1995년 5월24일 충주시로 내려갔다. 충주시는 작은 도시인지라, 택시기사는 주소만 갖고도 김여인의 오빠 집을 찾아주었다. 구멍가게를 겸한 집이었는데, 한눈에 궁색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집에는 부인만 있었다. 부인은 “남편은 택시 운전을 하는데 곧 올 것”이라고 했다. 삶의 고단함에 지친 부인은 기자를 경계하면서도 넋두리를 쏟아냈다.

    “시누이를 만나기 전에 윤대직에게는 다른 여자한테서 낳은 딸이 있었다. 사건이 나기 전 시누이와 윤대직은 윤대직의 딸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었다. 그때 시누이도 전 남편인 중국인 우민밍(吳敏明)과의 사이에서 낳은 ‘쏘냐’라는 딸이 있었다. 시누이는 홍콩에서 윤대직과 동거에 들어가며 쏘냐를 우리집에 맡겼다. 그런데 시누이가 죽은 사실이 알려진 후 우민밍이 이곳에 와 쏘냐를 데려갔다. 윤대직의 딸도 우리집에 잠깐 있었는데 사건이 있은 후 윤대직의 모친이 데려갔다. 우리는 시누이의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시체를 거두지 못했다. 홍콩에서는 관계기관을 통해 ‘시누이 시신을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왔으나, 우리는 홍콩에 갈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라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 시누이가 쓰던 물건도 돌려받지 못했다.”

    김만식씨는 저녁 무렵 집으로 들어왔다. 김씨는 깊게 한숨을 쉬더니 “그때 일은 악몽이었다. 모욕과 구타를 당한 것은 좋다. 어머니는…, 설사 어머니가 간첩이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한쪽 방에서 조사받을 때 들어보니 옆방에서 어머니를 조사하는 수사관들이 ‘이년 저년’하고 있었다. 그들도 어머니가 있을 텐데…, 간첩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는 상소리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수사관들로부터 어머니가 욕을 듣는 것은, 내가 맞는 것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그러다 동생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싹 빌고 사라졌다. 그때 우리 어머니는 대한민국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일본 손님을 맞는 호스티스

    이어 김씨는 “나는 내 동생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진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내 동생 사건의 진실과 우리 가족의 회한이 제대로 알려지기 바란다”며 동생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김옥분은 아주 고단한 삶을 살아온 여인이었다(1987년 윤씨 사건 당시 언론은 중간중간에 김여인의 당시 행적으로 짐작되는 사실을 게재했다. 2000년 2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 팀도 이 사건을 취재했다. 여기서는 김만식씨의 이야기와 당시 신문 기사 그리고 SBS가 취재한 자료를 혼합해 김여인의 행적으로 정리한다).

    김옥분은 1남5녀 집안의 둘째딸인데, 위로 언니와 오빠인 김만식씨가 있다. 1952년생인 김옥분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다 1972년 자신의 입이라도 덜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시내버스의 안내양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술집 종업원으로 변신했다. 호스티스가 된 것이다. 얼굴이 예쁘장한 김여인은 일본인의 현지처가 되었고 서울 장충동에 살림을 차렸다. 이때부터 김여인은 가끔 고향에 내려오면 어머니 앞에 당시로서는 매우 큰돈인 10만원 혹은 20만원을 내놓고 갔다. 가족들은 김여인이 하는 일을 알았으나 돈이 고마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일본인의 현지처 노릇을 하며 김여인은 기초적인 일본어를 익혔다.

    현지처 생활을 통해 간접적으로 외국 생활을 익힌 김옥분은 1970년대 중반 외국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홍콩 남자와 위장결혼하여 홍콩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1976년 9월30일 김옥분은 홍콩인 량칭화(梁靑華)와 위장결혼하는 형식으로 홍콩 여권을 발급받아,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량칭화와 곧 이혼하고 한국 술집인 ‘코리아가든’ ‘리무진’ ‘가림’ 등에서 호스티스 생활을 했다. 이때 김여인이 사용한 이름이 ‘수지킴’이다. 김옥분은 일본어 회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한국 손님과 함께 일본 손님도 자주 맞았다고 한다.

    1981년부터 김옥분은 이따금 일본에 다녀왔다. 때문에 그녀가 조총련과 접촉했다면 그 시기는 이때부터일 것이다. 그러나 김옥분과 가까이 지냈던 홍콩의 동료들은 “홍콩 국적을 갖지 못한 사람은 체류 기간을 늘이기 위해 홍콩 밖으로 나갔다 올 필요가 있었다. 술집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도 풀 겸 주로 일본에 가서 놀다 오곤 했다”고 말하고 있다. 김여인은 홍콩 국적을 가졌으므로 체류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었으나 친구들과 어울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일본 여행을 자주 했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이다.

    1982년부터 김여인은 마카오의 카지노에 출입했는데, 여기서 많은 돈을 탕진했다. 이 무렵 김옥분은 여러 남자와 짧은 동거를 거듭하다 민첩건축공사(敏捷建築公司)와 합요투자유한공사(合耀投資有限公司)·유환유한공사(裕有限公司)를 운영하는 홍콩사람인 우민밍(吳敏明)을 만나면서 장기 동거에 들어갔다. 우민밍은 본처가 있었으므로 김옥분은 그의 ‘세컨드’가 된 것이다(1995년에 만났을 때 김만식씨는 우민밍씨가 주고 간 명함을 보관하고 있다가 기자에게 내밀었다). 우민밍은 김옥분에게 생활비를 대주는 조건으로 술집에 나가지 말 것을 요구했다. 우민밍의 첩이 된 후 김옥분은 고단한 술집 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둘 사이에서는 딸 ‘쏘냐’가 태어났다.

    김만식씨의 말이다. “우민밍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면세 술을 사갖고 대여섯 번 우리 집에 왔었다. 처가 내놓은 음식도 잘 먹고…, 그런 사람과 헤어진 동생이 바보다. 술집에도 나갔고 현지처도 했기 때문에 동생에게 바람기가 있었다. 동생은 우민밍이 본처에게 갔다가 자기에게 오는 것에 짜증을 내고 생활비를 더 달라고 요구하며 싸웠을 것이다. 그러다 우민밍이 본부인에게 동생과 바람피운 것을 들켜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동생은 다시 술집에 나간 것 같은데, 그 얼마후 윤대직을 만났다. 우리는 옥분이가 윤대직과 함께 고향에 나타날 때까지 우민밍과 헤어진 것을 알지 못했다.”

    1986년 중반 김옥분은 일식집인 ‘마쓰(松)’에서 일하다 3개월 예정으로 일본 여행을 준비했다. 장기간 집을 비우게 된 김여인은 빈집을 봐줄 사람을 찾았는데 이때 작은 백화점을 운영하는 한국인 김모씨가, 비디오사업을 하기 위해 홍콩에 온 윤대직을 소개했다. 아무 연고 없이 사업을 위해 홍콩에 온 윤대직은 김여인이 장기간 비우기로 한 집에 잠시 기숙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두 사람의 동거와 결혼으로 이어졌다. 10월16일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했다. 이어 두 사람은 일본을 여행한 후 한국에 들어가 김여인의 친청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윤대직 납북 미수사건과 김옥분 피살사건은 두 사람의 결혼 시점에서부터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일어난 것이다.

    홍콩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윤대직이 운영할 ‘유나이티드 모션 픽쳐’ 사무실을 코리안센터 103호에 설치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에 필요한 자금은 김여인이 제공했다. 이 무렵인 12월24일 김여인이 한때 종업원으로 근무했던 일식집 마쓰로 일본인 남자 두 명이 김여인과 같이 찾아왔다. 마쓰 종업원 U씨에 따르면 김여인은 “홍콩에 처음 온 관광객인데 길을 몰라 내가 안내해 주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U씨는 “두 일본인이 나이가 들어보이고 김여인과 초면은 아닌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일본인은 1987년 1월2일 김여인과 윤씨의 아파트로 찾아와 “빌려간 돈을 어디다 썼느냐…”며 고함을 쳤다고 한다(당시 신문에 실린 내용).

    홍콩 경찰은 미제사건으로 처리

    이 무렵 김여인은 고향 충주시로 전화를 걸어 황급히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김여인의 올케는 “시누이는 단 한번도 고향집에 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는 돈을 부탁해 기억을 한다. 시누이는 ‘연말연시라 돈이 마련되지 않는다. 곧 갚을테니 300만원 정도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들어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윤대직씨 납북 미수사건이 일어났다. 김만식씨는 그 직후 안기부 충북도지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1978년부터 1982년 사이 나는 동아건설·삼성건설 등에 목수로 채용돼 사우디 건설 현장에 나가 일한 적이 있었다. 안기부는 이러한 내 경력을 찾아내 해외에 있을 때 북한과 접촉하지 않았냐고 채근했다. 동생과 나는 가난 때문에 외국생활을 했는데, 안기부는 외국생활을 근거로 간첩 혐의를 조사한 것이다. 정말로 나와 동생이 빨갱이였다면, 우리집에서 난수표나 무전기 같은 거라도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다 홍콩에서 동생이 피살체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안기부 직원들은 두손을 싹싹 빌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동생이 진짜 간첩이라면 그들이 사과할 리가 있겠는가?”

    김옥분이 피살체로 발견되자, 즉각 홍콩경찰은 수사에 착수했다. 명보(明報)를 비롯한 홍콩 언론들은 윤씨 납북미수 사건이 한국 언론에 크게 보도된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사건에 북한이 개입했을 가능성 등을 제기했다. 홍콩 경찰은 우민밍을 비롯해 김옥분과 살다가 헤어진 남자들에 대해 용의점을 두고 집중 조사했으나, 혐의점을 찾는 데 실패했다. 홍콩 경찰은 일본에까지 가서 용의자들을 조사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홍콩 경찰은 한국에 대해 윤씨를 조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여인 집에 드나들었던 필리핀인 파출부와 김여인의 친구들에 따르면 1월2일 낮 김여인과 친구들은 김여인 집에서 오징어 볶음을 해먹었다. 그런데 김여인의 사체를 부검한 홍콩 경찰은 김여인의 위에서 오징어를 찾아냈다. 그렇다면 김여인은 일본인이 찾아온 1월2일 밤이나 1월3일 새벽 사이 자기집에서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왜 윤씨는 1월3일 필리핀인 가정부를 찾아가 “이사를 갔다. 이제는 청소하러 올 필요없다”며 집안 열쇠를 찾아갔는지 의문이 남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과 홍콩은 범인 인도협정을 맺고 있지 않다. 당시 홍콩은 안기부의 대북(對北)전선 전초기지였다. 최은희·신상옥씨는 1978년 1월14일과 7월19일 홍콩에서 각각 북한으로 납치됐다. 때문에 홍콩 주재 한국총영사관에는 상당수의 안기부 요원들이 파견돼 있었다. 홍콩 정청(政廳)에는 정보기관이 없으므로, 홍콩에서는 경찰이 정보업무를 담당한다. 안기부 요원들은 홍콩 경찰과 자주 접촉하며 북한 관련 첩보를 수집했다. 이 시기 해외에서 귀순하는 상당수의 북한인들이 홍콩을 통해 한국으로 왔는데, 이는 안기부와 홍콩경찰간의 오랜 신뢰관계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신뢰가 윤씨에 대한 홍콩 경찰의 조사를 막았다. 한 소식통은 “홍콩 경찰은 비교적 관계가 좋았던 안기부측이 적극적으로 막았기 때문에 윤씨를 조사하지 못했다. 안기부는 윤씨를 사지(死地)에서 탈출해온 반공투사로 만들어놓았으니 윤씨가 살인 용의자로 조사받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설사 안기부가 막지 않았더라도 한국과 홍콩간에는 범인 인도협정이 없으므로 한국은 윤씨를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 한국에서는 경찰이 자발적으로 윤씨를 수사해야 하는데 한국 경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씨는 안기부에서 맞았다”

    어느 나라 경찰이든 강력사건이 일어나면 수사본부를 설치한다. 그런데도 사건이 풀리지 않으면 사건이 풀릴 때나 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담당자를 정해 놓는다. 따라서 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풀리지 않은 사건은 수사가 계속되는 ‘미제(未濟, 풀리지 않은)사건’이 되고, 시효가 만료돼 범인 추적을 포기하게 되면 ‘영구미제사건’이 된다. 김여인 피살사건은 현재 홍콩 경찰에서는 미제사건이다. 2000년 1월 이 사건 담당자인 홍콩 경찰의 스페튼 태런트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윤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조사했으나 범인을 찾지 못했다. 윤씨를 조사할 때까지 이 사건 수사는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씨를 제외한 모든 인물에 대한 홍콩 경찰의 조사가 끝날 때쯤 우민밍이 한국 충주시로 날아와 김만식씨를 만났다. 김씨의 말이다. “동생이 없으니 서툰 한국어로 손짓발짓에 필담(筆談)까지 써가며 이야기했다. 우민밍은 경찰 조사를 받느라고 혼이 난 것 같았다. 우민밍은 동생 사망사건을 제법 크게 보도한 ‘명보’를 비롯한 홍콩 신문을 들고 왔다. 우민밍은 한국에 오려고 여러 번 시도했는데, 한국 총영사관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아 이제야 한국에 왔다며 매우 미안해 했다. 그리고 딸 쏘냐를 데리고 돌아갔다.”

    왜 한국은 우씨에게 한국 방문비자를 내주지 않았던 것일까. 그후 기자는 다른 일로 홍콩에 출장갈 때마다 우민밍을 찾아보았으나 전화번호가 바뀌어 실패했다. 홍콩 경찰에게도 김옥분 사건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유감스럽게 기억하는 경찰관을 만나지 못했다.

    납북 미수사건이 일어날 당시 윤대직은 S통상 홍콩본부장으로 보도되었다. 기자는 윤대직씨를 찾아볼 요량으로 전화번호부를 통해 S통상을 찾았는데, 8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이 회사는 같은 이름으로 존재했다. S통상은 비디오가게 등에 비디오 등을 공급해 주는 조그만 회사로 서울 서초구에 있었다. 전화로 위치를 확인하고 이 회사를 찾아가 “윤대직이란 사람이 이 회사에 있었다는데 사실이냐? 그의 연락처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S통상에는 윤대직씨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말이다.

    “윤대직은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었다. 1986년에는 비디오사업이 인기가 좋았다. 윤씨는 우리 회사를 찾아와 홍콩에 가서 잘나갈 비디오를 골라 보내줄 테니 직함을 하나 달라고 해, 우리 회사 홍콩본부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알아서 만들게 했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 회사에 홍콩산 비디오를 공급해 주는 에이전트인 것이다. 당시 언론은 윤씨를 상사원으로 보도했는데 그는 상사원이 아니다. 우리 직원이 아닌 만큼 우리는 그에 관한 서류를 받아두지 않았다. 나는 윤대직이 서울에 온 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안기부에서 조사받으며 많이 맞았다며 가슴을 문지르곤 했다. 그가 김포공항에 도착해 기자회견하는 것을 TV로 보았는데, 그때도 (가슴을) 문지르고 있었다. 서울로 오기 전에도 그는 안기부 직원들에게 많이 맞았던 것 같다.”

    윤씨에 대한 추적 포기

    기자가 “윤씨는 안기부 직원들에게 왜 맞았다고 했는가”라고 묻자, 그는 “윤씨의 말로는 자기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며 안기부 사람들이 가슴을 때렸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S통상에서 윤씨의 주소지를 아는 데 실패한 기자는 다른 방법을 물색했다. 1987년 사건 당시 신문에 난 윤씨의 나이와 주소지를 근거로 추적해 보기로 한 것이다. 당시 나이를 근거로 역산하면 윤씨는 1958년생이 된다. 기자는 한 기관을 통해 언론이 잘못 보도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1956년부터 1960년 생 사이의 남자로 윤대직이라는 이름을 쓰고 신문에 났던 주소지와 연관 있는 남자를 찾았다.

    결과는 매우 싱겁게 나왔다. 1958년 생의 윤씨가 1987년 사건이 일어날 당시와 똑같은 주소지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윤씨의 주소지인 서울시 성동구 B동 일대는 이른바 ‘달동네’다. 윤씨의 귀가 시간이 늦을 것으로 계산한 기자는, 윤씨에게 물어볼 말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김여인을 죽인 사람은 누구냐? 짚히는 사람도 없는가?” “당신은 왜 1월3일 싱가포르행 비행기가 취소됐을 때 집에 들어가지 않고 호텔에서 잤냐?” “김옥분과 일본에 갔을 때 그녀가 조총련계로 보이는 사람을 만난 것을 본 적이 있나?” “안기부 직원들에게 맞은 이유는 무엇이냐?” “김여인은 조총련과 관계했느냐 아니면 일본인 손님과 관계했는가” 등등 질문할 말을 머리에 집어넣은 기자는 자정 무렵 B동을 찾아갔다.

    그러나 뜻밖의 광경에 실색하고 말았다. 윤씨의 주소지 일대 주택가가 아파트를 짓기 위해 모두 철거되었던 것이다. 집이 사라진 땅은 달빛 아래 허연 속살을 반사하고 있었다. 허탈해진 기자는 부근에 있던 B동 파출소로 들어가 당직 경찰관을 붙잡고 “여기에 주소지를 둔 사람들은 어디로 이주했는가?”라고 물었다. 경찰관은 “주소지를 바꾸지 않았다면 알 수가 없는 것 아니냐”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윤씨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한국통신을 찾아가 윤씨나 윤씨 가족이 사용하는 전화번호를 찾아내 실제 거주지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추적은 경찰이나 검찰 같은 수사기관만 할 수 있다. 여기서 기자는 윤씨에 대한 추적을 포기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설사 기자가 윤씨나 그 가족의 실제 거주지를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이때는 윤씨를 만날 수 없었다. 기자가 찾아 헤매던 시절 윤씨는 사기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이다(윤씨의 수감 사실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그때까지 취재한 것을 정리해 기사로 작성했다. 기사는 1987년에 일어난 두 사건을 소개한 후 당시 김여인은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공작원으로 보도됐는데, 김여인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는 것이 주내용이다. 당시 기자는 ‘주간조선’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주간조선’에 실리지 못했다. 편집장이 기사 게재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김여인 사건은 기자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3년 후인 1998년 기자는 ‘시사저널’에서 일했는데 이때 또 한번 게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도 편집장을 설득하는 데 실패해 게재하지 못했다. 그리고 ‘주간동아’에 근무하던 시절 송영언 부장(현 동아일보 논설위원)과 유영을 차장(현 주간동아 부장)의 배려로 이 기사를 싣는 데 성공했다(주간동아 2000년 1월20일자). 사건 발생 시점으로 따지면 만 13년 만에, 취재한 시점으로부터 따지면 4년 6개월 만에 기사화한 것이다.

    김만식씨를 취재하고 주간동아에 처음 이 기사를 게재하는 4년 6개월 사이, 김씨 집안에는 두 가지 큰 일이 있었다. 1987년 안기부의 조사를 받았던 김씨의 모친이 ‘간첩’이라는 한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다. 김여인의 언니도 실성해서 사망했다.

    2000년 1월18일 기자는 주간동아 기사를 읽고 찾아온 SBS-TV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의 남상문(南相汶) PD를 만났다. 남PD는 “수지킴 사건을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기자는 두 가지 당부를 받아준다면 자료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첫째는 김만식씨를 만나되 그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5년전 대면에서 기자는 김씨를 ‘대가 약한 사람’으로 판단했다. 그는 자신과 자기 가족의 억울함을 풀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13년 만에 처음 기사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외부에 자기편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동안 당해온 억울함을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습성이 있다. 더구나 방송을 통해 그의 얼굴과 실명이 나가면 그는 생업을 포기하고 세상을 원망할 가능성이 있다. 둘째로 “김여인이 간첩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런데도 당시 언론은 김여인을 간첩으로 몰았으니 이것만은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남PD는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그는 약속을 지켰다.

    남PD가 찾아갔을 때 김만식씨는 1987년 사건을 다시 조사해 달라는 내용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작성하는 등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김씨를 취재한 후 남PD는 홍콩으로 날아가 김옥분 피살사건을 수사한 홍콩 경찰과 김여인의 친구 등을 만나고, 싱가포르로 이동해 한국대사관에 오래 근무해 윤대직씨 납북 미수사건을 기억하는 직원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해 2월12일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을 통해 “누가 수지킴을 죽였는가”란 제목으로 그가 취재한 것을 방영했다. 이 프로에서 남PD는 기자가 찾아내지 못한 두 가지 사실을 새로 밝혀냈다.

    1987년 모든 언론은 윤씨를 3사 출신의 예비역 대위로 보도했다. 그러나 한 신문만은 “윤씨는 3사 출신임에도 육사 출신으로 행세하고 다녔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김씨가 육사 출신을 가장한 것은 밝혀냈지만 3사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까지는 밝혀내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한 신문은 정보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북괴는 ‘몇 년 전부터 사관학교 출신자를 포섭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북괴는 윤씨가 진짜로 육사 출신인지 알고 김여인을 통해 납북하려 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당시 언론은 윤씨를 3사 출신의 예비역 대위로 보도했기 때문에, 기자도 윤씨를 3사 출신의 예비역 대위로 믿었다.

    그러나 남PD는 윤씨가 사관학교는 물론이고 군대에도 갈 수 없는 중학교 1년 중퇴자라는 사실과 방위병(일등병)으로 제대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따라서 북한의 윤씨 납치 의도와 우리측 정보 관계자의 분석이 정확하다면, 북한마저도 윤씨에게 속은 셈이 된다.

    둘째로 남PD는 윤대직씨를 직접 만나는 데 성공했다. 남PD는 기자가 준 자료를 근거로 윤씨의 주소지를 추적해 집을 찾아냈으나 집에서는 윤씨를 만나지 못하고, 윤씨가 근무하는 한 벤처회사에서 만났다. 뜻밖에도 윤씨는 주목받는 벤처기업의 핵심 간부가 돼 있었다. 남PD는 기자가 묻지 못한 것을 물었으나 윤씨는 답변을 회피했다.

    윤씨는 1987년 사건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관련된 사건을 취재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의 방영 금지를 요청하는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윤씨의 이름과 얼굴을 밝히지 않은 채로 방영하라는 결정을 내려, SBS는 2월12일 이 프로를 방영하게 되었다. 이 프로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프로에 기자도 몇 번 얼굴을 비췄는데 뜻밖의 제보자들이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들은 전화나 이메일로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온 남자가 윤대직씨가 아니냐”고 묻고,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한 여성 독자는 윤대직씨임을 확인한 후, “자기 친구가 윤씨와 결혼하려고 하는데, 친구는 윤씨를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생 출신으로 알고 있다. 친구가 속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제보는 윤씨에 대한 취재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성PD와 결혼 생활

    이번에 서울지검 외사부는 윤씨를 살인 과 함께 사기혐의로 기소했다. 윤씨에게 부가된 사기혐의는 1987년 이후 일어난 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1987년 이후 윤씨는 기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왔는데, 그 삶이 사기 시비로 이어진 것이다. 1987년 이후의 윤씨 인생은 1987년 사건 당시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기자는 1987년 이후 윤씨를 만나 오랫동안 사귀어온 C씨를 만나 소설 같은 윤씨의 인생 유전 이야기를 들었다. C씨에 따르면 이 시기 윤씨는 외국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수입해 복사해서 비디오가게에 공급하는 일을 했다.

    이때 윤씨는 모 방송국의 여성PD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C씨와 D씨 등 윤씨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중1 중퇴자인 윤씨가 여성PD와 결혼한 경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윤씨는 여성PD와의 사이에 아이를 하나 낳았다. 이때 윤씨는 경제사정이 좋았던 듯 한강에서 제트 스키 등을 타며 여가를 즐겼다. 이렇게 잘나가던 윤씨가 1993년쯤 자취를 감추었다. 사기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돼 몸을 숨긴 것이다. C씨는 한참 지난 후 윤씨가 사기죄로 의정부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윤씨는 다른 사람 명의로 은행신용카드를 만들어 돈을 빌려쓰고 갚지 않아 사기죄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윤씨는 1994년 2월에 구속기소돼 1996년 7월까지 옥살이를 했다(기자가 윤씨를 찾아나선 것은 1995년 5월이다).

    이번에 서울지검에 구속되면서 윤씨는 세 명의 변호사를 선임했다. 이중 한 변호인은 1994년 윤씨가 사기혐의로 수감된 데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윤씨는 장인의 집을 잡혀 돈을 빌렸는데 그 바람에 장인의 집까지 날리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윤씨는 PD부인과 이혼했다. 그러나 윤씨는 출소후 이혼을 했음에도, 전 장인에게 진 빚을 전부 갚았다. 윤씨는 배운 것은 없지만 의리가 있고 우정이 무엇인지 아는 괜찮은 사람이다. 검찰은 윤씨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무리하게 기소했다.”

    의정부교도소 수감시절 윤씨는 한 사회단체에 소속돼 재소자 교화활동을 하는 여성과 펜팔을 했다. 윤씨 변호인은 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윤씨가 구치소에 있을 때 만난 사람이 그 여성을 소개해 주었다. 구치소 수감자들은 이 사람을 많이 괴롭혔는데 윤씨가 이를 막아주자,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이 여성을 소개해준 것이다. 그후 이 여성은 윤씨에게 편지를 보내고 사식을 넣어주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윤씨가 출소한 후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다.”

    윤씨와 가까이 지냈던 D씨도 이 여성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은 그 여자가 살던 부천의 전셋집에서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다 윤씨는 월세로 서울의 아파트를 구해 옮긴 후 그 여자 명의로 월부로 그랜저 승용차를 마련했다. 그리고 남은 돈을 사채시장에 넣어 이자를 받았다. 윤씨는 사채시장에서 나온 이자를 그 여자에게 생활비로 가져다주었는데, 어느날 그 여자가 임신한 몸으로 나를 찾아와 ‘윤대직이 생활비를 주지 않는다. 월 70만원씩 내야 하는 아파트 월세도 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소연했다. 이 여자는 괜찮은 사람인데, 인도주의 정신으로 재소자인 윤씨를 돕다가 완전히 인생을 망쳐버렸다.”

    비록 학력은 짧지만 윤씨는 실력은 있었다. 출소후 윤씨는 컴퓨터 분야의 일을 했다. 윤씨는 사기 전과자이므로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윤씨는 이 여성의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어 컴퓨터 등을 샀는데, 카드 대금을 완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쓴 돈이 모두 6500여만원이었다. 당연히 이 여성과 윤씨 사이에는 갈등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서울지검이 작성한 공소장에도 이 여인과 관련된 사기혐의가 올라 있다.

    이에 대해 윤씨의 변호인은 “그 일로 인해 그 여성은 당시에 이미 윤씨를 혼인빙자간음과 사기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사기 부분에 대해서 윤씨는 6500만원을 다 갚아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고, 혼인빙자간음에 대해서도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이번에 서울지검이 만든 공소장에는 이때 윤씨가 다 갚은 6500만원을 사기혐의로 적시됐는데, 이는 이미 검찰에서 무혐의 판정을 내린 것을 재록(再錄)한 데 불과하다. 과거 검찰에서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을 법원이 유죄로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고 말했다.

    윤씨는 이 여인과 호된 갈등을 치르고 헤어졌는데, 윤씨의 친구인 C씨와 D씨 등에 따르면 “그때 윤씨는 그 여성을 미국으로 유학보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윤씨는 중국 상하이(上海)시 푸둥(浦東)지구에 주상복합건물을 지어 분양하는 전혀 새로운 사업을 펼쳤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윤씨 변호인의 설명을 들어본다.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되기 전에 윤씨는 비디오사업을 하며 대만의 한 인기 여가수를 알게 되었다. 그녀를 한국으로 초청한 적도 있었는데, 이 여가수는 윤씨를 ‘오빠’로 부르며 가까이 지냈다. 그후 그녀는 리덩후이(李登輝) 총통과 아주 가까운 유력 집안의 아들과 결혼했다. 이 가수의 남편이 상하이 푸둥지구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가수는 윤씨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 남편이 푸둥지구 개발사업을 하니 참여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윤씨는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에 ‘Q국제무역유한공사’란 회사를 만들고 푸둥지구에 진출하려는 한국 업체를 물색하게 되었다.”

    전과자일지라도 여권이나 비자를 받는데는 제한이 없다(注: 경제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경제인들이 석방 후 외국여행을 하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윤씨는 중국을 들락거리며 푸둥지구 분양(장기 임대) 사업을 했는데, 이때 SBS TV의 아침 프로그램은 윤씨를 초대해 푸둥지구 분양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러던 어느날 중국에 가려고 김포공항에 나갔던 윤씨는 출국정지자로 분류돼 있는 것을 알고 중국으로 가지 못했다. 윤씨가 출국정지자가 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맞서고 있다.

    윤씨를 비난하는 측은 “윤씨가 푸둥지구 분양사업을 한다면서 사업 참여자로부터 수백만원씩 받아썼는데, 실적이 없자 투자자들이 사기혐의로 그를 출국정지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윤씨 변호인은 ‘윤씨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윤씨의 설명에 따르면 안기부가 윤씨의 출국을 막았다고 한다. 안기부는 북한이 상하이에 나타나는 윤씨를 없애 버리려고 한다는 첩보가 있어 윤씨의 출국을 막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씨가 Q국제무역유한공사를 운영할 때 돈을 투자했다 날린 사람들의 사례는 서울지검이 제출한 공소장에 사기 증거로 나열돼 있다.

    이무렵 안기부는 위조달러 유통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때문에 위폐 감별기 제작이 일시적으로 관심을 끌었는데 이때 윤씨가 위폐 감별기를 들고 나타났다. 은행에 가면 지폐 계수기(計數器)를 볼 수 있다. 윤씨가 들고 나온 위폐 감별기는 계수기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위폐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진폐(진짜 지폐)는 특수한 종이와 특수 잉크로 제작된다. 그러나 위폐범들은 이러한 종이와 잉크를 구하지 못하므로, 일반 종이에 일반 잉크로 위폐를 만든다. 따라서 계수기에 특수 종이와 특수 잉크를 구별하는 장치를 만들어 집어넣으면, 계수와 동시에 위폐를 잡아낼 수 있다. 윤씨가 들고 나온 감별기는 이런 방식의 기계였다.

    위조지폐 감별기도 실패

    그러나 세계적으로 위폐를 유통시키는 조직은 훨씬 더 영악하다. 달러는 1달러짜리나 100달러짜리나 크기가 똑 같고 모양도 비슷하다. 따라서 1달러를 100달러로 변조해 100달러 묶음에 집어넣으면, 윤씨가 들고 나온 감별기는 이를 식별하지 못한다. 진폐를 제작하는 데 쓰이는 특수 종이와 잉크는 각국의 정부 기관만 구입한다. 그런데 북한·이라크·이란 등 ‘테러 지원국’의 첩보기관은 그 나라 지폐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수입한 특수 잉크와 특수 종이로 위조달러를 만들고 있다는 첩보가 있다. 윤씨가 들고 나온 감별기는 이렇게 만들어진 위폐는 전혀 식별하지 못한다.

    윤씨의 변호인도 이 부분은 인정했다. 그는 “위폐 감별기는 윤씨가 개발한 게 아니고 중국에서 개발한 것이다. 윤씨는 이를 들여다 약간 개조해 각 은행에 팔려고 했는데, 사업성이 없어 완전 실패했다”고 말했다. 위폐감별기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윤씨는 또 다시 사기 시비에 휘말렸다. 변호인의 설명이다.

    “윤씨가 위폐 감별기 사업을 할 때 E씨가 5000만원을 내고 참여했다. 윤씨는 이 돈을 E씨가 투자한 것으로 알았는데, E씨는 이 돈을 R씨에게 빌려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업이 실패하자 5000만원의 임자인 R씨가 윤씨를 사기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러나 1998년 서울지검은 이 고소건에 대해서도 ‘혐의 없음’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서울지검 외사부는 이번에 윤씨를 기소하며 이 사건을 윤씨의 사기혐의 리스트에 다시 올렸다.”

    윤씨는 정말로 여복(女福)이 넘치는 사람이다. 변호인에 따르면 혼인신고를 하거나 그와 동거를 하다 그의 아이를 낳은 여자는 다섯 명이다. 그외에도 숱한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여복은 윤씨에게 결코 유리한 조건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윤씨 변호인은 “검찰은 윤씨가 사귄 여자가 10여 명도 넘는다며 윤씨를 완전 인간 말종으로 만들어놓았다. 어찌 되었든 윤씨는 여자가 너무 많아서 불행한 사람이다”고 말했다.

    이어 윤씨는 서울 신촌의 한 상가 분양 건으로 또 한번 소동을 겪은 후 가구상을 경영하는 한 언론사 사장 부인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언론사 사장 부인이 운영하는 건물에 지문(指紋)인식장치를 개발하는 G콤(가명)이라는 벤처회사가 세들어 있었다. G콤이 개발하는 지문인식시스템은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이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금인출 카드에 빚대 설명해 보자.

    사람들은 현금인출기에 현금카드를 넣고 비밀번호를 누른 후 돈을 찾는다. 현금인출기의 처지에서 본다면 인출기는 현금카드와 비밀번호만으로 돈을 찾으려는 사람이 계좌의 실제 주인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때문에 피해자로부터 은행카드를 빼앗고 비밀번호를 알아낸 강도가 현금 인출을 시도한다면 현금인출기는 ‘고스란히’ 현금을 내줄 수밖에 없다(이러한 문제를 줄이기 위해 인출기 앞에 CCTV를 설치했지만 범인 검거율은 그리 높지 않다).

    지문인식 개발 회사 인수

    지문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G콤은 이에 주목해 현금카드와 비밀번호 대신 지문으로 현금을 찾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예금주는 계좌를 만들 때 10개 손가락 중 사용할 손가락의 지문을 미리 입력해 놓는다(정상 지문). 그리고 강도의 위협을 받아 억지로 현금을 출금할 때 사용하는 손가락의 지문도 입력해 놓는다(비상 지문). 현금인출기를 이용할 때 예금주는 정상 지문이 있는 손가락을 센서에 갖다 대 본인임을 증명한 후 돈을 찾는다. 그러나 강도를 당해 억지로 인출기 앞에 섰을 때는 비상 지문으로 입력해 놓은 손가락을 센서에 갖다대는 것이다.

    이 경우 돈은 정상적으로 인출된다. 하지만 은행에서는 예금주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경찰에 연락해 추적케 하는 것이다. G콤이 개발하려고 한 것은 이런 시스템이었다. 신형 ‘방패’가 나오면 신형 ‘창’도 나오는 법이다. 이렇게 되면 대담하게도 정상 지문이 있는 예금주의 손가락을 잘라서 현금 인출을 시도하는 강도가 나올 수 있다. G콤은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또 하나의 기술을 개발했다. 지문이 있는 사람 손가락에는 미세한 땀샘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땀샘은 꼬물꼬물 움직이지만, 죽은 사람의 땀샘은 움직이지 않는다. G콤은 땀샘이 움직이지 않는 지문에 대해서는 비상 지문을 갖다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은행에서 비상벨이 울리게 했다. G콤은 이러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7년 말 한국은 IMF 경제위기를 맞았다. 개발만 할 뿐 완제품을 내놓지 못한 G콤의 경영사정도 크게 악화됐다. 이미 상당한 컴퓨터 기술을 갖추고 있던 윤씨는 G콤을 지켜보고 있다가 특유의 친화력으로 엔젤(벤처사업 투자가)을 끌어들여 G콤을 인수하고 ‘H 21’(가명)로 회사 이름을 바꾸었다. 윤씨는 지문인식시스템을 ‘H폰’으로 명명했는데, H폰은 엔젤들 사이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H폰(가명)이 해킹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지자 한 시중은행과 카드회사는 ‘H 21’과 H 폰 사용에 관한 업무제휴를 맺었다. H폰과 윤씨에 대한 기사는 여러 언론에 실리게 되었다.

    벤처 창업기금을 빌려주는 한 기술보증기금과 한 시중은행이 자금을 빌려주었고, H21은 코스닥 상장을 준비했다. 일본에 ‘H 21 자판’을 설립하고, 올해 7월에는 지문을 읽는 센서를 제작하는 미국의 ‘베리디컴’이라는 회사를 인수했다. ‘H 21’이 베리디컴을 인수한 것은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은 격’이었다. H 21이 베리디컴 인수를 시도하자 CNN과 AP통신·로이터통신 등은 윤씨와 H 21에 대해 상세히 보도하며 그를 ‘미래의 빌게이츠’로 묘사했다. 때마침 정부는 ‘전자서명에 관한 법’을 만들었는데, H폰은 전자서명시대를 열어갈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2000년 3월 윤씨는 모 언론사 사장의 소개로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이모씨를 회장으로 영입했다. 그러나 이씨는 비상근 회장으로 비즈니스 모델만 자문해 주다 2000년 말 퇴임했다. 이렇게 H 21이 잘 나갈 때 기자는 주간동아에, 남상문 PD는 SBS에 각각 김옥분 여인 피살 미스터리를 다룬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김만식씨 母子의 죽음

    두 언론의 보도가 있은 후 김만식씨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어느 날 충주시에 있는 김씨 부인이 전화로 “시누이 사건보도가 있은 후 남편은 억울하다며 일을 하지 않고 폭음만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며 울먹였다. 기자는 “절대로 흥분하면 안된다. 동생 사건은 과거의 일이다. 남편께서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끌고나가야 하니,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하라”고 당부했다. 대통령 앞으로 탄원서를 작성했던 김씨는 2000년 3월9일 동생이 피살됐으니 이 사건을 수사해 달라는 소장을 검찰에 제출했다. 홍콩과 싱가포르를 무대로 한 사건이니 만큼 이 사건은 서울지검 외사부에 배당되었다.

    그해 6월 기자는, 동생 사건을 한탄하며 술로 지내던 김씨가 술에 취해 도로변의 한 가게 마당에서 자다가 후진하는 차에 치여 죽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김여인이 피살된 후 어머니와 언니에 이어 오빠마저 죽은 것이다. 얼마후 김씨 가족이 가해자인 운전사와 합의해 보험금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윤대직씨가 사업가로 명성을 날릴 때 김씨 집안에는 계속해서 불행의 그림자가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윤씨의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10월8일 차근차근 내사를 해오던 서울지검 외사부는 이 사건을 맡은 고석홍 검사를 홍콩에 보내 홍콩 경찰로부터 김여인 피살자료를 넘겨받아 검토에 들어갔다. 그리고 10월24일 윤씨를 긴급체포하고 이틀 후 살인 및 사기혐의로 구속했다.

    이제 숨가쁘게 전개해 온 윤대직 납북미수와 김옥분 피살, 그리고 윤대직 사기사건을 정리해 본다. 먼저 윤씨 납북 미수사건인데, 서울지검 외사부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법정에서 유무죄 여부를 다툴 수 없다. 이 사건은 김옥분 피살사건을 구성하는 요소로서만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남북미수가 진실이라면 김옥분 피살사건은 한층 더 미궁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이 사건이 거짓이라면, 누가 윤씨의 납북 미수사건을 조작했는지가 밝혀져야 한다. 당시 안기부에게는 국가안보만큼이나 정권안보가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기관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진실한 정보(intelligence)를 지키고, 한 사람의 인권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 진실한 정보를 지키지 못하고 한 사람의 인권을 보호해주지 못했다면 안기부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둘째로는 김여인 피살사건인데 이 부분은 윤씨 재판에서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현재 김여인 피살사건에 대해 가장 많은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은 홍콩 경찰이다. 그러나 홍콩 경찰이 작성한 자료는 한국 법원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현재 한국 법원은 한국 경찰에서 만든 자료도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 법원은 오직 한국 검찰에서 피의자가 동의해서 작성한 것만 증거로 인정한다. 때문에 서울지검 외사부는 구속 기간 윤씨를 추궁하여 진술을 받아내는 것만이 살인죄를 입증하는 유일한 방안인데, 과연 윤씨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것인가는 미지수다.

    검찰 설명에 따르면 구속된 윤씨는 “김여인과 부부싸움을 하다 김여인이 죽는 바람에, 엉겁결에 놀라서 목을 졸랐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살해할 의도 없이 김여인을 때렸는데(혹은 밀쳤는데) 김여인이 사망해, 놀라서 목을 졸랐다는 게 된다. 이 경우 직접 사인(死因)은 살해할 의사 없이 때린 것(혹은 밀친 것)이 되고, 목을 조른 것은 직접 사인이 되지 않는다. 살해할 의사 없이 때렸는데 사람이 죽었다면 이는 폭행치사죄에 해당된다. 형법 262조는 폭행치사죄의 시효를 7년으로 정하고 있어 법원이 치사죄로 판단하면 윤씨는 무죄가 된다.

    윤씨 변호인도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홍콩 경찰의 자료는 법적으로 증거가 되지 않는다. 검찰이 그 자료에 의존해 살인혐의를 입증하려는 것은 무리다. 치사인지 살인인지도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최근 법원은 실체적 진실은 인정되더라도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조작돼 있으면 기소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윤씨와 윤씨 변호인이 이런 점에 치중한다면 윤씨의 살인죄 부분은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

    김여인은 과연 북한 공작원이었을까?

    윤씨의 사기죄 부분은 검찰이 윤씨의 유죄를 유도하기 위해 부차적으로 붙인 죄목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 부분은 살인 혐의와 더불어 법정에서 많은 논란을 빚을 것이다. 설사 사기죄 부분이 유죄로 인정되더라도 법원은 윤씨가 H폰이라는 신기술을 개발해온 것을 정상 참작해, 작량감경(酌量減輕, 형을 경감해 주는 것)해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과거 검찰에서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에 주목해 기소 내용을 배척한다면 윤씨는 사기 부분에 대해서도 무죄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법적인 검토만으로 살펴본다면 윤씨는 풀려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지난 11월15일 국정원은 ‘수지킴 사건이 왜곡 은폐된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며 사과했다. 그렇다면 윤씨도 과연 김여인이 조총련계에 포섭된 북한 공작원이었는지에 대해 진실을 말해 주어야 한다. 김여인의 집안에서는 김여인이 북한공작원으로 몰린 것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한을 품고 죽어 갔다. 윤씨는 김여인 집안의 몰락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 그리고 김여인과 진실을 보호하지 못한 안기부 역시 수지킴 가족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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