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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 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6·마지막회>

박정희 좌익시비로 사상논쟁 불붙다

  • 김준하

박정희 좌익시비로 사상논쟁 불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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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2월27일자 육군 중앙군법회의 판결문은 황태성의 행적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황태성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4년시 항일운동에 가담한 관계로 퇴교 처분을 받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다가 재정난으로 2년을 중퇴한 자로서 일정시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표지하고 항일운동에 가담하던 중 8·15해방을 맞이하자 조선공산당에 입당함과 동시에 경북도당 조직부장, 10·1 폭동사건의 주동역을 하고 월북한 후 북괴 치하에서 해주인쇄소 총무국장과 산업성 지방산업관리국장을 경유, 무역부상 겸 서리 등 요직에 재임한 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황태성 간첩사건’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국내에 잠입한 황태성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황태성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과 만나 통일논거를 하겠다는 목적으로 1961년 9월1일 남하, 서울에 잠입했다. 그후 황태성은 박정희 의장과 접촉하기 위해 박정희 의장의 친형 박상희(남로당 선산 군당위원장, 10·1폭동을 주도, 1946년 처형됨)의 처인 조귀분(김종필씨의 장모)씨에게 주선을 부탁했다. 조귀분씨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사위 김종필씨에게 전화를 걸어 황의 의사를 전달했고 김종필 부장은 자신의 처조카집에서 1961년 10월 황태성을 체포, ‘단순 간첩’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구속해 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송치했다. 1961년 12월27일 육군 중앙군법회의는 반공법, 국가보안법상의 간첩죄를 적용해 황에게 1심에서 사형을 선고했고, 1963년 10월 최종선고를 한 끝에, 1963년 12월14일 박정희 의장이 5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3일 전에 사형에 처해졌다’.

야당은 선거가 시작되기 전까지 간첩 황태성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둠속에 숨겨졌던 사건의 정체가 짧은 선거기간을 통해 하나씩 세상에 알려지게 됐던 관계로 모두가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 더욱이 대통령 후보와 그의 가족이 거물 간첩과 복잡하게 엉켰던 관계가 노출됨으로써 온 국민은 비상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구 유세를 하루 앞두고 윤후보는 청주에서 박정희 후보에 대해 최후의 결전을 통고했다. 청주에서 소집된 민정당 간부회의에서도 대구 유세에서 여·순사건과 간첩 황태성 사건에 대해 최종적인 결정타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윤보선씨는 청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박씨(박정희 후보)가 지적한 민족이념 없는 가식된 민주주의 자 중에는 나까지 포함된 것이 틀림없는데 다른 건 몰라도 사상적으로 나를 몰아대는 데 대해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고 “서구식 결투라도 신청, 박정희씨는 총 잘 쏘는 군인이지만 나는 맨주먹으로라도 싸우고 싶은 심정이다”고 비상한 전의를 내비쳤다.

유세도 하기 전에 대구가 크게 동요하는 빛을 보이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선거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돌연 간첩 황태성 사건을 기자회견을 통해서 공개했다. 고등군법회의 1심에서 사형 언도가 있은 지 1년9개월만에 사건의 일부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김부장은 ‘세상에 유포되고 있는 간첩 황태성이 박의장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간첩 황태성 사건이 논의되는 것은 혁명정부 고위층과 국민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북괴의 고등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황태성 사건이 논의되는 것 자체가 북괴의 고등전략에 휘말린 행위라는 것이다. 정부기관이 나서서 박의장에 대한 의혹을 전면으로 부인한 것은 김부장이 처음이다. 의혹을 제기해왔던 민정당과 윤보선 후보는 차츰 어려운 입장에 몰리는 듯했다. 윤후보로서는 알고 있는 사실 전부를 대구 유세에서 밝히기로 비상작전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대구에서는 수많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10·1 대구 폭동사건은 간첩 황태성과 박의장 친형인 박상희씨가 주도했을 뿐 아니라 박의장의 형은 처형됐다는 말이 있다’ ‘박의장 형인 박상희씨는 간첩 황태성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더라’ ‘박의장도 어렸을 때부터 간첩 황태성을 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한다’ 등이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발언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말들이 아닌가? 여기서 간첩 황태성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가 주동했던 ‘10·1 대구 폭동 사건’을 잠시 뒤돌아보기로 하자.

‘대구 10·1 폭동사건’이 발생한 지 55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사건의 내용과 성격을 규정하는데 여러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돼 경북 전역으로 확산된 소요사건으로서 같은해 10월12일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사망자 31명, 행방불명 36명, 부상자 20명, 피해 경찰서는 대구를 비롯한 도내 10곳, 전소 경찰서 2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구와 경북 일대에 걸쳤던 가슴 아픈 불상사였다. 간첩 황태성은 선봉에 서서 군중을 선동하고 연설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상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인용).

살벌한 분위기 속에 9월28일 대구 수성천에서 윤보선 후보의 선거유세가 벌어졌다. 운집한 군중이 10만을 헤아리는 대성황이었다. 그들은 윤후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연단에 오른 윤보선씨는 마침내 ‘여·순반란사건에 공화당 박정희씨가 관련됐다고 볼 수 있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며칠 전 전주에서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다’고 발언한 내용을 입증이나 하려는 듯 분명한 어조로 선언한 것이다.

수성천변에 운집한 청중들은 박수를 치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엄청나게 놀라는 표정들이었다. 폭탄선언을 한 윤씨는 “박정희씨가 정권을 다시 잡는 한 이 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없다. 이번 선거는 정책과 정책의 대결이 아니고 하나의 사상과 또 하나의 이질적 사상의 대결이니 만큼 어느 것이 옳고 그른가 하는 것은 여러분이 판단해 달라”고 호소했다.

대구 유세를 계기로 앞으로 전개될 선거의 양상의 초점은 두 가지로 집약됐다. 첫째는 사상논쟁으로 승패가 가려지게 된다는 것과, 둘째는 야당후보들이 난립했지만 종국은 박정희·윤보선의 맞대결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윤보선 후보의 대구 유세가 성황리에 막을 내리자 다음날 공화당의장인 윤치영씨가 전남 광주에서 협박에 가까운 공격을 해왔다. “만약 썩은 정치인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몇 달 안에 혁명이 또 일어날 것이며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라도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말하고 “2·27선서(박정희 의장의 정치불참 선언)에 참여한 모든 정치인들은 다 썩은 정치인”이라고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윤치영씨 발언에 대해 야당은 “하늘을 무서워하지 않는 처사” “민주주의 신봉자가 아닌 쿠데타 신봉자임을 스스로 폭로한 처사” “이번 선거의 무의미함을 입증하는 중대 발언” 등으로 신랄하게 비난했다. 박정희 공화당 총재도 당황한 끝에 윤치영씨를 송환하도록 명했으나 윤씨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발언 강도를 한층 높여 나갔다. “나의 발언은 정치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 것뿐이다” “우리나라는 5·16 전과 같이 공산주의에 먹힐 우려가 커진다” “허정, 윤보선씨의 발언을 문제 삼아야 하며 국가기밀을 외부에 누설시킨 송요찬과 김재춘은 총살돼야 마땅하다” 등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공화당의장인 윤치영씨는 야당에 대한 그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다.

허정 후보의 사퇴

중반을 향한 10·15 대통령선거의 전망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대구 유세를 계기로 야당 진영에 뜻하지 않은 변화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허정 후보의 ‘국민의 당’ 안에서 심상치 않은 징조가 나타났다.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박정희 후보와 대결한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라는 여론이 ‘국민의 당’ 안에서 퍼져나갔다. 유세 청중 수에서 윤보선과 허정 후보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일례를 들면 충북 제천에서 윤후보 유세시에는 2만 청중이 모였으나 허씨 유세 때는 불과 500명의 청중이 모였을 뿐이다. 그리고 선거는 항상 ‘양극의 대결’로 결판이 나는 속성이 있다는 통설 때문인지 박정희·윤보선의 양극 현상이 대세를 이룬 마당에 허정씨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그리 많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대구 유세를 계기로 허정씨의 ‘국민의 당’ 경북지부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북 제5지구가 해체되고 당원 전원이 민정당에 합류했다. 중구에 이병하(후에 국회의원)씨가 중심이 된 ‘허정 후보 사퇴 성명’에 대한 당원들의 서명 공작이 진행됐다. 마침내 그들은 대세가 민정당의 윤보선씨에게 기울어지고 있으므로 ‘국민의 당’을 해체하고 윤씨를 강력히 지지해서 야당의 승리를 쟁취하자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서울에서 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국민의 당’ 소장파들은 본격적으로 민정당측에 협상을 제의해왔다. 허정씨를 지지하던 박순천씨의 민주당도 거중 조정역을 자임하면서 윤·허 양씨의 단일화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게 됐다.

9월30일 마산에서 유세중이던 윤보선 후보는 단일후보 문제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중앙에서 진행중이던 허정 후보측과의 협상 내용을 수시로 보고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윤씨와 허씨는 10월5일 같은 날짜에 서울에서 유세를 벌이게 됐다. ‘국민의 당’ 대변인 송원영씨는 10월1일 수원에서 주목을 끌 만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서울 유세를 계기로 허정 후보와 윤보선 후보간의 우열이 현저하게 드러날 것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정치적 명분이 있는 사람이 야당 단일후보가 될 것이다”고 선언했다.

서울에서 어느 쪽에서 많은 청중을 동원하느냐, 누가 많은 지지를 받느냐 하는 것을 단일화의 바로미터로 삼자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윤씨가 마치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게 자가도취였다는 것을 서울 유세에서 실증하겠다”고 벼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세의 흐름은 대변인 입만 가지고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처럼 보였다.

‘국민의 당’ 대변인이 민정당을 향해 도전장을 내민 지 하루만인 10월2일 청천벽력 같은 사태가 ‘국민의 당’에서 일어났다. ‘국민의 당’ 당수이며 당 대통령 후보인 허정씨는 이날 오후 지방유세 계획을 돌연 중단하고 대통령 후보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허정씨는 긴급 기자회견을 통해서 “내가 금년초부터 오늘날까지 결심해온 것은 군정을 종식시켜야만 하겠다는 것이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일야당을 선두에서 제창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제하고 “후보가 7명이나 난립하고 있어 이와 같은 상태가 계속되는 한 군정종식은커녕 오히려 군정의 재집권을 합리화할 명분을 줄 게 분명하다”고 후보 사퇴 이유를 설명했다. 끝으로 그는 “내가 물러서는 길만이 단일 후보를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야당 진영은 쌍수를 들어 그의 결정에 대해 열광적인 환영을 보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허정씨의 대통령 후보 사퇴가 그를 지지해왔던 ‘국민의 당’의 공식 결의나 당의 총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당을 대표하는 대변인은 바로 전날 서울 유세에서 결론을 낼 것을 제안한 바 있었고 당의 중진들은 그들대로 당의 조직과 유세 문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허정씨의 돌연한 사퇴는 결국 허씨 자신의 독단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여하튼 허정씨의 사퇴는 선거의 양상을 박정희·윤보선 양 후보의 1대 1 대결로 굳혀 놓았다.

“이제는 해볼 만한 싸움”

박정희 공화당 대통령 후보는 광주에서 사상논쟁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격전을 개시했다. 대통령 후보로서 대중연설을 처음 갖게 된 박정희씨는 ‘역사는 역행시킬 수 없다’는 제목으로 선거연설을 했다. 그는 야당후보가 집중적으로 공세를 취하고 있는 사상논쟁에 대해 ‘낡은 매카시즘의 찌꺼기’라고 단호히 일축했다.

“새 민정은 그와 같은 폭로나 비난보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의 지도체계 아래 정국의 안정이 우선”이라고 역설했다. 야당인 윤보선 후보가 10·15 대통령선거를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이질적 사상과의 대결’이라고 규정한 것을 반박하기 위해 ‘이번 선거는 구악세력과 민중세력의 대결’이라고 못박기도 했다. 그러면서 박후보는 “폭로전술과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만 잡아 가두면 선거방해라고 떠들려는 심리를 알기 때문에 선거기간 동안은 처벌하지 않겠으나 선거가 끝나면 반드시 법에 따라 엄단할 방침”이라고 겁을 주기도 했다. 박정희 후보는 끝까지 사상논쟁의 핵심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선거가 시작된 지 10일이 지났다. ‘이제는 해볼 만한 싸움’이 됐고 유권자들도 날카로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자금도 없이 조직도 미완 상태에서 호남, 충청, 영남권을 몰아친 윤보선 후보의 유세 투쟁은 문자 그대로 피나는 싸움이었다. 10월5일 서울 남산공원 유세가 선거 중반전을 향한 큰 고비가 됐다. 10만 청중을 앞에 둔 윤보선 후보는 “혁명이라는 것은 국민 대중의 사무친 한을 풀어주고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도 군사정부는 총칼로 국민을 불안과 공포 속에 몰아넣고 무력으로 온갖 부정을 감행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씨는 반혁명자다’라고 비꼬았다. ‘3000만의 이름으로 박정희씨의 사상을 규탄한다’고 또다시 사상논쟁에 불을 지피는 한편 각 대학에 결성된 ‘YTP’라는 비밀조직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10·15 선거는 처음부터 정책대결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중반전 이후에도 폭로와 인신공격이 지속될 게 분명했다. 윤보선 후보의 서울 유세가 끝나고 이틀이 경과됐을 때 돌연 송요찬 후보(송후보는 구속중에 있었다)가 옥중에서 대통령 후보 사퇴 성명을 나병삼 변호인을 통해 발표했다. 윤보선씨를 기피해 오던 박순천씨의 민주당도 기획위원회의 결의를 통해서 윤씨 지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제는 선거를 해볼 만하다’에서 ‘이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게 됐다. 그러나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 진영은 만만치가 않았다. 박정희 후보가 또다시 정면으로 나섰다. 박후보는 충남 유성에서 군정이 종식되면 행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현역 군인들을 전원 원대 복귀시키겠다고 약속하고 야당에서 단일화 붐이 일어나는 데 대해서는 “정부 요직을 구 정치인이 독점물처럼 여기고 추잡한 흥정이 벌어지고 있다”고 역공세를 취했다. 사상문제에 대해서는 “비위에 맞지 않으면 공산당으로 모는 그들(구정치인)의 한민당식 수법 탓에 억울하게 공산당 누명을 쓴 불쌍한 백성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반문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간접적으로 변명했다.

박정희 후보는 10월6일 대구에서 일대 반전을 시도했다. 10만 청중을 앞에 둔 박후보는 자신이 당선되면 “공산주의자나 반국가적 행위를 한 자를 제외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겠다”고 선언했다. 박후보는 자신에 대한 미국의 날카로운 관심을 의식한 듯 “나는 반미주의자가 아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찬조연사로 나선 이만섭(후에 국회의장)씨는 “박정희 후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느니 또는 여·순반란사건에 관련이 있다느니 하는 윤보선씨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관제 빨갱이로 몰아치는 한민당식 수법의 재연이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후보 면전에서 이만섭씨는 박씨와 관련된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사상논쟁의 기조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발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0월8일 마산에 내려간 박정희 후보는 마침내 ‘여·순반란사건’과 자신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여·순반란 사건에 자신이 관련된 것처럼 발설한 데 대해 “당시 여·순지구에 주둔한 국군은 14연대이고 자신은 육사생도대장으로 복무하고 있었으므로 동 반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선거가 시작된 이래 박정희 후보가 여·순사건에 대해 자신의 결백을 스스로 주장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박후보는 “야당측에서 이질적 민주주의 운운하면서 개인공격을 일삼고 있는 것은 정책대결을 할 수 없으니 사상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흉계”라고 비난까지 했다.

9월24일 선거가 막 시작됐을 때 윤보선 씨의 전주 발언으로 표면화된 ‘여·순반란사건과 박정희’ 관련 발언, 곧이어 벌어졌던 사상 논쟁은 14일 만인 10월8일에 일대 고비를 맞이하게 됐다. 여론이 분분했다. “윤보선씨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아니, “박정희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분명히 어느 한쪽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틀림없지 않은가? 사상논쟁이 날이 갈수록 혼미 상태에 빠져들고 있을 때 군사정부에서 근무하던 관계인사가 중대한 정보를 지참하고 민정당을 찾아왔다. 그가 제공한 정보는 공보부 조사국에서 발행한 ‘한국 관계 해외 논조연간’(1961년 5월16일∼1962년 5월16일)이었다. 정부가 직접 발행한 간행물이니만큼 누가 보더라도 신빙성이 있었을 뿐 아니라 바로 전기 ‘연간총집’이 기록한 시기가 군사정권 시대였던 관계로 ‘한국 관계 해외논집’은 크게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민정당에서는 ‘연간총집’ 내용을 대통령 후보의 기자회견을 통해서 직접 발표하도록 했다.

윤보선 후보는 ‘연간총집’에 수록된 1961년 7월6일자 시사통신 기사를 공개하면서 “박의장은 여·순반란사건에 관여했는지 안했는지 분명히 대답하라”고 강한 어조로 요구했다. 더 이상 논란을 거듭할 게 아니라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매듭을 짓자는 태도였다. 윤보선 후보는 ‘연간총집’ 927페이지에 수록된 박의장에 관한 프로필을 기자들 앞에서 직접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박의장은 제1군 참모장 당시 남로당(공산당)의 군사부장으로 복무, 1948년 북조선 정부를 지지한 여·순반란사건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우인 장교들의 도움을 받아 군에 다시 복무하게 됐다”는 것이다. 민정당 당원들은 쌍수를 들고 기뻐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색다른 주장을 들고 나왔다. “윤씨가 폭로한 자료는 국내의 자료가 아니고 외국의 자료를 공보부에서 수록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공작금 20만 달러의 행방

한쪽에서 ‘너는 공산당 당원이었다’고 공격하면, 다른 쪽에서는 ‘나는 공산당 당원이 아니었다’고 되받아치는 진흙탕 싸움의 양상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 소령이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은 것은 선거일로부터 14년 전인 1949년 2월13일이 아니었던가? 14년이라는 세월이 그다지 긴 세월도 아니었건만 생존하고 있을 서울고등군법회의의 7명의 심판관과 2명의 검찰관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박소령에게 무기형을 선고한 심판관들은 왜 떳떳하게 증언을 못하는가? 군법회의 설치 장관을 비롯해서 박정희 소령의 구명 운동을 벌였던 당시의 고위 장성들은 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야당 진영에서는 넋두리 같은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마침내 투표일을 일주일 앞둔 10월9일 안동과 부산에서 절정을 이뤘다. 안동 중앙국민학교 교정에서 열린 유세에서 윤보선 후보가 먼저 폭탄 선언을 했다. “공화당은 민주정당도 아니며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정당도 아니다. 공화당은 완전히 불법, 위법으로 사전 조직된 정당이다. 그뿐 아니라 공산당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의 간첩이 와서 공산당식으로 만든 정당이므로 민주정당이 될 수 없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 다음 대목이 파란을 일으켰다.

“간첩 황태성은 20만달러를 가지고 내려왔다. 김종필은 그를 조선호텔에 모셔놓고, 그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식으로 밀봉교육처를 다섯 군데나 만들어 가면서 점선식 조직으로 공화당을 조직했다. 이런 정당이 과연 자유주의를 국시로 하는 이 나라에서 민주정당이 될 수 있는가?”

폭풍의 검은 구름이 몰아치는 듯했다. 즉각 중앙정보부가 반박하고 나섰다. “윤보선 후보의 안동 발언 중 공화당 조직에 황태성의 공작금 사용 운운은 전혀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이라고 부인하고, “황태성의 공작금 20만달러 운운은 지난 9월28일 치안국장이 발표한 바 있는 간첩 이만희로부터 압수한 20만달러 건과 착각 또는 혼돈한 것으로 인정되며, 동 금액은 이만희 검거 즉시 압수해 국고에 귀속 처리하고 서울 텔레비전 방송국 시설 기금으로 충당했다”고 해명했다. 간첩이 가져온 달러로 텔레비전 기재를 사왔다는 정보부 발표는 당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투표일을 가까이 두고 윤보선 후보의 연속적인 강공을 견디기 힘들었던 박정희 후보는 9일 부산에서 정면 대결을 시도했다. 박정희 후보는 10만 청중 앞에서 자기를 빨갱이로 모는 야당 인사에게 묻는다는 전제를 달고 “가령 내가 빨갱이라면 어째서 그들 밑에서 육군 소위에서 소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며 전방 사단장도 하고 야전군 참모장도 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사단을 몰고 이북에 넘어가면 어떻게 할 뻔했나? 또한 그러한 위험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혁명을 했는데 왜 대통령으로 앉아 그것을 비호했는가?” 하고 윤후보를 육박해 들어갔다.

이판사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사상논쟁의 하이라이트를 보여준 대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후보의 육탄공격은 유권자들을 납득시키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만일에 내가 공산주의자였다면”이라는 말을 전제로 우회적으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해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 후보로서는 그러한 말을 하지 않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마침내 윤보선 진영에서는 ‘최후의 카드를 언제 사용할 것인가’를 신중히 검토했다. “정부가 간행한 출판물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외국 기사는 믿을 수 없다”고 반박하는가 하면 “빨갱이가 아니었다”고 직선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공화당이나 박정희 후보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할 시기가 다가온 것으로 판단했다.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에 게재된 서울고등군법회의 언도 공판 기사는 누구도 변명하기 힘든 국내의 증거물이었다. 투표일을 이틀 앞두고 전격적으로 공개할 것을 민정당 간부회의가 극비리에 결정했다. 그런데 “내가 빨갱이라면 어떻게 사단장을 지냈겠나?” 하고 육탄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박정희 후보도 ‘간첩 황태성’과의 관계에 대한 빗발치는 공격 앞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듯싶었다.

박후보는 유세차 안동으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박후보의 입을 통해 자신의 신상 문제가 언급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10월10일자 동아일보를 참고해보자.

“일제 때부터 황(황태성)과 형(박상희)은 친구였다. 해방 후에 보니 황은 빨갱이였고 그가 북에 갔다는 말을 들었다. 5·16이 나던 해 9월경 당시 정보부장 김종필이가 황을 아느냐고 물으면서 간첩으로 남하해온 것을 체포했다고 보고해 왔다. 황은 나를 만나야만 이야기를 하겠다고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나중에 김종필이라도 만나야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할 수 없이 치안국 직원을 시켜 김종필로 가장해 조선호텔에서 만나게 했더니 자기가 이북 괴뢰 무역부상이며 나를 만나면 남북협상 문제를 충분히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그리해 그 일당을 모조리 잡았다. 처음 단서는 대구에 있는 나의 형수를 만나려고 사람을 시켜 보낸 것을 형수가 김종필에게 연락해 잡게 된 것이다. 그 뒤 재판을 하고 법에 의해 처리했다. 이밖에 야당이 떠드는 이야기는 모두 허위 날조된 것이다.”

이상이 박정희 후보가 황태성에 관해 기자들에게 설명한 요지다. 박후보는 처음으로 간첩 황태성이 자신의 형과 친구 사이였고 해방 후 빨갱이였으며 그후 북한의 무역부상을 지냈을 뿐 아니라 남하해서는 자기 형수와 전화연락을 했고 조선호텔에 묵은 일도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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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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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좌익시비로 사상논쟁 불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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