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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소년가장의 꿈

  • 정영기

열다섯 살 소년가장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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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몇 달 동안은 시간에 맞춰서 학원에 나가는 게 힘들었다. 공장생활에 익숙한 하루일과 중 저녁에 시간을 내서 학원수업을 들으러 가는 것은 고역이었다. 학원에 나가도 공부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능력으로는 검정고시에 합격할 자신이 없었다. 오랫동안 책을 놓고 있던 탓에 기초지식이 없었고, 예습·복습할 시간도 없어 수업진도를 따라가기가 힘겨웠다. 거기다가 공장 퇴근시간과 학원 수업시간이 맞지 않아 늘 지각을 했다.

공장 일은 오후 7시에 끝나는데, 학원수업도 7시에 시작했다. 공장 일이 끝나면 시간이 없어 저녁식사도 못한 채 바로 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나갔다. 공장에서 학원까지 버스로 30분 이상 걸려 아무리 서둘러도 항상 늦을 수밖에 없었다.

학원에 도착하면 근처 가게에서 빵 한 개로 저녁식사를 때웠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100원짜리 단팥빵이 나의 저녁식사였다. 나중에 가격이 150원까지 올랐지만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던 시절 내내 나는 그 빵으로 저녁식사를 대신했다. 한참 성장기에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 빵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빵을 먹고 목이 마르면 학원 화장실에서 수돗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우유도 하나 먹고 싶었지만 내 주머니사정으로는 빵보다 값이 비싼 우유를 사 먹을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은 월급으로 매달 내야 하는 학원비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속에 꿈을 키웠다. 검정고시에 떨어져 중학교 졸업장을 못 얻는다 해도 영어상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신문에 나오는 한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큰 기쁨을 주는지 미처 몰랐다. 우리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에 붙어있는 영어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고졸자들에게 처음부터 월급을 많이 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시력이 안 좋은 사람이 눈에 맞는 안경을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공부는 힘들기는 하지만 이처럼 가슴이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고 괴로워도 학원에 나가면 새로운 힘이 생겼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많이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학원은 학교와는 달랐다. 결석하지 않고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검정고시에 합격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검정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항상 쫓기는 듯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시험에 붙어야 한다는 부담은 또 다른 마음의 짐이었다. 시험에 떨어지면 다시 공부를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까운 시간과 돈만 낭비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나를 늘 초조하게 했다. 시험에 떨어져봐야 결국 그 자리인데도 그동안 고생이 헛되이 사라질 거라는 불안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외국으로 입양간 동생들 생각을 했다. 그들을 찾기 위해서는 영어단어라도 몇 개 배워두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어쩌면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만두면 다시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다. 평생을 열등감과 패배감 속에서 괴로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악물고 코피를 쏟으면서도 공장일을 마치면 학원에 나갔다.

검정고시란 주로 학업의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 혼자서 단기간에 많은 양의 학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학원에서의 수업은 내용을 이해하든 못하든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매일 공부해야 할 학습량은 엄청나게 많은데, 직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주변환경 또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근무했던 공장에서는 기숙사 방 하나에 7명이 함께 생활을 했다. 좁은 방에서 여러 명이 생활을 하다보니 사생활은 전혀 보장이 안되고 잠만 겨우 잘 수 있었다. 공장 주변에 방을 얻어 생활할 수도 있지만 적은 월급으로는 방세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가 없다.

고입 검정고시란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즉 초등학교 졸업자가 중학교에 다니지 않고 시험을 통해서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는 시험이다. 우리들은 이 시험을 ‘고검’이라고 불렀다.

검정고시는 매년 4월과 8월에 시험이 있다. 하루 동안 총 9개 과목의 시험을 치른다. 각 과목은 100점 만점에 40점 이상이 돼야 하고, 9개 과목 평균 60점이 돼야 전과목 합격으로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게 된다. 전과목 합격이 안되면 과목별로 60점이 넘는 과목만 합격하게 되고 다음에 불합격한 과목만 시험을 보면 된다.

학원에서는 일반 중학교에서 3년 동안 배우는 내용을 속성으로 1년 만에 진도를 마친다. 중학교에서는 하루 6시간 수업을 하지만 학원에서는 4시간 수업을 했다. 학습량도 많고 진도도 매우 빨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검정고시반은 처음 시작할 때는 한 반이 30∼40명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개강 때는 대체로 정원이 다 차지만 한 달이 지나면 인원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이 학원에 등록하기까지는 대단한 용기와 결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학원에 나간다고 해서 공부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학원진도는 직장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따라가기에는 벅차다. 대부분 너무 오랫동안 손에서 책을 놓았기 때문에 학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공부는 의욕과 결심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공부할 만한 여건과 환경이 주어져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공부는 학원에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습과 복습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학원에 나오는 사람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후 학원에 나온다. 학원도 어렵게 짬을 내서 나오는 사람들에게 예습이나 복습을 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일반학생들이 3년 동안 배우는 내용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1년 만에 끝내버리는 학원 수업은 어지간한 끈기와 노력 없이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검정고시생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공부에 대한 열등의식만 더욱 키운 채 책을 놓게 된다. 어쩌면 이들은 평생을 학력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검정고시반이 모집돼 1년이 지나 교과진도가 끝날 무렵이 되면 처음 시작한 인원의 3분의 1 정도가 남는다. 교과내용을 이해하든 못하든 그래도 이들은 열심히 따라온 사람들이다. 이들 중 실제 검정고시에서 10여 명 정도가 전과목에 합격해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는다. 나도 그중 한사람이 돼 그해 8월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드디어 나도 중학졸업자가 됐다. 합격증을 받아들고서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누구라도 붙잡고 자랑하고 싶었다.

혼자서 공부한다는 게 기껏해야 공장일이 끝나면 학원에 나가거나 시간 날 때마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펴놓고 외우는 방법이 전부였다. 참고서에 나오는 문제를 교과서에서 찾아 외우고 빨간 색연필로 교과서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지우는 원시적인 방법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학원 진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중학교 과정을 1년에 마쳐야 하기 때문에 학원수업은 학생들의 수준이나 이해도와는 관계없이 오로지 시험에 초점을 맞춰 진행된다. 이런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혼자서 어느 정도 공부를 해가야 한다.

하는 수 없이 잠잘 때와 공장에서 일하는 시간 외에는 오직 공부에만 몰두했다. 길을 걸을 때는 단어를 외웠고, 학원에 통학하는 버스에서는 교과서를 읽었다. 작업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주머니에서 단어장을 몰래 꺼내 중얼중얼 하다가 작업을 망친 적도 있었다.

소등 후 기숙사 복도에서 새벽까지 공부

학원수업이 끝나고 막차를 타고 공장기숙사로 돌아오면 자정이 가깝다. 공장기숙사는 11시가 되면 모든 방에 불을 끄게 돼있다. 기숙사에서 나름대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밤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소등시간이 되면 기숙사 방은 불을 다 끄지만 복도는 밤새도록 불을 켜놓았다. 나는 복도구석에 의자를 갖다놓고 새벽까지 그곳에 앉아 공부를 했다.

수학과 영어는 혼자서 공부하기에 가장 어려운 과목이었다. 하지만 영어는 나만의 공부방식을 만들어냈다. 그날 배운 영어단어는 반드시 암기하기로 규칙을 정했다. 작은 단어장을 만들어 그날 배운 단어는 그곳에 적어두었다. 영어단어를 먼저 쓰고 그 옆에 한글로 읽는 법을 적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나는 발음기호를 정확하게 읽는 방법을 몰랐다. 그리고 맨 끝에 단어의 뜻을 적었다.

공장일을 마치고 학원수업을 받으러 갈 때 이 단어장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공장에서 수원에 있는 학원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단어를 쉽게 외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단어를 쓰면서 스펠링을 익힌다. 단어가 완전히 암기됐다고 생각되면 영어단어를 손으로 가리고 우리말만 보고 영어단어를 머리에 떠올려 손가락으로 써보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단어 암기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버스를 타고 갈 때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일할 때도 손은 작업을 하고 있지만 머릿속에서는 영어단어가 반복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공부란 일정한 시간만 확보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집중력과의 싸움이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단 몇 시간이라도 집중해서 공부한다면 얼마든지 성과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피나는 노력을 해서 중졸학력을 취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나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합격증은 있으나마나한 학력증명서에 불과했다. 그나마 영어간판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 큰 소득일지 몰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 그것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누구 하나 인정해 주는 이도 없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얻고 싶었다. 고등학교 졸업장만 얻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성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교복에 모자를 쓴 학생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한번이라도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녀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았고 학교를 다닐 만한 여건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정고시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고졸 검정고시 합격증이 있으면 공장에서도 대우가 달라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배우는 검정고시학원 야간반에 등록을 했다.

고등학교 과정은 중학교 과정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어려웠다. 9개 과목 중 수학·영어를 제외한 다른 과목은 중학교 과정과 비해 특히 어렵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어와 수학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특히 수학은 공부에 대한 의욕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수학이라는 과목은 내용을 이해하고도 스스로 문제를 풀어보아야 그 원리를 터득할 수 있는데, 문제를 푸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듬해 4월 고졸 검정고시에서 수학과 영어를 제외하고 7개 과목에 합격했다. 그해 8월 합격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이미 합격한 7과목을 제외한 수학·영어 두 과목만을 공부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수학은 중학교 과정을 공부할 때도 기초가 부족해서 애를 먹었는데 고등학교 과정은 더 어려웠다. 그해 8월 시험을 치렀다. 영어는 좋은 점수를 받았는데 수학은 간신히 40점을 넘겼다. 1980년 8월, 드디어 나는 전과목 합격으로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나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얻었다. 합격을 못했으면 여전히 중졸 학력인데 검정고시에 합격하자, 하루아침에 고졸 학력자가 됐다. 시험 합격여부에 따라 3년이란 시간이 왔다갔다 했다.

합격하기 전까지는 대학에 간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고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칭찬이나 애정에 굶주린 나는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검정고시 합격증보다는 남들이 인정해 주는 학교를 한번이라도 다녀보고 싶었다. 거리에서 같은 또래의 학생들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열등감과 비애를 늦게나마 보상받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처지에 대학은 희망사항일 뿐,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대학에 들어갈 실력도 모자랐고 설령 대학에 입학한다 해도 학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직장에 다니면서 공부할 수 있는 야간 전문대학을 가고 싶었다. 그해 12월 대학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그때는 대입 예비고사라는 시험제도였다.

시험이 있던 날, 나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도 거른 채 공장기숙사에서 수원에 있는 시험장으로 갔다. 아침 7시, 교문 앞에는 벌써 수험생들의 선·후배, 학부모 등 수많은 사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학생들이 시험 보는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을까!’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어리둥절했다. 교문에는 수많은 사람이 자녀나 가족의 행운을 빌면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속에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점심시간, 나는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했다. 공장기숙사에서 일찍 나오느라 아침도 못 먹고 시험장에 왔다. 아침에도 차디찬 빵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는데 또 점심시간이 됐다. 벤치에 앉아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있었다. 옆자리의 다른 수험생들은 집에서 가져온 따뜻한 도시락밥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학생이었고 나와는 다른 신분의 사람이었다. 엄마의 손길이 그리웠다. 스물한 살의 성인인 내가 엄마의 따뜻한 도시락을 생각하고 있었다. 도시락을 싸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누군가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작은 행복이었다.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갑자기 헤아릴 수 없는 서러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복받쳐 올라왔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목이 메어 더 이상 빵을 먹을 수가 없었다. 세상은 나에게만은 결코 평등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나보다 좋은 조건에서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내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오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자신감이 없어졌다. 괜히 쓸데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시험을 치렀다.

EBS 라디오의 ‘가정고교’ 강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정보도 경험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대학입시를 혼자서 준비한다는 건 무리였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배워야할 내용을 단지 1년 공부한 검정고시 실력으로 대학에 가겠다고 덤벼든 것이 무모한 짓이었다.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욱 힘든 건 좌절감이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처럼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입시에 낙방한 후에도 내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검정고시 졸업장을 얻었지만 여전히 그 공장 그 자리에서 전과 마찬가지로 일했다. 공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먹고 자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것을 해결할 만한 돈도 없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을 하면 최소한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되기 때문에 공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싼 이런 환경은 혼자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주변환경은 내 힘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후 1년 동안 공장에서 열심히 일만 했다. 대학입학금이라도 마련해 두어야 다시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다음해, 공장에서 근무를 하면서 저녁에는 대입 준비를 위해 학원에 나가기로 했다. 5월말 대입학원 야간 직장인반에 등록했다. 그러나 5월은 대학입시 준비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학원 수업은 이미 진도를 많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검정고시와 대학입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입시제도가 또 바뀌어서 예비고사가 없어지고 대입학력고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학력고사는 검정고시에 비해 과목수가 많았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과목도 있었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이미 배운 과목을 다시 복습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을 텐데 나에게는 대부분이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내용이었다. 이해도 못하는 학원수업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학원진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한달 만에 학원을 그만두었다. 혼자서 공부하기로 했다.

헌책방에서 고등학교 교과서를 구입했다. 각 과목에 따라 문제집을 한 권씩 준비했다. 공장에서 일이 끝나면 기숙사에 틀어박혀 문제집과 교과서를 대조해 가며 공부했다. 문제로 등장한 교과서 내용은 검정펜으로 표시를 해두었다. 같은 내용이 두 번 문제로 등장할 경우 빨간펜으로 또 표시를 했다. 이렇게 교과서를 문제집과 대조해 가면서 공부했다.

세 번 정도 반복했더니 교과서의 주요 내용은 거의 암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가장 어려운 과목은 영어와 수학이었다. 영어와 수학은 공부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그래서 나중에는 시간이 없어 수학은 아예 포기를 하고 나머지 과목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런 공부방법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 이렇게 공부해서 과연 대학에 갈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수시로 찾아드는 불합격의 예감과 불안은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다. 다른 수험생들은 학교나 학원에서 정보를 접하면서 공부할텐데 나는 낮시간 동안 공장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그나마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 돼준 것은 라디오였다. 당시 교육방송(EBS)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가정고교’라는 강좌가 있었다.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고3 수험생을 대상으로 현직교사들이 문제풀이를 하는 입시 강의였다.

매일 밤 공장일이 끝나면 라디오 앞에 앉아서 방송을 들었다. 과목별로 15분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의 강의였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공장에서 일이 늦게 끝나는 날은 방송을 녹음해 두었다가 밤늦게 강의를 들었다. 나에게 라디오는 세상과 연결된 끈이었으며 정보를 접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라디오는 나의 스승이면서 학교인 셈이었다.

하루에 잘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서너 시간밖에 안됐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서 항상 수면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건강상태도 좋지 않아 눈은 충혈돼 있고 입술은 늘 터져 있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코피가 터졌다. 건강이 많이 나빠진 것 같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건강에 대한 투정은 나에게 사치고 허영이었다. 육체적인 고통도 힘들었지만 그보다는 시험에 떨어지면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이겨내기가 더 힘들었다.

마침내 국립사범대에 합격하다

대학을 나온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대학은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을 다니지 못한 사람의 눈에 대졸자는 대단한 사람으로 보인다. 공부가 힘이 들수록 대학 나온 사람이 그렇게 위대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지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한번 시작한 일이니만큼 일단 최선을 다해 보자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해 12월, 마침내 대입학력고사를 치렀다. 시험은 예상했던 것보다 쉬웠다. 나중에 점수를 받아보니 수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다.

야간 전문대학을 목표로 했던 나는 예상보다 좋은 점수를 받아들고 진로를 수정해야 했다. 교사가 되고 싶었다. 국립사범대학은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시안내서에서 읽고난 다음 주저없이 목표를 사범대학으로 정했다.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나는 이렇게 해서라도 학교에 다니지 못한 아쉬움을 보상받고 싶었다. 항상 그랬듯이 물어볼 사람도, 조언을 해줄 만한 사람도 없었다. 모든 판단과 결정을 혼자 해왔기에 진로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국립사범대학은 학교에 내는 등록금이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대학졸업후 4년을 의무적으로 공립학교 교사로 근무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학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는 내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나는 마침내 대학에 합격했다. 온갖 고생 끝에 합격하고 난 순간 그 형언키 어려운 기쁨은 그간의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뿌듯한 성취감은 물론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쳤다. 공장에서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었고 같이 일하던 친구들도 다들 부러워했다. 회사 사장도 나를 직접 불러 격려하고 경제적인 도움도 줬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공장생활을 끝내야 할 때가 됐다. 나의 성장기 대부분을 보냈던 공장,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 손때가 묻은 기계들을 닦으며 작은 희망을 보았다. 그 걸레에 묻어나는 기름때 속에는 나의 과거가 묻혀 있었다. 1983년 2월 공장에 사표를 냈다. 그렇게 해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공장생활에서 마침내 해방이 됐다.

그해 3월, 나는 스물세 살의 나이에 대학에 들어갔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내가 드디어 대학 신입생이 됐다. 소위 남들이 말하는 공돌이에서 대학생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때는 공장에서 일하는 남자를 공돌이라고 불렀고, 여자를 공순이라고 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설렘과 기대로 시작한 대학생활은 내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였다.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의 얼굴만 해도 이전까지 내가 만나던 사람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핏기 없는 얼굴에 무표정한 공장직공들과는 달리 하나같이 뽀얀 얼굴에 솜털이 뽀송뽀송한 게, 다들 내 눈에는 마치 동화 속의 왕자나 공주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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