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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명택 15·마지막회

경북 안동 鶴峯 金誠一 종택

退溪학풍 이어온 항일독립운동 명문가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경북 안동 鶴峯 金誠一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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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후반 김흥락이 안동 일대에서 지녔던 권위는 대단했다. 그 상징적인 예를 보자. 1890년 안동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신임 부사가 아전들과 짜고 읍민들을 착취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그 해결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김흥락의 중재였다. 김흥락은 유림사회와 민중들 모두가 신뢰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김흥락이 향청에 좌정하여 “무릇 민정은 순하면 따르고 역하면 뿌리치는 법이다. 모든 폐정을 고치게 할 터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기다리라”고 한마디 하니, 운집해 있던 읍민들이 “그 나으리께서 우리를 속이겠는가? 그만 집으로 가세나!”하고 모두 해산했다고 한다.

김흥락이 지닌 이러한 권위는 구한말 일제가 들어오면서 참담한 굴욕을 겪어야 했다. 그 굴욕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사들은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에 나섰다. 인구비율로 볼 때 전국에서 항일지사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1896년 7월22일 학봉집안과 김흥락이 겪었던 굴욕의 한 대목은 이렇다.

“김회락 의병포대장이 지휘하는 100여 명의 의병이 안동시 북후면 옹천에서 일본군에 패전하였다. 김회락 대장은 간신히 도망하여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던 학봉종택 안방 다락에 숨었으나 발각되어 결박되었다. 이에 화가 난 왜경은 김흥락과 김흥락의 동생 김승락, 김진의, 김홍락, 김익모 등 평소에 의병활동을 했던 집안어른 10명을 포박하여 종가 큰마당에 꿇어앉히고, 살림을 전부 마당에 꺼내어 금비녀 등 쓸만한 물건은 전부 가져가고 큰살림은 못쓰게 부수는 등 종가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한참 동안 분탕질을 한 후 다른 분은 풀어놓고 김회락 대장과 같이 활동한 김진의 두 분을 안동경찰서(안동관찰부兵隊)로 압송하였다. 김진의는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김회락 대장은 왜경의 총살 위협에도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고, ‘내가 죽거든 자식들에게 보수(報:원수를 갚다)를 가르쳐라!’고 지켜보던 가족들에게 소리치며 당당하게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두어 의병대장의 처절한 일생을 마감하였다.”(‘西山 金興洛의 독립운동과 그 餘脈’)

의병대장 김회락은 김흥락과 사촌간이다. 왜병을 피해 사촌형님집이자 종가인 학봉종택에 은신해 있다가 벌어진 일이다. 안동의 어른이던 김흥락은 왜경에게 포박당해 자기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수모를 겪었고 사촌동생인 김회락은 총에 맞아 죽어야만 했다. 이는 개인과 집안으로 볼 때는 수모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존망을 염려했던 영남의 명문선비 집안에서 치러야만 했던 노블레스 오블리제, 즉 사회적 책임으로 볼 수도 있다.

안동 일대에서 절대적 권위를 지닌 김흥락이 왜경에게 포박당해 마당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했던 사건은 안동의 유림들과 학봉집안을 포함한 의성김씨들에게 잊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았다.



그 치욕은 안동유림들과 학봉 후손들을 독립운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흥락의 제자들 명단을 기록해 놓은 ‘보인계첩((輔仁帖)’이라는 문건을 보면, 서산의 제자는 모두 707명이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해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람만 해도 60명에 이른다. 훈장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제자들이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서산의 제자 가운데 유명한 독립운동가로 석주 이상룡(상해 임시정부 국무령), 일송 김동삼(국민대표회의 의장), 기암 이중업(파리장서 주도), 성재 권상익(유림단 독립청원서 사건), 공산 송준필(파리장서 주도), 대개 이승희(만주 독립군), 백하 김대락(만주 독립군), 소창 김원식(만주 정의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안동일대에 거주하는 의성김씨들 중에서 훈장을 받은 사람은 27명인데, 이중 학봉의 후손이 11명이나 된다. 학봉집안은 독립운동가의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로 보면 안동이 양반동네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에 합당하는 사회적 책임, 즉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치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파락호로 위장해

김흥락이 종가 마당에서 포박당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손자가 있었다. 당시 나이 10세였던 김용환(金龍煥, 1887∼1946년)이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은 70세의 조부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21세 때에 이강계(李康秊) 의병진(義兵陳)에 참여하여 전투를 하는 등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것이다.

김용환의 항일운동 방법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그는 학봉종택에 대대로 내려오던 전재산인 전답 700두락 18만평(현재 시가로 180억원)을 모두 독립군자금으로 보냈다. 그러다보니 말년에는 종가 살림이 거의 거덜난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안동 일대에서 유명한 노름꾼이자 파락호로 소문이 났었다. 명문가 종손이 되어 가지고 집안 살림을 망해먹은 대표적인 사례로 ‘학봉 종손 김용환’의 이름 석자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는 김용환의 철저한 위장했다.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하였던 것인데, 얼마나 완벽했던지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손이 진짜 노름꾼인 줄 알고 원망이 자자했다. 오죽했으면 ‘양반동네 소동기’라는 책의 저자인 윤학준이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1930년대 형평사(衡平社)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金南洙), 그리고 학봉 종손인 김용환을 꼽았을까.

1945년 광복이 되고 나서야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냈던 그의 비밀스런 행적이 여러 자료에 의하여 드러났다. 그는 1946년 임종에 이르러서도 끝내 그 비밀을 밝히기를 거부하고 죽었지만, 근래에 독립운동을 했던 자료와 증거들이 발견됨으로써 1995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웅 여사는 1995년 아버지가 생전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받게 되자 아버지에 대한 그간의 한 많은 소회(所懷)를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제목의 서간문으로 남긴 바 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학봉 종손이 파락호로 위장하면서 그 많던 종가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넘기고 그것도 모자라 외동딸 시집갈 때 필요한 장롱 살 돈마저 써버려 큰어머니가 쓰던 헌 농을 가지고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는 읽은 이의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그러나 그 돈이 노름해서 탕진한 게 아니라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고보니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던 딸의 입장에서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너무나 드라마틱한 반전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끝내 발설하지 않았던 김용환의 그 결의와 각오가 놀라울 뿐이다.

짐작하건대 그 결심은 그가 10세 때 하늘같이 여겼던 조부가 왜경에게 수모를 당하던 광경을 목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千年不敗之地의 땅 검재

이제 학봉고택의 지세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하자. 대구에서 안동으로 가다보면 서안동 인터체인지가 나오고, 거기서 안동 시내쪽으로 들어가다가 왼편의 봉정사 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계(金溪)마을이 나온다. 금계의 순수 우리말 표현은 ‘검재’다. 학봉종택은 이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16세기의 기록인 ‘영가지(永嘉誌)’를 보면 검재는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 1000년 동안 패하지 않고 번성하는 땅)’로 소개되어 있다. 풍수가에서 ‘삼원불패지지(三元不敗之地; 180년 동안 패하지 않는 땅)’라는 표현은 가끔 쓰지만, 천년불패지지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을 만큼 엄청난 말이다.

그러니 학봉종택이 천년불패지지인 검재마을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일단 주목해야 한다. 불패(不敗)란 전쟁, 기근, 전염병과 같은 삼재(三災; 3가지 재난)가 별로 없다는 말과도 같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살기 좋은 동네다. 검재의 풍수가 어떠하길래 고인들은 이처럼 찬탄을 금치 못했을까.

검재 지역 산세의 특징은 한마디로 부드러움이다. 동양의 현자들은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을, 동(動)보다는 정(靜)을 중시했다. 부드러움과 정이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늘상 사는 사람들이야 으레 그러려니 하겠지만, 외부인이 처음 검재마을에 들어서면 100m 내외의 야트막한 동산들이 주조를 이루는 산세에서 편안함과 부드러움을 인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인 학가산(鶴駕山), 천등산(天燈山), 조골산(鳥骨山)의 줄기들이 내려와 기세가 순해지면서 상산(商山), 주봉산(住鳳山)을 형성하고 다시 이 산세가 들판쪽으로 내려오면서 더욱 순해져서 야트막한 동산들을 형성해 놓은 것이다.

나는 이곳 검재의 산세를 보면서 몇 년 전 답사한 중국의 장시성(江西省) 산세를 연상했다. 장시성은 중국 풍수의 양대 파벌인 형기파(形氣派)와 이기파(理氣派) 가운데 형기파의 본향이다. 사람의 관상(觀相)을 보듯이 산의 관상을 중시하는 입장이 형기파라면, 산의 사주(四柱)를 중시하는 입장이 이기파다.

형기파가 산의 관상을 볼 때 포인트로 삼는 부분은 전체적인 형태다. 즉 산세가 원만하고 부드러운가를 먼저 본다는 말이다. 산이 높지 않고 둥글둥글하고 바위산이 없을 때 부드럽다고 한다. 필자는 당시 장시성의 산세 대부분이 바위 절벽이 없이 둥글둥글한 금체(金體) 형세를 하고 있음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과연 형기파가 태동할 만한 산세구나! 하고 말이다.

안동의 검재 산세가 이와 흡사하다. 오히려 장시성 산세보다 더 좋다는 생각이 든다. 장시성보다 산들이 더 낮고 완만해서 산을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는 만족감과 안도감을 준다. 살기(殺氣)도 보이지 않는다. 살기가 없는 땅에서는 살생도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적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검재는 문사(文士)가 살기에는 최적의 산세가 아닌가 싶다. 문사는 거친 부분을 다듬어 부드러움으로 바꾸어주는 사람이다. 거침에서 부드러움으로 전환하는 과정이 바로 문명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거친 사람이 다듬어져서 부드러워질 때 그 강함은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선비는 외유내강을 전범으로 삼은 것 아닌가.

그러니 검재는 외유내강의 문사를 길러내는 데 있어서 최적의 산세를 갖추었다고 하겠다. 평소에는 지극히 예(禮)를 중시하는 선비면서도, 굴욕에는 참지 못하고 독립운동으로 나갔던 검재사람들의 기질은 이런 산세와 무관하지 않다.

검재 산세의 장점 중 다른 하나는 물이 완만하게 흐른다는 점이다. 냇물의 물살이 급하게 흐르면 우선 물속의 산소 함유량이 적어서 생태학적으로 좋지 않고, 급류가 흐르면서 그 물살을 따라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때문에 기운이 모이지 않고 흩어진다. 그래서 한일(一)자나 직선으로 흐르는 물길보다는 에스자나 갈지자로 흐르는 물을 풍수가에서 선호하는 것이다. 검재를 흐르는 개천들의 물길은 에스자 형태로 완만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검재의 지형이 경사가 적은 평지고 개천이 동네마다 흘러 수량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안동대 이효걸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검재의 냇물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가뭄 피해를 비교적 덜 받으므로 검재마을에는 저수지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낙동강 본류와 개활지(開豁地; 앞이 탁 트인 너른 땅)를 끼고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배수가 잘되어 다른 지역에 비해 수해의 피해도 크지 않다고 한다. 필요한 양의 물을 주산인 주봉산과 상산에서 일정하게 공급받으면서, 물을 빨리 지나가게 하지도 않고 머무르게 하지도 않는 것이 검재마을의 수세(水勢)라는 것이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가 중요하고 농사에서는 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이 적당한 동네인 검재는 농사짓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춘 셈이다.

조선후기의 상류층 주택

학봉종택은 조선후기 상류주택의 모습이다.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풍뢰헌(風雷軒), 선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운장각(雲章閣)을 모두 합쳐 90여 칸, 2000평 대지의 규모다.

운장각에는 총 1만5000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503점은 문화재로 지정됐다. 민간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 규모로는 국내 최대다. 여기서 필자의 주의를 끈 유물은 학봉이 사용하던 안경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안경이라고 하는데, 학봉이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안경테는 거북껍질(龜甲)로 되어 있다.

현재 건물의 좌향은 서남향의 간좌(艮坐)다. 영남지역의 명문부가(名門富家)에선 흥미롭게도 간좌 집이 많이 발견된다. 학봉 생존 당시에는 간좌인 이 터에 집을 지었으나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되고 습기가 많아서 1762년에 지금 위치에서 100m 가량 떨어진 소계서당(邵溪書堂) 자리에 해좌(亥坐)의 종택을 지어 1960년대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4년에 원래의 간좌 자리로 다시 건물을 뜯어 이사온 것이다. 습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집 터를 2m 정도 흙으로 돋운 다음에 이사를 왔다고 한다.

집 뒤의 내룡은 산이 아니라 작은 동산에 가까울 정도로 아담하고 부드럽다. 태조산인 천등산에서 20리를 굽이쳐 내려온 맥이라고 한다. 또 집앞의 안산도 둥글둥글한 금체 형태의 작은 동산들로 형성되어 있다. 이 봉우리들은 노적봉으로서 쌀과 재산으로 간주한다.

그렇다면 소계서당이 있는 해좌의 구종택과 간좌의 현종택은 풍수상에서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해좌 터는 멀리 조산에 뚜렷한 모습의 문필봉이 좋게 보인다. 문필봉은 학자가 살기 좋은 집터다. 반면에 수구가 벌어져 있고 물이 집터를 감아 돌지 않고 쭉 뻗어나가는 형세다. 즉 해좌 터는 문필봉이 장점인 반면 수구와 물의 흐름이 약점이다. 현재 종택인 간좌는 문필봉이 없는 대신 물의 흐름이 집을 감싸고 흘러서 좋고, 안대도 노적봉이라 재물이 모이는 터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각기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는 것이다. 어느 터를 택할 것인가는 종택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학봉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대에 이르러 독립운동 군자금을 대느라고 이 집 재산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다. 그런데다 딸만 하나 있었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했다. 돈도 떨어진 데다 아들도 없다는 것은 수백년간 명맥을 이어온 학봉종가 역사에서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학봉종가를 보종(保宗)할 것인가? 먼저 대를 잇기 위해서는 양자를 들이는 것이 시급했다. 학봉집안은 워낙 손이 귀해서 김용환도 양자로 들어온 종손이다. 전체 문중회의를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검재에서 100리 정도 떨어진 지례(知禮)라는 곳에 살고 있는 김시인(金時寅)이 종손으로서의 여러 자질을 갖추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양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물론 양자 결정에는 종손인 김용환의 생각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문제는 김시인의 생가에서 아들을 양자로 보내는 일을 반대하는 것이다. 살림도 완전히 거덜난 상태에서 종손의 무거운 책임을 다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가쪽에서는 완강하게 양자를 거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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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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