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호

“분당 수지는 알아도 수지킴은 모른다”

수지킴 사건 특종 이정훈 기자 vs 은폐혐의 구속 이무영 전 경찰청장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입력2004-11-05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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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무영(李茂永·57) 전 경찰청장이 수지킴 사건 수사를 중단시킨 혐의로 2001년 12월10일 구속됐다. 검찰측 설명에 따르면 이 전청장은 2000년 2월 김승일(金承一)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국장의 부탁을 받고, 경찰청 외사관리관실이 하고 있던 수지킴 사건 수사를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속되는 날까지 이 전청장은 “수사를 중단시킨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주지하다시피 이 전청장은 경찰 수사권 독립을 추진했던 인물. 때문에 경찰청에서는 ‘이 전청장의 구속은 검찰의 보복이다’라는 주장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이들은 “이 전청장은 김승일 국장의 부탁을 받고 수사를 중단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정원이나 검찰이 요구하면 역학 관계상 꼼짝없이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 경찰이다. 관계 법령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으니 경찰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 전청장으로서는 국정원의 지시를 따르라고 규정한 관계 법령을 어긴 것이 된다”고 지적한다.

    검찰은, 검찰총장이 국회에서 탄핵 대상으로 몰릴 정도로 위기에 몰린 상황을 역전시키는 기회로 수지킴 사건 수사를 활용한 면이 있다. 한 검찰 소식통은 “검찰은 수지킴 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엄벌에 처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무너진 검찰의 위상을 지키려 했다”고 말했다. 2001년 12월1일 기자는 수지킴 사건 수사를 중지시킨 혐의를 받고 있던 이무영 전 청장을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이 전청장과의 인터뷰는 열흘 전쯤 약속된 것이었다. 이 전청장은 2002년 여름에 열리는 지방선거에서 전북지사 후보로 출마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청장으로서는 전북지사 후보로서의 포부를 밝히기 위해 인터뷰에 동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수지킴 사건이 터져 나옴으로써 인터뷰의 주제가 바뀌어버렸다. 2년 전수지킴 사건을 처음 공개한 기자는 총력을 다해 수지킴 사건과 관련한 질문을 퍼부었다. 이 전청장과의 인터뷰는 그가 구속되기 전날까지 전화 통화를 통해 좀더 보완했음을 밝힌다.

    -이청장께서는 경찰청의 수지킴 사건 수사를 덮은 장본인이라는 보도가 있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분당 수지는 알아도 수지킴은 모릅니다. 수지킴은 이기자가 전문가니, 제가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인지 아닌지는 더 잘 알 것 아닙니까. 수지킴 사건은 1987년 초에 발생했다고 하던데, 그때 저는 88올림픽 기획과장(총경)으로 경비계획을 짜고 있어 그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어젯밤에 이기자가 쓴 ‘신동아’ 기사를 읽고 1987년에 수지킴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세상에! 1987년이면 대명천지인데, 그런 일이 다 있었더군요. 1987년에 수지킴 사건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제가 왜 재수사를 은폐하겠습니까.”

    “청장실 나가다 김국장을 만났다”

    -2000년 1월20일자 ‘주간동아’에 제가 수지킴 사건을 처음 보도하고, 이어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이 홍콩까지 날아가 수지킴 사건을 취재한 후 2월12일 방영했습니다. SBS 팀이 홍콩을 방문한 직후 경찰청 외사관리관실은 홍콩 주재 경찰관을 통해 홍콩 경찰의 자료를 구해 수지킴 사건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2월15일 국정원의 김승일 대공수사국장이 이청장을 찾아온 것은 사실 아닙니까.

    “김승일 국장을 만난 것을 해명하기에 앞서 당시의 제 상황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저는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한직으로 꼽히는 경찰 관련 학교에서 근무한 적이 많았습니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마다 경찰 개혁 방안에 관한 시방서를 만들어보곤 했습니다.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께서 경찰청장에 임명했을 때 저는 곧바로 경찰 개혁에 착수할 준비가 돼 있었던 것입니다.

    1999년 11월15일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경찰청장 임명장을 받던 날,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임명장을 받은 후 대통령께 경찰 개혁에 관해 보고를 드리겠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임명장을 받은 후 바로 대통령과 독대하면서 경찰 개혁 방향을 적은 제 취임사를 드리고 20여 분간 경찰 개혁 방향에 대해 보고드렸습니다. 경찰 개혁은 타기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찰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소신이라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대통령께서는 좋은 생각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통령의 격려로 고무된 저는 자신을 갖고 바로 경찰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1999년 12월1일부터 2000년 3월9일까지 ‘경찰 대개혁 100일 작전’에 들어간 것입니다. 저는 전체 경찰공무원의 96%를 차지하는 경위 이하 경찰공무원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것이 경찰 개혁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하고, 경찰 헬기를 타고 울릉도와 마라도까지 날아가 간담회를 갖고, 현장 근무자의 애로 사항을 청취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경찰 개혁 방향에 대해 밝히고 경찰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 역설했습니다. 세세히 세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때 제가 만난 현장 근무자가 무려 1만500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김승일 국장이 저를 찾아왔다고 하는 것은 제가 경찰 개혁 100일 작전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던 2000년 2월15일이라고 합니다. 날짜까지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가 그렇다고 하니 그날이 맞겠지요. 김국장은 경찰청장실에서 5분간 나를 만나 수지킴 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 중지를 요청해, 제가 받아들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기억은 다릅니다. 우선 제 기억은 김국장의 기억만큼 명료하지 않습니다. 그날 비서실장(吉炳松 경정)이 ‘국정원의 대공수사국장이 찾아왔다’고 하기에 다른 일로 청장실을 나오다가 김국장을 만난 것 같습니다. 가볍게 수인사만 하고 나가려고 하자, 김국장이 홍콩인가 뭔가 하는 이야기를 꺼내기에, 저는 ‘외사 사항이라면 외사관리관(김병준 치안감·현재는 경찰청 정보국장)과 협조하시지요’ 하고 밖으로 나간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잠깐 잠깐! 말씀을 잘라서 미안합니다만, 경찰청에는 국정원의 대공수사국에 해당하는 보안국이 있지 않습니까. 대공수사국장이 찾아왔으면 보안국장을 만나라고 해야지 왜 외사관리관을 만나라고 합니까.

    “그때 대공과 관련된 외사 사항이 많았습니다. 중국에서는 한국인 사업가를 납치해 돈을 부쳐주면 석방해주겠다고 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던 때였으므로 외사관리관이 중국 공안에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곤 했습니다. 중국에서 일어나는 한국인 납치사건에 대해 국정원은 당연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공수사국장이 홍콩 어쩌고 하기에 저는 외사 사항으로 판단하고 외사관리관을 만나라고 한 것입니다.”

    -수지킴 사건은 중국에서 일어난 한국인 납치와는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그런데 왜 외사관리관실에서 수지킴 사건을 다룹니까. 대북 용의점이 있는 사건이라면 경찰청에서는 보안국이 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외사관리관실에서는 대공사건도 담당합니다. 과거 외사관리관(경무관)은 ‘보안심의관’이란 이름으로 보안국장(치안감) 밑에 있다가 독립기구로 떨어져 나왔으니까요. 한때 국정원에서도 해외파트가 북한과 해외를 전부 담당하지 않았습니까. 주간동아와 SBS 보도가 있은 후 홍콩에 있는 우리 경찰 주재관이 홍콩 경찰에게 수지킴 관련 자료를 요청해 그 자료가 경찰청 외사관리관실로 들어온 모양입니다. 그러니 외사관리관실은 수지킴 사건에 관한 자료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국정원의 대공수사국장은 경찰청 외사관리관실에서 수지킴 사건을 수사하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나중에 안 사실인데, 홍콩 경찰 자료를 입수한 직후인 2월12일부터 14일 사이 외사관리관실 산하 외사3과에서 국정원에 수지킴 자료를 제공해 달라고 세 번이나 요청했던 모양입니다. 외사3과에는 국정원에 자료 제공을 요청했던 근거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국정원의 대공수사국장이 역으로 협조를 요청하겠다며 저를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외사관리관실과 국정원 사이에 벌어졌던 일이라 당시에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대공수사국장이 찾아와 홍콩 어쩌고 하기에 저는 외사관리관실과 협조하라고만 하고 밖으로 나갔던 것입니다. 역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국정원은 거꾸로 외사관리관실에 경찰이 홍콩에서 입수한 수지킴 자료를 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찰이 입수한 수지킴 자료가 국정원으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국정원은 그 자료를 돌려주지 않았습니까.

    “복사하고 돌려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찰에서는 계속 수사를 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이기자, 다 알면서도 묻는 것 아니오. 국가기관 등에 대한 협조 요청을 규정한 국가정보원법 제15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기자 주: 국가정보원법 15조는 ‘원장은 이 법이 정하는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관계 국가기관 및 공공단체의 장에게 요청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 때문에 국정원은 경찰 등 타 국가기관에서 다루는 사건을 얼마든지 가져갈 수 있습니다.

    국정원은 경찰청 훈령인 범죄수사규칙 75조에 따라서도 경찰이 수사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기자 주: 범죄수사규칙 75조는 ‘경찰관서장은 … 기관에 이송 또는 인계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여기서의 기관은 국정원 등을 가리킨다). 국가정보원법에 의거한 정보 및 보안업무기획 조정 규정, 이것은 비밀 지침(3급 비밀)인데, 이것에 의해서도 외사를 포함한 보안(대공) 정보는 국정원에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법 조항 때문에 경찰은 국정원에게 수지킴 사건을 넘겨준 것입니다. 경찰은 수지킴 사건의 수사를 덮은 적이 없습니다.”

    힐튼 호텔서 김 전국장 만나

    -김승일 국장은 예전부터 아는 사이셨죠.

    “아는 분입니다. 과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사적으로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김국장 하고 가까운 사이면 그날 제가 그를 그렇게 박절하게 내보냈겠습니까. 나는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도 몰라요”

    -그리고 김국장을 다시 만난 것이 1년 9개월 후인 2001년 11월15일이지요? 서울지검 외사부가 수지킴 피살 사건 피의자 윤태식씨를 기소한 것이 11월13일이었으니, 그 이틀 후에 김국장을 만나셨군요. 그때 김국장은 국정원을 퇴임해 보험공사에 감사로 가 있었고, 이청장께서도 경찰청장을 퇴임한 다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찰청장에서 퇴임한 다음인 2001년 11월9일 김국장이 제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피하려고 했는데, 부득불 만나자고 해서 11월15일 오전 11시쯤 힐튼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손해보험협회에서 제게 감사패를 주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경찰청장 재임 중에 안전띠 매기 운동을 벌였습니다. 저로서는 자랑스러운 일이라 배경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은 OECD 가입국 중에서 교통사고 사망자 1위 국가입니다. 한국은 자동차 1만대 당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7.4명이고, 일본은 1.2명입니다. 이런 상태로 2002년 월드컵을 치르면 한국은 일본과 너무 비교돼 국가적으로 창피를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찾고 있었는데 너무도 당연하게 안전띠 착용을 생활화하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2000년 4월2일부터 계도기간을 거쳐 안전띠를 매지 않은 운전자를 집중단속했는데, 이것이 엄청난 성과를 가져왔어요. 23.4%이던 2001년 2월의 안전띠 착용율이 98%까지 치솟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2001년 11월 초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전년에 비해 2001명이나 줄자 손해보험회사가 ‘만세’를 불렀습니다. 2000년의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1만236명이었으나 안전띠를 매게 한 지 6개월 만에 20% 정도 줄어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자동차 보험료 지급 등으로 적자를 봐온 손해보험회사들이 2001년에는 1741억원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흑자로 반전되자 주가까지 따라 올라, 손해보험회사는 희색이 만면해질 수밖에요. 그래서 손해보험사협회가 감사패를 주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11월15일로 예정돼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비서실장을 한 길병송 경정도 힐튼호텔로 불러냈습니다. 오전 10시에 먼저 약속한 사람을 만나고 있는데, 11시쯤 김국장이 커피숍으로 오더라고요. 먼저 손님을 보내고 그를 맞았습니다. 김국장은, 수인사를 나눈 후 제게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수지킴 사건이라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곤란하게 됐는데, 국정원의 고 엄익준(嚴翼駿) 2차장이 전화해서 처리한 것으로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래요.

    저는 이 사람이 무슨 일로 인해 조사를 받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저는 수지킴 사건에 대해서 전혀 모를 때라, ‘무슨 소리를 하느냐. 나는 경찰을 떠난 사람이다. 나는 돌아가신 엄차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얼굴이 벌게져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동석한 길병송 경정이 당시 상황을 덧붙여 설명했다.

    “그때가 국정원 김은성(金銀星) 2차장의 사표가 수리된 시점이었습니다. 한때 이청장께서 김은성 차장 후임자로 국정원에 간다는 얘기가 있어, 그 일 때문에 김국장이 찾아왔는 줄 알았어요. 옆자리에 있었는데 이청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김국장이 허둥지둥 나가더라고요. 두 분이 만난지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러자 이청장이 ‘병송아, 수지킴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정보 보고도 받지 않았다”

    이 전청장에게로 질문을 돌렸다.

    -엄익준 2차장과도 잘 아는 사이시죠.

    “그분은 전주 북중 3년 선배입니다. 제가 왜 그분의 인격을 깎아내리는 일에 가담합니까? 참….”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수지킴 사건을 놓고 이무영 청장의 이름이 거론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수지킴 사건과 관련해서 저와 경찰은 곁가지입니다. 이 사건은 국정원이 연루된 사건이지 저나 경찰이 개입될 사건이 아닙니다. 검찰이 본줄기를 치기 위해 곁가지를 건드리는 것인지 몰라도…, 아무튼 저는 이 사건 수사를 중지하라고 한 적이 없어요.”

    -외사관리관실에서도 그렇게 말하는가요.

    “김국장을 만난 며칠 후 ‘한국일보’에 수지킴 관련 사건에 경찰 간부가 연루돼 있다는 보도가 나왔기에, 2000년 2월 당시의 외사관리관이었던 김병준 치안감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경로로 이런 기사가 나오게 되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김치안감은 ‘청장님은 잘 모르실 겁니다. 당시 국정원의 실무자 몇 명이 찾아와 경찰이 홍콩 주재관을 통해 수사하고 있는 사건은, 1987년부터 국정원이 수사하고 있는 사건이므로 이첩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실무자들과 법적으로 검토한 후 이첩해도 법률상 문제가 없다고 판단돼 국정원으로 이첩했습니다. 그후 구두로 청장님께 이첩 보고를 한 것 같습니다만, 청장님께서는 경찰 개혁 100일 작전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어 기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김치안감은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후 김치안감은 제게 전화를 걸어와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만, 청장님께서는 저에게 국정원 협조사항에 대해 검토해 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검토한 후 사건을 국정원에 이첩했고 청장님께 이첩한 것을 구두로 보고한 것 같습니다. 그후로는 자세한 보고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김치안감의 전화를 받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것을 제외하고는 수지킴 사건 수사와 관련해 부하로부터 보고받은 사실은 없습니다.”

    -경찰청 정보국에는 각종 언론보도를 분석하는 팀이 있습니다. 2000년 초 주간동아와 SBS가 연속해서 수지킴 사건을 보도했으면 당연히 정보국에서는 수지킴 사건에 대한 정보 보고를 올렸을 것입니다.

    “정보국이 입수한 정보가 전부 청장에게 올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수지킴 사건에 관한 정보 보고를 읽은 기억이 없습니다. 수지킴 사건은 검찰이 윤태식씨를 기소하고, 이어 신동아에서 수지킴 사건 전말기를 밝힌 후 저도 비로소 처음 안 사건입니다. 국정원에서 대공수사국장이 찾아오고 할 때도 무슨 일인지 몰랐습니다.”

    -화제를 경찰청장 재임 시절로 돌려보겠습니다. 저는 이청장을, 경찰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한 분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잘못하신 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호남 출신 인사를 대거 승진시킨 것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은 것은 아닙니까.

    “좋아요. 얘기해 봅시다. 순수 직업 경찰관이 9만1000여 명쯤 되는데 이들을 본적이나 출신고 등을 기준으로 분류해보면 영남 출신이 31%, 호남 출신이 29%, 충청이 15.5%, 서울·경기·강원 등 중부권이 20% 정도 됩니다. 경정 이하 하위 계급에는 대개 이러한 비율로 배치돼 있습니다. 그런데 총경 이상에서는 영남과 호남만 놓고 따지면 44% 대 21%가 됩니다. 영남 출신은 인구 비율보다 13% 포인트 많고 호남은 8% 포인트가 적습니다.

    해마다 경무관 승진자가 10∼11명 정도 나오는데 영남 정권 때 5∼6명은 영남 출신이고 호남 출신은 이른바 ‘배려 차원’에서 1명씩 넣어주었습니다. 나머지는 충청이나 중부권 출신이고요. 저는 이것을 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총경 이상 고위직도 경찰 인구비율대로 4:4:2:2로 승진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특정 지역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박탈감으로 인식됐던 모양입니다. 국회에서도 여당 공격용 자료로 이용했으니 그들의 박탈감은 더욱 컸겠지요.”

    -전북 출신으로는 최초의 경찰 총수였지요.

    “제가 54대 청장인데, 그동안 호남 출신은 세 명이고, 전북 출신은 제가 처음입니다. 경상도 출신 청장은 28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유당과 공화당 정권 때는 이북 출신이 많았으므로 이들을 뺀다면 사실상 경찰 총수는 영남이 독점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찰청장 임기제 도입 필요

    -54명의 경찰청장 중에서 임기 2년을 채운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청장께서는 임기를 채우셨습니다.

    “잘못 알고 계십니다. 검찰총장과 합참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은 법적으로 임기가 2년으로 명시돼 있으나 경찰청장은 법적으로 임기가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저는 유사한 분야의 총수 임기가 2년이라, 2년을 채우려 한 것뿐입니다. 사실 경찰청장의 임기는 법령으로 2년을 보장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2년은 근무해봐야 예산안을 짜서 경찰 업무를 추진하고, 그 결과를 교훈 삼아 새로운 정책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기 위해서도 경찰청장 임기제는 필요합니다.

    54명의 역대 청장 중에서 2년 이상 총수를 맡은 분이 불과 6명에 불과할 정도로 경찰 총수의 재임 기간이 짧았습니다. 저는 4일 모자라는 2년을 했습니다.”

    -수지킴 사건을 이야기하며 경찰 개혁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경찰 개혁을 생각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저도 탄탄대로만 달려온 것은 아닙니다. 몇 번인가 ‘이제는 옷을 벗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1998년 경찰종합학교장으로 발령받았을 때는 계급정년 때문에 정말로 옷을 벗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다섯 번 읽고 마음을 비웠습니다.

    이기자도 살아보면 알겠지만, 세상일이 나빠져봤자 얼마나 나빠지고, 또 좋아져봤자 얼마나 좋아집니까. 그러니 항상심(恒常心)을 갖고 살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경찰 개혁은 누가 해도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가하다고 하는 이른바 물 먹은 자리에 가 있을 때 경찰 개혁 방안의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재임중에 경찰 수사권 독립을 추진하셨는데, 일각에서는 이청장이 경찰 수사권 독립을 추진했기 때문에 수지킴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다고도 합니다.

    “수사권 독립이란 말은 어폐가 있어요. ‘수사권 현실화’가 적절한 표현이지. 실제 수사의 98%를 경찰이 담당하는데, 사건 당사자인 국민은 검찰에 가서 경찰에서 한 것과 똑같은 수사를 받고 있어요. 일제 때 만들어진 형사소송법에서 검찰에서 작성한 조서를 증거로 채택한다고 해놓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국민들은 똑같은 조서를 두 번 쓰는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1분1초가 아까운 시대인데 이게 무슨 낭비입니까.

    경찰은 실력이 없다고 하는데, 말이 안되는 소리입니다. 중앙경찰학교에 순경으로 들어오는 젊은이의 92%가 전문대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갖고 있어요.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악대(樂隊)를 모집하자 미국의 줄리아드 음대를 나온 사람이 도전하더라고요. 순경 계급장을 달아주는 자리인데….

    세상이 무섭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결국 국민은 형사소송법을 바꿔 경찰의 수사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경찰은 생명산업”

    -형소법만 바뀐다고 경찰의 수사권이 독립되겠습니까. 예를 들어 헌법 12조 3항은 ‘영장 신청은 검사가 한다’로 돼 있습니다. 검찰의 영장 신청이 헌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입니다. 이러니 경찰이 수사권 독립을 위해 추진하는 구속장(경찰이 청구하는 영장) 제도는 현실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개헌을 하지 않고는 경찰의 수사권 독립이 현실화할 수 없는 것이지요. 또 검찰청법 4조는 ‘검사는 범죄수사에 관해서는 사법경찰을 지휘 감독한다’고 돼 있는 등 곳곳에 경찰의 독자적인 수사를 방해하는 법률 조항이 있습니다. 경찰에서는 이러한 조항들이 경찰을 검찰의 노예로 만드는 ‘노예조항’이라고 하던데, 이에 대한 이청장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경찰 수사권 독립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의 공론화 중단 지시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그 문제는 검·경이 다툴 일이 아니고 국민들이 해결해줘야 할 문제입니다. 지금 체제대로 가면 결국 수사를 받는 국민이 불편하니까 국민이 변경을 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경찰 수사권 독립이 검·경간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져서는 정말 곤란합니다. 경찰은 실력부터 열심히 닦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것을 빠뜨릴 수 없군요. 경찰이나 검찰이 비난을 받는 것을 유심히 살펴보면, 강력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시국사건이나 정치적인 사건을 편파적으로 처리해서 욕을 먹더군요. 경찰이나 검찰이 민생 치안을 위협하는 사건을 편파적으로 수사한다는 비난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국민들은 민생 치안 분야의 강화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보·보안·수사·방범·경비·교통·외사 등 경찰의 여러 분야 중에서 민생 치안과 관계된 방범과 수사 분야가 각광을 받아야 하는데, 거꾸로 경찰에서는 정보나 경비처럼 윗사람에게 잘 보일 수 있는 분야가 인기를 끌고 있어요. 경찰 개혁을 했다지만 수사 분야에서 개선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IT시대에 등장하는 새로운 범죄를 막기 위해 사이버 경찰청을 만들었고 과학수사를 활성화했습니다.”

    -과학수사요? 과학수사의 시작은 감식입니다. 그런데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감식기관이라는 서울지방경찰청 감식과에 가보면 전부 ‘할아버지’들만 앉아 있어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감식은 이른바 경찰 내의 3D 분야로 꼽혀 젊은 경찰관들은 거의 지원하지 않습니다. 감식을 잘 해서 범인을 잡아도 결국 범인을 잡은 수사경찰만 특진하니 누가 감식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저는 재임중에 감식과를 과학수사과로 바꾸고 감식을 잘해 범인을 잡으면 감식한 사람도 특진하게 하는 제도를 처음 도입했습니다. 또 여러 번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지문은 전부 컴퓨터에 입력시킴으로써, 사건 발생시 범인 검거 속도를 빠르게 했습니다.

    저는 경찰은 생명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사나 방범·교통 등은 직접적으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분야고, 기타 다른 분야도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있는 분야입니다. 제가 인기를 끌지도 못하면서 경찰청장에 2년이나 머물러 있으려고 한 것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생명산업을 진작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간첩과 좌익사건을 다루는 보안 분야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DJ 정부 들어 경찰청 보안국은 대공수사를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업무를 놓은 것입니까, 아니면 진짜로 간첩이 줄어든 것입니까. 간첩사건을 수사하는 국정원의 대공수사국과, 기무사의 방첩처 그리고 경찰청의 보안국은 공통적으로 국정원과 기무사·경찰청 내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공과 방첩과 보안은 변화한 세계에 맞는 규모를 갖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첩이 줄었다면 이 분야를 줄여야 할 것이고, 반대로 위축돼 있다면 활성화해야 할 텐데, 워낙 고립돼 있다보니 개혁을 외치는 사람도 이 분야만은 손을 대려고 하지 않더라고요.

    “많은 분야를 알고 계시는군요. 보안 분야를 조정해야 한다는 얘기가 이제 겨우 나오고 있으니 언젠가는 조정이 이뤄지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너무 이릅니다.”

    -경찰청 정보국은 ‘첩보의 난지도’라고 할 정도로 온갖 첩보가 취합됩니다. 그러나 구슬이 열 말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꿰어야 보배지. 수많은 첩보 중에서 정보를 가려내고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을 골라내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지도자들에게 올리려면 판단 분석 기능이 중요한데, 경찰청 정보국은 그 기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은 경찰청 정보를 보기나 합니까. 경찰청 정보는 대통령에게 올라가지 못하고 차단 당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정보국 직원들에게 ‘여의도 증권가에 나도는 ‘치라시’ 첩보를 들고오지 말라, 나는 ‘치라시’ 첩보는 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경찰 정보는 생생한 밑바닥 민심을 모으는 것이 특징입니다. 택시 기사의 이야기와 복덕방 아저씨의 이야기가 담기는 것이 경찰 첩보입니다. 물론 첩보를 가공해서 고급 정보를 만드는 데는 국정원이 뛰어나겠지요. 그러나 우리도 그 정도는 합니다. 우리가 만들어 분석한 정보도 대통령에게 직보됩니다.”

    -그렇게 경찰 정보가 치밀하다면 2000년 2월에는 당연히 수지킴 사건에 대한 보고가 청장한테 올라갔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수지킴 사건에 대한 정보 보고를 받은 기억이 없어요. 정말입니다.”

    -검찰에서 김승일 대공수사국장과 대질신문을 시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까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분당과 수지는 알아도 수지킴은 모른다고!”

    무최루탄과 립스틱 라인

    -이청장 재임중에 최루탄이 없어졌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무(無)최루탄을 강행했습니까.

    “1997년 말 한국은 경제위기 때문에 IMF 상황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때 한국의 목줄을 쥐고 있던 것이 누구였습니까.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라고 하는 신용평가 기관 아닙니까. 이들이 한국에 대한 신용등급을 내리고 올림에 따라 한국경제가 울고 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위가 일어나 한국의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돌이 날아오고 최루탄이 펑펑 터지는 장면이 CNN 등을 통해 세계로 타전되면 한국은 그냥 죽어요. 그래서 경찰만이라도 최루탄을 쏘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경찰은 김대중 대통령-김세옥 청장 때인 1998년 9월3일 경남 창원의 만도기계 노사분규 때 3404발의 최루탄을 쏘고 지금까지 쏘지 않았습니다. 제가 경찰청장에 취임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저는 서울지방경찰청장에 취임한 1999년 1월12일부터 ‘절대로 최루탄을 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서울청장 시절 지하철 노조 파업과 농·수·축협 통합에 반대하는 시위 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만 저는 최루탄을 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서울청의 참모들은 물론이고 윗분들까지도 최루탄을 쏴야 시위대를 해산시키지 않냐 했지만 저는 한사코 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무최루탄은 성공작입니다.

    일본 경찰이 마지막으로 최루탄을 쏜 것이 1984년이니 우리는 일본보다 14년 늦게 무최루탄을 실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1999년 한해 동안 최루탄 비용으로 잡아 놓은 15억원이 고스란히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최루탄 회사는 망하게 하고 손해보험회사는 살려놓고 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명 ‘립스틱 라인’으로 불렸던 여경 기동대에 대해 여쭤보지 않을 수 없군요.

    “무최루탄과 똑같은 논리로 만들었습니다. 시위를 하는 분들은 불만이 있어서 하는 분들인데, 그분들에 대해 최루탄을 쏘고 기동대를 투입해 강제 해산하면 더욱 불만이 높아질 것 아닙니까. 결국은 화염병까지 날아오게 되는 것이고…. 시위에 나선 분들을 순화시키려면 그럴만한 도구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1999년 3월 창설한 여경 기동대였습니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려면 여경(女警)도 남경(男警)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김강자 서장도 ‘여경을 온실 속의 화초로 만들지 마십시오’라고 몇 차례 부탁을 해왔습니다. 여경 기동대는 서울 청량리에서 농민 시위 때 처음 투입했습니다. 그때 저는 방석복(防石服)을 벗긴 의경들로 일차 폴리스 라인(police line)을 만들게 했는데 충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갖고 폴리스 라인을 여경 기동대로 교체했습니다.

    그후 시위 때마다 방석복을 입지 않은 여경 기동대를 내보내자, 언론이 주목하고 사회적으로 반향이 컸습니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는 대신 여경들에게 야쿠르트를 건네주기까지 했으니까요.

    립스틱 라인은 프랑스의 ‘르몽드’지가 김대중 대통령 재임중의 한국 변화상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여경 기동대 사진을 싣고 ‘한국, 경찰봉 대신 립스틱으로 시위 막아’를 제목으로 붙였습니다. 여기서 립스틱 라인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선진국 언론은 다르더라고요. 한국 언론이라면 립스틱 라인이라는 제목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요.”

    -김강자 서장 이야기가 나왔는데, 김서장을 서울 종암서장에 앉혀 텍사스촌 일대의 미성년자 매매춘을 근절케 한 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까, 의도한 사건이었습니까. 그때 언론은 ‘여여(女女) 싸움을 통해 미성년자 매매춘을 단속했다고 보도했는데요.

    “제가 치안감을 달고 서울경찰청에서 형사부장을 할 때 김강자씨는 경정으로 민원실장을 했습니다. 그때 김서장을 처음 알았는데 매우 맹렬한 여성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김서장은 이미 그때 미성년자 매매춘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1999년 말 경찰개혁 100일 대작전을 위해 전국을 다니다 충북 옥천에 갔더니 김강자씨가 옥천경찰서 서장으로 있더군요. 김강자 서장 아주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헬기에서 내리니까, 다른 경찰서에 갔을 때와 달리 여경이 나와 꽃다발을 주더라고요. 여성 NGO 대표들도 와 있고요. 김서장한테서 보고를 받아보니 옥천군내 티켓 다방을 없애는 데 주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경찰서 안에 있는 체육관에 가보니 동네 꼬마들이 태권도를 배우고, 아주머니들은 에어로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노래방까지 있었어요. ‘아, 바로 이것이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봉사 경찰은 바로 이런 것을 하는 경찰이란 생각이 든 것이지요.

    경찰서 마당으로 내려가니 김서장이 ‘청장님, 이것 한번 쳐보십시요’ 그래요. 뭔가 하고 봤더니 오락실에 가면 동전 넣고 주먹을 치는 펀치 볼이었습니다. 주먹을 맞추는 펀치볼 부분에 ‘김강자 서장’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서장한테 불만이 있는 직원이나 스트레스를 받은 직원은 펀치볼을 서장으로 생각하고 줘 패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하하 참!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려고 헬기장으로 가는데 김서장이 ‘청장님 서울에서 여성문제로 한번 일해보고 싶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여러 사람이 있어 대답을 하지 않고 돌아왔지요.

    서울에서 경찰서장을 하려면 총경을 달고 4년쯤 보낸 고참 총경이라야 합니다. 김서장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김서장의 생각이 하도 발랄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써먹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대표적인 매매춘 장소가 어딘가 생각하다 텍사스촌에 가까운 종암경찰서장에 김총경을 임명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의령에 있던 김인옥 서장을 경기도 양평 서장에 앉혀 둘을 경쟁시키기로 했습니다. 양평은 러브호텔이 많은 곳 아닙니까. 이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김서장은 밤만 되면 점퍼를 입고 남성 간부들을 데리고 텍사스촌을 시찰나간 것입니다. 그러자 곧 언론에서 관심을 갖고 집중 조명을 하는 것입니다. 김서장이 매매춘 여성을 붙잡고 ‘너 몇 살이니? 힘든 것 없니’하고 질문하는 것이 언론에 보도되자 잘한다는 칭찬이 쏟아지더라고요. 매춘조직이 얼마나 지독합니까. 그런데 여자 서장과 언론이 찾아다니자 그들은 저항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후 저는 방범과장 회의를 할 때마다 김서장 사례를 거론하며 전국 각지에 있는 매매춘 장소를 이렇게 단속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경찰청장직에서 물러나셨는데, 2002년 지방선거에서 전북지사로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 자리에서 전북 지사 출마를 공식 선언하셔도 좋습니다.

    “아직 출마선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때가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제 고향을 위해 몸 바쳐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고향 발전을 위해 군산 앞바다에 몸을 던지겠다는 생각입니다.”

    -구체적으로 고향을 어떻게 발전시키겠다는 것입니까.

    “제가 전주시 풍남국민학교를 나왔는데 그때 전북 인구를 300만이라고 했습니다. 1960년대에는 250만이라고 하더니 1993년 전북지방경찰청장으로 가보니 200만, 지난 여름 휴가 때 가보니 190만이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사람이 떠나서는 전북이 발전할 수 없습니다. 떠나는 땅이 아닌 돌아오는 고향이 되어야 전북이 발전합니다. 300만 인구를 목표로 발전하는 전북을 만들고 싶습니다.”

    -전북을 위해 일하려면 정당 가입이 필요한데 조만간 정당에 가입할 의향이신가요.

    “그것은 말할 단계가 아닙니다. 30년 경찰 생활을 통해 저는 행정조직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 배웠습니다. 또 경찰은 생명산업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투명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저의 경쟁력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김병준 치안감과 검찰에서 대질신문을 하셨죠. 김치안감의 진술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대질 신문을 했습니다. 김치안감은 제가 수지킴 사건을 국정원으로 이첩하라고 지시했다는데, 이첩 지시를 한 적이 정말 없습니다. 김승일 국장이 수사를 중단해달라고 하기에 실무자와 이야기하라고 한 것이 전부입니다. 이첩하라 말라고 지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무영씨 주장 검증

    기자가 ‘주간동아’를 통해 수지킴 사건을 처음 보도하고 이어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의 남상문 PD가 홍콩과 싱가포르로 날아가 후속 취재를 하던 2000년 1월 말 기자는 국정원 관계자들로부터 많은 전화를 받았다. 당시 남PD는 수지킴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 측에 인터뷰 요청을 해놓고 있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국정원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남PD가 어떤 사람이냐. 이기자는 수지킴 사건을 어떻게 해서 취재했고, 또 남PD에게 어떻게 협조해 주었는가” 등을 장시간 캐물었다.

    이 시기 남PD는 윤태식을 만났다. 윤태식은 남PD에게 “1994년 공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됐을 때 인터폴을 통해 찾아온 홍콩 경찰과 한국 경찰을 만나 수지킴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홍콩 경찰은 전모를 이해하고 내게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남PD는 윤씨의 주장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인터폴과 접촉하는 경찰청 외사관리관실에게 윤씨의 주장이 사실인가 물었다. 이때 외사관리관실은 남PD가 홍콩에 가서 취재하며 만났던 홍콩 주재 경찰주재관 조모 경정을 통해 홍콩경찰이 조사한 수지킴 자료를 넘겨받은 다음이었다.

    홍콩에서 자료가 입수된 데다 남PD가 추적중인 사실이 확인되자 경찰청 외사관리관실은 수사에 들어갔던 것이다.

    경찰청 외사관리관실에서 국정원에 자료 요청을 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러나 국정원은 반대로 갔다. 국정원은 남PD의 인터뷰 요청를 거부하고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를 예의 주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파문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김승일 대공수사국장이 직접 이무영 경찰청장을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SBS 보도에 이어 다른 언론이 수지킴 사건 추적에 나섰다면 국정원은 이 사건을 덮으려는 시도를 감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언론이 침묵했기 때문에 국정원은 경찰 수사를 막을 수 있었다.

    아무튼 경찰청은 수지킴 사건을 수사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반대로 국정원은 언론보도를 지켜보며 조직적으로 수지킴 사건 수사를 막으려 했다. 이 전청장이 김승일 국장의 부탁을 받고 수지킴 수사 중단을 지시했는지는 두 사람만이 아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수지킴 사건은 본질적으로 국정원 사건이다. 나는 곁가지다”라고 한 이 전청장의 주장에는 분명 일리가 있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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