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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굴|베베르의 시해 보고서와 증언서

“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러시아측 자료로 본 명성황후 시해사건

  • 박종효·전 모스크바대 교수

“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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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을 입은 일본인 폭도 5명이 긴 칼을 들고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앞뒤로 뛰어다니고 있었으며 그외에도 일본인 폭도 20~25명이 단검을 들고 있었다. 출입문 2개는 각각 일본군 2명과 장교 1명 등 도합 5명이 차렷자세로 서서 지키고 있었다.

조선군 훈련대 소대는 왕후의 침전 옥호루를 약간 등진 채 세워총자세로 정렬해 있었다. 이 소대 옆에는 풍채가 당당하고 양복을 잘 입은 한 일본인이 유럽식 긴 칼(세레딘-사바틴은 일본도를 유럽식 긴 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을 빼어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이 자가 일본인 폭도들의 지휘자인 듯싶었다. 나는 이 자에게 다가가 영어로 ‘굳 모닝(Good morning)’ 하고 인사했다. 일본인 두목은 대답 대신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영어로 다음 질문을 했다.

일본인 폭도 두목:성명(姓名)을 말하라.

세레딘-사바틴:세레딘-사바틴입니다.



일본인 폭도: 직업은 무엇인가?

세레딘-사바틴: 건축가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어서 뜻밖에 사람들에게 밀려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의 호소를 듣고 두목은 생명은 보장해 주겠으니 그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내친김에 군인 한두 명을 붙여 호위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왕후 처소 옥호루에 있던 일본말을 잘하는 조선군 두명을 불러 나를 보호해주라고 명령했다. 나는 이제 살 수 있게 됐다고 안심하고 왕후침전에서 일본인 폭도들이 자행하는 만행을 자세히 보았다.

일본인 폭도들은 10~12명의 궁녀들을 왕후의 침전에서 2m가 넘는 창 밖의 뜰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궁녀들은 한 사람도 달아나거나 소리 지르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혔을 때도 창 밖으로 던져졌을 때도 시종일관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무서운 고통을 참고 있었다.

궁녀들은 옥호루에 있었으며, 뜰에 내쳐진 궁녀들은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이런 추측을 한 이유는 내가 조선여성의 고매한 순절(殉節)정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일본인 폭도들은 두 명의 궁녀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와 내가 서있던 곳에서 겨우 5~6보 떨어진 곳에 던지고 갔으나, 궁녀들이 살아서 호흡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앞에 버려진 궁녀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혀 노대(露臺) 위에서 뜰로 내던져질 때도 앞서 말한 궁녀들과 똑같이 반항하거나 울부짖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 궁녀는 넘어져 눈을 뜨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칼을 든 일본인 폭도 5명(3명은 사복을, 2명은 양복을 착용하고 있었다)이 붉게 달아오른 흥분한 얼굴로 눈에 살기를 띤 채 야수처럼 왕후 처소 이곳 저곳을 뒤지며 왕후를 찾고 있었다.

이들 무법자 5명은 내가 현장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듯 급히 내게 뛰어와 일본어와 조선어로 내가 누구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가를 물었다.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하고 있던 두 명의 조선군이 설명하자 그들은 다시 왕후의 침전으로 들어가려고 돌아섰다.

이때 외모가 낯익은 조선인이 이곳에 들어와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잘 만났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광경을 보고 미친 듯 날뛰던 폭도들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 조선인은 그들에게 나에 대해 중요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이 내게는 가장 두려웠다.

그들은 분개하여 다시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보호하고 있던 조선군도 물러섰다. 어떤 자는 나의 옷깃을 잡고 어떤 자는 양복과 팔을 잡고 고함치며 위협하면서 왕후가 어디 있냐고 묻기 시작했다. 일본어와 조선어로 물어 나는 전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기색을 지어 보였다. 내 옷을 잡았던 자가 영어로 물었다. ‘왕후는 어디 있냐?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

이런 순간에 일본인 두목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를 놓아주고, 두목에게 아주 공손한 태도로 나와 나를 알고 있는 조선인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두목은 그들의 말을 신중히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와서 아주 엄격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는 아직 왕후를 찾지 못했다. 왕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왕후는 어디 있느냐?

두목에게 나는 조선의 궁중법도에 따라 왕후를 볼 수도 없으며, 침전도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두목은 나의 이런 말을 이해한 듯했다. 그러나 나를 알고 있는 조선인이 내가 현장에 있는 것이 불안한 듯 일본인 두목에게 내가 틀림없이 왕후의 은신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유일한 유럽인 증인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사정이 급해지자 나는 일본무사(武士)는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킨다는 말을 상기하고 급히 두목에게 쫓아가 약속을 지켜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마침내 두목은 나를 지키던 2명의 조선군인에게 나를 옥호루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두 명의 조선군인 호위를 받으면서 광화문까지 나오는데, 여러 장소에서 많은 일본군을 보았다. 그리고 특히 한 곳에서는 150여 명의 일본군과 장교가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곳에 고종이 계시는 것 같았다. 광화문을 나온 시각은 아침 6시였다. 왕후의 처소에서 광화문까지는 약 10~15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5시50분경까지 내가 왕후의 처소에 있었던 동안 그곳에서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를 찾아내지 못했다. 러시아 공사관(현 경향신문사 옆)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6시30분경이었다. 위급한 궁궐 사태의 현장 목격자로 내가 본 모든 것을 대리공사 베베르에게 증언하였다.”

중국 지부 러시아공관에서 그가 쓴 증언서에서는 제물포(인천) 외항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해군함정 2척 중 1척이 10월10일 밤 제물포에서 사복을 입은 일본인들과 군인을 태운 뒤 몰래 일본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밖에도 10월9일 저녁으로 예정된 일본행 정기여객선이 9일 새벽, 예고 없이 제물포에서 일본인 승객들을 태우고 떠났다는 증언도 했다.

(세라딘-사바틴은 제물포에서도 한때 거주했으며, 독립문을 비롯한 러시아공사관과 정교회 등을 설계했다. 그리고 러시아 동청철도(東淸鐵道) 여객선 제물포 지사장을 역임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0월9일에는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친일 내각이 그에게 내무부 고문직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

명성황후의 최후

세레딘-사바틴이 옥호루에서 떠난 이후 상황은 한 무명 상궁(尙宮)이 증언하고 있다.

현장에 있던 무명 상궁은 명성황후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하였다.

“일본 폭도들은 왕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쪽으로 왔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이 일본 폭도들에게 왕후가 있는 방 앞에서 양팔을 들어 가로막고 궁녀들뿐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이 순간 일본인 폭도들은 칼로 이경직 대신의 양팔을 내리쳐 그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이경직은 이날 밤 사망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괴성을 지르며 방에 난입해 왕비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왕후와 궁녀들은 왕후가 이곳에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왕후는 갑자기 회랑(궁궐내의 복도)을 따라 급히 달아났다. 그 뒤를 한 일본인 폭도가 쫓아가 왕후를 잡고 마룻바닥에 넘어뜨린 후 왕후의 가슴을 세 번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나이 많은 한 상궁이 수건을 꺼내 왕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후 얼마 지나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가까운 숲속으로 운구(運柩)해 갔다.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궁궐의 한 환관(宦官)을 통해서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시신을 화장(火葬)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위의 무명 상궁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침전에 난입했을 때, 왕후도 처음에 궁녀들과 같이 왕후는 이곳에 계시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왕후는 갑자기 복도를 따라 결사적으로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 이 때문에 폭도들은 왕후로 짐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앞서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폭도들은 이곳에서 궁녀들을 하나씩 밖으로 내던지며 극도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폭도들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탈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신을 운구하여 화장했다는 말은 현흥택 정령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현흥택 정령은 진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은신처를 말하라고 사정없이 나를 때렸으나, 끝내 모른다고 했다. 폭도들은 고종이 계시는 곤령합으로 나를 끌고가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했다. 모른다고 하자 폭도들은 각감청(閣監廳)으로 다시 나를 끌고가서 왕후가 계신 곳을 자백하라고 또 때렸다. 이때 갑자기 곤령합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나를 잡고 있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으로 급히 뛰어갔다. 그후부터 일본인 폭도들은 더 이상 왕후의 피신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는 곤령합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궁금해 그리로 가보았다.

고종은 장안당(長安堂)으로 벌써 옮겨가셨고, 곤령합에는 왕후가 피살된 채로 누워 계셨다. 나는 주위에 일본인 폭도들이 아직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서 나왔다. 그후 왕후의 시신을 동쪽 정원에서 화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화장장에 있는 시신의 의복이 여자옷인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이처럼 현흥택 정령은 왕후의 시신을 왕의 침전인 곤령합에서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 왕후의 시해시점은 세레신-사바틴이 약 20~30분간 옥호루 현장에 머물러 있다가 떠난 시간인 새벽 5시50분 이후인 10월8일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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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효·전 모스크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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