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페론이 뿌린 비극의 씨앗 대평원의 잔치는 끝났는가

아르헨티나의 운명

  • 이강원 < 시인, 수필가, 주 아르헨티나 대사부인 >

    입력2004-11-16 16: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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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12월20일에서 2002년 1월1일 사이.

    이 한 여름밤의 열흘은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가장 숨가쁘고 긴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줄줄이 사탕처럼 다섯 명의 대통령이 무대를 오르내렸다. 다섯번째로 선출된 에두알데 대통령이 취임식 날 국가견장과 함께 받은 숙제바구니는 마술을 부리지 않는 한 풀기 어려운 난제로 그득하다.

    아직도 환청처럼 귓가에 맴도는 냄비 두드리는 소리. 바로 하루 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무더운 여름 밤거리를 뒤흔들던 소리다.

    “이번 냄비시위가 불순분자의 선동에 의한 것이며 국민은 계속 허리띠를 졸라매라는 대통령의 대 국민 연설을 듣고 그대로 냄비 집어들고 거리로 나왔어. 집집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냄비 프라이팬 국자 심지어는 냄비뚜껑까지 들고 나왔지. 처음에는 서너 명이었는데 골목마다 밀려나와 순식간에 몇 십만 명이 됐어. 세계에서 가장 넓다는 누에베 데 훌리오(7월9일의 거리) 140m가 좁을 정도였잖아? 아무리 국민의 소리를 못 듣는 벽창호라고 해도 대통령이 그토록 국민의 뼈아픈 고통을 모를 수 있었을까? 그런 지도자는 당연히 물러나야 해.”

    케이블 TV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마리엘라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그녀는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는 중산층 시민이다. ‘마리엘라까지?’ 이번 냄비시위의 심각성이 짜르르 전해온다. 빈민층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거리로 나왔다면 이 정부는 소생할 가망이 없는 것이다.



    “4년이란 긴 세월을 경제위기의 줄타기를 하면서 누적된 우리의 분노와 좌절감을 정치인들은 짐작이나 할까요? 아이는 네 명이나 되는데 직장은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정말 눈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슈퍼마켓을 약탈한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대로 가면 저도 다음달에는 그 무리에 합류해야 할 것 같으니까요.”

    항공사 직원이었던 호세도 땀을 뻘뻘 흘리며 찌그러진 양은냄비를 두드렸다. 이 냄비소리는 바로 국민들이 한 목소리로 내지르는 비명이다. 참고 참다가 터져나온 절규! 이 소리가 하루만에 대통령의 무릎을 꿇게 해 임기의 반을 남겨놓은 데 라 루아 대통령을 2년 10일 만에 물러나게 했다.

    이토록 부글부글 끓어올라온 감정이 폭발할 것이라는 것은 오래 전부터 감지되었다. 특히 지난해 10월의 상·하원 선거는 야당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그것은 2등의 승리였다. 1등은 40%를 차지한 거부표와 기권표였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찍을 후보가 없어서 내가 좋아하는 코미디 만화 주인공 이름을 써주었지요. 어느 후보보다도 마음에 들었어요” 하며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지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실제로 아예 투표장을 찾지 않은 사람도 많았지만 좋아하는 캐릭터, 조크 쓰기, 심지어는 오사마 빈 라덴의 얼굴이 그려진 투표용지도 나왔다. 이는 여야 정치인 모두에게 던진 등골이 서늘한 심판이었다. 넉 달째 월급과 연금이 13%나 깎이는 내핍운동에 묵묵히 따랐던 국민들에게 12월초에 발표한 주 250달러, 월 1000달러로 한정한 은행예금의 일부동결은 국민의 얼어붙은 마음에 꽂은 비수가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아르헨티나에서 늘어난 것 좀 열거해 볼까요? 빚과 실업자, 극빈자, 국가위험도 수치, 점쟁이와 정신과 의사, 그리고 푹 절은 한숨입니다. 1950년대만 해도 영국까지 넘겨보던 나라가 어찌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울화가 치밀어서 프라이팬을 들고 나왔어요. 누구의 지시도 따르지 않고 모두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들이니 이는 바로 민중혁명입니다.” 경제학자 로페스까지 푸념을 늘어놓는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넘치는 부를 주체하지 못했던 곳, 캐나다와 호주를 따돌리고 세계 7대 강국의 자리까지 차지하며 ‘남미의 진주’라는 명성을 얻었고, 수도를 각종 건축양식과 조각의 박물관으로 꾸며 ‘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던 곳, 세계에서 가장 넓은 18차선 도로, 1913년에는 남미 최초의 지하철을 건설하고 자랑하던 나라, 다섯 살짜리까지 지정 정신과의사를 두고 지내고 1년에 수차례 유럽여행과 쇼핑을 즐기던 나라, 바로 아르헨티나다.

    엄청난 외채, 두 집 건너 실업자, 서서히 대량학살을 당하고 있다고 비명 지르는 빈곤층, 그리고 국가위험도 세계 챔피언 획득이 그들이 보여주는 오늘의 모습이다. 이런 자신의 추락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르헨티나의 겉모습은 여전히 천연하고 아름답다.

    스페인어로 은이라는 뜻이라서 그럴까. 아르헨티나의 빼어난 자태와 풍부한 자원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남북 4000km, 동서 1000km로 세계에서 여덟번째, 한반도 14배의 면적이다. 왼쪽 옆구리에 안데스산맥을, 다른 한쪽에는 대서양을 품고 있다. 그러니 그속에 담겨있는 다양함이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북서쪽에는 사막과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6980m)와 그 연봉들, 북동쪽의 세계 7대 불가사의이며 세계 자연 유산 유적지인 이과수폭포와 열대 우림, 중부지방의 광활한 대평원 팜파, 그리고 남쪽에는 대초원과 만년설의 빙하가 버티고 있다. 한 나라가 마치 미니 세계지도를 품고 있는 듯한 천혜 조건이다. 무한한 지하자원, 넓고 비옥한 곡창지대, 풍부한 목축, 다양한 관광자원은 누가 보아도 입에 군침 돌게 하는 풍요로움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곳을 여행해보면 ‘신이 지구를 빚을 때 아르헨티나에 더 많은 정성을 쏟았다’는 것이 한눈에 느껴진다. 북쪽의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왼쪽어깨를 맞대고 있는 칠레, 오른쪽의 우루과이가 입을 비죽 내밀 정도의 특혜다. 그래서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곳 사람들은 신도 아르헨티나 국적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래머, 화가 후안 미로, 첼리스트 요요 마, 시인 타골, 소설가 유진 오닐과 앙드레 말로 등 많은 예술가가 이곳에 매혹되었고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탈리아의 영화배우 비토리오 가스만(Vittorio Gasman)은 이 지상에서 천국은 바로 아르헨티나라고까지 극찬했다.

    그러면 이런 빼어난 조건으로 세계 5등의 자리까지 차지했다가 꼴지 그룹으로 추락할 때까지 과연 경보의 종은 울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몸이 썩어 들어갈 때까지 너무 오랫동안 키워온 고질병이 눈귀를 모두 막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불안과 군사혁명, 만성적 재정적자, 과다한 외채, 미숙한 경제정책 운용, 도려내기 힘들 정도로 곳곳에 번진 부정 불감증, 그리고 페론의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이 엉켜서 생긴 이곳만의 고질 병! 지난 70년 동안 여러 번 발병했지만 병이 도질 때마다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고 마치 치료된 양 착각에 빠져 지냈다. 착각에는 커트라인이 없다더니 이곳의 현사태를 보면 절로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우리나라가 4년째 중환자실에 누워있지만 그나마 목숨부지하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명의를 만나면 회복할 가능성은 가지고 있으니까요. 작은 집안경제도 빚이 늘어나면 쓸 것 줄이고 더 열심히 일하는데 이 나라는 곳간에 쌓여있는 재산 빼다 팔아먹거나 더 큰 빚을 얻어서 꾸려왔으니 말이 됩니까? 여기에 안주해서 별일 없겠지 하고 지내온 우리 국민들도 한심하고요. 그래서 저는 이 나라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진단합니다. 출구는 온 국민이 손톱이 빠질 정도로 열심히 파야 찾을 수 있겠지요.”

    영자신문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헤럴드’의 편집장 마이클이 냉소를 지으며 쏟아놓은 말이다.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그렇듯 이곳에도 디아기타 케란디 과라니 등의 인디안 부족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미 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 식민지 시대를 거쳐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중앙집권주의자와 연방주의자들의 대립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은 뒤 1853년 연방헌법을 제정, 초대 대통령을 선출했다. 19세기 말 이래 아르헨티나는 육류와 곡물수출에 힘입어 연평균 7%의 가파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20세기 초반에는 일인당 GNP가 유럽국가들보다도 높았다.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뉴욕과 맞먹는 대도시로 커졌다.

    당연히 유럽인들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을 능가하는 ‘아르헨티나 드림’으로 비쳐져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동구 등지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들의 이민가방 속에는 앞으로 ‘아르헨티나 병’을 일으키는 병균이 되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도 함께 들어 있었다. 이들은 자리잡자마자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노동자의 몫을 챙기기 시작했다.

    때 맞추어 등장한 후안 도밍고 페론 대령은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유효 적절하게 이용하는 뛰어난 동물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45년 54%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2차대전 후 곡물수출로 벌어들인 엄청난 외화를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기 바빴고, 소비재 위주로 이루어진 공업발전계획은 자본재 수입의 증가를 유발, 외환사정을 악화시켰다.

    급성장할 수 있는 또 한번의 기회는 페론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물 건너가고 아르헨티나는 구조적 만성 고질병환자로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페론주의는 생산성은 떨어지지만 파업에는 뛰어난 노동자, 기업 경쟁력보다는 정경유착의 꿀맛을 탐닉하는 기업가, 국가발전이나 경제성장 등은 뒤로한 채 눈앞의 이익을 챙기는 정치인, 국가의 발전은 안중에도 없이 개인의 몫만 게걸스럽게 찾는 국민 등 집단이기주의 그룹을 양산해냈다.

    설상가상으로 1950년대 들어 기본재 수입증가와 미국, 영국이 실시한 아르헨티나 산 농축산물 수입 제한으로 외환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페론은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1955년 군 쿠데타로 실각,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그는 1972년 다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복귀하지만 세번째 부인 이사벨을 부통령으로 삼는 씻을 수 없는 실책을 범했다. 1974년 7월 그가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이사벨은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지만 너무 무능하고 무기력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페론이라는 이름 두자뿐이었다.

    이런 지도자의 무능을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좌익 게릴라와 우익의 테러는 국가를 혼란에 빠트려 1976년 군사 쿠데타를 유발했다. 이 군사 쿠테타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어둡고도 슬픈 사건으로 기억된다. 좌익 게릴라 분쇄라는 명분으로 사라져 아직까지 찾지 못한 영혼이 1만명에서 3만명이라고 한다. 군사정권은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벌인 긁어 부스럼 전쟁인 포클랜드 전쟁에서 패전, 1983년 대망의 문민정부에 정권을 내주었다.

    “알폰신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에게 거는 기대는 참 컸지요. ‘더러운 전쟁’이라고까지 불리던 군사독재에서 풀려났으니까요. 그런데 갈수록 태산이라고 이번에도 꽝이지 뭡니까. 이번에는 5000%까지 가는 살인적인 인플레의 덫에 치이게 된 겁니다.”

    사랑은 가도 옛 말은 남는다던가? 페론은 갔지만 그가 남긴 페론주의의 망령은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아르헨티나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발목을 잡고 있다.

    “알폰신 대통령도 페로니즘의 희생자지요. 매사에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이기주의집단에 그의 말이 먹혀들겠어요? 처음에는 구조조정도 시도했지만 페로니즘의 벽을 뚫지 못하고 결국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물러났지요.”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는 일다 아줌마의 얘기다. 지평선을 삼킬 만큼 광활한 라팜파. 며칠을 달려도 인가조차 없으며 오직 끝없는 지평선과 광대한 하늘만 존재하는 대평야가 바로 라팜파다. 이래도 상상이 안되면 지평선에 홀려 현기증에 빠지는 병(horizontal vertigo) 을 일으키는, 다림질해놓은 듯한 막막한 대지를 상상해보면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라팜파는 요술주전자처럼 무한한 곡물과 고기를 생산, 아르헨티나에 주체하지 못할 만큼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그때는 참 굉장했지요. 금이 너무 많아 금고에 다 넣을 수가 없어 은행 복도에까지 쌓아놓았어요. 국민이 원하면 길도 금으로 깔아주겠다고 큰소리치는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아르헨티나의 황금기(The golden age)였지요. 이때 먼 곳을 내다보고 중장기 국가 발전에 재투자하는 지도자를 못 만난 것이 두고두고 한으로 남습니다.”

    텔레 페 방송국 기자 홀헤는 한숨을 깊게 쉰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고풍스런 건물들과 조각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호화롭고 격조 있는 가로등도 대부분 이때 건립되었는데, 유럽산 원자재로 유럽 최고의 건축가와 조각가가 설계하고 만들었다. 거리 곳곳에 깔린 조약돌(cobble stone)도 한 장에 1달러씩 주고 사왔다고 한다. 마침 집 앞길도 그 돌길이어서 세어보았다. 어림잡아도 100m에 80장 이상이니 부에노스 주변에 깔린 것만 합쳐도 천문학적인 액수가 될 것이다. 옛사랑의 그림자만큼이나 안타까운 지난 날 영화의 자취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묘한 매력을 가진 도시다. 고색이 창연한가 하면 녹색의 나무와 꽃이 화사하고 넓은 거리와 그 모퉁이마다 자리잡고 있는 카페는 가슴 깊이 숨어 있는 우수의 줄을 팽팽하게 조인다. 부에노스의 봄은 자스민의 향기가 불러온다. 담장마다 그득 그득 피어오른 이 꽃의 향기는 밤에 더 짙어져 이 꽃향기는 향수로도 쓰이지만 최음제로도 쓰인다니 이 도시가 잠자지 않는 도시라는 별명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자스민의 바통은 자카란다 나무가 이어 받는다. 2m도 넘는 이 나무는 그 우락부락한 가지에 조그만 종 모양의 보라색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낸다. 만개한 이 꽃의 보라색으로 잠식당한 도시의 모습은 숨을 들여 마실 정도로 아련하고 아름답다. 이 꽃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피는 꽃은 자카란다보다 한길은 더 큰 띠빠 나무다. 삶은 계란 노른자 같은 색깔의 꽃을 노랗게 뿜어낸다. 도시의 어느 거리를 걷는가에 따라 떨어진 꽃잎으로 길 색깔까지 달라진다.

    가을과 겨울에도 꽃의 행진은 멈추지 않는다. 야자수는 흰 꽃을 무더기로 피워내고 술통모양을 빼닮은 빨로 보라초라는 나무는 분홍색과 흰색 꽃으로 큰 그림자를 만들어줄 정도다. 피고 지는 꽃을 묵묵히 지켜주는 꺾다리 아저씨 유칼립투스 나무와 참나무도 곳곳에 빽빽하다. 세련된 용모와 옷차림의 시민들은 세련된 도시와 어우러져 누구나 유럽에 와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게다가 도시를 거니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100% 백인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이곳처럼 유색인종이 드문 곳은 보기 힘들다. 누구는 스페인이 식민지로 삼기 전에 인종청소부터 하고 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은 아침에 길에 나가서 흑인을 보면 그날은 재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귀하다는 얘기지요.”

    식품점을 하는 중국인 첸이 신기하다며 들려주었다. 이들은 겉모습뿐 아니라 머릿속까지 자신들은 라틴아메리칸이 아니고 유럽인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도 확고하게. 자신의 땅이 유럽에 붙어야 할 것이 잘못되어 남미에 붙게 되었다고 불평하고 자궁 속의 아기도 세상 나올 때 남미 땅에서는 나오기를 거절한단다. 오죽하면 아르헨티나 제2의 국가가 된 탱고도 처음에는 천시하다가 프랑스에서 좋다고 하자 “그래? 정말 괜찮네!” 하고 다시 받아들여 그 진가를 부여받았다.

    이토록 이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남미의 왕따 역할을 자청하고 다른 남미 국가들과 자신들을 차별화한다. 이런 억지를 부리고 살자니 마음이 편할 리 없고, 그러다보니 마음 골병든 사람도 늘어나 환자당 정신과의사 숫자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다. 이런 멘탈리티는 자신과 국가를 분리시키는 현상으로 나타나 위급한 일이 있으면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곤 한다. 이번 사태에도 이미 초장에 외국으로 빠져나간 돈이 막대하고 최근에는 하루에 7억달러씩 인출했다니 ‘헤매는 대통령’ 데 라 루아와 ‘새파란 눈의 몬스터’ 카발로 경제장관이 어찌 예금동결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부유층이 빼돌려 해외에서 잠자고 있는 달러가 아르헨티나 외채액수와 맞먹는다는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닙니다. 내로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미국, 우루과이, 스위스에 계좌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서민들이 열 받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극빈자가 500만 명이 넘는데….”

    경제학자 로페스의 계속되는 말이다.

    라틴아메리카는 원주민 인디오문화와 스페인·포르투갈문화, 미국문화와 유럽문화의 얼개가 복잡하게 얽힌 잡종문화의 배경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이 문화적인 공통점 외에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빈부의 격차’다. 라틴아메리카의 5억 인구 중 거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9000만 명이 극빈층이다. 극빈층이란 4인 기준 월 생활비 200달러 미만으로 1인당 하루 1달러 정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계란 한 줄에 2달러, 고기 1kg에 7달러, 칫솔 한 개에도 5달러이니 이들이 집단 영양실조상태에 빠져있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가장 건강하고 두터운 중산층을 자랑해왔다. 그러나 4년간 지속된 경제 불황은 엄청난 힘으로 이 중산층을 파괴했다. 매일 8060명이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눈사태에 비길 수 있는 중산층 몰락 사태인 것이다. 시내 중심의 버스터미널 레티로역 바로 뒤에는 ‘비쟈 31’이라는 이름을 가진 빈민촌이 있다. 화려하고 우아한 시내를 배경으로 포장도 안된 질퍽거리는 좁은 미로를 끼고 판자촌이 다닥다닥 늘어서 있다.

    요즘 이곳 입구에 플래카드가 깃발처럼 휘날리고 있다. ‘Bienvenidos, la clase media!!!!’ 중산층 입주를 크게 환영한다는 말이다. 요즘 거리에는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엄마, 신호등에 걸린 사이 차를 닦으려고 걸레를 들고 뛰는 아이들, 네거리에서 방망이와 공을 돌리며 잠깐 쇼를 보여주고 동전이라도 받으려는 청년들의 숫자가 엄청 늘었다. 밤이면 세계에서 가장 넓은 길, 누에베 데 훌리오의 중앙분리대 녹지지역이나 부에노스의 브로드웨이 코리엔테스 거리 극장들 앞에는 잠자리를 찾는 노숙자들로 붐빈다. 이들의 대부분이 한때는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었던 중산층 출신이다. 이들 사이에 신종 인기 직업은 말 한 마리 사서 쓰레기 수집하는 마부가 되는 것이라 한다.

    “이것 역시 하루살이 인생이기는 하지요. 종이 1kg 팔면 4센트(50원)정도 받아요. 열심히 하면 하루 한 끼는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 데리고 말채찍 휘두르며 드라이브도 할 수 있어서 신나지요.”

    스스로 행운아라는 한달 차 마부 훌리오의 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은행원이었다.

    “차는 벌써 반 년 전에 팔았고 집도 변두리 촌으로 옮겼어요. 의료보험회사 이사였던 남편은 배달사원으로 전락해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는데도 오늘은 슈퍼마켓 갈 돈까지 떨어졌어요. 춤 추어도 돈 던져주는 모자 속은 비어 있을 때가 많아요. 이제는 춤 출 기력도 없어요.”

    번화가에서 탱고를 추는 거리의 댄서 니나는 울먹였다. 행운의 여신이 찾아오지 않는 한 니나의 가족도 곧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알폰신으로부터 6개월까지 덤으로 받아 1989년에서 1999년까지 10년 넘게 아르헨티나를 통치한 메넴 대통령은 앞으로 역사가들의 도마에 가장 많이 오르게 될 것이다. 시리아 이민의 후예인 그는 임기 초 5000%가 넘는 인플레를 잡아 국내외의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인플레 잡기의 공신인 달러와 페소를 1:1로 묶은 고정환율제는 불과 4년도 안되어 그 약발이 떨어지고 오히려 나라 경제를 갉아먹는 흉악범이 된다. 한동안 이들은 세계 일등국의 화페인 그린백과 같은 가치를 갖는 화페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해 지냈다. 그러나 그건 바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기였고 장님 자기 닭 잡아먹기였다. 곧 이 제도가 무리라는 것을 안 환상의 콤비 메넴과 카발로 장관은 민영화라는 미명으로 국영기업체와 토지를 매각해서 그 틈을 메웠다.

    “세상에 자국의 국적 비행기까지 팔아먹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거기에 은행 철도 전기 수도 TV채널 석유채굴권까지 매각했어요. 가장 원통한 것은 세계에서 공해의 마지막 보루라는 남쪽 파타고니아의 상당부분을 팔아먹은 것이지요. 베네통 사장, 테드 터너 CNN 사장, 스필버그, 빌 게이츠 등 세계의 갑부 치고 그곳에 땅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지요. 더 기막힌 것은 판매대금 중 막대한 양의 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오리무중이라는 것입니다.”

    페로니즘의 신봉자인 메넴 대통령은 식을 줄 모르는 활력과 화려한 여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상황이 비관적일 때일수록 큰소리치며 낙관적인 견해를 쏟아내 국민들도 그 말에 주술이 걸려 잠시 현실을 잊을 정도였다. 그는 재임시절 화려한 전용기를 3대나 구입해서 탱고 1, 2, 3으로 명명하고, 화려한 이발소(머리는 그의 아킬레스 건) 설치하기, 관저에 성형외과의사를 상주시키고 수시로 성형수술 받기 등으로 끊임없이 깜짝쇼를 보여주었다.

    그의 깜짝쇼는 70세를 넘어서도 식을 줄 몰라 작년 6월에는 자기 나이 절반의 미스 유니버스 출신 세실리아 볼로코와 결혼식을 시끌벅적하게 치르더니 신방 차린 지 2주도 안돼 무기밀매 혐의로 구속되었다.

    가택연금 형태로 다섯 달 동안 궁전 같은 곳에서 오붓하게 지낸 뒤, “아마 우리가 어느 누구보다 가장 길고 달콤한 신혼생활을 했을 걸?” 하고 얘기해서 “살인적 인플레를 잠재웠다는 고정환율제가 결국 국가 파탄을 가져온 주범으로 밝혀졌으니 우리는 그가 주는 독약을 서서히 마신 격이야!”라고 한탄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게다가 세실리아는 칠레인이면서 결혼 전부터 깻잎머리와 누드에 국기 색깔(흰색과 하늘색) 대형타월을 두르고 잡지 표지에 등장, ‘제2의 에비타’ 분위기를 짙게 풍겨서 그들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깜짝쇼 커플’임을 보여주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사에서 정치인 퇴장은 있을 수 없다. 그야말로 꺼진 불도 다시 보자요, 불사조들의 행진이다. 임기 못 채우고 물러난 알폰신 전 대통령과 데 라 루아에 패배해 정치은퇴를 선언한 두알데가 모두 지난해 10월 상원의원 선거에 당선, 화려하게 복귀함으로써 불사조임을 보여주었다. 두알데는 이번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니 사람의 운명도 그렇지만 정치운명을 누가 점칠 수 있을까. 결국 그는 대통령직 4년을 데 라 루아와 공평하게 2년씩 나누어 갖게 되었다. 이렇듯이 이곳에는 정치 입단자가 수두룩하다. 메넴은 꽃 중의 꽃이자 거물 불사조이니 그는 정치 입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노욕은 끊임없이 솟는 샘물인지 2003년에 대통령에 다시 도전하겠다니 누가 알랴, 몇 년 뒤 국민들은 데 라 루아의 도전장을 접수하게 되려는지….

    작년 12월20일 황혼이 검붉게 스러져가는 저녁 7시 카사 로사다(대통령 집무실)의 정문은 이미 냄비시위대로 한치의 틈도 없었다. 데 라 루아 대통령이 사임서를 제출하고 가족이 기다리는 관저로 가는 길은 하늘 길밖에 없었다. 헬리콥터를 타기 위해 옥상으로 걸어가는 그의 어깨에는 이틀 사이에 몇 년의 세월이 얹혀있는 듯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다섯번째 불명예 퇴임 대통령을 갖게 되었다. 변호사 출신으로 36세에 상원의원에 당선,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려온 그다.

    “메넴에 질려 Mr. Clean이라는 그를 찍었어요. 얼굴이 바뀔수록 더 큰 자루를 들고 나타나는 도둑놈이자 거짓말쟁이인 정치인들에 질렸거든요. 그러나 언챙이 아니면 일색이라더니 데 라 루아는 색도 냄새도 맛도 없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문제만 생기면 전임자 원망하고 결정적일 때 꼭 실기를 거듭했습니다. 늘 열흘날 잔치에 열하룻날 병풍 치는 격이었지요. 게다가 보좌관은 뒤로하고 28세 아들 안토니오의 말만 들으니 뭐가 되겠어요. 6개월도 안돼 국민이 등돌리기 시작했지요. 중산층을 냄비시위에 끓어들이게 한 연설도 안토니오가 써준 것이라고 합니다.”

    시인 올란도의 말이다. 그만큼 언론에서 희화된 대통령도 드물 것이다. 그를 무능한 위기 관리능력 상실자로 비꼬고 찌르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 방송되어 그 시간이면 영부인은 관저에 있는 20여 대의 TV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기 바빴다고 한다. 심지어는 그의 이름을 딴 ‘delarruizar’라는 새로운 용어도 생겼다. 주저와 혼돈, 갇혀있음을 뜻한다. 그는 현재 수도 남쪽 대서양 해변을 끊임없이 혼자 얘기하며 걷고 있다고 한다.

    그가 물러나자 다시 페론당의 시대가 왔다. 페론당의 정치 9단 4인방이 밀실에 모여 마치 교황 선출하듯 뽑은 대통령이 산 루이스주의 알프레도 로드리게스 사 주지사다. 70일 시한부 대통령이지만 그는 선출되자마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비가 꽃 본 듯이 활짝활짝 웃더니 곧 ‘함박웃음 대통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누구는 강남제비를 닮은 ‘산 루이스 제비’ 같다고도 했다.

    그 자리에는 무슨 귀신이 붙었는지 앉기만 하면 사람이 변하나보다. 사 대통령은 4인방의 수렴청정을 받아야하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100만 일자리 고용창출, 노조 지도자 만나 정책 백지수표 발행 등 자신을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으로 잠시 착각하더니 4인방의 노여움은 물론 다시 일어난 냄비시위로 설자리를 잃고 일주일 만에 사임한다.

    “사 대통령이 시골사람이라 그래요. 산 루이스 벽촌에서 18년 동안 주지사를 했잖아요. 그곳에서는 황제 같았거든요. 1993년에는 납치돼 모텔에서 ‘Y no C’라는 포르노에 출연, 섹스비디오를 찍은 사건도 있었지요. 그러나 납치됐다는 것은 그의 말이고 그가 18세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찍었다는 말도 있어요. 이런 대단한 섹스 스캔들 뒤에도 그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주지사에 당선 됐습니다. 그러니 큰물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겠지요.”

    이름을 밝히기를 원치 않은 50대 남자가 들려준 ‘아르헨티나의 사 비디오’ 얘기다. 그리고 골수 페론주의자며 정계의 원로 에두알도 두알데가 2003년 12월 다음 대통령 선거 때까지 2년 동안 대통령직을 맞는 조건으로 취임, 숨가쁘게 돌아가던 수레바퀴에 제동을 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지사 두 차례, 부통령 등을 거쳐 경륜으로는 충분히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0년 동안 전임자들이 신주단지 모시듯이 끌어안고 있던 아르헨티나의 애물단지 고정환율제로부터 탈출, 평가절하를 감행했다.

    아르헨티나 역사의 산증인인 5월 광장(플라자 데 마요)! 1807년 이래 중요한 정치 사회 사건들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곳이다. 지난 열흘 동안도 이곳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모두 그 가슴에 품었다. 이 광장 바로 앞에 있는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Casa Rosada)는 시위대가 그려놓은 낙서로 흉하게 얼룩져 있다.

    페론과 에비타, 그리고 영화촬영을 위해 이곳에 온 마돈나가 대중을 향해 손을 흔들던 그 유명한 발코니도 지척에 있다.

    “우리에게 이 광장은 정신적 피난처이자 어머니 품 같은 곳입니다. 아직도 냄비 두드리는 소리가 남아있는 듯하죠? 저도 얼마나 열심히 두드렸는지 아직도 팔이 아파요. 덕분에 집에 있는 냄비는 모두 못 쓰게 찌그러졌어요.”

    광장에서 국기를 파는 후안은 아직도 며칠 동안에 생긴 변화가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냄비의 효과에 맛들인 일부 시민은 이제 작은 이권을 위해서도 냄비를 들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냄비가 집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콩가루 집안이 됐다는 얘기이자 집안의 평화가 사라졌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던데…. 이제 평가절하의 여파는 화산 폭발에 비유될 만큼 클 것이다. 정치인, 기업가, 노동자, 그리고 국민 모두가 뼈를 깎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지금까지 피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볼 기회가 없었던 국민들이라 고통면역 제로이니 누구보다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아르헨티나는 영원히 표류하게 될 것이다. 70년 전 페론주의의 외투를 과감히 벗어버리든가 21세기에 맞도록 수선하든가, 세금을 내는 사람은 바보라고까지 얘기하는 부정의 뿌리는 국민 모두 스스로 도려내야 할 것이다.

    축구 외에는 구심점이 없다지만 축구장의 한마음 열기를 왜 국가 바로 세우기에 쓰지 못하나. 무엇보다 아직도 포근히 잠자고 있는 천연자원을 개발하고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풍부한 관광자원의 상품화,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 우수와 열정의 멋을 뿌리는 탱고를 업그레이드한다면 ‘아르헨티나 드림’은 다시 피어날 것이다.

    이 ‘아르헨티나 드림’은 많은 한국인을 이 땅으로 불러왔다. 1965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에 첫 이민선이 들어선 이래 1980년대 말에는 교민수가 4만5000명까지 불어났으나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이곳에서 꿈을 접는 숫자가 늘어나 현재는 2만5000명 정도의 교민이 삶의 둥지를 틀고 있다.

    다부지고 근면한 한국인들의 기질은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이미 ‘109 한국촌’을 비롯, 온세와 아베자네다 지역의 상가형성, 2개의 일간지 발간, 40여 개의 교회, 한국 병원, 한국인 골프장에 한국인 전용 묘지까지 갖추는 일을 36년만에 이룩했다. 이미 2세 중에는 의사, 변호사, 건축가, 언론인 등 전문인이 배출되어 현지 사회에 진출하고 있다. 이번 소요사태로 200여 가게가 털리고 수십명이 다친 중국인에 비해 한국인은 4가족만이 재산피해를 입었다.

    현 여당인 사회정의당(PJ)의 대부 페론. 그의 두번째 부인인 에비타를 빼놓고는 아르헨티나의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사망 50주기가 되는 금년 7월26일에는 기념관 개관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다.

    “지금 에비타는 이곳을 내려다보고 울고 있을 거예요. 그가 한 일이 다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이 어려울 때 마음을 기댈 피난처 역할을 아주 잘 해 주었지요. 나라가 최악의 상황에 빠져있는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우리를 이끌어줄 지도자가 없어요. 저는 그것이 더 암담하게 느껴집니다.”

    부에노스 대학의 사회학 교수 이사벨의 탄식이다. 에비타는 ‘부유한 자들의 창녀, 가난한 자들의 성녀’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내가 만난 이곳 사람들은 거의 그녀를 마음의 안식처로 삼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비판하는 것은 첫번째 금기라는 것은 알 만한 외국인은 다 알고 있다.

    시내 중심가 특급 지역인 레콜레타. 고급 상가와 아파트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이곳의 명물은 1만7000평의 레콜레타 묘지다. 7만 명이 잠들어 있는 이곳은 18명의 전직 대통령, 장군 각료, 예술가 등 아르헨티나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만 묻힐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에비타의 묘도 있다. 찾기 어려울 만큼 묘지 왼쪽 한구석에 있지만 안내인 없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늘 그녀의 묘 앞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팜파주의 조그만 도시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탱고가수, 라디오 아나운서를 하다가 페론과 결혼해 영부인에 오른 전설 같은 삶을 산 여인. 골동품상이나 책방에 걸린 그녀의 사진은 지금 보아도 무척 아름답다. 그녀는 아르헨티나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갖게 해주었고 소외되고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활동을 했다. 에비타를 추모하는 열기는 지방에 가면 더 뜨겁게 느껴진다. 공공건물이나 식당 할 것 없이 대통령 사진보다 에비타의 사진을 더 많이 붙여놓았다.

    레콜레타 묘지는 나도 자주 찾는다. 에비타의 집 앞에 서니 오늘은 저절로 ‘Don’t cry for me, Argentina’가 입가에 맴돈다.

    “아르헨티나여, 나 때문에 울지 말아요. 나는 항상 당신들 곁에 있었어요. 때로는 어렵고 험하게 살아왔지만 그래도 약속은 늘 지켰어요. 나를 멀리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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