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名門은 있되, 패거리는 없다

외국의 학벌문화

  • 홍훈 < 연세대 교수(경제학·학벌없는사회 대표) > hoonhong@base.yonsei.ac.kr

    입력2004-11-08 16:1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육의 수준과 질은 사회 구성원에게 권력과 경제력을 차등적으로 부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나타나는 철저한 대학 서열과 이에 근거한 학벌의 형성, 그리고 학벌에 의한 신분결정 등은 선진국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리의 현실은 특수하다.

    첫째, 한국의 학벌은 각 구성원에게 너무나도 큰 상벌의 차이를 낳는다. 학벌은 권력 돈 명예, 그리고 혼인 등에서 선택의 범위를 결정함으로써 신분의 차이를 낳는다. 이에 비해 외국의 대학교육은 권력과 돈에 서 약간의 차등을 가져올 뿐이며, 한국사회처럼 개인의 신분을 결정하거나 개인의 자긍심을 박탈하는 수준으로까지 그 영향력이 커지지 않는다. 더구나 한국에서는 졸업장 자체가 중요한데 비해 외국에서는 전공과 관련된 지식과 기술이 의미를 갖는다.

    둘째, 한국에서는 20대 초에 결정된 차이를 나중에 뒤집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입시를 거쳐 특정 대학의 구성원이 되고, 이를 통해 일생 동안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 결정되면, 이것이 사회에서 개인의 능력이나 실적을 압도해 버린다. 반면 선진국 대학생들은 대학 재학중이나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자기가 노력한 결과에 따라 대학입학 당시의 평가를 역전시킬 수 있다. 외국에서의 대학 입학은 우리와 같이 치열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은 일생을 두고 거쳐야 할 여러 차례의 경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셋째, 한국의 학벌은 집단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지연이나 혈연과 마찬가지로 학연이나 학벌은 패거리를 이루어 공적인 영역에서 서로 밀어주고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외국의 경우 학력이 개인 차원에서 권력이나 돈의 분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학벌로 이어져서 공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학벌에 관한 한국과 선진국의 차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미국 대학에는 우리처럼 촘촘한 서열이 없다. 다만 상위권 중위권 하위권 등 몇 개의 덩어리로 나뉘어 이들 사이에 느슨한 서열이 존재할 뿐이다. 가령 하버드나 예일과 같은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상위권이다. 각 대학은 대학군 내에서 혹은 대학군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며 이 과정에 대학의 전공별 순위가 수시로 뒤바뀐다. 미국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되는 순위는 바로 이런 경쟁을 반영하는 것이다.



    미국 대학들은 모금을 통해 교수의 수준과 시설을 향상시켜, 더욱 우수한 교육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경쟁한다. 그리고 좋은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직장에서 뛰어난 실적을 거둠으로써 최종적으로 그 대학에 대한 평가가 올라간다. 좁게 보면 훌륭한 교수를 얼마나 유치하느냐가 특정 학교에 대한 평가를 결정하며, 넓게 보면 교육이 사회의 요구에 어느 정도 부응하느냐에 따라 대학의 순위가 바뀌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 졸업생들은 졸업장이 아니라 대학에서 익힌 지식을 가지고 사회현장에서 훌륭한 실적을 올림으로써 더 많은 권력과 부를 획득한다. 미국 고등학생들에게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것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좋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졸업장이 빛나는 것이다. 한국의 명문대 졸업장이 상대적으로 높은 입시성적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아닐 수 없다.

    한국 학생들이 고등학교 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다가 대학에서는 적당히 학점을 따는 데 비해 선진국 대학생들은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더 열심히 공부한다. 그것은 선진국에서는 대학 졸업장이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사회에서 졸업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변호사나 회계사 시험이 한국에 비해 쉽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변호사나 회계사는 어려운 자격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명성을 얻는 게 아니라, 시장경쟁을 통해 실적을 올림으로써 평가받는다.

    미국에서는 특정 대학이 모든 전공에서 일정한 서열을 유지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어떤 대학이 경제학에서 우위라면, 다른 대학은 정치학에서 앞서간다. 어떤 대학이 인문사회 부문에 중점을 둔다면, 다른 대학은 공학에 치중한다. 적어도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대학마다 나름대로의 학파 혹은 학풍을 지니고 있으며, 많은 대학들이 이것을 자랑스런 전통으로 여긴다. 경제학을 예로 들자면 동부의 사립대학들은 정부개입을 어느 정도 허용하는 입장이고, 중부의 시카고대학 등은 철저한 자유방임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미국의 대학순위가 전공별로 다르고 각 대학이 나름대로 전통을 유지하는 것은 특정 종합대학에 대한 평가가 ‘하향식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교수 전공 단과대학에 대한 평가가 쌓여서 ‘상향식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유학을 준비하는 한국 학생들은 미국에 대학서열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고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마도 올림픽에서 메달의 숫자로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철저한 서열에 잘 길들여져 있다.

    미국 대학들은 신입생을 뽑을 때 획일화된 입시점수에 의존하지 않는다. 미국도 우리나라의 수능성적과 비슷한 SAT 점수를 기본으로 하지만, 여기에 절대적으로 매달리지 않고, 적성이나 중·고등학교 과외활동 등을 감안해 학생의 잠재력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미국 고등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퀴즈대회 스타일의 암기용 지식이 아니라, 건전하게 사고할 수 있는 능력과 전공학습에 필요한 기초지식이다.

    미국의 대학서열은 느슨하지만 경쟁은 치열하다. 또한 서열은 신입생 평가에 의존하지 않으며, 평가 자체도 SAT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고교생들에게 입시성적이란 명확하게 존재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처럼 절박한 것도 아니다.

    미국의 서열은 모든 대학들을 빠짐없이 줄 세우는 방식이 아니며, 그것이 수시로 뒤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다르다. 한국의 대학서열, 특히 상위권 대학의 서열은 지난 수십 년간 거의 변한 적이 없다. 한국에서는 각 대학의 사회적 명성, 교수들에 대한 평가, 졸업생들의 사회진출 등이 모두 대학입학 당시 신입생들의 성적에 따라 결정된다.

    미국에서는 유명교수가 무명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경우 무명대학이 유명해진다면, 한국에서는 유명교수가 무명대학으로 옮기면 유명교수의 이름이 사라질 뿐이다. 이것은 미국에서 교수나 학생이 학교를 옮겨다니는 일이 자연스러운데 비해 한국에서는 이례적이라는 사실과 직결되어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어떤 유명대학이 아무런 전통이 없었던 전공을 신설하는 경우, 그 전공은 대학의 명망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그래서 그때까지 권위를 누려온 다른 중위권 대학을 좌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낮은 순위에서 벗어나기 위한 교수나 학생들의 노력은 열매를 맺기가 어려운 것이다.

    미국의 경우 대학입학은 일생을 통해 거쳐야 할 여러 경쟁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한국의 입시경쟁은 이후의 모든 경쟁을 배제하고 안정된 특권을 얻기 위한 단 한 번의 필사적인 싸움이다. 따라서 경쟁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람들도 시야를 조금 넓힌다면 이 땅의 학벌문제를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상위권 대학이 모든 전공에서 동일한 서열을 지키고 있다. 철학에서 1위이면, 공학이나 음악 미술에서도 1위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고착화된 서열은 학생들의 입학점수로 결정된다. 아마도 미국 대학생들이 우리처럼 수능성적에 따라 획일화된 등급이나 등수를 강요받는다면 이를 단호하게 거부할 것이다. 더구나 한번 정해진 순위가 사회에 진출한 후 권력과 돈 그리고 신분상의 차이를 가져온다면 기가 막혀 할 것이다.

    이것은 한국에서 하위권 대학 학생들이 편입시험을 통해 대학을 옮기는 경우 대부분 동일 전공을 선택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가령 하위권 대학에서 이미 경영학을 전공한 학생이 상위권 대학의 경영학과로 편입하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학력세탁’이다. 이런 학생들은 상위권 대학의 학생이 4년 동안에 끝내는 과정을 6년에 걸쳐 이수하는 것이다. 미국 대학에서는 이런 일을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은 일류대학에서 평량 평균 2.0을 받은 학생이 하위권 대학에서 4.0을 받은 학생보다 높게 평가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미국과 비교할 때 한국의 경쟁은 제한되어 있고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수들의 학문적 경쟁, 학생들의 재학중 노력을 모두 수능점수로 대체하고 있으며, 이렇게 결정된 대학서열이 노동시장에서의 경쟁마저 삼켜버린 기형적인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학입시가 마치 진정한 의미의 경쟁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독일 대학들은 평준화되어 있어 우리와 대조적이며, 서열이 느슨한 미국과도 차이가 있다. 독일 고교생들은 내신성적과 아비투어(Abitur) 성적으로 대학진학 자격을 얻는다. 아비투어는 주어진 지문을 나름대로 해석해 논술 형태의 글을 쓰는 졸업시험으로 과목당 3~4시간이 걸린다.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으므로 일단 진학 자격을 얻은 학생들은 대학이나 전공을 선택할 때 경쟁할 필요가 없다.

    독일의 경제와 사회체제가 그렇듯이 교육제도도 효율성보다는 상대적으로 평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미국 대학과 마찬가지로 독일 대학들도 대학별로 어떤 전공이 강하다든지, 어떤 학파나 학풍을 가지고 있다든지 하는 특성을 유지한다. 가령 마인츠대학은 칸트(I. Kant) 철학 연구에 중점을 두며, 브레멘대학은 경제학에서 더 폭넓은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출신 대학보다 어떤 교수 밑에서 공부했냐가 중요하다. 미국처럼 교수-전공-단과대학으로의 상향적인 평가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독일에는 대학 서열이 없으므로 특정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특권을 부여받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처럼 개별 교수의 연구와 학생의 지식습득 정도에 대한 평가는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졸업장은 중요하지 않으며, 학문적 목적 이외의 파벌은 형성되지 않는다. 다만 특정 대학 졸업생들 사이의 인연은 돈독한 편인데, 그것도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다는 사적인 관계로 끝난다.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한 K박사는 “대학이 평준화되어 있기 때문에 독일 학생들은 자신의 학문적 관심에 따라 이 대학 저 대학을 옮겨다니면서 지식을 얻는다. 그러므로 학문적 경쟁은 종합대학이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이런 풍토이기 때문에 독일이 자랑하는 하버마스(J. Habermas) 같은 대학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독일 사례에서 종합대학 차원의 경쟁이 없어도, 교수나 학생끼리 얼마든지 경쟁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대학이 평준화되면 교수나 학생의 실력이 떨어질 거라는 일부 한국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기우인 셈이다.

    프랑스에는 대학수준의 교육기관이 일반대학과 고등전문대학(그랑제콜, Grands e´coles)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대학진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baccalaure´at)’에 통과해야 한다. 이 시험은 우리의 수능시험과 달리 주입식 교육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수준이 높다. 그렇지만 고교 졸업자 중 우수한 학생들은 일반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예비학교에서 준비한 다음 고등전문대학에 입학한다.

    그랑제콜은 고등사범학교, 고등행정학교, 고등토목학교 등으로 구성되어 교육·행정·토목 등 사회 각 부문에서 지도자로 성장할 엘리트를 양성한다. 다만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그랑제콜 출신이라도 일반대학을 거쳐야 한다. 일반대학과 그랑제콜 출신 사이에는 거의 경쟁이 존재하지 않으며, 주로 각 부류 내에서 경쟁한다.

    결국 프랑스 대학체제에는 2부류의 단순한 서열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한국 대학처럼 상세한 서열은 아니지만, 서열이 존재하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런 서열이 한국에서처럼 20대에 결정되며, 그 이후에 크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서열이 프랑스 사회에서 각 구성원들의 자긍심을 손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그랑제콜 출신 엘리트들이 단순히 특권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엄청난 사회적 의무를 짊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프랑스 엘리트를 움직이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불문학을 공부한 H교수는 “그랑제콜 출신이 하나의 커다란 집단을 이루어 권력과 돈을 나누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랑제콜에서는 사회 각 분야에 필요한 엘리트를 교육하기 때문에 이들이 동질성을 갖기도 힘들다. 예를 들어 고등사범학교와 고등행정학교가 뭉쳐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대학 서열은 한국의 ‘학벌’과 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학력’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존해 사회적 지위에 합당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는다. 프랑스 경우에 비추어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우리의 국립대학교 졸업생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도 한번쯤 따져봐야 할 것이다.

    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가장 우수하며 두 대학에 입학하기는 대단히 힘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스퍼드대학의 광고문구에는 ‘입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쟁을 거쳐야 하지만, 일단 입학하고 나면 훌륭한 교육에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나와 있다.

    어떤 면에서 영국 대학들이 한국 대학들과 비슷한 서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연히 선두에 있는 대학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이 두 대학에 이어 다음 순위가 줄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한국보다는 느슨하다. 또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가 다수의 전공에서 우수하다지만 모든 전공에서 1위를 달리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의학에서는 에든버러대학이 두 대학보다 앞서 있다.

    더구나 사회진출 과정에서 ‘옥스브리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합성어)’ 출신과 지방대학 출신 사이에 공식적으로 아무런 차등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오랜 기간 영국에 머물면서 경제학을 공부한 P교수의 증언이다. 지방대학 졸업생의 입사원서를 처음부터 심사에서 빼버리는 일부 한국 대기업의 행태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두 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 학연이나 학벌을 이루면서 집단으로 권력과 돈을 나누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이들은 엘리트로서의 특권뿐만 아니라 의무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 일류대학 출신과 비교된다. 프랑스와 영국의 상황에 비추어 우리는 상위권 대학들을 여러 개로 쪼개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해보면 어떨까 싶다.

    동양권의 일본은 한국과 가장 비슷하다. 국립 도쿄대와 교토대, 히도츠바시대, 사립 게이오대와 와세다대 등 유명대학 졸업생들이 사회 각 부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한국과 닮은 점이다.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입시성적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선발한다. 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우선 입시성적을 강조하면서도 국립대와 사립대가 기준으로 삼는 시험의 종류와 시험과목이 다르다. 도쿄대 등 국립대는 본고사 성적뿐만 아니라 예비고사에 해당되는 이른바 ‘센터’성적을 고려하는 데 비해, 사립대는 본고사만 치르고 ‘센터’를 고려하지 않는다. 또한 본고사 과목도 대학마다 다르다. 이런 이유로 국립대 지망생과 사립대 지망생은 입시준비 과정부터 분리된다. 이것은 일본사회가 한국처럼 모든 학생들을 하나의 잣대로 줄세우지 않으며 학생들간의 철저한 서열을 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에도 한국과 비슷한 대학서열이 존재하지만 상위권 대학이 갖고 있는 우위가 한국의 일류대학보다는 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일교포로서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P씨는 “언론에 대한 교수들의 접근 가능성이나 언론을 통한 발언권이 소속대학의 등급에 의해 결정되는 한국사회의 특성을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보다 확연한 차이는 도쿄대가 서울대와 같은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물론 도쿄대가 최고지만, 교토대, 히도츠바시대, 게이오대 그리고 와세다대 등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어 상위권 대학들 사이의 격차가 한국에서처럼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경제학을 공부한 L박사는 “도쿄대에도 히도츠바시대 등 다른 대학 출신의 교수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화학 등의 분야에서는 교토대가 계속해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도쿄대를 앞서가고 있다.

    도쿄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부문은 정계와 관계에 국한되어 있고, 학계·법조계·언론계·대기업 등에는 여러 상위권 대학이 골고루 진출해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발표된 일본 상장사 사장들의 출신대학 분포를 보면, 게이오대 302명, 도쿄대 293명, 와세다대 199명, 교토대 147명, 히도츠바시대 64명 등이다. P씨는 이런 차이에 대해 “도쿄대의 규모가 와세다대나 게이오대보다 작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에는 ‘학벌(學閥)’이라기보다는 이보다 약한 ‘학연(學緣)’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일본 내에서도 학연은 최근 부각되고 있는 기업 구조조정 등과 관련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종합하자면 선진국 대학들은 서열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거나, 서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보다 훨씬 느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아가서 한국과 비슷한 서열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대학별로 학벌을 이루어 다른 집단을 배제하는 행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선진국의 경우 대학입시는 물론이고 대학교육 자체가 권력이나 돈을 분배하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그것이 상당히 중요한 요건이 되는 경우에도 집단적 독점이나 지위를 부여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한국의 입시경쟁은 보다 의미있는 다른 경쟁들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구나 선진국 대학의 서열은 학문이나 교육의 다양성을 전제로 깔고 있으며, 명문대학 졸업생들은 엘리트로서 무거운 책무를 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한국의 일류대학들은 선진국 대학에 비해 학문이나 교육수준에서 뒤떨어져 있으면서도, 내부에서는 철저하게 순서를 매기는 우스꽝스런 행태를 보이고 있다.

    선진국 상황은 우리에게 참고자료일 뿐이다. 선진국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 사안도 한국에서는 얼마든지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공교육은 이미 철저하게 붕괴되었으며, 10대 청소년들은 청춘을 잃어버린 채 입시경쟁에 빠져들고 있다. 또한 학벌을 통한 사회 구성원들의 이익추구는 심각한 불평등과 소외를 낳고 있으며, 부정부패에 대한 불감증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흔히 지연, 혈연 그리고 학연이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지연과 혈연의 비합리성은 적어도 논리적인 차원에서 명약관화하게 드러났다. 이에 비해 학연이나 학벌은 경쟁의 절차와 교육의 신성함으로 위장되고, 담론을 장악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기반을 형성함으로써, 현재까지 비합리성이 충분히 노출되지 않고 있다. 우리 사회의 학벌문제에는 연고주의뿐만 아니라 학력(學力)주의도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모두 학벌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공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먼저 지식인들부터 자신의 학벌에 안주하거나 자식이 좋은 대학에 진학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보다는 학벌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이는 자각이 필요하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