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호

백제인이 전한 일본 가면극 원산지는 페르시아

한국 초연 앞둔 진기악

  • 김지욱 < 진기악 한국 공연 추진위원회 간사 >

    입력2004-11-02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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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옛 고도 충남 부여의 구드래 나루터에는 일본에 건너간 백제인 ‘미마지(味摩之)’의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986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이 건립한 것.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남중국의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고, 아울러 부처를 공양하기 위한 기악도 받아들였다. 백제의 기악은 한국 가면극 발달에 획기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그 맥이 오늘의 산대도감 계통극에까지 이어온다. 무왕 13년(612) 일본 추고(椎古) 20년에 이르러 백제인 미마지가 도동(渡東)하여 일본에 기악을 전하니 그는 일본 연극사의 기초를 다진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사적은 일본서기(권 제22)에 전하고 기악면도 230여 개가 일본에 현존하여 그 연극 내용도 교훈초(1233)에 전하나 그에 관해서는 생몰 연대조차 전하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문학박사 이두현 지음)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이 4월3일 부여의 구드래 나루터에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공연된다. 미마지가 일본에 전했다는 기악이 백제를 떠나서 다시 그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꼭 1390년 만이다. 또한, 한국에서 첫 기악 공연을 열기 이틀 전인 4월1일에는 미마지가 바다 건너 최초로 도착한 곳으로 알려진 일본의 다자이후(太宰府)에서 기악이 한국으로 떠나는 것을 알리는 출발 공연을 할 예정이다. 4월5일과 6일에는 서울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진기악(眞伎樂)’ 서울 공연을 가질 계획이다. 특히 한국 공연에서는 미마지가 일본에서 어린이들에게 기악을 가르쳤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부여와 서울, 그리고 일본의 어린이 각 100명이 함께 음악을 연주한다.

    진기악의 제작은 일본에서, 의상 디자인은 한국에서 담당한다. 이외의 분야에서는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모여 진기악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도움을 줬다. 이 작업에 참가한 예술가들은 연출자인 일본의 노무라 만노죠를 비롯하여 한국의 김용목(처용무 전수자), 강차욱(송파산대놀이 이수자), 리앙구인(梁谷音, 중국 국가 제1급 배우), 장밍롱(張銘榮, 중국 국가 제1급 배우), 테오도르(기니아, 아프리카 무용가), 죠이(인도 전통 무용가), 지맛트(인도네시아 전통 무용가) 등이다.

    진기악을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초연했지만 한국 공연을 준비하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기악을 복원하려는 취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일부 사람들이 ‘일본의 가면극을 한국에서 공연한다’고 비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1년 11월에는 한국연극학회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진기악’ 복원의 취지와 공연 성과들을 발표하는 등 사전 홍보작업을 했다. 2001년 11월22일에는 신라호텔에서 ‘진기악 한국 공연 추진위원회’의 발족식을 가졌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고, 2002년은 한일 월드컵으로 인해 전세계의 눈이 극동 아시아로 쏠려 있는 시기다. 특히 올해는 한·중·일 3개국의 국민 교류의 해로, 문화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때에 범아시아의 문화적 산물인 기악을 복원하려는 ‘진기악’ 공연이 부여(4월3일)와 서울(4월5~6일)에서 펼쳐지는 것은 무척 의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비록 근현대사에서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정치적 이념의 차이나 침략전쟁 등으로 인해 서로 소원한 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됐지만 고대나 중세에 한·중·일 삼국의 관계는 문화교류 차원에서 서로 긴밀한 사이를 유지했다.

    특히 한국과 일본 교류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 교류의 역사는 한국이 중국이나 서역에서 받은 문물들을 일본에 전해준 것이었다. 한일 문화교류의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한자를 일본에 전하고 논어 등 10여 권의 책을 전한 왕인(王仁) 박사, 595년 일본에 건너가 불교를 가르친 혜자(慧慈), 법륭사(法隆寺)의 벽화를 그린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비롯한 많은 승려들,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아들들을 가르친 아직기(阿直岐), 성덕태자(聖德太子)를 정치·경제적으로 보필했던 신라인 진하승(秦河勝), 일본 최고의 절인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설한 백제 사람 등이 있다. 이밖에도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교류가 있었다.

    이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인 미마지는 “백제 사람 미마지가 서기 612년에 기악(伎樂)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등장한다.

    ‘일본서기’ 권 제22에 따르면 “백제 사람 미마지는 중국 오(吳)나라에서 기악무(伎樂舞)를 배우고 돌아온 뒤 612년(무왕13년) 일본의 사쿠라이(櫻井)에 가서 일본 상류층의 어린 소년들에게 기악무를 가르쳤다. 사쿠라이는 지금 아스카(飛鳥)의 광암사(廣巖寺) 부근이다. 이곳에서 미마지는 성덕태자의 비호를 받아 사찰에서 공연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짧은 기록이지만 기악이라는 춤을 중국에서 배워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왕인 박사나 다른 사람들이 일본에 전한 것들은 책이라든가 불상, 아니면 건축물 같은 유형적인 것들이어서 그 형태들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기악은 춤이라는 무형의 존재이므로 그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연구되었던 기악은 불교를 선교하기 위한 선교극이면서 교훈극으로 알려져왔다. 부처를 공양하기 위한 종교적 가무로서의 기악이라는 용어는 불교 경전에도 자주 나오며 고대 중국 문헌과 ‘고려사(高麗史)’에도 일반적인 명칭으로 ‘기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백제에서도 사찰을 중심으로 연희(演戱)되었고,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일본에 전해진 뒤에도 역시 사찰을 중심으로 공연되면서 신도들의 신앙심을 북돋우는 불교극으로 내려오다가 전승이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나타난 기록 외에 기악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지만 일본의 고마노 치카사네(迫近眞)가 1223년에 지은 ‘교훈초(敎訓抄)’라는 책에 기악의 공연 내용을 대략 기록하고 있다. 기악에 나오는 가면의 종류와 이름, 그 배역들이 어떤 내용의 연희를 하는지가 나와 있다. 하지만 그림으로 설명된 것이 아니고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희의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또, ‘교훈초’의 기록은 미마지가 기악을 일본에 전한 612년보다 600여 년이 지난 다음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기악의 가면은 7∼8세기의 것 230여 점이 일본에 그대로 남아 국보로 보존되고 있어 미마지가 일본에 전래했던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훈초’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등장 인물은 치도(治道). 길놀이를 담당하는 배역으로, 불사(佛事) 의식의 행렬에 창을 들고 선두에 가며 길의 부정(不淨)을 씻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명칭은 한국의 전통 행렬 구성에서 ‘길치도’ ‘도가(導駕)’ 등의 형태로 남아있다.

    치도는 기악이 성행하던 나라(奈良)에 있던 여러 절의 자재장(資材帳)에 나오는데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번이나 마편을 잡는다(一人 或 二人 持 幡, 麻鞭)”라고 씌어있다. 이 마편은 구나(驅儺) 때 쓰이는 것이므로, 치도는 벽사(邪)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악에는 치도 외에도 사자(獅子), 사자아(獅子兒, 2명), 오공(吳公), 오녀(吳女), 금강(金剛), 역사(力士), 곤륜(崑崙), 바라문(婆羅門), 태고부(太孤父), 태고아(太孤兒, 2명), 취호왕(醉胡王), 취호종(醉胡從, 8명) 등이 등장한다.

    오공은 오나라의 귀공자 또는 왕을 지칭한다. 오공의 극중 역할은 극 전체를 이끌어 가는 리더 역할이며, 백제인 미마지가 중국의 오나라에서 기악을 배워왔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기악이 전래되면서 중국에서 추가된 배역이거나 원형이 중국화한 것으로 보인다.

    오녀는 오공의 상대역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오공과 오녀의 가면 형태로 보아 부녀 사이가 아닐까 한다. 오녀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곤륜으로부터 희롱을 당하는 역할이다.

    사자는 치도와 마찬가지로 길의 잡신을 누르거나 물리치는 역할의 동물로 ‘교훈초’에 의하면 사자가 나오는 대목에서는 음악이 기악곡이 아니라 아악곡인 ‘능왕’을 쓴다고 했다. ‘능왕’과 함께 연주되던 나소리(納曾利)가 벽사용 음악인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자 역시 벽사를 위해 등장한 역할로 생각된다.

    사자아는 사자 1마리를 끌고 가는 어린이 2명을 뜻한다.

    가루라(迦樓羅)는 법화경 등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큰 새 이름으로 ‘머리는 매와 비슷하고 몸은 사람을 닮았으며 날개는 금빛이고, 머리에 여의주가 박혀 있고 화염을 내뿜으며 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수미산의 사해에 살며 불법수호 팔부중(八部衆)의 다섯번째다.

    금강은 외도로부터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바라문은 인도의 사성(四姓) 가운데 하나로 범천(梵天)의 후예라고 하며, 제사(祭祀)와 교법(敎法)을 다스리는 최상위 계층인 승려나 학자 계층을 말한다. 그러나 ‘교훈초’에서 바라문에 ‘기저귀 빨래하기’라는 이칭을 붙인 것으로 볼 때 바라문이라는 고귀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기저귀 빨래라는 비상식적인 행위를 극적으로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곤륜은 중국의 서남방에 있다는 영산(靈山)의 이름이기도 하며, 중국의 남방에 살고 있다는 ‘곱슬머리에 몸이 검은 사람들’, 또는 동아시아인들, ‘이국(異國)의 살결이 검은 사람’의 총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곤륜의 가면 역시 얼굴 표정이 기괴하며, 귀는 날카로운 삼각형에 송곳니가 삐죽 나와 있는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모양이다. 오녀를 희롱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역사는 오녀를 희롱하고 있는 오입쟁이 곤륜을 항복시키는 역할이다. 불경(佛經)의 금강력사(金剛力士)의 전통에 따라 금강저(金剛杵)를 곤륜을 항복시키는 무기로 사용하는데, 이는 남근에 비유해 소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남근을 휘두르는 춤으로 외도의 곤륜이란 인물을 퇴치하는 불법수호신(佛法守護神)의 주술적인 기능과 웃음을 지닌 춤이다.

    태고부는 2명의 의붓자식을 거느린 아버지로서, 너무 어려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참배할 수 없는 아이들과 함께 불전(佛殿)에 참배한다.

    태고아는 태고부의 의붓자식 2명을 뜻한다.

    취호왕은 술에 취한 호나라 왕이라는 뜻으로, 일명 촌장, 외국인 혹은 귀화한 외국인으로서 매우 떠들썩하게 노는 역할이다. 기악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러 명의 술에 취한 인물들이 법석대고,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취호종은 취호왕의 종자 8명으로 취호왕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들 출연자들이 모두 행렬을 이루어 입장을 하고 나면 치도는 행사장과 그 주변의 사악한 기운을 내쫓는 벽사의 의식을 통해 행사장을 정화한다. 치도의 정화의식이 끝나면, 사자아라는 미소년이 끄는 사자가 들어와서 사자춤을 춘다. 다음은 오공이 부채를 들고 등장하여, 악사를 향해 피리를 불거나 그치는 시늉을 하면 악사가 피리를 불거나 그친다.

    다음은 가루라가 나와 빠른 반주 음악에 맞춰 서조(瑞鳥)의 춤을 춘다. 다음에 금강과 바라문이 나와서 승려에 대한 희극적인 연기를 하고, 이어 곤륜이 등장하여 오공의 처인 오녀를 희롱하는 외설적인 춤을 추면 역사가 등장하여 곤륜을 항복시킨다. 다음에 태고부가 태고아 둘을 데리고 나와 부처 앞에 예불하게 한다. 끝으로 취호왕과 취호종이 등장하여 술에 취한 호나라 사람의 모습을 흉내낸다.

    4월에 한국에서 초연되는 ‘진기악’의 내용도 ‘교훈초’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천(天) 지(地) 인(人) 3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제1장인 ‘천’은 전체 출연자가 하얀색 가면을 쓰고 행진하여 무대로 입장하고, 악사들이 연주를 끝내고 좌석에 앉아 가면을 벗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한국의 시나위, 일본의 번악(番樂) 등 아시아 각국의 춤 공연이 펼쳐진다. 그후에 행사장을 정화하는 치도가 무대로 등단하여 전체 행사장을 정화시킨 다음 무대 중앙에 선 뒤 한국의 북청사자춤 등 아시아 각국의 사자춤을 공연한다.

    제2장 ‘지’에서는 중국의 만년환과 초펜, 인도의 파라타나티암, 아프리카의 카키란페, 태국의 바반 등 아시아 각국의 무용 공연이 펼쳐지고 오공과 오녀가 등장하여 부부의 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금강과 역사가 등장하여 장차 닥칠 일에 대한 복선을 깐다. 그후 오공이 사냥을 떠나기 위해 오녀와 헤어지고 홀로 무대에 남아 있는 오녀를 발견한 곤륜이 오녀를 희롱한다.

    금강과 역사는 검을 가지고 곤륜을 저지하는데 이때 등장한 오공이 아내가 부정한 짓을 한 것으로 알고, 그 벌로 칼로 오녀의 코를 잘라버린다. 마침내 바라문이 등장하여 여러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오녀의 사정을 들은 다음 신비한 마술로 오녀의 코를 원래대로 붙여놓는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바스키(뱀)가 등장하여 가루라와 싸우지만 가루라가 바스키를 정복한다.

    제3장 ‘인’에서는 태고부가 자신의 의붓자식들인 태고아와 함께 연희를 펼치는데 아이들은 연희를 싫어하여 태고부가 수차에 걸쳐 독촉한 끝에 연희를 실시한다. 그후 취호왕과 그 종자(醉胡從)들이 나와 진기악의 갈등이 종료된 것을 축하하는 연희를 펼친다. 대단원에서는 가루라가 등장하여 공연을 함께 한 악사들과 함께 행사의 종료를 알리는 연희를 펼치고, 전체 출연자들이 함께 무대 위로 올라와 흥겨운 뒤풀이를 한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전한 이 기악은 미마지가 기악을 배워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중국 남조 오나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멀리 서역에서 시작되어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한국에 전해졌으며, 미마지가 이를 일본에 전했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있다. 중국 남조에는 없었던 사자가 극중에 있고, 남아있는 가면들 중 서양인의 골격을 가진 가면들이 있고, 인도의 사성 계급 중 하나인 바라문이라는 배역이 등장하고, 가루라라는 새가 등장하는 것들에서 그 근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중요 무형문화재 중 하나인 ‘처용무’의 경우에도 처용의 탈을 보면 이는 아시아인의 얼굴 형상이 아닌 서양인의 형상으로 보인다. 이를 근거로 처용설화에 나오는 처용이 서역의 사람이라는 학문적 연구도 있는 실정이다. 처용무가 서역으로부터 왔다는 학설들을 살펴보자.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조(條)에 의하면 “역신이 처용 아내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처용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잘 때 처용이 돌아와서 자신의 아내 외에 한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며 물러나자, 역신이 처용이 노하지 않음에 감복하여 이후로는 처용의 얼굴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지 않겠다고 맹세하므로 그 이후로 백성들이 처용의 얼굴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를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처용설화와 그에 곁들인 처용가와 처용무에 관한 연구는 우리 국문학 연구에서 단일 대상으로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많이 전개되었다. 1989년 울산문화원이 펴낸 ‘처용 연구 논총’에 따르면, 논문이 무려 151편이 발표되었고, 문헌 자료만도 97건에 달한다. 처용이라는 인물에 대해 연구자마다 각기 다른 해석들을 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용, 무당, 실명, 제웅, 외래인 등의 다섯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이용범씨는 “처용은 아라비아 상인이었다”고 주장했고, ‘깐수’로 알려진 정수일씨도 “처용은 자연인이며 외래인으로 서역인이다”는 주장을 했다.

    ‘삼국사기’에 “신라 49대 헌강왕 5년(879) 3월 왕이 동쪽 지방을 순행하는데 낯선 사람 넷이 어전에 나타나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 모양이 괴상하고, 또 의관이 다르므로 이때 사람들이 산해정령(山海精靈)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두 문헌에 나타난 것을 비교해 보면 ‘삼국유사’에는 처용이라는 이름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없고, 두 책에 나오는 인원 수가 다른 점은 있지만, 동해에서 나타난 인물이 노래하고 춤춘 점은 같다.

    고려 때 이제현이 쓴 ‘익제난고’에 처용은 푸른 바다에서 왔는데 용모가 특이하다고 했고, 조선시대 ‘악학궤범’에 “산 모양과 비슷한 무성한 눈썹, 우그러진 귀, 붉은 얼굴, 우뚝 솟은 코, 밀어나온 턱, 숙여진 어깨, 머리 위에는 꽃을 꽂고”라고 묘사한 처용의 모습은 어느 모로 보나 한국인 모습이 아니고, 움푹한 눈과 높은 코를 지닌 아리아인종이나 터키종족 등의 서역인을 연상하게 한다.

    향가 연구가들에 따르면 신라의 향가는 일반적으로 그 표현 수단과 방법에서 굴절적이고, 내면적이며, 형상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처용가는 감정 표현이 아주 솔직하고 대담하며 직선적이다. 이것은 신라 향가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과 다른 점이며, 반면에 중세 페르시아나 아랍문학에 나타나고 있는 경향과 상통한다는 것.

    처용설화에 나오는 동해안의 용과 그 아들인 처용의 정체를 살펴보면, 당시 국제항이던 개운포(현재의 울산) 앞바다에 출현한 이상한 생김새의 진객들, 게다가 그들에게는 처음 보는 물건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항해나 상술의 재간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니, 그들을 본 신라인들은 이것이야말로 불가사의한 천신의 조화라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고래로 전승된 용신앙을 빌려 해상 출현자들을 용신(龍神)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정수일씨는 처용설화의 용은 당시 동해를 통해 들어온 기이한 외래인, 즉 서역 사람일 거라고 주장한다.

    또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기 얼마전 무함마드에 의해 634년에 전 아라비아 반도가 통일되었다. 이어 642년에는 페르시아에, 651년에는 당나라에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멀리 이제 막 통일을 이룬 한반도와 접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신라와 이슬람세계와의 교류가 역사에 최초로 기록된 것은 신라의 사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슬람 사가들에 의해서다. 9세기 중엽 이븐 쿠르다드비에 의해 쓰여진 ‘키타브 알 마살릭 왈 마말릭’은 한반도에 이슬람이 진출했음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건너편 콴수를 가로지르는 곳에 많은 산들과 금이 풍부한 신라라고 불리는 나라가 있었다. 우연히 그곳에 갔던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혹되어 영구히 그곳에 정착하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건너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 기록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처용설화다. 곧 처용이 이슬람 상인이었다는 설인데, 위의 기록과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에서 처용은 4명의 일행과 함께 외국에서 상륙하여 나머지는 사망하고 처용만이 생존한 실제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주의하여 처용이 서역으로부터 온 이슬람 교도일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처용무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춤이 지어져서 처용가면과 더불어 연례(宴禮)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후 처용무는 궁중에서 귀신을 쫓는 의식인 구나의례(驅儺儀禮)에 쓰였던 것으로 ‘악학궤범’에 이 춤을 추는 격식이 기록되었다. 이미 신라시대부터 가면극이 행해졌다는 것은 이외에도 기록이 몇 군데 더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대표적인 가면극인 산대도감극 등 우리나라 가면극의 기원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여러 학설들을 정리해보면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4가지의 기원설이 있다. 즉 △산대희(山臺戱) 곧 가면극설(假面劇說) △산대희와 규식지희(規式之戱)의 결합설 △기악(伎樂)기원설 △고대기원설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중 우리나라 산대도감극의 기원이 ‘기악’이라는 설에 주목하자면 과연 ‘기악’의 기원은 어디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서연호는 ‘가면극의 양식 및 전승적 측면에서 살펴본 오국의 위치; 일본 기악과의 비교를 중심으로’(1993)라는 글에서 일본에 기악을 전래한 오나라의 위치에 대해 중국 남조 이외에 한국 내재설로 고구려설 가야설 백제설이 있음을 소개하고, 전승된 가면, 연희의 내용, 연희방법, 북청사자놀음과의 관계, 전승계통, 고대의 지역 명칭 등을 근거로 오국은 고구려의 봉산(황해도) 지역에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일본의 학자들은 ‘기악’의 기원을 중앙아시아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그러나 독일의 학자 루카스는 ‘기악’의 기원이 서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악이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서역에서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동으로, 동으로 전해지면서 그 나라의 현실에 맞게 각색되며 내용이 추가되거나 없어지고 하는 과정을 수세기에 걸쳐 반복하면서 중국에 전해졌고, 이를 백제인 미마지가 중국에서 배워 백제에서도 연희되었고, 일본에까지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은 티베트의 산간지방이나 중국의 위구르 자치주 등지의 벽화에서 기악의 가면과 유사한 가면의 그림들을 찾아볼 수 있었고, 한국의 산대도감 계통극의 내용과 기악의 내용이 흡사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동안 중국에까지 전해온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반면 중국에서 백제,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과정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 연구되었던 ‘기악은 불교극’이라는 학설은 서역에서 발생한 기악이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거친 이후에 불교를 동쪽의 나라들에 전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학자들은 이 기악이 원래부터 종교의 포교를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최초에는 조로아스터교의 포교를 위한 가면극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산대도감극은 조선조 전기에 산대나례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나례도감이나 산대도감에서 유래한 말이다. 여기서 나례(儺禮)라는 것은 음력 섣달 그믐날에 민가와 궁중에서 지난 해의 잡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벌이던 의식으로, 구나(驅儺) 대나(大儺) 나희(儺戱)라고도 한다. 궁중에서는 대궐 안을 청소하고 정돈하는 한편, 벽사를 위하여 나례의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는 궁궐을 정화함으로써 나라 전체를 정화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모두 평안하기를 기원한 것이다.

    이 풍속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 정종 무렵으로 보인다(고려사 권64 志, 권18 禮 6 軍禮條). 나례 때에는 처용무도 함께 추었다. 이후에는 왕의 행차나 칙사의 위로, 신임 관리를 위한 축하연에 수시로 연희되기도 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적인 의미는 희박해지고 점차 놀이로 변모했다.

    아무튼 오늘날의 산대극은 경기지방에 전해지는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를 가리키지만, 놀이의 내용과 형식으로 볼 때 이외에도 북한지역의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영남지방의 통영 고성 가산 진주에 전해지는 오광대(五廣大) 놀이와 동래와 수영의 야류(野遊) 등이 있다. 원래 서울의 변두리였던 애오개(阿峴)와 녹번 등지에 본산대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승이 되지 않아 그 내용을 모르고 ‘양주별산대놀이’와 ‘송파산대놀이’를 통해 산대극의 원형을 추론할 뿐이다.

    서역의 문물은 실크로드라는 커다란 강을 흘러가며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그 나라의 특성에 따라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거나 없어지기도 하고, 또 그 나라에 필요한 것은 그 나라에 남아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동쪽으로의 흐름이 계속되다가 더 이상 강물이 흘러갈 수 없는 일본에는 그 문물들이 남게 되어 상대적으로 중국과 한국보다 많은 흔적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대도감 계통극과 기악의 내용이 흡사하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이혜구(94) 서울대 명예교수다. 그는 1953년 ‘연희춘추’에 기고한 ‘한국음악연구’라는 글에서 기악과 ‘양주별산대놀이’ ‘봉산탈춤’의 과장을 비교 분석하며 그 구성과 내용이 유사하다는 점을 학계에 보고했다.

    이혜구 교수의 글을 살펴보면 기악의 치도는 양주별산대 제1과장의 고사와 2과장의 상좌춤, 그리고 봉산탈춤 제1과장의 사(四)상좌춤과 동일한 내용인 벽사의 의미를 지녔다고 분석한다. 오공은 양주별산대의 제3, 4과장인 옴, 연잎과 눈꿈제기와, 사자무는 봉산탈춤 제5과장의 사자무와 각각 같은 의미를 지녔으며, 가루라와 금강은 양주별산대의 제6과장인 팔먹중, 침노리(완보), 봉산탈춤의 팔먹중춤과 같은 과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바라문은 양주 별산대의 제7과장인 사당노리(관 쓴 중), 봉산탈춤 제3과장의 사당춤과, 곤륜은 양주 별산대의 제8과장인 노장, 봉산탈춤의 제4과장인 노장춤과, 역사는 양주 별산대의 제10과장 취발이, 봉산탈춤의 제4과장 취발이와 같은 과장이고, 태고는 미얄할미(양주, 12과장)와 미얄춤(봉산, 7과장), 취호는 양반(양주, 11과장), 양반춤(봉산, 5과장)과 각각 같은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 구성의 순서만 약간씩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나라의 산대도감 계통극과 유사하고, 일본의 전통 예능으로 전해지고 있는 노(能), 가부키(歌舞伎), 교우겐(狂言), 분라쿠(文樂)의 원류로 알려지고 있는 기악을 좀더 자세히 연구하고 일본에 전해졌던 기악이 아닌 아시아 각국을 거치면서 변형되었을 기악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 시작은 일본의 배우이자 연출가인 노무라 만노죠(野村万之丞, 본명 노무라 코우스케)였다. 1959년에 동경에서 출생한 그는 일본에서 300년의 역사를 가진 카가 마에다한 전속의 교우겐(狂言) 노무라 만조우의 직계 장남이다. 그는 조부 6세 만조(인간국보), 부친 만(인간국보)의 지도를 받고, 1995년에 5세 만노죠라는 이름을 이어 받아 8대째의 당주가 되었다. 20대 초반에 이탈리아에서 열린 ISTA(국제연극인류학학교)에서 공부하여, 세계적인 연극인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독자적인 예술관을 정립하고 고전과 새로운 동서문화의 융합을 목적으로 한 작품들을 창작했다.

    노무라는 자신의 전공인 교우겐을 어려서부터 연희하면서 ‘연희자인 자신이 왜 가면을 써야 하는가?’에 많은 의문을 품어왔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가면에 대한 연구를 해온 사람이다. 그는 늘 기악을 복원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와 그는 2000년 봄, 서울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NHK는 2001년 11월 방송을 목표로 대하드라마 ‘성덕태자’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성덕태자의 얘기를 드라마로 만들려면 당시에 국제적인 교류가 활발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와의 교류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고, 고대 삼국시대의 의상과 소품 제작을 위해 수소문하다가 연출자인 사토 미키오씨와 예능 고증을 담당한 노무라씨가 한국을 찾게 된 것이다.

    드라마 ‘성덕태자’를 함께 준비하면서 우리는 서로가 갖고 있었던 기악에 대한 의문과 그 기악을 복원하고자 하는 뜻을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10년간에 걸쳐서 실크로드를 거슬러 올라가며 기악의 원형을 찾는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첫 공연을 하고 난 후 서쪽을 향해 다음 나라, 그 다음 나라로 옮겨가면서 각 나라의 고유한 연희들과 비교하고, 접목시키면서 그 원형이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첫 공연에서는 완성된 기악의 형태를 볼 수 없고 10년 후에 완성된 기악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복원을 위해 한국에서 산대도감극의 기악기원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이혜구 교수, 임동권 중앙대 명예교수, 이석호 국사 편찬위원회 교수, 이응수세종대 교수, 박전열 중앙대 교수 등 여러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받은 것은 물론, 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 송파산대놀이 등 산대도감 계통극을 보면서 기악의 원형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창작 오페라 ‘미마지’를 준비하던 연출가 임진택 선생과 음악가 이종구 한양대 교수를 만나 서로 연구한 결과를 토론하고, 상호의 작업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도 했다.

    또한 새로 복원하는 기악의 이름을 ‘진기악(眞伎樂)’이라 명명했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에서 일본에 전래된 형태의 기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범아시아인이 모두 소유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로 하여 ‘21세기의 문화는 아시아로부터 세계로의 발신’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가면 음악 의상 무대 춤사위 등 모든 것을 준비하게 되었다. ‘교훈초’에 있는 내용과 현존하는 기악의 가면들을 바탕으로 하였고, 아시아 각국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춤사위 및 음악을 함께 작업했다. 우리의 노력은 작년 10월에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은 물론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 세네갈 등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 작년 10월16일 일본 동경에서 역사적인 진기악 초연을 하게 되었고, 미마지가 일본 상류층 어린이들에게 기악을 가르쳤던 곳으로 추정되는 나라의 아스카 석무대 앞에서 두번째 공연을 연 데 이어 이번 4월초에 우리나라에서 초연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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