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제도의 힘으로 과학 살려라

과학기술인은 소모품인가

  • 최재천 <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 jcchoe@snu.ac.kr

    입력2004-09-16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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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나 기분 나쁘면 이과 간다”는 자식의 말이 대덕단지의 박사 아빠들에게 더할 수 없는 협박이라는 소문이 단지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그랜저 타는 나이가 한의대는 30세, 의대는 35세지만, 공대는 45세, 자연대는 영원히 못 탄다”는 이야기가 대학가에 나돌며 서울대 이공계 대학원 입학 전형에서 미달 사태를 보이더니 급기야 대학입시에서 수험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상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공계 위기’는 더 이상 뉴스거리도 아니지만 심각한 사회문제임에는 틀림없다.

    드디어 대통령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책 마련을 지시하여 교육인적자원부, 과학기술부, 노동부, 산업자원부 등이 나름대로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과학기술부가 마련하고 있는 정책들만 보더라도 상당히 다양하고 의욕적이어서 정부에서 내놓는 대책들과 여러 민간 연구소들의 처방까지 합하면 현재 엄청나게 많은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마 이들 중에 우리가 원하는 해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아이디어들을 포괄할 수 있는 일관된 개념 또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 좀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공계 위기의 본질을 분석해보고 그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확립해야 할 몇 가지 기본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 했지만 나는 그에 못지않게 인간은 ‘과학적 동물(Homo Scientificus)’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어느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두뇌를 갖도록 진화했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 과학이 탄생했다. 우리는 바야흐로 과학 기술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감히 인간이라는 동물의 자연서식지는 과학기술이 창조한 세계라고 단언한다. 우리 모두 과학기술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다 늙고 병들어 죽는다.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환경



    속세를 피해 산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도 어쩔 수 없이 산성비로 오염된 개울물을 마셔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세상에서 잠시 쉬겠다며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휴대전화를 챙기고, 공항이나 호텔마다 인터넷이 그물망을 치고 있다. 우리들 중 일부가 항생제를 남용하는 바람에 인류 전체가 점점 더 지독한 병균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이제 그 누구도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과학기술의 영향권 밖에서 살 길은 없다. 그리고 길은 한 방향으로만 나 있다. 과학기술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이다. 막무가내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외침은 더 이상 현실성도 없고 설득력도 지니지 못한다.

    동굴시대에도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있었다. 누구는 야생동물들의 행동과 이동경로를 관찰하여 분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또 다른 이는 늘 새로운 도구를 고안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새로운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여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든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지식수용에 무관심하거나 느리거나 아니면 정보를 제대로 얻지 못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같은 석기시대인이었다 해도 이 두 부류는 삶의 질에 있어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을 것이 당연하다. 또 이런 과학기술인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부족이 그렇지 못한 부족보다 번성했을 것이다. 과학기술력이 바로 국력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처럼 긴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선사시대는 제쳐두고 역사시대만 보아도 헤게모니의 이동은 과학기술의 주도권 싸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원래 과학의 역사를 주도했던 곳은 중국을 비롯한 동양이다. 종이, 나침반, 화약, 시계 등 이미 1세기경에 중국이 보유하고 있던 발명품들이 서구에 등장한 것은 10세기나 그 이후부터였다. 서양의 과학 수준이 동양을 능가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였고, 본격적으로 힘의 불균형이 국제정치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였다. 1842년에 벌어진 아편전쟁이 가장 상징적인 예다.

    그때 무릎을 꿇은 중국이 이제 자발적으로 과학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뛰고 있다. 이처럼 과학만이 살 길임은 자명한데 우리는 지금 그걸 외면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확실하게 과학기술을 중흥하려고 노력하는 데 견주어 우리는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

    우리나라 이공계 위기의 본질은 최근 발표한 한국과학기술인연합의 논평에서 간단명료하게 나타난다. “1960~70년대 한국의 과학기술인 우대 정책과 청소년들의 이공계 선망 분위기가 1980~90년대의 고도성장을 낳았다. 2000년대 초 이공계 기피현상을 보며 2010년 이후 한국의 모습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이공계의 위기는 그 규모와 성격은 조금씩 달라도 웬만한 선진국이라면 다 겪은 과정이다. 다만 위기임을 느끼자마자 대책 마련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 정면 돌파한 나라들은 위기를 무사히 넘겼거나 넘기고 있고,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장기적인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애써 멀리 둘러볼 필요도 없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과 중국만 비교해봐도 위기의 본질은 간단하다. 장기적인 경제불황으로 자칫 이류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놓여 있는 일본은 10여 년 전쯤부터 나타난 이공계 기피현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현재 일본 정부의 차관급 이상 공직자 중 이공계 출신은 불과 3%. 그러나 중국은 국가 최고지도부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7명 중 이공계 출신이 장쩌민 주석을 비롯하여 무려 6명이나 된다. 거기다가 최근 제정된 과학기술상의 상금 규모가 자그마치 8억원에 이르는 등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파격적인 우대정책을 실시하고 있어 명실공히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설 것이 예측된다.

    지금 비록 침체에 빠져 있지만 이미 기술력과 자본 축적에서 선진화를 이룩해놓은 일본과 우리나라의 사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처 선진국 수준에 오르지 못한 시점에서 이공계 인력마저 감소한다면 머지않아 또다시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까 두렵다. 경제적 속국으로 겪을 설움은 정치적 속국으로 겪었던 설움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여러 단체들과 언론 매체들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해보면 대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과학기술자의 신분 보장과 사기 진작을 위한 대책 마련이다. 나는 이를 ‘과학기술자의 행복지수 개선’을 위한 방안이라 부르려 한다. 다음으로 지속적인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국가제도 또는 사회 인프라의 구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국민 홍보전략’의 수립이다. 이 세 가지 기본방향은 어느 것 하나도 독립적이지 않다. 세 가지 모두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되어야 오늘날의 위기를 더욱 신속하게 그리고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



    ▷ 과학기술자의 행복지수 개선하라


    자신의 직업을 자식에게 권하고 싶어하지 않는 현실은 행복지수가 낮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가늠자다. 직업만족도는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결정된다. 직업 보장, 처우 개선, 그리고 쾌적한 작업 환경조건의 확보가 그것이다.

    대학교수를 제외한 우리나라의 많은 과학기술자들은 직장에 대한 확신이 없는 가운데 불안한 연구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 사이언스지는 우리나라가 몇 년 전 외환위기를 겪을 때 과학기술자들이 대거 실직한 점을 이공계 기피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경기가 나빠지면 전문성이 결여된 관리직이 먼저 해고되는 외국의 경우와는 너무 다른 양상이다. 아직 우리 국민들은 과학의 본질과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여 전공을 택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취업률이다. 조금 서글픈 일이지만 이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근래 몇 년간 KDI(한국개발연구원)를 비롯한 몇몇 연구기관들은 국내 연구인력 현황에 관하여 수요와 공급에 상당한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한결같이 이른바 ‘첨단’ 과학기술 분야는 인력이 모자라 허덕이는데 수요가 늘지 않는 기초과학 분야의 공급에는 변화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과학기술 인력 수급에도 시장원리를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지극히 근시안적인 발상이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우리 옛말이 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연구진을 구성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떠올려본 속담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고급 인력층이 매우 얇아 급변하는 산업구조에 신속하게 적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잘 나가는 분야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은 장차 그 분야에 필요하게 될 인력을 미리 길러두지 못했다는 말이다.

    미래의 산업을 어느 분야가 주도할 것인지, 그리고 그럴 경우 어떤 인력이 필요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초과학 분야를 항상 고르게 발전시켜 놓아야 한다. 선진국이란 바로 그걸 잘 해놓은 나라들이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늘 이윤을 남겨야 하는 기업들이 이처럼 먼 미래까지 걱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기초과학기술자 양성을 국가가 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 일을 하라고 국민이 세금을 거둬준 것이다.

    기초과학기술자 양성에 더 이상 어쭙잖은 시장원리를 적용하지 않길 바란다. 장차 어떤 분야에 어떻게 쓰일지 모를 기초과학기술의 수요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창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영원히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변화를 따라가기 바쁠 뿐이다.

    세계보건기구(WHO) 홈페이지에는 세계 각국의 연령별 사망률을 비교해 놓은 그래프가 있다. 인간도 엄연한 포유동물이다 보니 20대와 30대, 즉 번식을 가장 왕성하게 하는 시기에는 다른 많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사망률이 여성의 사망률에 비해 거의 세 배 정도로 높다. 수컷이란 원래 ‘짧고 굵게’ 살다 가게끔 진화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그래프에서 다른 모든 나라들은 40대와 50대로 접어들면 남성의 사망률이 여성의 사망률 수준으로 떨어지는 데 반해 유일하게 그 차이를 더 벌리며 치솟는 나라가 하나 있다. 바로 우리나라다. 전세계를 통틀어 우리의 40~50대 남성들의 목숨이 가장 ‘파리목숨’에 가깝다는 뜻이다. 기초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야말로 몸으로 때우려니 무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대한민국을 한마디로 ‘소모품인간 사회’라고 정의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조만간 선진국 대열에 낀다고 기대하지도 않지만 거꾸로 후진국으로 전락할 위험도 없다고 본다. ‘은근과 끈기’의 민족으로서 그런 추락을 결코 방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고난과 극복의 역사에 자긍심을 가지는 일은 집단 수준의 평가이고 자위일 뿐이다. 나라는 망하지 않겠지만 그 나라의 성원인 국민 개인은 목적 달성을 위해 제조되고 폐기되는 소모품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은 ‘소모품인간 사회’


    대한민국이라는 집단이 세계 10위권에 드는 경제대국의 체면을 유지하려 ‘발악’을 하는 동안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질은 급락하고 있다. 한동안 써먹다가 효용가치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가차없이 버리고 새로 만들어 쓰는 것은 자동차와 가전제품들만이 아니다. 우리가 바로 대표적인 소모품이다.

    이 불행한 삶의 질곡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이제라도 기초를 확실하게 다지는 일밖에는 없다. 나는 선진국이란 변화를 주도하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국민의 건강과 목숨을 담보로 선진국 대열에 가까스로 턱걸이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 변화를 주도하는 선진국가가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기초학문을 단단하게 구축하기 전에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거듭 강조하건대 정부가 책임지고 기초과학의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으로 다른 나라들처럼 기초과학 분야의 국가연구소들을 만들어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으면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를테면 수학연구소나 생태연구소조차 없다. 연구소의 연구원은 물론 대학교수의 수도 현재의 두세 배는 되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단기적인 시장원리를 적용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꼭 시장원리를 적용해야 한다면 반드시 장기적인 계산을 해야 한다.

    보수 인상, 주택 제공, 자녀 학비 보조, 세제 혜택, 연금제도 마련 등을 비롯한 처우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물론 예산 문제가 뒤따르는 일이겠지만 정부의 확고한 의지만 있으면 가장 손쉽게 시행할 수 있고 가장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는 대책이다. 선진국처럼 과학기술자의 보수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높으면 공부가 아무리 어려워도 지원하는 학생이 늘어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선 보수만 보더라도 나는 적어도 현재의 두세 배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즉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느냐,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는 구절이다. 나는 요사이 우리 과학기술계에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보람 있는 연구생활을 하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모두 필사적으로 살고 있다. 아침 9시에 출근하여 새벽 1~2시에 퇴근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빈둥거릴 시간이 있어야 창의적인 연구결과가 나오는 법인데 그저 숙제만 하기에도 하루 해가 모자란다. 그렇다고 보수가 좋은 것도 아니고 장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식에게 과학기술 전공을 권유할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처우를 개선하는 단기적인 처방과 함께 쾌적한 환경에서 여유 있게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하는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구체적인 방안들은 다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일이지만 우선 두 가지만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SCI(Science Citation Index : 과학기술논문 색인지수)에 목을 매는 학문 사대주의를 당장 던져버릴 것을 주문한다. SCI는 미국의 일개 사립기관이다. 역시 사립기관이긴 마찬가지인 무디스에 오금을 펴지 못하는 우리 경제계의 입장은 당장 물건을 팔아야 하는 점에서 조금은 이해해줄 수 있지만 학문에서만큼은 이렇게까지 남의 나라 기업에 굽실거릴 까닭이 없다. 우리만큼 SCI 신봉도가 병적으로 높은 나라는 없다. 그렇게까지 굴욕적으로 해야 발전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과학기술계가 어린 것은 아니다.

    또한 연구여건이 나은 대학들의 교수들에게는 SCI에 등재된 학술지에 논문을 내는 일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대다수 지방대학의 교수들에게는 너무 불공평한 기준이다. 인문사회 계통의 연구도 지원하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은 이미 SCI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작업을 시작했다. 과학기술부와 과학재단, 그리고 교육인적자원부도 좀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을 마련하여 시행하기 바란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연구원이나 대학교수의 연구 업적이 줄어드는 원인으로 전체 응답자의 40%가 ‘과중한 관리 업무로 인한 자기 계발 시간의 부족’을 들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종종 창의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연구실 전화선을 빼놓거나 아예 집으로 피신한다. 아직까지 휴대전화를 마련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잡무에 시달려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푸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SCI에 목 매지 말자


    외국 대학의 실험실들이 보유하고 있는 연구보조원(Technician)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외국과 달리 연구보다는 행정관리 업무를 전담해줄 보조원이 필요하다. 모든 교수에게 일일이 보조원을 제공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겠지만, 비슷한 연구를 하는 교수 몇몇을 하나의 단위로 묶은 후 그들에게 행정보조원을 붙여주면 연구 업적에 상당한 진전을 기대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보조원은 단순히 잔심부름이나 하는 그런 보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능하면 이공계 대학을 나와 석사과정을 수료하여 직접 연구에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연구수행에 필요한 제반업무를 총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수나 연구원은 오로지 창의적인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다. 그리 많은 경비를 들이지 않고도 연구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유학시절 나는 공학박사 학위과정을 밟으면서 장래 정계로 나가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는 친구들을 경멸했었다. 학문을 단순히 출세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환멸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제 나의 ‘닫힌’ 생각을 바꾸려 한다. 우리나라 고급공무원의 90%가 이른바 문과 출신이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몇 년 전 영화감독 이규형씨는 “국민의 반이 이과 출신인데 우리는 거의 문과 방송만 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공계 졸업생들이 증권사에 취직하거나 정치 또는 행정계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은 결코 아니다. 과학계에 몸담고 싶으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마지못해 밀려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표적인 증권가 월스트리트에는 자연과학을 전공한 애널리스트들로 가득 차 있다. 과학 교육 덕택에 더욱 더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이공계 출신들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여 실력도 발휘하고 국가와 기업에 공헌할 수 있도록 융통성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문과 출신들도 더 조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과학 교육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

    과학적 사고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얼마 전부터 교육인적자원부가 시행하고 있는 자립형 사립고 정책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가진 기형적 ‘평등주의’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책 시행이 전혀 과학적이지 못한 것에도 문제가 있다. 소수의 자립형 학교들을 지정하여 일정 기간 운영해본 다음 그 효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의심스럽다.



    교육은 과학적 사고 기르는 것


    자립형 사립고 제도를 아예 도입조차 할 수 없는 공립고들과 비교할 것인지, 아니면 자립할 능력이 부족한 다른 사립고들과 비교할 것인지 분명치 않다. 자립형 사립고로 전환한 학교들의 성과를 자립하기 전의 상태와 비교하는 것은 올바른 실험이 아니다. 교육부가 선정한 자립형 사립고와 여건이 비슷하지만 자립 정책을 도입하지 않은 학교들을 선택하여 똑같은 재정적 지원을 한 후 동시에 모니터링해야 한다.

    과학적 사고는 과학 연구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과학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이공계 출신들이 이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고 가정해보라. 좀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추진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 과학 마인드의 정착이 필요하다.

    물리학자이자 소설가인 스노우(C. P. Snow)가 일찍이 1959년에 경고했던 ‘두 문화(two cultures)’의 장벽, 즉 문과-이과 또는 인문-이공의 장벽이 우리나라처럼 높은 곳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최근 교육인적자원부가 대입수능시험에서 교차지원을 허용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어찌 보면 이 두 장벽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또 2005년부터 실시한다는 제7차교육과정에서는 표면상으로나마 고등학교에서 문·이과의 구분이 없어진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수험생들의 학력 저하를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오히려 현재 이과 지망생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의 수학과 과학을 고등학생 모두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인문사회 계통으로 분류해온 분야들도 최근에는 점점 더 상당한 수준의 수학과 과학을 필요로 하고 있다. 외국의 경우 심리학은 거의 자연과학 쪽으로 기운 지 오래다.

    세계 경제학계에서 우리 학자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우리나라에 첫 학문분야 노벨상을 안겨줄 학자는 전통적인 자연과학 분야가 아니라 경제학 분야에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경제학자들은 대개 수리경제학 분야를 전공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받았던 스파르타식 수학교육의 덕을 무시할 수 없다. 그밖에도 인류학, 철학, 언어학 등 수학과 과학적 사고의 도움을 거부할 수 있는 인문사회 분야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의심스럽다. 교육은 어차피 일방적인 것이다. 먼저 산 세대가 사회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것들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수학과 과학 교육을 흥미롭게 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일이지만 흥미롭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가르침을 포기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오래 전부터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반복 훈련만 하고 있는 고교과정을 줄이고 대학과정을 늘려줄 것을 제안해왔다. 이른바 ‘5-5-5제’. 이 제도는 초등학교 과정을 5년, 중등학교 5년, 그리고 대학교 과정 5년으로 하자는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교과과정이 1년 단축되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대학과정은 1년 증가한다. 학문은 날이 갈수록 전문화하는데 현행 교육제도와 입시제도로 인한 전반적인 학력 저하는 학문 발전과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 심각한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 인문사회 계통도 그렇겠지만 특히 단계적인 교육이 필요한 자연과학 분야는 현행 학부제로는 충분한 전공교육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절대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대학 교육의 질적 저하에 따라 대학원 교육마저 파행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주장하는 5-5-5제는 교육계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한 제도라서 쉽게 시행하기 어렵겠지만, 이번 기회에 이공계에 한하여 단계적으로 시행해보면 어떨까. 고등학교 과정에서 이공계에 관심이 있고 능력 있는 학생들에 한하여 대학진학 시기를 1, 2년 단축시켜주자. 그리고 일단 대학에 들어오면 비록 5년으로 짜여진 과정이더라도 본인의 노력에 따라서 더 일찍 졸업할 수 있도록 융통성 있게 운영하자는 것이다. 정부의 사기 진작 정책에 따라 과학기술자의 장래가 밝아지고, 하루라도 빨리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면 능력 있고 관심 있는 학생들을 이공계로 불러모으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교육과정 혁신하고 지원 늘려야


    대학은 대학대로 지금처럼 인문사회와 자연계열을 분리하여 교육할 것이 아니라 예전의 문리과대학과 비슷한 ‘기초학문대학’을 만들어 신입생을 받았으면 한다. 나는 대학에서 자연과학 과목들을 가르치지만 비교적 철학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강의를 한다. 자연과학을 택한 학생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무미건조한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분히 인문학적인 소양을 함께 함양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많다. 자연과학,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과학의 발달이 인간 존엄성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시점에서 과학기술자들이 인문학적 관점을 습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과학기술시대를 사는 인문사회계 학생들도 과학의 기본을 알기 위해 과학기술학 정도는 수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 정도로는 너무 약하다. 인문사회계 학생들을 위해 말랑말랑하게 만들어놓은 과목 한두 개 듣는 걸로는 부족하다. 외국 대학의 학생들처럼 자연과학계 학생들과 함께 본격적인 과학 과목들을 필수로 몇개씩은 수강하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기초학문대학이 세워져 그리로 들어온 학생들은 이런 구분 없이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을 골고루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통합과정을 거친 다음 적절한 시기에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전공을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원에서는 박사과정에 대한 지원을 외국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현재로서는 BK21 사업단에서 월 60만원 정도의 장학금을 받는 것이 국내 최고 수준이다. 이는 사립대학의 경우 등록금을 내기에도 부족한 액수다. 겨우 생색만 내는 수준이 아니라 최소한의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은 지원해야 한다.

    적어도 월 150만원 정도는 돼야 한다. 지금처럼 BK21 사업단이 지급하는 형식이 아니라 미국처럼 과학재단이나 학술진흥재단 등이 맡아 전국적인 규모로 관리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만을 전담하는 ‘과학기술 장학재단’을 따로 설립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대학 3학년 말이나 4학년 초에 지원하도록 하면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자기가 원하는 대학원의 원하는 지도교수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대학원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확충하고 전세금을 무상으로 대여하는 방법 등을 활용하면 최소한 학위과정 중에는 재정적인 걱정 없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다.

    그와 함께 국내 박사를 일류대학 교수로 채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국내 박사과정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제는 국내에서 학위과정을 해도 충분히 국제경쟁력 있는 논문을 발표할 수 있다. 학위과정 중에도 얼마든지 국제학회에 참석하거나 외국 대학이나 연구소에 장·단기 교환연구를 다녀올 수 있다.

    나는 종종 학생들로부터 국내에서 학위과정을 이수하는 것과 외국 유학을 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외국 대학에서는 일단 장학금을 받으면 오로지 학업에만 몰두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그러기가 어렵다고 답한다. 국내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는 학생들에게도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면 경쟁력 있는 학자들을 배출할 수 있다. 또한 김희준 서울대 화학부 교수가 최근 지적한 것처럼 국내 박사과정을 활성화하면 여성 과학도들이 가장 큰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고 그만큼 국내 박사과정의 질도 향상될 것이다.

    얼마 전 KBS의 환경스페셜 100회 기념 강연회에 기조연설을 청탁받아 참석했을 때 박권상 사장께서 임기중 역사스페셜, 환경스페셜에 이어 ‘과학스페셜’을 만드는 것을 자신의 최고 업적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한다. 과학과 과학자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TV 프로그램처럼 젊은 세대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칠 매체는 없다. 이제 국내에도 제대로 조명만 받으면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과학자들이 얼마든지 있다.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를 통해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펼쳐야 한다.

    나는 요사이 과학대중화 사업의 일환으로 “알면 사랑한다”는 말을 마치 좌우명처럼 떠들고 다닌다.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과학이야말로 알리는 만큼 사랑받게 되어 있다.



    과학의 대중화 필요


    그런데 과학을 알리는 일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어려움이 있다. 과학을 알리는 일에 뛰어들 홍보 대사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대학도 이제 무한경쟁시대로 돌입하여 연구업적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고 있다. 과학의 대중화에 어느 정도 일익을 담당했다고 자부하는 나도 더 이상 희생을 감수하기 어려워 요즘 몸을 사린다. 과학의 대중화에 쏟은 노력의 결과들은 자연과학 분야의 개인 연구업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벌써 오래 전부터 과학기술부에 이른바 ‘과학문화 석좌교수제’를 제안해왔다. 명칭이 주는 거창한 느낌을 떨치기 어려우면 ‘과학문화 국가교수’라고 해도 좋다.

    과학문화 국가교수는 임기 동안 연구업적의 절반 정도를 과학 홍보 업적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다. 그 동안에는 과학기술부가 교육부로부터 협조를 받아내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저서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영국의 생물학자 도킨스(Richard Dawkins)는 현재 옥스퍼드대학의 과학홍보 석좌교수(Endowed Chair in 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로서 일반 대중이나 다른 분야의 학자들을 위한 과학저술 작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학 화학과의 애트킨스(Peter Atkins) 교수도 연구를 접고 과학저술 활동만 하고 있다. 우리 과학계에도 과학을 알리는 일이 연구 업적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해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무엇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에 대하여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과학을 대체로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그 동안 우리가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과학은 특별한 지식이 아니다. 세상을 분석하고 지식을 습득하는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학문을 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래서 화학 물리학 지질학 등을 자연과학이라 하고,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을 사회과학이라 부르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과학의 본질과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그래서 과학에 대한 공포나 의구심을 버리고 과학자에 대한 선망과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소여의 모험’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담장에 페인트칠을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 자기도 따라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어떤 페인트를 사용하여 어떻게 붓질을 해야 하는가를 다짜고짜 상세히 가르쳐줄 필요는 없다. 페인트칠 자체가 재미있어야 하며, 칠하는 기술은 일단 관심을 유도한 다음에 설명할 일이다.

    우선 과학이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늘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과학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걷힐 것이다. 과학기술인은 그저 전문지식만을 갖췄을 뿐 세상사에는 관심도 없고 보편적인 사고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생각하는 사회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근거 없는 선입관 때문에 과학자들은 지도력이나 비전은 말할 나위도 없고 관리 경영 능력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학기술자들은 글을 못 쓴다는 얘기도 따지고보면 이렇다 할 근거가 별로 없는 소문이다.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문학적인 글쓰기에 익숙해 있어서 그렇지 정확성과 경제성을 요구하는 과학적 글쓰기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글쓰기다. 실제로 외국에는 과학자 출신 작가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간결하고 정확한 과학적 글이 그들에게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글도 잘 쓰고 감성적인 과학자들이 성공했다. 과학기술자들의 이런 면을 좀더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理’의 위기가 ‘工’의 위기 불렀다


    ‘이공계 위기’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理)’의 위기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로 시작한 기초학문의 위기는 벌써 오래 전부터 여러 차례 지적해온 일이다. 다만 최근에 잘 나가는 줄 알았던 ‘공(工)’마저 흔들리는 바람에 졸지에 심각한 문제로 부각된 것이다. ‘이’의 위기가 결국 ‘공’의 위기를 부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공계의 위기를 해결한답시고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인 대책을 마련하여 땜질 처리만 한다면 또 다시 ‘공’만 간신히 물 밖으로 건져내고 ‘이’는 여전히 익사 직전으로 남겨놓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공계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기초학문의 위기다. 기초학문이 제대로 서면 기술 발전은 자연히 따라온다. 대입 수험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상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물론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이공계 지원이 더 유리하도록 입시정책을 수정하면 될 것이다. 교차지원을 어렵게 하자마자 이공계 지원이 늘었다는 보도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공계의 위기가 해결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공계 졸업자들 중 상당수가 아직 직장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시적인 이공계 지원자 감소가 당장 중대한 위기를 자초하는 것은 아니므로 고통의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 하더라도 이 기회에 더욱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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