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편견 버리고 사회복귀 지원해야”

정신장애인들에게 꿈 심어주는 최재명씨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09-16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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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의 인권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편견과 차별이다. 장애인은 보통사람과 뭔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사회적 불이익을 조장하고, 거기서 생긴 ‘낙인의식’은 다시 편견을 강화한다. 신체장애인들이 부단한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정신장애인들의 인권은 아직까지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최재명(58) 사랑밭재활원장은 고난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결코 아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 착한 심성을 몸에 익혔고, 학교에서 배운 사회사업가의 모델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활동을 인권적 시각에서 조명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음지에 머무르고 있는 정신장애인들의 삶을 양지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반송리. 바로 이곳에 경산복지재단이 운영하는 사랑밭재활원이 있다. 진입로 양편에 사랑밭재활원에서 나온 ‘회원’(사랑밭에서는 ‘원생’이라는 말 대신 ‘회원’이라고 부른다) 20여 명이 자연보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이것은 ‘우리도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 도움을 주자’는 취지에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한 행사다. 정신장애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닌데다,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재활원 입구의 표석에 새겨진 문구가 인상적이다. ‘이마엔 예절, 가슴엔 이상, 손엔 노동을.’ 100m쯤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왼쪽 면회실 앞에 더욱 놀라운 글귀가 있다. ‘一日不作 一日不食·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 기자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으니 최재명 원장은 재활원이 설립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사랑밭재활원의 설립자는 최원장의 아버지 최병흥(88)옹이다. ‘거짓말하지 않고 참된 길만 간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신조로 살아왔다는 최옹. 그는 광복 후 건축재료상을 시작했는데, 건설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막대한 돈을 벌었다. 영산콘크리트, (주)호산, 한일시멘트 등이 그가 설립한 회사들이다. 이런 사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최옹은 1981년 사랑밭재활원이 문을 연 이래 줄곧 땀의 소중함과 일하는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최옹은 사업이 번창하는 때에 외국인들이 한국의 소외계층을 지원하는 활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 ‘우리가 언제까지 외국사람들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다. 나도 언젠가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는 것. 실제로 최옹은 지금까지 사랑밭재활원과 소외된 청소년들을 위해 만든 ‘애전장학회’ 등에 100억원 이상을 기증했다.

    최재명씨가 이화여대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하고 사회복지사로 살아가게 된 것도 아버지의 헌신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최씨는 사회사업가 남편(1978년 작고)을 만나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현재 모두 사회사업을 전공하고 있다.

    사랑밭재활원의 구석구석에는 한국정치사의 풍운아 고 윤길중 의원의 붓글씨가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윤의원은 최옹과 강원도 문막초등학교 선후배 사이인데, 말년에 몸이 약해지자 사랑밭재활원에 찾아와 흙을 밟으면서 소일했다. 윤의원은 기력이 떨어져 몸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몸을 곧추세우고 ‘愛能益世·사랑의 능력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를 수없이 썼다고 한다. 윤의원의 마지막 외침은 바로 사랑밭재활원이 추구하는 정신이다.

    최원장은 대학을 졸업한 뒤 외국계 지원기관에서 근무했다. 나라 전체가 먹고사는 일에 매달리던 시절, 최원장은 일선 사회사업가로서 소외계층의 아이들과 만난 것이다. 부모가 문을 잠가놓고 일을 나가는 바람에 방안에 갇혀서 하루 종일을 보내는 아이들, 당장 수술이 필요한 데도 돈이 없어 시름시름 죽어가는 아이들…. 최원장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의사는 빨리 수술하라고 재촉하고, 기관에서는 다시 일어날 가망이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두자고 권하고, 그러면서 시간은 계속 가는 거죠. 천신만고 끝에 수술을 끝내고 병실에 찾아갔는데 머리를 빡빡 깎은 아주머니가 딸을 보고 환하게 웃는 거예요. 정말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가도 그런 일을 겪고 나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겁니다. 만약 수술을 포기했다면, 딸아이는 어머니의 해맑은 웃음을 영영 보지 못할 뻔했잖아요.”

    사랑밭재활원은 정신요양시설로 출범했다. 대학에서 실습을 나간 것말고는 정신장애인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최원장은 곧바로 숭실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장애인복지를 시작하기에 앞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최원장도 한때 ‘장애인은 잘 보호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장애인 문제를 고민하면서 ‘지나친 보호는 차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최원장이 사랑밭재활원을 기존의 장애인 수용시설과 다르게 운영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런 이유다.

    “1980년대만 해도 정신장애인 하면 우선 가둬놓고 약을 투입하는 게 관행이었어요. 밖으로 나오면 위험하다는 인식이 강하게 지배한 거죠. 하지만 사랑밭재활원은 처음부터 열린 공간을 지향했어요. 그래서 장애인들이 얘기하고 놀 수 있는 ‘자유병동’을 만들고, 희망자에 한해서 들에 나가 일도 할 수 있게 했죠. 지금 생각하면 아주 초보적인 단계였는데, 그때는 그게 ‘모범사례’로 뽑히고 그랬어요.”

    최원장의 말처럼 1980년 초에 정신장애인들을 외부로 끌어낸다는 것은 파격적인 조치였다. 최원장은 초창기 사랑밭재활원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인원점검을 하다보면 사람이 없는 거예요. 전직원이 뛰어다니면서 환자를 찾다보면 집에 가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으면 그렇게 했겠어요. 그런 사람을 철창 안에 가둔다는 게 얼마나 가혹하고 무모한 짓입니까. 우린 힘들어도 그들에게 조금씩 자유를 주고, 그렇게 해서 하루라도 빨리 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80년대의 정신장애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비화가 있다. 바로 1980년대 중반에 터진 ‘기도원 사건’이다. 당시 경기도의 한 기도원이 정신장애인들을 감금하고 강제노역에 동원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불시에 현장을 덮쳤는데, 수사과정에서 상습폭행과 시체 암매장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던져주었다.

    ‘기도원 사건’의 여파는 사랑밭재활원에도 미쳤다. 당국이 문제가 된 기도원의 환자들을 분산 수용하기로 결정했는데, 무려 129명이 사랑밭재활원에 배정된 것이다. 의사와 사회복지사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증의 정신장애인들이 대거 몰려왔으니 사정이 어떠했을까. 최원장은 “가족도 포기하고, 환자도 아무런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치료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일반적으로 정신장애인의 치료에서는 가족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가족이 어느 정도 뒷바라지를 해주느냐에 따라 환자의 상태는 극과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 요즘에야 환자와 보호자가 자유롭게 만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망신스러워서 집안에 둘 수 없다. 죽어도 좋으니 제발 맡아만 달라’고 환자를 떠넘기는 가족들이 적지 않았다. 환자는 퇴원을 원하고, 가족은 거부하는 상황은 급기야 심각한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수용생활을 견디다 못한 환자가 자살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처음에는 맡아만 주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겠다던 사람들이 막상 사고가 터지면 보상하라면서 난리를 치고….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시설에 수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신장애인도 함께 살아야 한다. 환자도 인간인 만큼 정당하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굳어진 거죠.”

    정신장애인들에게 1995년은 중요한 해다. 이 해에 제정된 ‘정신보건법’의 핵심이 바로 ‘탈수용화 정책’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정신장애인을 수용시설에 몰아넣는 것이 당연한 조치였다면, 1995년 이후엔 치료와 사회복귀를 병행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뀐 것이다.

    사랑밭재활원은 1999년 2월 정신요양시설에서 사회복귀시설로 전환했다. 200여 명에 달했던 인원을 단계적으로 정리해 50여 명으로 줄였고, 모든 병실도 개방했다. 이때부터 희망자들을 뽑아 취업을 나가도록 지원했다. 하지만 정신장애인들이 지역사회와 자연스럽게 뒤섞이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최선의 치료는 사회복귀


    주유소에서 일하던 장애인이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그는 동작이 느린 편이었다. 한번은 기름을 다 채우기도 전에 자동차가 출발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러자 관내의 경찰관이 찾아와 ‘정신장애인이 시설 밖으로 나와서 일해도 되는 거냐?’며 따진 일이 있다.

    당시 취업을 나간 장애인이 쓴 수기엔 이런 내용도 들어있다. ‘전자회사에 다니는 아주머니들이 간혹 사이코라고 우리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4명의 재활원 친구들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자제품이라 많은 주의가 필요하지만, 참아내고 꼭 승리하겠습니다’.

    주변의 쓴소리를 들으면서도 최원장은 지역사회 취업활동을 밀어붙였다. 그것은 ‘일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이야말로 최선의 치료’라는 그의 원칙 때문이었다.

    “경험을 통해 무의욕을 의욕으로 바꾸고, 무감동에서 감동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정신장애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장애인에게 자유를 주면 위험하다’면서 말렸지만, 저는 ‘움직여야 사람이 된다’는 말로 설득했어요. 일하지 않으면서 약에만 의존하면 치료는 그만큼 늦어지는 겁니다.”

    사랑밭재활원이 위치한 화성시 동탄면 지역에서는 1년에 두 번씩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잔치가 벌어진다. 지역사회 주민들과 사랑밭 회원들이 함께 어울리는 행사다. 전국적으로 장애인 시설은 기피대상 1호다. 물론 동탄면 주민들도 처음부터 사랑밭재활원을 반겼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원장의 노력과 회원들의 취업활동이 나름대로 인정을 받으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젠 지역주민들이 자원봉사를 자청해 김장을 담가줄 정도로 좋아졌다.

    “서로 돕고 사는 거죠. 재활원에서 통닭을 먹으려면 동탄면 닭집에서는 아침부터 닭을 튀겨야 되고, 자장면을 먹으려면 중국집이 하루 종일 바빠요. 지역사회에서 관심을 갖고 대하니까 장애인들도 자부심을 갖는 것 같아요. 바로 이런 점들이 사회복귀를 위한 디딤돌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탄면 지역에서 지역주민들과 장애인 시설이 유기적으로 협조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건복지부에서는 한때 이곳을 특수지역으로 선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특수지역이 되면 여러가지 혜택도 받을 수 있었지만, 최원장은 반대했다고 한다.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장애인을 특수한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장애인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라야 합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서서 장애인의 인권문제를 거론할 필요도 없잖아요.” 바로 사회복지학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다.

    최원장은 정신장애인들의 사회복귀를 돕는 ‘그룹홈(Group Home)’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오산과 동탄 지역에 7개의 주거시설을 마련해 정신장애인들이 직접 지역사회 주민들과 부딪히면서 살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사랑밭재활원이 장애인들을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는 데다, 퇴원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나자 대안으로 마련한 시설이다.

    ‘그룹홈’도 처음에는 많은 후유증을 낳았다. 동네에 쓰레기가 쌓여 있으면 가장 먼저 장애인들이 의심을 받았고, ‘당장 시설을 옮기지 않으면 조치를 취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주민들도 있었다. 또한 불안감을 느낀 어느 정신장애인이 14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어 사랑밭재활원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장애인들이 성실하게 정착하면서 주민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요즘엔 교회에 나오라고 찾아오거나 일자리를 주겠다며 먼저 연락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사실 정신장애인들이 복잡하고 전문적인 일에 종사하기는 힘들어요. 감정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위험할 때도 있고요. 다만 젊은 사람들이 다 떠나고 인력난이 심하다 보니까, 궂은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잖아요. 장애인들은 주로 음식점 설거지, 관공서 심부름, 농사일을 하는데, 요즘은 ‘재활원 사람들 참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가끔씩 장애인이라는 핑계로 월급을 터무니없이 깎아서 속이 상할 때도 있지만, 돈보다 중요한 건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직접 했다는 만족감이죠.”

    사랑밭재활원은 ‘늘푸름’이라는 이용시설을 만들어 장애인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사회복귀 훈련을 받도록 했다. 이른바 ‘클럽하우스(Club House)’ 시스템인데, 여기에서는 장애인들에게 취업동기를 부여하고, 사회적응과 여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정신장애인들은 낮엔 직장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이곳에서 치료와 놀이를 겸하는 것이다.

    “과거에 비하면 장애인들의 인권이 몰라보게 향상됐습니다. 지금은 상습적으로 폭행하거나 철창에 가두는 일은 거의 없어요. 정신장애인들이 수십명씩 바닷가로 놀러가는 건 예전엔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사회복귀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직도 개선해야 할 점이 많아요. 시설 안에서는 정상이라 해도, 시설 밖으로 나가면 갈 데가 없는 현실이죠. 나이는 한두 살씩 먹어가는데 건물 안에서 꼼짝도 못한다면, 그게 최선의 대안은 아니잖아요.”

    최원장이 최근 들어 자주 쓰는 말이 ‘정신사회재활’이다. 한마디로 정신장애인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고,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자는 얘기다. 최원장은 정신장애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사회적 편견이라고 말한다. 정신장애인들은 신체장애인과 달라서 더욱 세심하게 배려해야 하는데, 아직 한국사회가 그런 수준까지 성숙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다양한 영역에서 정신장애인 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최원장은 정신장애인 문제의 경우 어느 분야보다도 전문적인 사회사업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신장애인의 말은 한마디라도 새겨듣지 않으면 화를 당하기 쉽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온갖 상처를 받고 끝내 시설로 들어온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박탈감이 자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어루만져주려면 전문적인 서비스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는 여기에 매달리는 사람이 의외로 적다. 그 길이 워낙 고달프고 보람을 찾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길밖에 모르는 사람이라서 한번도 싫증을 느껴본 적이 없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사회사업을 시작할 때에 비하면 장애인들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전체 사회로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여전히 정신장애인을 부담 없이 외부에 내놓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고, 단지 신경쓰고 싶지 않으니까 시설에 맡기려는 추세가 강하잖아요.”

    지금까지 사랑밭재활원을 거쳐간 정신장애인은 1000여 명에 이른다. 그중에는 퇴원해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시설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싶어도 법적으로 사회복귀시설의 수용인원은 50명으로 제한돼 있다. 최원장은 사랑밭재활원을 떠난 사람들이 “그때가 행복했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내올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한다.

    사랑밭재활원은 여느 정신장애인 시설과 다른 점이 많다. 출입구와 방문이 가정집처럼 열려 있는가 하면, 장애인들이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복도에서 마주친 장애인들과 웃으면서 안부를 묻는 최원장. 그는 환자들의 치료상태와 프로그램 진행수준을 빠꼼하게 외우고 있었다. 최원장은 기자의 사진촬영 요청을 받고 회원들에게 일일이 다가가서 “얼굴이 나와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물론 그들의 초상권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딱 한 사람을 빼고 모든 장애인들이 흔쾌히 동의했다. 생각보다 최원장이 그들과 훨씬 가까운 곳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밭재활원에는 ‘원더풀 샵’이라는 이색공간도 있다. 여기는 지역사회에서 기증한 의류와 정신장애인들의 창작품 등을 벼룩시장 형태로 운영하는 공간인데, 자수와 공예품 중에는 시중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물건도 많았다. 최원장은 “이렇게 잘하는 사람들을 덮어놓고 무시하려고 하니 얼마나 답답합니까”라며 안타까워했다.

    최원장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사랑밭재활원을 떠날 무렵 교복을 입은 100여명의 청소년들이 보였다. 근처 학교에서 재활원으로 자원봉사를 나온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잔디밭에서 풀을 뽑고 정신장애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11명의 직원이 50명의 정신장애인을 돌보는 사랑밭재활원. 그곳은 장애인들이 인간답게 대접받는 쉼터처럼 보였다. 언뜻 봐서는 장애인 시설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비결을 물으니 최원장은 재활원 본관 앞에 있는 표석을 읽어보라고 했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자


    ‘우리 잠시 이 사회에 머무는 동안, 아니 이 재활원에 머무는 순간만이라도 사회를 위해 무엇을 얼마만큼 봉사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자. 먼 훗날 오늘을 되돌아볼 때 이곳에 머문 순간이 우리 생애에 가장 보람 있었던 나날로 자부할 수 있도록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며…(중략)’

    비가 촉촉이 내린 재활원 잔디밭은 말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올해 88세인 사랑밭재활원의 설립자 최병흥옹은 요즘도 틈만 나면 사다리를 타고 나무 위로 올라가 가지를 치고, 꽃밭을 가꾼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은 법. 최근까지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재활원을 방문할 때마다 자가용 대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탈 때가 많다는 ‘최씨고집’을 재활원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어느덧 퇴근시간. 한 무리의 장애인들이 일을 끝내고 재활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걸음걸이가 불안정한 사람은 있었지만, 얼굴표정이 어두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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