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백범 암살 배후는 이승만과 미국”

통일운동가 신창균옹, 그 고난의 삶

  • 김진수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jockey@donga.com

    입력2004-09-01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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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균옹은 올해로 95세다. 남들 같으면 은퇴하고도 20~30년은 족히 흘렀을 법한 고령이건만, 현재 신옹이 가진 대표적인 공식 직함만도 4개나 된다.

    남·북·해외동포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6·15공동선언 실천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통일연대) 명예대표, (사)민족화합운동연합(민화련) 명예의장, (사)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수석대표 등이 그것이다.

    그런 그가 6월1일 사단법인 ‘통일맞이’가 주는 제7회 ‘늦봄 통일상’(‘늦봄’은 고 문익환 목사의 호)을 받은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순리(順理)적인 일일 것이다. 신옹은 통일운동가이자, 백범이 우리 곁을 떠난 지 53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일을 최고의 사명으로 여기는 이른바 ‘백범맨’이기 때문이다.

    7월8일 경기도 과천시 별양동에 있는 신옹의 아파트를 취재차 방문했을 때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신옹은 “8·15해방 전엔 항일독립이 우리 민족의 소원이었지만, 해방 이후엔 남북통일이 최대의 과제”란 말부터 꺼냈다. 때문에 통일운동이야말로 ‘제2의 독립운동’이란 것이다.

    그러고는 “조국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위한 삶을 산다고 살았지만, 막상 이번에 상을 받고는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이 상을, 만일 살아있다면 나와 나란히 자리를 함께했을 이 땅의 수많은 독립운동가 및 통일운동가들에게 돌리고 싶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신옹과의 만남은 당초 지난 6월 초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때마침 서울 종로5가를 걷던 중 다른 행인의 다리에 걸려 허리를 삐끗한 상태였다. 게다가 신옹의 귀가 너무 어두워 일단 인터뷰를 보류했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보청기를 착용하고도 청력이 약한 신옹과의 대화중 상당부분은 그가 ‘주워온 아홉번째 아들’이라 부르는 홍원식(42·(사)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사무처장)씨의 도움을 받았다. 홍씨는 5년 전부터 신옹의 신변잡사를 수발해오고 있다.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뒤 15년째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는 23평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신옹은 새벽5시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난 뒤 신문을 보거나 성경을 읽고, 다시 한숨 눈붙인 다음 일어나 식사하고 본격적으로 일과를 개시한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4개 단체의 사무실 중 하루에 한 군데는 꼭 들러 통일운동에 대한 계획 등을 구상하고 그 실행 정도를 체크한다.

    장기간 통일운동을 해오다보니 일부 언론에선 그를 두고 ‘친북적 인사’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신옹의 생각은 단호하다. 자신은 사상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민족적 측면에서만 친북적이라는 것이다.

    최근 신옹에게 충격을 던진 ‘사건’ 중 하나는 2002한일월드컵이다.

    “가장 극적인 경기는 승부차기로 끝난 한국-스페인전이었지만, 사실은 붉은악마를 필두로 한국민이 하나로 결집한 장면이 더욱 감격스러웠어. 왠지 3·1운동 때가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오더라고. 그 힘이 남북통일을 위한 힘으로 승화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해교전은 잠시 그의 상심을 불렀다.

    “서해교전 이후 남북간 통일논의가 경색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햇볕정책엔 변함없는 것 같아 다소 마음이 놓여. 통일논의는 그대로 이어질 거야, 마땅히 이어져야만 하고.”

    신창균옹은 충북 영동 태생이다. 1908년, 중산층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늦둥이어서 가족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일곱 살 때부터 한문서당에 다녔는데 그가 학동(學童) 생활을 마칠 무렵인 열두 살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얘기를 귀 따갑게 듣고 자란 그는 3·1운동에 열렬히 동참했다. 당시 충청북도에서는 가장 치열한 만세운동이었다. 시위 군중들은 일경 주재소를 파괴했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헌병에 의해 주동자 50여 명이 체포됐고, 그중엔 소년 신창균도 포함돼 있었다.

    신옹 등 몇 명의 학동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매만 맞고 나왔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민족자립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졌고, 이후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계기가 됐다.

    1922년 5월 신옹은 대전제일보통학교 3학년 재학중, 3·1운동 당시 옥고를 치른 사람들에 대한 의리로 항일 동맹휴학을 주동해 무기정학을 당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1927년 30대1이라는 당시로선 아주 치열했던 입학경쟁을 뚫고 충북사범학교(청주 소재)로 진학한다.

    사범학교에서도 사상문제로 인해 수차례 퇴학 위기에 몰리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졸업을 한 신옹은 이후 10년간 청주, 충주, 음성 등지에서 교편을 잡으며 제자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심어주었다. 그것만이 고통과 울분의 나날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항일운동을 하는 이들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신옹은 일경의 요시찰 대상이 돼 심한 감시를 받는다. 그런 상황에서 교직을 계속 수행하긴 무리였다.

    임시정부의 마카오 연락책

    신옹은 33세가 되던 1940년 6월 망명길에 오른다. 그렇게 파란의 삶은 시작됐다.

    처음 도착한 곳은 남중국 광동성 수도인 광주. 이역(異域)에서의 심정은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곧 용기를 낸 신옹은 빵 행상에 나섰다. 장사를 위해 여러 지방을 돌다보니 적잖은 경험을 쌓게 됐고, 그는 곧 광주와 마카오를 오가며 성냥무역을 시작했다. 마카오는 전력 사정이 좋지 않은데다 성냥 원료가 귀해 장사가 잘됐다. 성공한 성냥 판매상이 된 신옹에게 행운이 겹쳤다.

    그의 장사수완을 눈여겨본 중국 부호의 신임을 얻어 당시 남중국에서 가장 큰 사업체였던 중산전력회사의 사장직과 광동전력회사 부사장직에까지 올라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당시 마카오엔 조선인들의 왕래가 잦았다. 신옹은 재정적 기반이 탄탄하고, 마카오 총독부에 정식으로 등록한 뒤 거주하는 유일한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중경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게 됐다. 임시정부의 연락책을 맡은 것이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광동에 잠시 머물다 중경으로 옮겼는데, 김구 주석의 최측근인 조완구씨와 엄항섭씨 두 사람을 창구로 해서 임시정부와 긴밀한 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신옹의 주임무는 독립자금을 보내주고 광동·광서, 홍콩, 싱가포르 등지의 정치·경제 상황과 일본군의 동태를 수시로 수집해 보고하는 일이었다.

    오래지 않아 시련이 닥쳐왔다. 일본군은 신옹이 몸담고 있는 전력회사를 강제로 빼앗았고,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신옹은 1945년 7월 재산을 정리해 본국으로 빼돌림과 동시에 허위 증명서를 만들어 비밀리에 귀국했다. 조선의 독립에 대비해서라도 반드시 비밀자금이 필요할 것이라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돼 그는 종로경찰서에 구속된다. 그럼에도 곧 찾아온 8·15해방은 그에게 다시 자유를 되찾게 해주었다.

    종로경찰서에 붙잡힌 뒤 일본경찰에게 가져온 재산의 반을 빼앗겼지만, 왕년의 사업가 신창균은 여전히 남한 제일의 부호로 불릴 만큼 탄탄한 재력가였다. 알려진 바 없지만, 당시 남한에 두 대밖에 없다던 벤츠 승용차 중 한 대는 그의 소유였다.

    이 시기 그의 재력을 보여주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미군정 시절인 당시 중앙청엔 태극기가 게양돼 있지 않았는데, 신옹이 성조기와 함께 태극기가 게양될 수 있도록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이다. 신옹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자.

    “소년시절 내게 세례를 주신 교장 선생님의 아들인 우광복과 나는 절친한 친구사이였는데, 이 친구가 윌리엄스란 미국 이름을 갖고 미군정 하지 장군의 보좌관(중령)으로 한국에 왔지. 미 군정청 사무실에서 그를 대면했는데, 자기가 힘 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으니 소원을 말해보란 거야. 처음엔 사양했는데 자꾸 말해보라고 해서 내가 중국에서 성냥 판매사업으로 성공한 얘기를 하며 조선성냥회사(당시 조선 최대의 성냥회사로 일본인이 경영)를 경영할 수 있게 해주면 마카오에서의 경험을 살려 힘껏 경영해보겠다고 했지. 크게 기대 안했는데 그게 현실로 이뤄졌어.”

    신옹은 소신경영을 했다. 종업원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면서 한발짝 더 나아가 회사 주식의 40%를 종업원들의 몫으로 양여하는 파격적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또 중역과 종업원간 보수 차이를 최대한 줄였다. 이런 조치는 해방 직후 노사분쟁이 격화된 상황에서는 가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조선성냥회사는 단 한 건의 노사분규도 없이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이같은 인연에 힘입어 신옹은 윌리엄스를 찾아 정담을 나누곤 했는데, 어느날 독립된 조국의 행정청에 태극기가 걸려있지 않은 것을 보게 됐다.

    “그래서 윌리엄스에게 ‘여기도 조선땅 아닌가? 그러므로 성조기만 달지 말고 태극기도 함께 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어. 그도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답했는데, 얼마후 윌리엄스가 미국 본대로 귀대해버렸어. 결국 수포로 돌아가는가 싶어 낙심했지. 그랬는데, 며칠 뒤 윌리엄스의 후임으로 온 하지 장군 보좌관이 만나자고 해 청사로 갔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거야. ‘내 전임자가 당신에게 약속한 태극기 게양건을 신신당부하고 갔기에 곧 실행에 옮기려 하니 속히 태극기 10장을 준비해주시오’.”

    신옹은 뛸 듯이 기뻐하며 태극기를 전달했는데, 그날은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동아일보가 ‘조선성냥회사 사장 신창균’이란 직함을 밝히면서 이 사실을 보도했지. 군정청 마당에서 성조기와 함께 당당히 펄럭이던 태극기를 보며 느꼈던 그 날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해.”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한반도는 외세에 의해 분할 통치가 결정되고 남과 북은 각기 단독정부 수립에 나섰다. 당시 남한에선 정부수립 문제를 놓고 팽팽한 대치국면이 형성됐다. 이승만 진영은 남과 북이 각기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데 적극 찬성했지만, 백범 김구 진영은 이를 적극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1948년의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는 이런 정치상황 아래서 이뤄졌다. 이즈음 신옹은 24개 정당과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1946년을 기점으로 국내 최대 정당으로 부상한 한국독립당(한독당)에서 자신이 후일 평생 존경하는 인물이 된 백범과 함께 활동한다. 백범은 한독당의 당수였다. 신옹의 직책은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및 재정부장이었다.

    마침내 1948년 4월 신옹은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남북협상 한독당 8인 대표(김구,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신창균, 김의한, 조일문, 최석봉)의 일원으로 북행길에 오른다.

    “남한 양김(김구·김규식)의 제안을 북한 양김(김일성·김두봉)이 받아들여 회의가 성사됐는데, 당시 백범의 회의 참석을 막기 위해 시위대가 경교장(백범의 거처) 앞마당을 지키고 있었지. 이에 백범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법으로 경교장을 빠져나와 4월19일 먼저 평양으로 떠났어. 나와 다른 일행들은 다음날 길을 나서 평양에서 백범과 합류했지.”

    신옹이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거행된 연석회의에 참석해 보니, 남측 참석자보다 북측 참석자 수가 월등히 많았다. 게다가 회의 진행을 단순 다수결로 하고 있었다. 신옹은 연석회의이니 동등하게 해야 한다며 북측 진행자인 주영하씨에게 이 문제를 강력히 항의했다.

    “그랬더니 주씨가 휴식시간에 ‘신선생, 우리 김일성 장군님을 만나서 말씀을 나눌 수 없을까요?”라고 의중을 묻는 거야. 연석회의 일정을 협의하라는 거였어. 나이론 내가 네 살 위였지만, 상대는 북한의 입법·사법·행정을 통합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위원장, 한마디로 최고실력자인지라 조금은 얼떨떨했지.”

    김일성과의 독대

    신옹이 주씨의 제의에 기꺼이 응하자 김일성 위원장과의 만남은 곧 이뤄졌다. 주씨의 배석 하에 30여 분간 김위원장을 단독으로 만난 것이다.

    “안내를 받아 모란봉극장 사무실로 들어가니 김위원장이 환하게 웃으며 손이 아프도록 악수하더군. 그의 첫마디는 ‘통일운동에 정열을 다 바치시는 신선생님을 만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였어.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김위원장은 다시 내게 ‘모처럼 기적적으로 성사된 연석회의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했어. 그래서 난 절차적 정당성을 갖춘 회의가 되게 하려면 남과 북이 1대1로 안건을 합의해 나가는 것이 옳다고 설명했어. 김위원장은 당시 36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시종일관 진지하게 나를 대했어. 우여곡절 끝에 연석회의에선 ‘한반도 내에서의 외국군대 철수’를 핵심내용으로 한 공동선언을 채택한 뒤 폐회하고 5월5일 돌아왔지.”

    실패로 끝난 남북협상이 반세기도 훨씬 지난 일임에도 신옹은 연석회의를 분단 이후 최초로 시도한 ‘통일운동’으로 회고한다. 그리고 그 정신을 계승한 것이 지난 2000년의 ‘6·15남북공동선언’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백범을 직접 대면하거나 보필한 사람들 중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생전의 백범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던 신창균옹.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맺어진 것일까.

    “백범과의 첫 대면은 해방 이후 내가 다니던 덕수궁 뒤 정동감리교회에서 이뤄졌어. 그 날은 백범이 환국 후 처음 맞는 일요일이어서 그가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마카오 망명 당시 나의 연락창구였던 엄항섭씨의 소개로 백범에게 인사할 기회가 있었지. 백범은 마치 오랫동안 함께한 사이처럼 친근하게 내 두 손을 꼭 쥐어줬어. 그 날의 감격과 체온을 난 아직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이후 신옹은 1948년 역사적인 연석회의에 백범과 동행했을 뿐 아니라, 그후 각종 회의에 참석해 백범과 한독당의 의사를 대변했다.

    이런 인연으로 백범은 서거(1949) 1년 전, 중국에서 사망한 백범의 모친(곽낙원 여사)과 아내(최준례 여사) 및 맏아들(인)의 유골을 환수해 천장식(遷葬式)을 기독교 교회 연합장으로 거행하면서 연장자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당시 41세였던 신옹에게 대표기도를 맡기기도 했다.

    신옹의 눈에 비친 백범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외유내강의 소유자였어. 어린 시절 동학혁명군의 선봉에 선 이래 ‘치하포사건(1896년 백범이 일본군 장교를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보고 살해한 사건)’의 장본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이 바로 백범이잖아? 또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기획한 사람이니 만큼 언뜻 생각하면 대단히 과격하고 동적인 분일 것 같지 않아? 그런데도 수많은 친필 휘호와 자작시를 남겼을 만큼 문화·예술적 소양을 갖춘 정적인 분이셨어. 새벽 6시면 어김없이 묵상을 하며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곤 했지.”

    무척 믿고 따른 만큼, 백범이 안두희의 흉탄에 암살됐을 때 신옹의 심정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백범 암살 당시의 분노는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살아있다.

    특히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요원으로 활동했고 우익 청년단체인 백의사(白衣社)의 특공대원이었다는 사실이 지난해 9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문서 공개로 드러난 이후 신옹은 백범 암살의 배후가 미국일 것이란 심증을 더욱 확실히 굳히고 있다.

    “난 훨씬 이전부터 백범 암살은 이승만 일당과 미국의 공모에 의한 것이라 주장해왔어. 그래서 지난해 그 문건이 공개됐을 때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장기표 공동대표와 함께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 대통령의 사과와 향후 배상을 촉구한 바 있지. 그런 직후 그만 9·11테러사건이 터져 그 일의 추진을 미뤄왔지만, 기회를 봐서 다시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거야.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의 암살은 주권국의 전 국가원수이자 가장 존경받는 한국인에 대한 불법행위란 점에서 반드시 역사적 단죄가 뒤따라야 해.”

    백범 지지했다 사업체 빼앗겨

    신옹은 해방 직후 백범과 이승만 두 사람을 모두 잘 알고 지내던 처지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해방 직후 신옹이 다니던 정동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자연히 두 사람은 얼굴을 자주 접하게 됐는데, 운암(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은 당시 젊은 나이에 상당한 재력가로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신옹을 늘 주의 깊게 대하곤 했다고 한다.

    “환국한 백범은 서대문 경교장에서 지내며 일요일이면 일부러 운암이 나오는 정동감리교회로 와서 예배를 드렸어. 자연스럽게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한 지붕 아래서 예배를 드리니 서로간에 관계도 좋았어. 무엇보다도 백범은 한 살 위인 운암을 깍듯이 ‘운암 형님’이라 부르며 예의를 지킨 데다, ‘신탁통치 반대 및 새로운 독립정부 수립’이란 정치적 목적 또한 같아서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었던 거지. 그러나 미국과 UN이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정책을 선포하자, 이를 두고 백범과 운암은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어. 난 두 사람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됐지.”

    신옹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기꺼이 백범을 선택했다고 한다.

    첫째, 임시정부 최초의 대통령인 운암은 이미 미국정부가 한국을 독립국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내부방침을 정한 상태에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신탁통치’를 강력히 청원했다가 임시정부 의정원으로부터 탄핵 소추와 파면을 당한 바 있어 독립국의 지도자가 된다는 건 정의관념에 맞지 않다.

    둘째, 남북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운암의 생각에 찬동하는 것은 ‘병든 부모에게 약 한번 쓰지 않고 방치해 죽게 만드는 불효자식’과 같은 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가 남북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정부를 보유하게 되면 필경 미국과 소련의 지원 아래 서로 다른 군대를 갖게 되고, 각기 다른 군대가 있는 이상 ‘동족상잔’이란 천추의 한이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것이다. 남북의 통일이 없는 한 아직 우리 민족은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다”는 백범의 주장이야말로 민족의 만년대계를 기약하는 것이다.

    신옹은 기꺼이 백범을 선택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사업체를 강탈당했고 국회의원 출마 등 정치적 입지 또한 운암의 개입으로 철저히 봉쇄됐다. 고난의 가시밭길 인생이 다시금 시작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한독당은 1950년 10월 6·25 전쟁 중 당 간판을 계속 부착했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제해체되는 비운을 맞는다.

    한독당 해체 이후 신옹이 만난 두번째 동지는 죽산 조봉암 선생이다. 알려진 대로 조봉암 선생은 한국 사회운동사의 거물이다. 해방 직후 그와 친분을 쌓아왔던 신옹은 1957년 4월 평화통일정책에서 한독당과 동일한 노선을 표방한 진보당이 창당되자 재정위원장을 맡는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여생마저 통일운동에 바치겠다는 그는 어쩌면 송암(松岩)이란 자신의 호처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늘 푸른 소나무와 바위의 꿋꿋함,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권의 탄압은 계속됐다. 자유당에 입당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를 뿌리치자 다음엔 특무대로부터 재정위원장을 그만두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결국 이듬해 1월 세칭 ‘진보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고, 진보당 당수인 조봉암 선생은 간첩혐의로 1959년 사형을 당했다.

    신옹은 7개월 후 무죄로 풀려났지만, 새로 몸담은 진보당 역시 한독당에 이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해체되는 수난을 겪었다. 역사에 대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라지만, 신옹은 가끔 당시를 회고할 때면 조봉암 선생이 만일 대통령이 됐더라면 남북통일이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쨌든 신옹의 시련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시 혁신계 인사로 분류돼 그는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72년 7·4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신옹은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은 통행금지법과 같다”는 뼈있는 말을 남겼다. 통일운동을 독점해온 정부보다 먼저 통일운동을 벌이면 죄가 된다는 점을 야유한 것이다.

    1995년 11월 신옹은 김영삼 정권이 범민련 남측본부 간부 3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을 당시 구속대상에 포함됐으나 노령자라는 이유로 적부심사재판에서 10일 만에 석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반골의 삶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 때는 “박정희와 김일성이 만나야 통일이 된다”고 했다가, 전두환 정권 때는 “전두환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이라고 부르지 않으니 반통일분자 아니냐”고 주장했다가 정보당국에 의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신옹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1989년 남북학생 판문점회담 강행투쟁 등 통일과 관련된 거의 모든 시위나 집회에 참석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요즘도 집회 현장은 물론 통일운동을 하는 지인(知人)들의 경조사에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다. 그의 건강을 염려한 자녀들이 만류해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 통일을 향한 이런 신옹의 열정은 화려하다고 할 만한 그의 전력과 무관하지 않다.

    1948년부터 8년간 KNCC(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 최고지도부에서 재건위원 과 실행위원을 역임한 데 이어, 통일사회당 총무 및 정책심리의장(1961, 1965), 민추협 서울시 대표(1973), 민족통일촉진회 회장(1983), 전국민주민족운동연합(전민련) 공동의장(1990), 남·북·해외동포 조국통일범민족대회 예비회담 남측 대표단장 및 범민련 남측공동의장(1990), 민주개혁민주정부수립 국민회의 공동의장(1992), 6월 민주항쟁 10주년 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고문(1997), 백범 서거 50주기 추모공연위원회 위원장(1999),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금강산)’ 주석단 공동대표(2001), 자신의 뜻이 사후에도 지속될 수 있도록 여·야 국회의원 12인 및 학자들과 함께 설립한 사단법인 백범정신실천겨레연합 수석 공동대표(2001∼현재) 등을 과거에 맡았거나 현재 맡고 있다.

    53년 만의 방북

    격동기를 살아온 신옹이 북한 땅을 다시 밟는 감격을 누린 것은 지난해 6월이다. 금강산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발표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에 참석한 것이다. 1948년 연석회의 이후 53년 만의 일이다.

    그때의 소감은 어땠을까. “금강산에 첫발을 디디면서 이제 통일논의가 제대로 진전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신옹은 같은해 8월 평양에서 열린 ‘8·15 통일대축전’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그가 명예의장으로 있는 범민련은 김영삼 정권 당시 이적단체로 규정된 이래 아직까지도 그 굴레를 벗지 못했다. 신옹은 올해 6월 북한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로부터 ‘6·15공동선언 2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방북은 불허됐다. 이 때문에 그를 수발하는 홍원식씨가 대신 참석했다.

    신옹은 1999년 6월26일 평양에서 열린 백범 서거 50주기 추모모임에도 북한 민화협의 초청을 받았지만, 방북이 불허된 바 있다. 이적단체의 일원이란 점이 불허 사유였다.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통일운동을 탄압해온 역대 정권들은 정말 한심해. 게다가 썩어서 송장 냄새 풀풀 나는 국가보안법을 통일의 걸림돌로 방치해놓고 민간 차원의 통일논의를 가로막고 있으니 말이야. 남북을 주종관계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않으면 통일의 길은 요원해.”

    신옹은 지금의 김대중 정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김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난 이후 통일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잘된 일이지. 그러나 김대통령이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용기 있고 소신 있게 통일운동을 진행하지 못하는 점이 늘 아쉬워. 지난해만 해도 야권이 밀어붙여 국회에서 통과된 임동원 통일부 장관(당시)의 해임건의안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잖아?”

    임동원 전 장관이 장관직을 물러나게 됐을 때 신옹은 임장관의 퇴임 하루 전 그를 방문해 “우리 때문에 물러나게 돼 참 미안하게 됐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세상의 권위 따위에 맹종하지 않고 살아온 신옹이지만, 그도 자신의 가족한테만은 면목이 서지 않을 때가 많았다. 자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미안함 때문이다.

    신옹의 반려자 오향복(75) 여사는 남편과 사제간으로 만났다. 신옹이 충북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한때 음성 수봉국민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았었는데 이때의 제자들 중 한 명이 바로 오여사다.

    오여사는 신옹과 이웃하여 살았던 관계로 신옹의 집안일을 많이 도우며 자랐다. 신옹이 마카오로 망명한 후 신옹의 부인이 병으로 드러눕자 오여사는 병 간호를 했다. 병세가 깊어 그녀가 운명한 후에도 신옹의 4남1녀를 돕던 오여사는 해방 직전 귀국한 예전의 담임교사 신옹과 해후를 하게 됐고, 두 사람은 1945년 8월 결혼했다. 이때 신옹은 38세, 오여사는 그보다 20세 아래인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이후 4남1녀를 다시 두게 돼 신옹의 자녀는 모두 8남2녀다.

    핍박받은 통일운동가의 가족

    신옹의 자녀들은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아버지 때문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나로 인해 출세길이 막히고 출국금지를 당하고 갖은 고생을 해도 한번도 원망하지 않았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야.”

    두 내외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기자가 포즈를 부탁하자 오여사는 “남편이 한번도 이렇게 그윽하게 바라봐준 적이 없다”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신옹은 그런 오여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부잣집 따님으로 부러울 것 없었던 오여사는 신옹과 인생역정을 함께하며 고난의 삶을 살아왔다.

    올해로 32년째인 생활설계사(보험) 생활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도 아직 신옹이 ‘만년 현역’이기 때문이다. ‘늦봄 통일상’ 수상 후 상금 500만원 중 일부를 오여사에게 주었는데, 이는 신옹이 6·25 이후 아내에게 벌어다준(?) 유일한 돈이었다. 나머지 상금은 범민련과 통일연대 등 자신이 몸담은 단체에 헌금했다.

    신옹은 언뜻보면 70대 할아버지처럼 보인다.

    “건강 하나는 타고났던 것 같아. 90세까지 테니스를 즐겼으니. 꾸준히 운동하고 하루 두세 번씩 샤워해온 것이 비결인 것 같아.”

    50년 넘게 장로로 활동해온 독실한 기독교인인 신옹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하지만 마카오 망명시절부터 즐겼던 반주 한잔은 지금도 끼니때마다 빼놓지 않고 곁들인다. 식성 역시 왕성하다. 10년 전부터 끼고 있는 보청기도 그의 활동을 제한할 특별한 걸림돌은 못된다. 이런 그의 건강은 평생을 열심히 살아올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신옹이 90세 때인 1997년 출간한 회고록의 제목은 ‘가시밭길에서도 느끼는 행복’(해냄출판사)이다. 신옹은 가시밭길 같은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무엇보다도 사랑해왔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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