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국의 숨은 인권운동가 5

‘아동학대 근절 위한 가족모임’ 대표 송영옥씨

“성추행 당한 어린이의 절망을 아시나요”

  • 황일도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hamora@donga.com

‘아동학대 근절 위한 가족모임’ 대표 송영옥씨

3/4
가족모임은 피해 가족들의 경찰조사나 재판과정을 돕는 일도 벌이고 있다. 사건마다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송대표의 말. 아직 미비한 부분이 많은 한국의 법체계에 대해 분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생기면 우선 진술능력이 있는지 검사부터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게 안돼 있어요. 아이들에게도 어른과 똑같이 6하원칙에 따른 진술을 하도록 요구하죠. 이럴 때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신이 대신 나서서 진술하곤 합니다. 상황이 명확지 않아도 경찰이 원하는 형식에 끼워 맞추고요. 나중에 재판정에 서면 항상 이게 문제가 돼요. 당사자가 아니니까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고, 가해자측 변호사는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진술의 증거 능력을 무너뜨리는 거죠.”

꽃님이 사건이 진행되던 당시 송대표는 검사 앞에서 “나는 모른다. 단 우리아이 말은 믿어달라”고 반복했다고 말한다. 사건이 끝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것이 가장 정확한 대응이었다는 것. 가족모임을 돕고 있는 법조인들 역시 마찬가지 견해였다. 이후로 가족모임을 찾는 피해 어린이 엄마들에게는 “절대로 모르는 일을 대신 진술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몇월 몇일 몇시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이들의 증언에도 명백히 신뢰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예를 들어 장소에 대한 기억은 아주 구체적이다. 단순히 놀이방이 아니라 어느 탁자 옆에 있는 어느 의자에서였다는 것까지 기억할 정도라는 것. 또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내는 일관된 표정이나 제스처들도 신뢰할 만한 단서들이다. 그러나 사법부가 이러한 ‘맥락’을 증거로 인정해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아직 많지 않다는 것이 관련단체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아동 학대사건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은 아이들이 간혹 실제로 일어난 일과 자신의 상상을 섞어 말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본능적인 기제다. 누군가 자신을 구해주었다던가, 당시 주위에 맥락 없이 흩어져 있던 사물들을 의인화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어른들이 듣기에는 아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유치원 교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한 어린이는 “묶여있는 자신을 다른 선생님이 구해주었다”고 진술했다. 법정에서 아이가 지목한 선생님이 “풀어준 적이 없다”고 진술하자 법원은 아이의 말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사법부의 이해의 폭이 너무 좁아요. 아이들의 심리상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아이들이 당시 상황을 묘사해 그린 그림을 나중에 확인해 보면 사진처럼 정확해요. 아이들은 초콜릿 두 개 먹고 하나 먹었다고 거짓말은 합니다. 옆 아이 때려놓고 안 때렸다고 발뺌하기는 하죠. 그러나 없는 일을 ‘성폭행당했다’고 꾸며내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어요.”

어린이 성폭력 문제를 둘러싼 사법부에 대한 불만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경찰, 검찰, 판사 등 피해 어린이는 사건 조사과정에서 대여섯 차례에 걸쳐 폭행 당시의 상황을 진술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가 겪는 심리적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부모 역시 아이를 법정에 세워가면서까지 소송을 진행하는 일을 포기하는 원인이 된다.

관련 시민단체들이 형사소송법 상의 증거보전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검사, 피고인, 피의자 또는 변호인은 미리 증거를 보전하지 아니하면 그 증거를 사용하기 곤란한 사정이 있는 때에는 제1회 공판기일 전이라도 판사에게 압수 수색, 검증, 증인신문 또는 감정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의 주장은 피해자나 그 법정 대리인도 증거보전을 신청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한다는 것.

“아이를 염려하는 검사가 나서서 증거보전을 신청해주면 다행이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요. 대신 산부인과 의사나 소아정신과 의사 같은 전문가가 입회한 상태에서 아이의 상태와 진술을 확보하자는 겁니다. 녹취도 좋고 비디오 촬영도 좋지요. 그 증거능력을 인정하면 두번 세번 아이가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는 일은 막을 수 있으니까요.”

가해자 성기 길이 묻는 경찰

재작년 경기도 일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송대표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파트 베란다를 넘어 들어온 강도가 자고있던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 선희(가명)를 성폭행한 사건이었다.

사건 발생 며칠 뒤에 만난 아이는 송대표에게 “범인을 잡아달라”고 말했다. 마음 고생이 심했던 선희의 엄마는 얼굴 가득 새까맣게 기미가 껴서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송대표는 아이에게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소설을 읽어보라고 당부했다.

“‘네가 당한 일은 네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화산폭발이나 장마처럼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해서요. 책임이 있다면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나라와 사회와 어른들의 몫이겠죠. 선희에게 ‘너는 이제 가만히 있으면 된다. 어른들이 낫게 해주겠다’고 말해줬죠.”

송대표는 피해 어린이들을 만날 때면 자신의 딸 꽃님이를 데리고 나간다. 힘든 일을 겪었지만 이제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꽃님이를 보면서 아이들도 마음을 연다는 것. 선희의 얼굴에서 처음 희망을 본 것도 꽃님이와 함께였다.

선희의 경찰 조사과정에 송대표는 ‘이모라고 연막을 치고’ 입회했다. 지금은 많은 부분이 개선됐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경찰의 수사방식은 엉망이었다. 담당 형사는 아이 앞에 30cm자를 꺼내놓고 가해자 성기가 몇 cm였는지, 몇 분이나 폭행을 당했는지 물었다. 기가 막혀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송대표의 회고다.

“경찰서를 폭파시켜 버리고 싶더라고요. 소리를 질렀죠. ‘당신은 딸이 강간당할 때 길이가 얼마고 몇 분이나 당했나 생각하겠느냐’고요. 그랬더니 담당 형사가 바뀌더군요.”

수사가 진행되면서 아파트 앞뒤 동이 똑같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몇몇 피해 가족들은 조용히 이사 가버렸다. 범인은 현장에 거의 단서를 남기지 않을 만큼 지능범이었다. 경찰은 계속되는 추적 끝에 베란다 난간 안쪽에서 어렵사리 찾아낸 지문을 갖고 인근 주민들의 지문과 일일이 대조해 나갔다. 범인은 예상했던 대로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20대 남자였다. 범인을 지목하러 가는 선희와 함께 경찰서를 찾았다. 아이는 포승에 묶여있는 범인을 보고 박수를 쳤다. 아이의 원한과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원칙적으로 피해 어린이는 가급적 가해자와 대면하면 안됩니다. 법정에서 마주쳐도 쇼크를 받는 일이 허다하니까요. 그렇지만 결박당한 채 고개를 숙인 가해자를 보면 오히려 기뻐하죠.”

3/4
황일도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hamora@donga.com
목록 닫기

‘아동학대 근절 위한 가족모임’ 대표 송영옥씨

댓글 창 닫기

2023/0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