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8월호

태극전사 15인이 말하는 ‘6월의 붉은 전설’

“우리는 축구가 아니라 전쟁을 치렀다”

  • 김한석 < 스포츠서울 축구부 기자 > hans@sportsseoul.co.kr

    입력2004-09-01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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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대표선수들은 저마다 프로무대와 해외의 소속팀으로 복귀해 다시 땀을 흘리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2002년 6월 태극전사들이 연출한 월드컵 4강신화의 감동과 흥분은 축구팬들의 가슴에 여진으로 남아있다.

    경기장과 도심을 붉은 물결로 수놓으며 72년 월드컵사를 새로 쓴 태극전사들의 투혼은 다시금 그날의 명승부를 생각나게 한다. 그것은 다시 볼수록 더욱 선연하게 각인되는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다. 저마다 붉은 색 옷으로 치장하고 시청 광화문 공원 할 것 없이 수백만의 응원물결을 이루었던 축구팬들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들이 전혀 꾸밈 없어 보일 정도로 국민들 가슴에 벅찬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외신들이 21세기 세계축구의 지각변동이 한국에서 시작됐다고 타전할 만큼 한국팀의 경기는 짜릿했다. 1년 6개월 동안 히딩크 감독의 지휘 아래 강행군해온 태극전사들의 땀과 눈물을 보상받는 값진 승리였다. 그러나 태극전사들의 4강신화가 빛나는 것은 어떤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투지와 집념 때문이다. 그만큼 영광에 가려진 고비도 많았다. 한번 삐끗하면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냉정함을 잃지 않고 끝까지 목표를 이루려고 분투한 태극전사들의 집념과 도전정신은, 월드컵이 국민들에게 가져다준 최대의 긍지요, 자신감일 것이다.

    2002년 6월, 신화를 창조한 영광의 태극전사들은 어떤 느낌에 빠져들었을까. 그들이 체험한 환희와 탄식, 영광과 좌절을 되새겨본다면 ‘오, 필승 코리아’의 함성과 ‘대~한민국’의 엇박자 메아리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마지막 키커 홍명보



    2002한일월드컵 MVP 결선투표에서 3위를 기록하며 아시아선수로는 최초로 ‘브론즈볼’수상의 영광을 차지한 ‘아시아의 베켄바워’ 홍명보(33·포항).

    그는 유상철과 더불어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A매치 134회 출전으로 한국 최다 출전기록도 갖고 있는 홍명보,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 대표팀 막내로 출전한 뒤 4회 연속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으며 16게임 연속 출장한 것도 아시아 최다기록이다.

    그런 화려한 경력으로 사실상 마지막 월드컵 무대에서 그가 맛본 최고 환희는 과연 어떤 순간이었을까.

    6월22일 스페인과의 8강전. 연장까지 가는 120분 사투에도 0의 행진을 깨지 못하고 접어든 승부차기. 홍명보는 마지막 다섯번째 키커로 나섰다. 이운재가 스페인의 네번째 키커 호아킨의 공을 막아냈기에 그가 성공시키면 4강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숨을 죽였다. 이운재의 선방에 얼싸안고 환호하던 동료들도 다시 숨을 고르고 어깨동무했다. 히딩크 감독은 냉정한 눈초리로 홍명보의 발끝을 주시했다.

    정적이 깨졌다. 골네트가 출렁거리자 빛고을의 붉은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지구촌이 경악하는 순간이었다.

    어깨동무를 한 채 깍지까지 끼었던 태극전사들은 손을 풀고 모두들 홍명보에게 달려갔다. 양손을 펼치고 벤치로 달려가는 홍명보의 환호작약. 그 표정에는 그동안 태극전사들이 흘린 피와 땀, 눈물이 한꺼번에 오버랩됐다. 그리고 동료들과 부둥켜안고 엎어지고 넘어졌다.

    “내 인생에 월드컵 4강이란 게 있었나 없었나, 정말 기뻤다.”

    평소 웃음이 많지 않던 홍명보지만, 이날만큼은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을 지나가면서 환하게 웃었다. 꿈에도 그려보지 못했던 월드컵 4강신화가 그의 발끝에서 완성됐던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홍명보를 신뢰했던 모양이다. 그는 스페인전을 하루 앞둔 마무리 훈련에서 “마지막 승부차기는 명보가 차라”고 지시했다.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있을 때 히딩크가 길러낸 제자가 스페인 대표팀의 수문장 카시야스다. 히딩크의 첫째 지시. “카시야스가 왼손잡이이니 모두 오른쪽으로 차라.” 히딩크는 또 “카시야스가 왼손잡이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넘어질 때는 손으로 해결하고, 왼쪽은 왼발을 뻗어 커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되도록 허리 높이 이상으로 차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한치도 틀리지 않은 분석에 홍명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 잊지 못할 순간은 또 있었다.

    “폴란드와의 첫 경기에서 선홍이가 첫 골을 넣었을 때였다. 16강전에 올라갈 수 있다는 느낌이 팍 왔다. 그리고 2대0으로 끝나는 순간 멍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잠시 후 후배들이 달려왔다. ‘진짜 이겼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한동안 닥치는 대로 마구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그라운드를 나오자마자 전화기를 찾았다. 아내(조수미씨)에게 기쁨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전화는 통화중. 계속 버튼을 눌러댔다. 버스에 탄 뒤에야 터졌다. “나, 이겼어!”

    미국전에서 안정환이 동점골을 넣었을 때는 속이 후련했다. 미국전 전날 훈련이 끝난 뒤 선수들에게 농담 한마디 던진 게 현실로 나타날 줄이야. “내일 골 넣는 사람이 오노 골 세리머니를 하는 게 어때?”

    이날 저녁 김원동 프로축구연맹 사무국장으로부터 “오노 골 세리머니를 하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얘기를 듣고는 귀가 번쩍했다. 스케이트를 타는 안정환, 그 옆에서 어색하게나마 뻔뻔스런 오노의 흉내를 내는 이천수를 멀리서 바라보며 목이 터져라 소리를 내질렀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만큼 속이 후련한 적은 없었다.”

    기억하기 싫은 순간은 터키와의 3·4위전.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는 긴장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휘슬이 울린 지 불과 11초. 유상철이 건네준 볼을 잡아서 처리하려다 볼에 미끄러졌다. 순간 달려들던 터키의 장신 스트라이커 쉬퀴르가 휙 낚아채더니 골문 안으로 차넣었다. 1962년 칠레월드컵에서 체코의 마세크가 멕시코전에서 15초 만에 명중시킨 월드컵 최단시간 골기록을 경신하는 빌미를 제공했으니, 허망할 수밖에. 그것도 볼에 미끄러지는 어이없는 실수로….

    그는 경기 뒤 “절정의 순간에서 떠날 수 있어 홀가분하지만, 집중력이 떨어져 골을 허용해 아쉽다. 이제는 후배들이 이 자리를 대신할 때다”라고 마지막으로 아픈 기억을 되새겼다.

    8강전까지 5경기에서 2점만 내준 철벽 방어로 최고 수문장에게 주어지는 ‘야신상’ 후보에 올랐던 이운재(29·수원삼성).

    그에게 가장 숨가쁜 순간은 스페인전 승부차기. 네번째 키커는 이날 경기에서 120분 동안 한국 왼쪽 공간을 열심히 파고들던 눈엣가시 호아킨이었다. 세 번 모두 다른 방향으로 떴던 터라 장갑에서 땀이 배어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연장전까지 모두 끝나고 나니 코칭스태프에서 뛰는 방향을 정해주겠다고 했다. 골문으로 갈 때 히딩크 감독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웃으면서 뭐라고 얘기하는 게 TV에 비쳤을 것이다. 방향을 알려주겠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는 과감히 ‘마이웨이’를 외쳤다. “내 판단으로 선택해 방향을 잡고 뛰어보겠다고 말했다.”

    호아킨이 스타트를 끊었다. 이운재는 오른쪽으로 움찔했지만 움직이진 않았다. 그 순간 달려오던 호아킨이 멈칫했다. “그때 호아킨의 눈과 마주쳤다. 템포를 빼앗았다. 왼쪽으로 한 발짝 나오면서 뛰었고, 볼이 내 손에 걸려들었다. 이걸로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명보형이 마지막 다섯번째 킥만 넣으면 되니까.”

    이운재는 한번도 동료들의 킥을 보지 않았다. 번번이 왼쪽 코너플래그 쪽으로 걸어가면서 등을 돌렸다. “어렸을 때부터 승부차기 때는 우리편 킥은 보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긴장되기 때문이다.”

    이운재도 4강신화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마지막 순간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홍명보가 킥하는 찰나, 고개가 휙 돌아갔고 이내 네트가 출렁거리자 두 손을 잡고 치켜올렸다.

    그러나 정작 이운재는 골뒤풀이 퍼레이드를 따라가지 못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쉬고 싶었다. 낮 경기였고 정신적으로도 가장 힘든 경기여서 나까지 명보형을 쫓아가면서 기쁨을 나눌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6월14일은 이운재가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98프랑스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김병지에게 밀려 탈락했던 이운재. 그는 98프랑스월드컵 첫 경기인 멕시코전이 열리던 6월13일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도 못 가고 밤 늦은 피로연에서 1대3으로 역전패하는 멕시코전을 시청했다. “TV로 보는데 정말 만감이 교차했다. 아내에게 ‘4년 뒤엔 꼭 월드컵 골문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 뒤 꼭 4년이 지난 6월14일 포르투갈과 16강을 결정짓는 마지막 결전을 치렀다. 이번 대회에선 김병지를 제치고 주전 장갑을 낀 이운재. 무실점 방어로 비원의 16강 진출의 꿈을 이루었으니 꼭 4년 만에 한을 푼 것이다. 포르투갈전이 끝나고 아내(김현주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마워.” 4년 전 아내와 했던 눈물의 약속을 지켜낸 남편 이운재로선 평생 잊지 못할 날이었다.

    아찔했던 순간도 두 번이나 있었다. 이탈리아전 연장 전반, 수비에 가담했던 설기현의 백패스 실수로 가투소에게 볼을 뺏겨 1대1 위기를 맞았다.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슛을 가까스로 골대 위로 펀칭해내고 나서 수비수들에게 고함쳤다. “정신차려.” 스페인전에서 모리엔테스의 슛이 골문 구석으로 날아가다 왼쪽 골대를 맞고 나왔던 연장 후반에도 ‘설마, 설마…’ 하며 마음이 콩알만해졌던 이운재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아쉬웠던 때는 독일과의 준결승전. 후반 30분 발라크의 왼발슛을 막았다. 그러나 바로 발맞고 튀어나간 볼을 오른발로 다시 갖다대는 데 속수무책이었다. 넘어지자마자 다시 일어섰지만 맞받아 때린 발라크의 2차 슈팅이 워낙 빨랐다. “허망했다. 화가 난다고 할까, 안타깝다고 할까.” 결승 문턱에서 이 실점 하나로 ‘요코하마까지 가자’는 맹세가 무너졌으니….

    울면서 뛴 안정환

    실패와 좌절의 순간을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안정환, 이을용, 설기현.

    지옥과 천당을 오간 태극전사 중에서 가장 극적으로 명예를 회복한 선수는 아무래도 안정환(26·이탈리아 페루자)이 아닐까.

    이탈리아와의 16강전. 얼마 만에 선발출격이었던가. 이번 월드컵에서 스타팅 라인업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들자 자못 흥분한 안정환. 그러나 경기시작 4분 만에 찬스이자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설기현이 넘어지면서 얻어낸 귀중한 페널티킥. 이탈리아 선수들이 세리에A에서 같이 뛰었던 자신을 가장 경계했다는 얘기도 들었던 터라 꼭 성공시켜야 했다. 페루자에서 2년간 거의 벤치신세를 면치 못했던 한도 풀어야 했다.

    볼을 11m 지점에 갖다놓고 머리를 매만졌다. 후~후~, 심호흡도 했다. 아내에게 행운을 빌어달라며 세 번이나 반지에 입을 맞춘 뒤 달려들었다. 오른발 슛. 그러나 이탈리아 최고 GK라는 부폰의 다이빙에 킥이 걸려들었다. 허탈했다. 뒤돌아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을 잊었다. 당혹감에 휩싸였다. 가장 쓰라린 악몽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다시 찾아들었다. 연장 후반 12분. 3분 뒤면 피말리는 승부차기가 기다리고 있다. 기회는 소리없이 찾아왔다. 왼쪽에서 이천수가 백패스로 내준 볼을 이영표가 페널티지역 왼쪽 모서리 바깥에서 반대편으로 감아올렸다. 안정환은 솟구쳤다. 앞에선 이탈리아 최고의 수비수 말디니가 뛰어올랐다. 그러나 타이밍이 안정환에게 딱 걸렸다. 미국전에 이어 다시 헤딩골이었다. 오른쪽 골문으로 굴러가는 골든골을 확인한 뒤 코너플래그로 달려갔다. 가장 가슴 벅찬 환희의 순간이었다.

    “골 넣은 뒤에 아무 생각도 안들었다. 멍한 상태였다. 정신을 잃은 것만 같았다. 쓰러져 뒤엉키고 기쁨을 나눈 뒤 벤치 쪽으로 가는데 박항서 코치와 얼굴을 맞대고 포옹하면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제서 눈물이 흘렀다.”

    사실 그는 울면서 113분을 뛰었다. “페널티킥을 실축한 뒤 속으로 울면서 뛰었다. 눈물만 안 났을 뿐이지. 감독님이 끝까지 안 빼고 믿어주었던 것에 깊이 감사한다. 아마도 중간에 교체됐더라면 평생 가슴에 응어리를 안고 살 뻔했다.”

    미국전에서 동점골을 넣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었다.

    “미국전에서도 골 넣고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면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볼이 이마에 와서 맞아 골이 들어간지 몰랐을 거라는 얘기는 사실과 다르다. 볼이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봤다. 단지 볼이 GK한테 가리는 바람에 굴러들어간 걸 확인하고자 두리번거렸을 뿐이다.”

    미국전 헤딩골 때는 얼떨떨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전 헤딩골에는 정신을 잃었으면서도 자신의 실책을 만회한 데 대한 기쁨으로 눈물이 흘렀던 것이다. 그 어느 소설가가 각본 없는 희비의 순간을 그토록 절묘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11m에서 맞은 잔인한 악몽은 이을용(27·부천SK)이 먼저였다.

    주전 이영표가 첫 경기 직전 부상당해 폴란드전에서 왼쪽 미드필더로 출전하게 된 행운은 불운의 전주곡이었다. 황선홍의 선취 결승골을 어시스트한 것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두번째 선발출전한 미국전에서 악몽의 덫에 걸려들었다. 전반 39분 찢어진 이마에 붕대를 감은 황선홍의 투혼으로 귀중한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이때 주장 홍명보는 이천수에게 킥을 명했다. 그러나 갑자기 벤치에서 작전변경 신호가 떨어졌다.

    “이을용으로 바꿔라.” 히딩크 감독의 감(感)이었다.

    왼발 인사이드킥. 골문 왼쪽 구석을 겨냥해 밀어찼다. 그러나 이을용의 왼발킥을 국내팬들에게 ‘미국의 사리체프’로 불린 프리델이 육중한 몸을 던져 쳐냈다. 그것도 한 손도 아닌 두 손으로 쳐냈으니 미리 방향을 읽지 않고서야 힘든 선방이었다. 김남일이 문전으로 달려가 발을 갖다댔지만 왼쪽 골문을 비껴났다. 순간 쓰러질 뻔했다. 그라운드에 주저앉은 이을용은 하늘만 응시했다.

    황선홍은 “누구나 실축할 수 있다. 실수만 탓할 상황이 아니다. 남은 시간 동안 정상적으로 플레이하는 게 중요하다”며 폴란드전에서 자신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한 이을용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힘을 얻었다.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한때 웨이터 생활을 하며 방황하기도 했으나 다시 축구로 일어서지 않았던가. 소리없이 뛰어다녔다. 수비 때는 누구보다 먼저 몸을 던졌고, 측면을 돌파할 때는 이를 악물고 한 발이라도 더 뛰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데….

    “큰 경기에서 실수하면 하늘이 노래지고 자기 플레이를 할 수 없지만, 이날만은 곧 태어날 아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명예회복의 순간이 찾아왔다. 후반 33분 센터서클 왼쪽을 치고 들어가다 미국 도노번에게 태클을 당해 자신이 직접 프리킥을 얻어냈다. 반대편 골문을 응시했다. 자신이 직접 왼발로 힘껏 감아찼다. 반대편 골마우스에서 안정환이 솟구쳤다. 볼은 안정환의 옆 이마를 맞고 골문 오른쪽으로 흘러갔다. 2게임 연속 어시스트. 자신의 PK 실축으로 꺼져가던 16강의 불씨를 되살려낸 이을용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경기가 이렇게 길었을까. 지옥에서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을 순간은 터키와의 3·4위전. 0대1로 뒤지던 전반 9분 아크 오른쪽에서 얻은 프리킥 찬스. 히딩크는 팀에서 유일하게 왼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이을용을 믿었다. 어김없었다.

    왼발 인사이드로 감아찬 볼은 한 줄로 늘어선 터키의 수비벽을 훌쩍 넘어 오른쪽 골포스트 상단 모퉁이 안쪽을 맞고 네트에 꽂혔다. 히딩크 군단에서는 처음으로 프리킥 골이 명중한 순간이었다. 태극전사 중에서 가장 높은 공격포인트였다.

    기적을 만든 설기현의 슛

    히딩크가 킬러로 기대한 선수는 설기현(23·벨기에 안더레흐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고개 숙인 비탄의 순간이 많았다. 미국전에서 날린 4개의 슈팅 중에서 골문으로 날아간 유효슈팅이 3개로 가장 많은 찬스를 맞았지만, 모두 불발탄이 돼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중 경기 시작 2분 만에 오른쪽에서 박지성의 패스를 받아 황선홍이 골마우스 왼쪽으로 넘겨준 패스를 몸을 던지다시피 해서 날린 왼발 발리슛이 크로스바를 살짝 넘어가 땅을 쳤다. 전반 18분에는 유상철의 기습패스를 이어받아 문전 왼쪽을 쏜살같이 돌파했지만 두 번이나 머뭇거리다 슈팅을 날리는 바람에 GK 몸에 걸린 게 마음에 계속 걸렸다. 이 중에서 한 골만이라도 터져주었다면 16강행이 일찌감치 결정됐을 것을….

    “미국전에서 골 기회를 놓쳤을 때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길 수 있던 경기를 비긴 책임이 내게 있다는 생각에서다.”

    누구보다도 속앓이가 컸던 설기현. 경기가 끝난 뒤 버스를 타려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공동취재구역을 지나칠 때 기자들이 한마디만 해달라고 간청하다시피 했건만 고개를 숙인 채 총총히 빠져나갔다.

    좌충우돌. 측면에서 전방으로만 돌파하려고 고집하는 설기현을 두고 축구팬들은 여간 불만이 많지 않았나 보다. 왜 설기현을 빼지 않느냐는 원망은 이탈리아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설기현은 히딩크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이었다. 이탈리아에 0대1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던 후반 43분. 2분 뒤면 태극전사들의 투혼도 16강진출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

    페널티지역 오른쪽 바깥에서 이탈리아 주장 말디니가 황선홍에게 태클을 걸자 황선홍은 송종국에게 재빠르게 백패스. 다시 연결된 횡패스를 이어받은 박지성은 황선홍에게 월패스를 찔러주었다. 수비를 등진 채 황선홍은 반대편 왼쪽 골문으로 긴 패스를 내주었다. 순간 볼은 파누치의 왼쪽 무릎을 맞고 튀어올랐다가 다시 떨어졌다. 설기현은 주인 없는 볼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주저함이 없었다. 왼발로 오른쪽 골문을 향해 땅볼슛을 날렸고 네트가 출렁였다. 4700만 국민의 가슴에도 감격의 파문이 출렁거렸다. 많은 외신들이 이번 월드컵 최고의 명승부로 한국 대 이탈리아전을 꼽은 것은 설기현의 극적인 막판 동점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거의 끝나는 상황이었다. 그대로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관중들이 환호했을 때 비로소 골이구나 하고 실감이 날 정도였다.”

    그는 감격의 순간 어머니를 생각했다. “볼이 골네트를 가른 뒤 잠시 귀가 멍해졌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달렸다. 4만여 붉은 관중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이 그 많은 관중 사이에서 선명했다.”

    아들을 위해 강릉 삼덕사 절에서 불공을 드리는 어머니. 어린 나이에 해외에 나가 고생한다며 눈물을 훔치시곤 했던 어머니. 아파트 공사장에서 10여년간 일하며 어렵게 4형제를 키워온 자랑스런 어머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대표팀 막내 박지성(21·일본 교토퍼플상가)에게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포르투갈전 후반 25분. 수원에서는 폴란드가 미국을 일찌감치 2골차로 리드하고 있어서 비기기만 해도 16강행이 결정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박지성의 젊은 피는 갈수록 뜨거워졌다. 이영표가 왼쪽에서 길게 넘겨준 볼을 골마우스 오른쪽에서 가슴으로 트래핑한 박지성. 첫번째 터치가 약간 길었지만 오른발을 쭉 뻗어 기가 막히게 탄력을 죽였다. 수비에 가담한 세르지우 콘세이상이 다가섰지만 휙 볼을 접는 박지성의 센스에 휘청했다. 순간 박지성의 왼발슛이 폭발했다. 슈팅각도는 매우 좁았으나 워낙 볼이 강해 GK 바이아의 가랑이를 맞고 골라인을 통과했다. 16강 자축포였다.

    최주영 물리치료사는 “박지성이 미국전에서 다친 왼발로 결승골을 터뜨렸을 때가 가장 기뻤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경기 하루 전에야 훈련에 나선 저를 투입해주어 감사한다. 골이 들어간 순간 무의식적으로 벤치를 바라보는데, 감독님이 기쁨에 겨워 나에게 손짓을 했다. 그래서 달려가 가슴으로 뛰어오르며 깊게 포옹했다.”

    미국전에서 발목을 심하게 접질려 퉁퉁 부어 올랐던 박지성은 의학상식으로 볼 때 4일 만에 열린 포르투갈전에서 출전할 상황이 아니었다. 부기가 심하다 보니 다친 뒤 이틀이 지나서야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코칭스태프조차 그의 비중이 크기는 하지만 포르투갈전 기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그가 절대 필요했다. 감독이 직접 의료진에게 특별관리 지시를 내렸고, 결국 경기 당일 오전까지 컨디션을 체크한 뒤 전격적으로 경기에 투입됐던 것이다.

    히딩크는 “이날 경기에서 박지성이 골을 넣은 후 내게 달려들었던 것이 뉴스가 됐다는 걸 안다. 나는 평소 선수들을 개인별로 따로 만나지 않는다. 나의 팀 관리 노하우다. 선수들을 따로 만나면 내가 누구만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게 마련이고 팀워크를 해치게 된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박지성을 꽉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넣은 골은 유럽 프로리그에서도 보기 힘든 세계 톱클래스의 골이었다.” 태극전사들이 기록한 8골 중 네티즌이 최고 멋진 골로 꼽은 황금골이다.

    아쉬웠던 순간도 있다. 독일전 후반 46분. 태극전사의 진군이 게르만 전차군단을 뚫지 못하고 0대1로 분패했을 때다. 설기현이 왼쪽에서 횡패스를 찔러주자 아크 쪽으로 달려들던 박지성이 오른발을 갖다댔다. 그러나 볼은 오른쪽 골문을 훨씬 벗어나 허공으로 날아가버렸다. “발을 갖다대는데 링케가 태클을 넣었다. 순간 움찔할 수밖에 없어 완전한 슈팅을 날리지 못한 게 아쉽다.” 만약 발을 제대로 갖다댔더라면 동점골을 명중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축구선수에게는 태클할 때 슈팅하는 것이야말로 선수생명을 끊을 수 있는 자살행위에 다름없다는 걸 몸이 반사적으로 말해주었기에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이영표(25·안양LG)는 어쩌면 월드컵의 영광을 함께 맛보지 못할 뻔했다.

    폴란드와의 첫 결전을 이틀 앞둔 6월2일. 경주시민운동장에서 마무리 훈련을 하다가 그라운드에 나뒹굴었다. 자체경기를 하다 차두리의 발에 채였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겠지” 하고 별 부상이 아닌 줄 알았다.

    그러나 다음날 초음파 검사 후 의사는 “제가 본 환자 중 두번째로 심하군요” 하고 말했다. 왼쪽 종아리를 지탱하는 근육 중 하나가 파열됐다는 것이다. 6주 진단. 절망이었다. 아무리 빨라도 3주 후에나 훈련할 수 있다는 대목에선 더욱 좌절했다. 밥맛도 없고 잠도 오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였지만 순간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1년 반 애타게 기도하면서 월드컵을 준비했기에. 그러나 차두리가 밉지는 않았다. 주위에 얘기했다. “내가 더 조심했어야 했다.”

    절망의 순간. 그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주위의 모든 지인들이 이영표를 위해 기도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부상 이튿날은 목발을 짚고서도 걷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회복 속도가 빨랐다. 불과 1주일 만에 뛸 수 있었고 12일부터는 정상 훈련이 가능했다.

    그는 마지막 터키전이 끝난 뒤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모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어시스트로는 안 잡혔지만 포르투갈전 박지성의 결승골을 엮어냈고, 이탈리아전에선 안정환의 골든골을 어시스트해낸 활약에 감사 기도를 드렸다. 무엇보다 어쩌면 월드컵 엔트리를 바꿔야 할 상황으로 치달은 시련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준 하느님께.

    “배트맨 김태영입니다”

    98프랑스월드컵 마지막 벨기에전서 이임생이 붕대투혼을 불살라 월드컵 참패에도 불구하고 국내프로축구의 열기를 지핀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4년 뒤엔 김태영(32·전남 드래곤즈)의 ‘마스크 투혼’이 월드컵 그라운드에 화제를 뿌렸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이탈리아와의 16강전. 경기시작 7분 만에 김태영은 그라운드에 나뒹굴었다. 파누치의 긴 센터링을 몸을 던져 헤딩으로 따내려는 순간, 뒤늦게 솟구친 비에리가 착지하면서 왼팔꿈치로 김태영의 코를 가격한 것이다. 헤비급 복서 출신한테 한방 맞았으니. 악 소리는 응원함성에 묻혀버렸지만, 그라운드에 쓰러진 김태영은 거의 기절 상태였다. 그러나 ‘아파치’란 별명처럼 승부근성이 강하기로 소문난 그로서는 아픈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코뼈가 부러졌을 때는 장난이 아니었다. 솔직히 너무 아팠다. 선수생활하면서 처음 코가 깨진 것이다. 아무리 정신력이 중요하다지만 코가 내려앉았는데 정신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계속 코에만 신경쓰고 있다가는 경기를 망치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집중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나니 정말 눈물나도록 아팠다”고 했다. 경기 뒤 응급실로 가 수술을 받았는데 밤새도록 얼음찜질하느라 잠 한숨 못잤다.

    지독한 투혼이었다. 김태영은 스페인전에도, 독일전에도 나섰다. 달라진 건 마스크를 썼다는 것 뿐이었다. 처음에 일본에서 공수해온 얼굴보호대는 붉은 색, 검은 색 두 종류였다. 붉은 물결이 넘실대는 국민들의 성원을 몸으로 느꼈기에 붉은 색을 택했다. 그 붉은 투혼으로 한국이 4강까지 질주할 수 있었고, 김태영은 “내 한 몸 부서져라 뛰어 4강진출에 힘이 됐다면 그보다 큰 보람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던 날 “배트맨 김태영입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했을 때 그토록 박수소리가 컸던 것은 그의 붉은 투혼에 대한 찬사였다.

    배트맨에게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미국전이었다. 전반 24분 오프사이드 작전을 펴며 나올 때 전체적으로 최종 수비라인이 맞지 않아 매시스를 놓쳐 선취골을 내주었다. 김태영 자신이 실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수비조직이 한순간에 무너진 데 대한 자탄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김남일(25·전남 드래곤즈)도 저승사자 같은 투혼으로 국민들, 특히 여성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월드컵 뒤 ‘김남일 신드롬’으로까지 번진 그의 투혼은 이탈리아전부터 시작됐다. 고통스런 순간이 거듭 이어졌다. 후반 20분께 참브로타와 충돌하면서 왼쪽 발목을 접질려 3분 뒤에 절뚝거리며 교체돼 나왔다. 그러나 4일 뒤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 전반 12분 만에 이번엔 로메로에게 태클을 당해 쓰러졌다. 그러나 다친 발목을 끌고 20분을 더 뛰었다. 어떻게 뛰었는지도 모른다.

    온 나라가 4강진출의 감격의 물결에 뒤덮인 날 김남일은 서울행 비행기를 타면서 동료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결국 히딩크가 상대 플레이메이커를 꽁꽁 묶는다고 해서 ‘진공청소기’란 별명까지 붙여준 김남일이 빠지면서 독일전 터키전에서 허리진에 구멍이 났고 신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김남일이 뛰었더라면…. 국민들이 가장 안쓰럽게 생각한 선수가 바로 김남일이었다.

    고통스러울수록 부모님이 생각났다. “부모님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도 없었을 것이다.”

    부평고 1년 시절 선배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동료들과 단체로 팀을 이탈, 8개월 동안 가출해 웨이터 생활까지 했던 그였다. 당시 김남일은 아버지의 눈물을 보고 다시 축구화를 신었다. 지난해 8월 히딩크호에 발탁됐을 때 “땜질용 아니냐”는 눈총을 받아 또 한번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미스터 압박’이란 애칭이 붙을 정도로 그의 강한 프레싱과 터프한 수비는 한국이 잇따라 유럽의 거함들을 격침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랬기에 김남일에겐 이번 월드컵이 더욱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히딩크의 회고. “처음 만났을 때 김남일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주 수줍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대에 대해 존경심을 유지하면서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게 됐다. 온화하고 겸손하면서도 확실한 태도를 가진 성격으로 성장했다. 신체적으로 전술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한국의 미드필드엔 네덜란드의 다비즈 같은 ‘싸움닭’이 없다고 걱정했던 히딩크로선 월드컵 직전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지네딘 지단까지 막아내는 그의 수비능력을 믿고 월드컵의 목표를 계속 높여왔던 것이다. 김남일은 심한 파울을 하고서도 웃는 낯으로 쓰러진 선수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어김없이 다시 더 강한 파울로 상대가 자신이 책임진 수비공간을 뚫고 나가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한다.

    팬들이 김남일에게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순간이 있었다.

    미국전에서 전반 이을용이 페널티킥을 실축한 뒤 문전을 쇄도하던 김남일이 미국선수들과 충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내뱉은 육두문자가 생생하게 TV에 비쳐졌다. 9명의 미국선수들을 혼자 노려보는 눈빛에 광기가 흘렀다. 이름하여 ‘9대1 맞짱 사건.’ 욱하는 성격만큼 말투도 거침이 없다. 4강진출 뒤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뭐냐는 질문에 “얘기해도 돼요”라며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나이트요”라고 답했다. 담백한 표정에 소년 같은 장난기가 귀엽다며 여성들은 또 다시 비명을 질렀다. 서글서글한 외모에 터프하고 꾸밈없는 언행으로 여성 팬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는 ‘깜짝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훈장을 받을 때 “나이트를 가고 싶은 김남일입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순간 어떤 여학생팬들은 거의 실신 직전까지 갔다는 후문이다.

    송종국과 피구의 명승부

    서른이 넘어 진짜 태극마크를 단 ‘늦깎이’ 최진철(31·전북현대)도 찢기고 터질수록 화수분처럼 뿜어나는 투지로 그라운드에 태극혼을 아로새겼다.

    사투의 순간. 이탈리아전이 끝나고 그는 탈진했다. “나만 열심히 뛴 것도 아닌데 호들갑을 떤 것 같아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내가 몸이 약해서 그런 것뿐인데….”

    그가 회고하는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비에리에게 밀려 선취골을 내줬을 때다. 코너킥 때 1차 위치선정은 내가 좋았다. 그런데 어깨로 밀치며 문전으로 들어오는데 내가 휙 밀렸다. 왼손으로 비에리의 유니폼을 잡지 않았다면 넘어졌을 것이다. 다행히도 유니폼을 잡고 다시 점프했지만 한 템포 늦어 비에리에게 헤딩골을 내줬다. 안타까웠다.”

    히딩크가 강조하는 상대에 대한 ‘존경’도 잊지 않는다. “비에리는 정말 힘들었다. 헤비급 복서답게 힘도 좋고 빨라서 먼저 내가 좋은 위치를 차지하더라도 힘으로 밀고 들어왔다. 우리한테 패한 뒤 숙소에서 문짝을 부쉈다고 하는데 ‘성격이 그래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경기전 미팅 때 히딩크 감독이 ‘왼발을 잘 쓴다. 다혈질이니까 약을 올리면 페이스가 흐트러질 것이다. 냉정하게 대처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최선을 다해 막았고, 승리했기에 모든 것이 좋았다.”

    가장 보람된 순간은 “고공공격이 폭발적인 독일전에서 여러 번 위기를 막아냈을 때다. 이탈리아 스페인을 꺾으면서 동료들이나, 내 자신이나 워낙 많이 뛰어 체력이 바닥나고 힘들었지만 헤딩을 막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래서 헤딩골을 먹지 않은 게 보람이라면 보람이다.”

    노장 수비수들과 김남일의 부상투혼은 신구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단면이다. 그런 면에서 세대교체의 성공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7경기에 교체없이 출전한 유일한 필드플레이어 송종국(23·부산 아이콘스)은 한국축구의 차세대 기둥으로 떠올랐다. 그는 한국팀이 유종의 미를 거두는 데도 크게 공헌했다.

    “터키전에서 한국대표팀의 마지막 골을 성공시켰다. 체력이 바닥나 가장 힘든 상태에서 선전했기에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터키전 후반 전광판이 꺼진 지도 3분이나 흘렀다. 패하더라도 1대3이냐, 2대3이냐는 태극전사가 일으킨 4강 폭풍의 대미를 장식하는 데 큰 차이가 있었다. 송종국은 필사적으로 터키문전으로 달려들어 슈팅기회만 노렸다. 오른발 중거리슛. 볼은 문전에 서있던 차두리의 엉덩이를 비껴 네트에 빨려들었다. 7경기를 무교체 출장한 철각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중거리포였다. 이 한방으로 히딩크호는 2대3 펠레스코어로 지구촌 팬들에게 멋있는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다.

    송종국에겐 피구와의 맞승부가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포르투갈전에서 세계정상의 플레이메이커 루이스 피구를 맨투맨 수비로 꽁꽁 묶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5월 서귀포 전지훈련 때 친구를 통해 피구의 경기 비디오테이프를 구했다. 팀 훈련 때마다 유상철 이천수 등과 함께 전문 프리키커로서 킥 훈련에 집중했던 때다. 그는 키커를 맡기 위해 피구를 벤치마킹하고자 했고, 급히 ‘프리킥의 달인’ 피구의 비디오테이프를 구해 반복 시청하면서 ‘피구 배우기’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프리킥뿐만이 아니었다. 피구의 경기 장면을 되풀이해서 보다보니 개인기와 빠른 측면 돌파에 일정한 원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들고 나는 방향이 일정했으며 드리블 때의 습관도 몇 가지 유형이 있었다. 또한 피구가 집중 마크할 경우 특유의 플레이가 전혀 살아나지 않는다는 약점도 알아채게 됐다. 결국 송종국은 프리킥을 배우려다 피구의 약점까지 깨우치게 된 셈이다.

    “처음에 상당히 긴장했지만 막상 붙어보니 비디오로 봤던 것처럼 플레이해 막기가 수월했다. 더욱이 피구는 전반에 나 정도는 우습게 제칠 수 있다는 듯 느슨한 플레이로 일관해 상대하기가 예상외로 편했다.”

    비록 골은 신고하지 못했지만, 2006독일월드컵을 빛낼 ‘젊은 피’의 활약도 돋보였다.

    팬들은 이제 차두리(22·고려대)하면 번개 같은 오버헤드슛을 떠올린다.

    이탈리아전 후반 전광판이 꺼진 뒤 1분. ‘차붐 주니어’ 차두리는 아버지보다 더 빨리 뛰었다. 설기현의 동점골이 터진 지 3분. 이탈리아 선수들은 혼비백산했다. 이 혼란을 틈타 차두리의 돌파는 빛이 났다. 오른쪽 터치라인을 타고 드리블해가는 차두리의 기세를 막지 못해 이탈리아는 코너킥을 내주는 것으로 급한 불을 껐다. 그러나 이어진 볼이 유상철의 머리에 맞고 문전으로 흘러들자 이탈리아 문전을 등지고 섰던 차두리가 갑자기 공중으로 솟구쳤다. 전광석화처럼 오른발 오버헤드킥으로 벼락 슛을 날렸다.

    그러나 너무 정직했다. 너무도 잘 맞았기에 공은 GK 부폰의 품에 안겨버렸다. 조금만 빗맞았더라면…. 방송해설을 하던 아버지 차범근 전대표팀 감독은 할 말을 잊고 말았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골사냥을 대신해 명중시키겠다고 약속했던 두리보다 정작 아쉬움에 탄성을 내질렀던 쪽은 아버지였다. 부자의 탄식이 동시에 터진 순간이었다.

    이천수(21·울산현대)는 “독일전이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독일과의 준결승 전반 8분. 이천수가 오른쪽 공간으로 침투하다가 차두리를 보고 길게 대각선 패스를 때려주었다. 발빠른 차두리는 이를 낚아챘고 다시 페널티킥 박스 오른쪽으로 달려드는 이천수에게 짧은 패스를 연결했다. 뒤도 안돌아보고 오른발 논스톱슛. 그야말로 벼락이었다. 그러나 왼쪽 골문으로 빨랫줄 같이 날아가던 볼은 ‘야신상’을 수상한 독일의 ‘고릴라 GK’ 올리버 칸의 오른손 펀칭으로 무산됐다. 전광석화 같은 슛에 번개처럼 선방했으니 장군멍군.

    “독일전 전반에 때린 슛은 정말 들어가는 줄 알았다. 발에 맞는 감각이 너무 좋았는데 올리버 칸이 그걸 막아내다니. 역시 야신상을 받을 만하다.”

    월드컵이 끝나고 태극전사들은 훈장과 포상금을 받고, 해단식까지 마쳤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폴란드전을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꼽고 있다. 이유는 물론 1승에 대한 간절한 염원 때문이다.

    폴란드전에서 쌍포를 터뜨려 한국축구 월드컵 본선 도전 48년사에 비원의 첫승을 이루는 데 길라잡이가 됐던 두 주역 황선홍과 유상철도 마찬가지로 폴란드전의 감격을 반추한다.

    ‘유비’ 유상철(31·일본 가시와 레이솔)은 월드컵 이전부터 “골을 넣을 수 있는 자리에서 뛰고 싶다”며 골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대포알 중거리포와 헤딩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 히딩크는 멀티플레이어인 유상철에게 2선 공격에 가담해야 하는 자리, 즉 가장 궂은 일을 많이 하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겼다. 이에 화답하듯 폴란드전서 회심의 중거리슛을 성공시켰다. 후반 8분. 인터셉트한 뒤 수비수의 깊은 태클을 뚫고 질풍처럼 드리블하더니 카우지니와 바우도흐를 제치고 번개 같은 오른발슛을 날렸다. 세계 4대 수문장의 한 명으로 꼽히던 폴란드 GK 두데크도 겨우 손끝만을 댈 수 있었다.

    월드컵 2회 연속골. 98프랑스월드컵서 2연패한 뒤 벨기에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하석주의 왼쪽 센터링을 슬라이딩 오른발슛으로 명중시킨 동점골로 한국축구의 자존심을 세웠던 그가 4년 뒤 월드컵 첫 경기에서 비원의 월드컵 첫 승을 확정짓는 쐐기골을 작렬시켰던 순간이다.

    그는 이날 아침 아내에게 “오늘 예감이 좋다”는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서귀포에서 마지막 훈련을 할 때부터 그는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이번 월드컵은 왠지 감이 좋아요” 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이미지트레이닝을 했고 폴란드전서는 예언처럼 정확히 그 약속을 지켰다.

    “골을 넣고 양손을 들어 흔든 것은 맞은편에 붉은악마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다. 다함께 일어나서 기쁨을 나누자는 의미였다.”

    그가 분기탱천한 순간도 있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도 평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경기 전날 이탈리아의 플레이메이커 토티가 ‘한국은 한 골만 넣으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한 얘기를 들은 뒤 오기가 치밀어올랐던 기억이 난다. 이탈리아 선수들의 태도에서 마치 고등학생이 중학생을 상대하듯 우리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 엿보였다. 그래서 이 경기만큼은 꼭 이기고자 벼르고 별렀다.”

    국민들은 ‘황새’ 황선홍(34·일본 가시와 레이솔)의 아름다운 퇴장을 기억한다. 폴란드와의 첫 결전에서 그의 첫 골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한국의 4강신화는 싹이 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16강행도 험난했을 것이다.

    “어느 때가 가장 기뻤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다 기뻤다. 그래도 고르자면 폴란드전 첫 골이 가장 기뻤다.”

    8년 만의 골. 1994년 미국월드컵 마지막 경기인 독일전에서 추격골을 터뜨린 뒤다. 98프랑스월드컵에서 부상으로 한 경기도 못 뛰고 벤치만 지켰던 악몽을 건너뛰고 ‘황새의 부활’을 이뤄냈던 것이다. 폴란드전 전반 25분. 이을용이 왼쪽 코너플래그에 있던 설기현에게 스로인했고 다시 리턴패스를 받았다. 이을용은 골마우스에서 움직이는 황선홍을 봤다. 그리고 무릎 높이로 왼쪽 골문을 향해 센터링. 황새에겐 너무도 좋은 골먹이였다. 왼발을 슬며시 갖다댄 볼은 두데크의 오른손을 피해 골네트에 휘감겼다.

    “을용이가 왼쪽으로 파고드는 것을 보고 짧은 센터링을 기대하면서 앞쪽으로 내달렸다. 예상했던 대로 볼이 날아왔고 온 신경을 집중시켜 공에 발을 댔다.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찔했다. 아니 기절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골을 넣으면 골 세리머니로 아내와 박항서 코치에게 키스를 날리겠다고 한 약속도 지켰다. 벤치 쪽으로 뛰어오면서 거푸 키스를 날렸다.

    “아내나 박코치와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벤치에서 경기에 나서지 못한 채 묵묵히 있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뜻에서 키스를 보냈다.” 대표팀 맏형다운 얘기다.

    “폴란드전이 다가오면서 열망이 강해졌다. 이전까지 내가 참가한 세 차례의 월드컵에서 단 한번도 이겨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에겐 한에 가까운 감정으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안방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또다시 실패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폴란드전 결승골이 그토록 기쁠 수가 없었다. 15년째 대표선수로 뛰어왔지만 그때만큼 흥분되고 짜릿한 적은 없었다. 온몸의 혈관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골을 넣었다는 기쁨보다 ‘이제는 정말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가장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은 미국전. 전반 21분 공중볼을 따내려다 미국 문전에서 헤이덕과 같이 점프했는데 너무 높이 뜨는 바람에 헤이덕의 머리에 맞아 오른쪽 이마가 찢어졌다. 그라운드에 나뒹군 그의 얼굴에 선혈이 낭자했다. 관중석에서 아빠가 피흘리는 걸 본 큰딸 현진(8)은 울음을 터뜨렸다.

    최주영 물리치료사의 얘기.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빨리 운동장에 들어가겠다고 해 진정시키느라고 혼났다.” 붕대를 감았다. 전반 39분 아구스에게 밀려 넘어지면서 페널티킥까지 얻어냈다. 폴란드전에선 왼쪽 엉덩이 위쪽 근육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던 그다. 근육 안쪽까지 워낙 심하게 멍이 들어 미국전 이틀 전까지도 출전 여부가 불투명했을 정도. 하지만 황선홍은 소염제 주사를 맞으면서까지 출전 의지를 불살랐는데 겹부상을 당한 것이다.

    “고통보다는 이 경기에 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솔직히 불안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이미 몇 군데 다친 데가 있어서인지 부상이 겹친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마가 찢어졌다고 축구 못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의연함이 믿음직스럽다.

    그러나 부상보다도 망치로 가슴을 맞은 듯 충격을 받은 것은 딸의 절규 때문이었다. 아빠가 피를 흘리면서도 붕대까지 감고 나가 뛰는 모습에 어린 딸이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나중에 아빠에게 던진 한마디. “아빠, 축구 그만해.”

    “그래 적어도 대표팀에선 다시 쓰러지지 않을게.” 아빠는 딸에게 약속했다. 월드컵 직전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해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겠다”고 선언한 그였기에 딸의 눈물은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다.

    터키와의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황새는 관중들에게 고별인사를 했다. 히딩크는 등뒤로 다가가 그를 안으며 한 손을 같이 치켜들어 관중들의 연호에 답했다. 작별식이었다. 그렇게 함께했다. “좀더 일찍 좋은 환경, 좋은 팀에서 활동했더라면 세계적인 선수로 컸을텐데…” 하고 아쉬움과 칭찬을 아끼지 않던 히딩크. 3·4위전에 뛰지 못하게 한 게 아쉬움으로 남지만, 황새의 아름다운 퇴장을 누구보다도 축하해주는 정겨운 모습이었다.

    “마지막 터키전까지 잘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부상 때문에 출전하지 못했다. 경기가 끝난 뒤 그라운드 한가운데서 선수들과 함께 큰절을 하면서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어떻게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 할 텐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관중석을 향했다. 붉은악마 앞으로 다가가서 다시 한번 큰절을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이제 황새도 히딩크도 떠났다. 환희와 비탄이 엇갈릴 때마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부상과 탈진에도 꿋꿋이 전진을 거듭했던 태극전사들. 붉은 6월의 전설을 쓴 그들은 정말로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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