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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색깔 있는 문화 이야기 6

에라스무스, 평화를 사랑한 최초의 세계시민

  • 박홍규 < 영남대 법대 교수 > sky3203@donga.com

에라스무스, 평화를 사랑한 최초의 세계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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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와 마키아벨리는 60세 전후인 1527년과 1536년에 각각 죽었다. 사상가답게 모두 왜소한 체격이었으나 얼굴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에라스무스의 굳게 다문 입술에는 숭고한 이상이 깃들어 있으나, 마키아벨리의 조소 머금은 얇은 입술에는 현실의 냉혹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에라스무스는 국경을 저주한 세계인으로 살았으나,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인류공동체사상의 상징이랄 수 있는 에라스무스는 권력자에게, 개인적 요구는 물론 국가적 요구마저도 인류공동체의 평화라는 이상 밑에 두어야 한다고 요구한 반면, 국민국가사상의 상징인 마키아벨리는 권력자의 권력의지를 최고 목표로 삼아 국시의 가차없는 관철을 지고의 과제로 상정한다. 국시의 관철,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가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에라스무스의 인류공동체론이 우리에게 아주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우리말로도 번역된 ‘에라스무스’에서 에라스무스가 죽자 마키아벨리가 득세해 정치는 윤리에서 벗어난다고 말한다. 즉 에라스무스는 정치를 도덕 밑에 두나,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도덕에서 떼어내버렸고, 이로 인해 정치는 이상과 실리, 윤리와 외교, 인류와 국가, 협력과 대립, 통합과 분열, 타협과 갈등이라는 차원으로 대립적 양상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에라스무스를 좋아하고 마키아벨리를 싫어한 츠바이크가 지어낸 소리에 불과하다. 에라스무스가 살아있을 때도 정치는 윤리와 무관했다. 아니 인류사의 처음부터 그랬다. 예부터 군주는 마키아벨리의 군주였지 에라스무스의 군주가 아니었다. 민주주의니 뭐니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마키아벨리식 군주의 득세다. 절대권력의 대통령, 그것이 군주와 다를 게 뭐 있는가?

그러나 인류사는 또한 에라스무스의 역사이기도 하다. 철인정치를 주장한 플라톤으로부터 몽테뉴·볼테르·스피노자·칸트·톨스토이·간디·킹에 이르기까지, 인류애란 주제는 끊임없이 주장해온 가치였다. 약삭빠르고 냉혹한 마키아벨리가 어리석고 몽상에 젖어있는 에라스무스를 끝없이 조소해도, 게다가 현실은 늘 마키아벨리의 정확성을 입증해주고 있는데도 정당성은 언제나 에라스무스의 몫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아니다. 마키아벨리도 에라스무스도 오해받고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의 아들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썩어빠진 현실을 개혁할 힘있는 민중적 군주를 대망했고, 에라스무스는 분열된 국가와 썩은 종교를 대체할 인류적 이상을 추구했다. 따라서 츠바이크 식의 대립적 사고만으로 두 인물을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다 현실을 개혁하려 했으며, 낡아빠진 전통을 부정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써 실마리를 삼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주의란 현실에 영합하는 기회주의나 보수주의 또는 처세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부정 및 변혁으로서의 그것을 의미한다.

에라스무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신학을 연구했다. 신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보다 파리대와 옥스퍼드대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그러나 신학자로서 에라스무스는 그다지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화’를 위해 그를 주목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수준이 의심되는 ‘우신 예찬’ 류의 중역(重譯)에 만족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여러 차례 번역되었으나, 아직도 중역을 면치 못하고 있다. ‘만드라골라’의 번역도 마찬가지다.

독재와 폭력을 부정하고 평화와 자유를 추구한 츠바이크가 히틀러 집권 1년 뒤에 쓴 ‘에라스무스’ 첫머리에는, 에라스무스가 어느 편이냐는 질문에 “그는 늘 자신만 대표한다”고 답한 당대인의 말이 인용돼 있다. 그렇게 에라스무스는 평생을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살았다.

“나는 나만을 대표한다”

그는 사생아, 그것도 신부의 근친상간으로 태어났다. 그나마 부모가 일찍 죽는 바람에 성당에 맡겨졌다. 언제 어디서(네덜란드는 분명하나) 태어났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다만 20세 무렵인 1488년 신부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주 관심사는 종교가 아닌 예술이었다.

그는 평생을 신부로 살았다. 그러나 신부복을 입지 않았고 수도원에도 가지 않았으며 예배도 거부했다. 그에게 가톨릭은 감옥이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제후·영주·대학에도 구속당하기를 원치 않았으며 자기 위에 그 누구도 두지 않았다.

평생 자유인이자 독립신자였던 그는,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권력에 저항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타협했다. 신부의 신분으로 교회에 저항한 혁명가 루터와는 전혀 달랐다.

30세 무렵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국에 살게 되면서 그는 비로소 자기 영역인 학문과 예술을 발견한다. 50세경 유명해지기까지 그는 구걸해 얻은 빵으로 연명할지언정 자유와 독립을 지향하는 삶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묶으려는 특정 개인이나 대학에 묶이는 대신 인쇄소 교정원, 가정교사 등 ‘자유직’을 전전한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만큼일 뿐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유목민처럼 이곳 저곳, 이 나라 저 나라를 쏘다녔다. 모든 외부의 힘과 출세에의 유혹을 거부하고 기피했다. 그에게는 집도, 고향도 없었다. 오직 방랑과 방황뿐이었다. 항상 공허 속에 살았다. 삶은 오직 책 읽기와 글쓰기에 바쳐졌다.

공허 속에 살기에 그는 투명했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나 창조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넓은 정신을 지닌 ‘올바른’ 사상가다. 그는 몽테뉴에게까지 이어지는 16세기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열린 마음과 회의적 관용의 전형이다. 그들은 명료하되 경직되지 않은 시각으로 인간사를 관찰한다. 모든 학문의 이론적 가치를 실천의 관점에서 회의한다.

에라스무스는 중세의 미신을 거부했다. 그러나 종교적 관행마저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종교는 인간의 실천적·지적 능력의 유한성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감수성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그가 비판한 것은, 기도문이나 교리에 대한 논쟁을 정치적 논쟁 혹은 죽기살기 식의 싸움질로 연장해가는 지적 독단론이었다. 그는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강한 비판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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