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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의 세계 | 맥주 즐기기

여름의 술, 향긋한 보리의 축복

  • 조경란 < 작가 >

여름의 술, 향긋한 보리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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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맥주를 따라줄 때 거품이 하나도 안 일어나도록, 지나치게 주의해서 따라주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잔을 받을 때도 잔을 기울이지 않고 똑바로 세워 받는다. 그래야 거품을 더 일게 할 수 있으니까.

거품은 ‘맥주의 꽃’이다. 거품은 맥주 속에 탄산가스가 날아가는 것을 막아주고 공기와의 접촉을 차단해준다. 그 거품이 맥주의 산화를 억제하는 것이다. 맥주를 잔에 따를 때는 거품이 2, 3cm 정도의 두께가 되도록 따르는 것이 맛을 더욱 좋게 한다.

맥주의 맛을 음미하는 데엔 오감(五感)이 필요하다. 맥주는 살아있는 일종의 생물이며 쉽게 변질될 수 있는 연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맥주는 시각(빛깔)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다음엔 향기를 맡고(후각), 솨르르르 탄산가스가 잔의 밑바닥을 차고 올라오는 소리를 듣고(청각), 그윽한 향미를 맛보며(미각), 마지막으로 차가운 맥주잔을 쥔 손끝에서 느껴지는 쾌감(촉각)을 경험할 때 맥주를 마시는 최고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무조건 차갑다고 맥주가 맛있는 건 아니다. 맥주는 온도가 높으면 쓴 맛이 강하게 느껴지고 되레 너무 차면 거품이 나지 않아 제 맛을 느끼기 힘들다. 맥주를 마시기 가장 적당한 온도는 여름철엔 4∼8도, 겨울철엔 8∼12도가 좋다. 여름철엔 특히 냉각시킨 잔을 사용하면 더욱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맥주는 자연광이든 인공광이든 빛이란 걸 싫어한다. 빛을 쬐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술이 와인만은 아닌 것이다. 맥주병을 만질 때도 아주 부드럽고 신중하게 다뤄서 흔들림이 거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까 맥주는 어쩌면 와인보다 더 까다로운 술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랑하는 맥주집

맥주는 포도주보다 알코올 성분이 훨씬 적은 데다가 칼로리도 높지 않다. 그리고 성장을 돕는 비타민 B군이 풍부한 술이다. 맥주는 탄수화물은 풍부하지만 지방질이나 당분은 없어서 실제로 살을 찌게 하지는 않는다. 열량을 비교해도 100ml에 포도주 70cal, 과일주스 50cal인 데 비해 맥주는 45cal의 열량만을 낼 뿐이다. 맥주를 마시면 살이 찐다고? 맥주를 즐기고 싶다면 우선 그런 걱정조차 잊어버려야 한다.

요즘은 세계 여러 나라의 맥주를 파는 술집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그만큼 다양한 맛의 맥주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단골 식당 중 하나인 ‘그안’에 가면 벨기에 맥주 레페와 화이트 맥주 호가든, 그리고 부드러운 스텔라를 맛볼 수 있다. 거긴 와인 주종이 더 많은 곳이긴 하지만 편안한 의자에 푹 기대 장충동 야경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강남역 근처 ‘더블린’에선 유럽식 모듬 소시지 안주를 맛볼 수 있다. 밀 맥주 슈나이더를 파는 곳이기도 한데, 조만간 그 맥주를 마시러 다시 가봐야겠다.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3층 ‘모토’에서는 ‘제대로 된 유리잔’에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손님이 많지만 않다면 종업원들이 ‘맥주를 따를 때는 우선 거품이 생기지 않도록 맥주잔을 기울여서 맥주가 잔의 벽을 타고 내려가게 하면서 잔의 중간까지 따른다. 그런 다음 비로소 잔을 똑바로 세워서 풍성한 거품 모자를 쓰도록 만드는데, 이때 맥주병 주둥이가 잔이나 맥주에 닿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는 맥주를 음미하는 기술을 확실히 보여주는 곳이다. 야경 또한 맥주의 맛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역시 나의 단골은 봉천동에 있는 ‘커피와 나무들’이다. 거기서 나는 오비와 하이트 맥주를 양껏 마신다. 늦은 저녁이면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가서 말이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내 꿈 중 하나가 이루어진다면 미래의 어느날 나는 가을의 뮌헨에 있을 것이다. 세계적인 맥주축제인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를 기웃거리며 한잔씩 한잔씩 각각의 맥주 맛을 음미하고 있을 것이다.

‘보리의 땀’ 을 마시기 위하여

그러나 노동이 없는 맥주는 어쩐지 김이 빠지는 느낌이다. 인간의 땀냄새는 맥주의 향기보다 감미롭고 달콤하다. 노동 뒤에 마시는 맥주의 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나는 다시 내 일터로 돌아온다. 다시 마실 맥주 첫 모금의 맛을 책상 서랍에 꾹꾹 눌러 담은 채. 나는 새로 시작할 노동을 앞두고 맥주를 마시고 그리고 그 노동이 끝나면 가장 먼저 맥주를 마신다. 그러니 나에게 맥주는 언제나 특별한 의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맥주를 시킬 때도 “여기, 맥주 좀 주세요” 하지 않고 꼭 이름을 붙여 주문한다. “여기 카스 주세요, 하이네켄 주세요” 하는 식으로. 무엇이든 그 대상의 이름을 부를 때는 한없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황금색, 호박색, 갈색, 붉은색, 검은색, 그리고 흰색의 맥주들. 나는 맥주가 마시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일을 다 마치지 못했다. 나는 진정으로 ‘보리의 땀’을 맛볼 수 있는 자격을 스스로에게 주고 싶다.

맥주 양조업자가 맥주라는 기적의 산물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기본 요소들은 바로 공기, 흙, 물, 불이다. 네 가지 중 그 어느 하나라도 넘치거나 모자라면 맥주의 맛과 빛깔은 곧 달라져버리고 만다.

공기, 흙, 물, 불….

맥주는 우리 인생의 일부인 셈이다.

신동아 200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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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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