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핵 재처리시설, 이종훈이 불붙이고 장영식이 물끼얹다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대우 hoon@donga.com

    입력2004-08-31 15:4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이종훈(李宗勳)씨는 YS정권 시절인 1993년 3월부터 5년간 한국전력 사장을 지낸 사람이다. 한국전력 정규 공채 출신으로는 최초로 사장이 된 그는 1996년 의지를 갖고 은밀히 핵 재처리시설 도입을 추진했다.

    그가 도입을 추진했던 재처리시설은 핵무기 제조용이 아니다. 한국의 열여섯 개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다시 원자로에 넣는 MOX 연료(Mixed OXide Fuel·혼합 산화연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씨를 중심으로 한 한국전력 원자력인들의 노력은 IMF 경제위기와 DJ정권 출범 후 새로 한전사장이 된 장영식(張榮植)씨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씨는 어떤 이유로 핵 재처리시설을 도입하려고 했는가. 그리고 그의 노력은 어떤 이유로 좌절되었는가. 그 전말을 밝혀보기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은 세계 핵주권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은 미국의 동의없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렵다.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핵무기를 갖고 있는 4대 강국도 미국의 눈치를 봐가며 원자로를 수출한다. 한국 또한 미국의 이해없이는 제대로 된 원자력 정책을 펴기 어렵다.

    한국은 원자력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덕분에 일찌감치 원자로를 도입했다. 6·25전쟁의 화약연기가 폴폴 날리던 1956년, 양유찬 주미대사는 미국 워싱턴에서 로버트슨 미국 국무차관보, 스트라우스 미국 원자력위원장과 함께 ‘원자력의 민간 이용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간의 협력을 위한 협정(한미원자력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이 한국 원자력 산업을 싹 틔우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 협정에는 미국은 한국의 연구용 원자로 도입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62년 이에 따라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트리가마크 Ⅱ라는 시험용 원자로(250㎾)를 최초로 도입했다.

    비슷한 시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도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었으니, 국가 수준으로 봐서 한국은 아주 일찍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맺었던 셈이다. 그리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인 1970년 한국은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인 고리 1호기(60만㎾) 건설에 들어갔다.

    그런데 한미원자력협정에는 상업로를 지원한다는 내용이 없었으므로 한국은 원자력협정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에 착수했다. 미국은 웨스팅하우스사의 원자로가 한국에 제공되기 때문에 협정 개정에 동의했다. 1974년 5월15일 한·미 양국은 ‘미국은 한국이 상업용 원자로에 들어가는 농축 우라늄을 이용하는 것을 양해한다’는 쪽으로 내용을 수정한 한미원자력협정에 서명했다. 그 덕분에 한국은 1978년 고리 1호기를 가동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상업용 원자로를 가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이후 한국은 일사천리로 원전을 건설해 현재 16기의 원전을 가동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 시기 한국은 원자로 공급 파트너를 ‘콧대 센’ 웨스팅 하우스에서, 자금 사정이 악화돼 원자로는 물론이고 원자로 제작기술까지도 제공하겠다는 컨버스천 엔지니어링(CE)사로 바꾸었다.

    한국은 CE사의 기술을 토대로 한국형 표준 원자로 KSNP를 제작하게 되었다. 16기의 원전은 현재 한국에서 소비되는 전력의 3분의 1 이상을 생산한다.

    일본, 비핵화 선언으로 시작

    그런데 비슷한 시기 미국과 원자력 협정을 맺은 일본은 훨씬 빠르게 원전 분야를 발전시켰다. 전범(戰犯)국가 일본은 ‘입안의 혀’처럼 미국의 비위를 맞추며 원자력분야를 발전시켰다.

    1961년 일본은 ‘핵무기는 제조도·보유도·사용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비핵 3원칙’을 발표했다. 그와 동시에 일본은 영국의 기술을 도입해 최초의 일본식 원자로(16만㎾급·東海村원전) 개발을 준비했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원전 기술을 도입해 독자적으로 원자로 개발을 시도하면 미국의 의심을 산다. 일본은 미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먼저 ‘비핵 3원칙’을 발표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35만㎾급, 52만㎾급 원자로를 계속 개발해 나가, 지금은 미국(104기), 프랑스(55기)에 이은 세계 3위(52기)의 원전 대국이 되었다(한국은 8위).

    일본은 1980년대 또 한번 크게 점프했다.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건설의 길을 연 것이다. 전범국가인 일본이 재처리시설을 도입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아주 예민한 문제다. 특히 미국이 반대하면 이 일은 성사될 수가 없다. 따라서 사전에 미일원자력협정 개정을 시도했는데, 일본은 이러한 논리로 미국을 설득했다고 한다.

    “봐라. 우리는 지난 20여 년간 비핵 3원칙을 정직하게 지켜오지 않았느냐. 보다시피 일본은 자원빈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도 자원을 확보하려다 보니 일어난 것이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는, 재처리하면 훌륭한 자원이 된다. 자원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재처리가 꼭 필요하다. 우리는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도 절대로 핵무기를 만들지 않겠다. 그러니 재처리시설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

    이러한 노력은 성공을 거둬 마침내 일본은 일본에서의 핵 재처리를 허가하는 쪽으로 미일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 혼슈(本州) 최북단에는 도끼모양의 반도가 있는데 그곳에 아주 궁벽한 마을인 롯카쇼무라(六ヶ村)가 있다.

    1985년 일본핵연료주식회사(日本原燃)는 이곳에 농축우라늄 공장을 건설했다. 그리고 1992년부터는 일본의 52개 원전에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을 옮겨 보관하는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을 갖추었다.

    롯카쇼무라에 원자력과 관련된 시설이 들어서자 일본은 1995년부터 이곳에 2005년 완공을 목표로 핵재처리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이미 미국으로부터 양해를 받았으니 국제적으로 이 공사를 반대할 세력이 없었다.

    현재 미국은 전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BNFL과 코제마라는 재처리 전문 회사를 갖고 있다.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두 회사에 일본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를 보내, 재처리 해달라고 위탁했다.

    두 나라가 이를 환영했음은 물론이다. BNFL과 코제마는 몇 차례 그들이 재처리해서 만든 MOX 연료를 일본으로 보냈는데, 그때마다 그린피스를 비롯한 반핵단체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런 와중에도 일본의 재처리공장 건설은 착착 진행되었다.

    이러한 일본과 완전 반대 방법으로 원자력을 도입한 것이 북한이다. 북한은 1962년 1월 소련의 지원을 받아 IRT-2000 연구용 원자로를 처음 도입했다.

    1980년 7월 열출력 5000㎾의 제1원자로를 건설하고, 1987년 2월에는 열출력 5만㎾의 제2원자로를 착공하였다. 평북 영변에 건설된 이 두 개의 원자로가 1990년대 초반 북핵(北核) 위기를 몰고온 장본인이다(제2 원자로는 미완공).

    북한에 건설된 원자로는 소련이 공급한 것인데 소련 또한 핵확산을 철저히 막는다. 때문에 북한은 1985년 12월 NPT(핵비확산조약)에 가입하고 1992년 1월에는 IAEA(국제원자력기구)와 전면안전조치협정에 서명했다.

    그해 5월 북한은 IAEA의 사찰을 처음으로 받게 되었는데 이때 IAEA는 북한이 IAEA에 신고한 것과 다른 시설(재처리시설로 의심)을 보유한 것을 발견했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두 개의 원자로에서 나온 사용후 핵연료를 재처리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90g을 추출했음을 시인했다.

    1993년 2월 IAEA는 북한에 대해 특별사찰을 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은 NPT 탈퇴를 선언해, 본격적인 북핵 위기가 조성됐다.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1994년 6월 영변지역을 제한공습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마지막 수순으로 카터 전대통령을 평양에 보냈는데, 카터를 만난 김일성(金日成)은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혀, 한반도에 드리웠던 전운은 걷히게 되었다.

    이후 미국과 북한은 고위급 회담을 열고 1년여 후인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합의서에 서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북한이 핵무기를 갖지 않는 대가로 미국은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통해 차관 형태로 북한에 100만㎾짜리 원자로 두 기를 지어주게 되었다.

    한국, 일본식 모델 선택

    일본이 미국에 대해 ‘입안의 혀’처럼 지내는 방법으로 실속을 채웠다면, 자주성을 강조하는 북한은 ‘벼랑끝 전술’을 구사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획득한 것이다.

    각각의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두 나라는 모두 강력한 적을 만났다. 일본은 그린피스로 대표되는 반핵단체를 상대해야 했고,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불량국가(rogue state)로 지목되는 출혈을 치렀다. 일본의 선택이 현명한 것인가, 북한의 자주노선이 옳은 것인가? 한국이 선택한 것은 일본식 모델이었다.

    1991년 11월8일 한국의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한국은 핵무기를 제조도·보유도·저장도·배비도·사용도 하지 않는다’는 비핵 5원칙을 선언했다. 일본보다 30년 늦게 비핵화선언을 한 것인데, 핵무기는 저장과 배비까지도 하지 않겠다며 일본보다 더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비핵화선언에 대해서는 아직도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반공 노선을 고수하는 극우 보수세력들은 “한국도 핵주권을 가져야 하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데 먼저 비핵화선언을 한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적군 앞에서 먼저 무장해제를 실행한 격이다. 한국은 핵문제에 관해서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NCND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고 맹비난했다.

    한국이 비핵화선언을 한 이유는 이 시기 미국 CE사의 기술을 받아들여 한국형 표준원자로(KSNP) 제작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이 안심하고 원자로 제작 기술을 제공하도록 하기 위해 이 선언을 한 것이다.

    비핵화선언 후 한국은 다음 단계로 빨리 넘어갔어야 한다. 그런데 고조된 북핵 위기와 이 선언이 맞물리면서, 한국에서는 모든 핵을 반대한다는 반핵운동이 일어났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사태가 흘러간 것이다.

    반핵운동이 힘을 얻자 ‘표를 의식’한 유력 정치인들이 동참했다. 한국 원자력계는 1994년말까지 새로운 원전을 전혀 건설하지 못하는 위기에 봉착했다. ‘손발이 안맞다’ 보니 비핵화선언은 ‘비원전(非原電)선언’이 돼 버린 것이다. 이종훈씨는 이러한 시기(1993년 3월)에 한전 사장이 되었다.

    제네바 합의가 타결된 후 그는 “북한은 한국의 일부니 KEDO가 북한에 건설하는 원전에는 한국의 KSNP가 공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미국 원자로를 판매할 속셈으로 “북한과 남한은 엄연히 다른 나라다. 한국의 KSNP는 미국의 CE사 기술을 토대로 만들었으므로 미국의 허가 없이는 제3국인 북한에 공급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오랜 논란 끝에 미국은 북한을 한국의 일부로 인정해 KSNP의 공급에 동의했다.

    이어 이사장은 비밀리에 재처리시설을 도입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과 맺은 원자력협정을 개정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런데 미국의 지도층 인사 중에는 북한의 핵무장 노력에 자극받은 한국의 일부 보수파 인사 들이 “한국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주목해, 한국이 재처리시설을 짓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람이 많다. 이들을 먼저 무마해야만 원자력협정을 개정할 수 있다.

    1996년 4월 이사장은 미국으로 날아가 법률회사인 H&H(호건 앤드 하트슨)사와 100만달러에 로비 대행계약을 맺었다. H&H사는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파트너로 근무했던 CNP사와 같은 계열이었다.

    H&H사의 대표인 마이클 번즈씨는 국회의원 출신으로 힐러리와 아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사장은 H&H사를 움직이면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는 영국의 BNFL과도 접촉했다. BNFL이 한국에 원자로 제작기술을 제공한 미국의 CE사를 인수했기 때문이었다. BNFL은 CE와 같은 계열의 원자로를 갖고 있는 한국과 협력하면 자사의 재처리시설을 판매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들의 대미 로비망을 동원해 열심히 미국을 설득했다.

    그러자 라이벌인 BNFL에게 한국 시장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프랑스의 코제마사까지 나서서 한국을 위해 대미 로비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1997년 한국에서 IMF 경제위기가 발생하고 이듬해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다. 1998년 5월 정부는 공개채용 방식으로 한전 사장을 공모해, DJ 측근으로 오랫동안 미국의 뉴욕주립대학에서 교수를 해온 장영식씨를 사장으로 선출했다.

    한전과 H&H사는 2년마다 계약을 연장하기로 했었는데, 장사장이 취임한 직후 계약연장 문제가 대두했다. H&H사에서 계약을 연장하겠느냐는 문의가 오자 장사장은 연장에 반대한다는 답변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추인받기 위해 이 문제를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알렸다. 1998년 6월 임동원(林東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주재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이 사업이 ‘△경제성이 없고 △국제 핵확산금지조약 및 김대중 대통령의 통일이념 구현에 장애가 되며 △남북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미국의 사전 동의를 얻어내기 어려우며 △국내외 환경단체의 강한 저항이 예상된다’며 ‘H&H사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한전 주도로 추진된 사업을 국가안전보장회의가 나서서 “하지 말라”고 결정했으니 이후로는 그 누구도 핵 재처리시설 문제를 꺼낼 수 없게 되었다. 1991년 비핵화선언을 하며 만들어 놓은 무대가 졸지에 무너져내린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공채사장’ 장영식씨는 1년도 채우지 못하고 1999년 4월 박태영(朴泰榮) 산업자원부 장관과의 불화로 퇴임했다.

    2001년 1월9일 기자는 장씨를 만나 핵 재처리시설 도입을 좌절시킨 이유를 장시간 들어보았다. 장씨는 그 이유를 “NPT(핵확산금지조약)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라고 아주 간단히 설명했다.

    한국이 NPT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그의 신념인 듯했다. 그는 이런 사실도 털어놓었다. “1998년 한국 언론은 한국이 핵탄을 만들기 위해 재처리를 시도했다고 보도했는데, 내가 그런 기사가 나오게 했다. 한국은 절대로 NPT를 어겨서는 안된다.”

    그는 “언제 한국이 NPT를 위반한 사실이 있는가. 한국이 도입하려는 재처리 시설은 핵탄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전범국가인 일본도 재처리공장을 짓고 있는데, 무슨 근거로 한국은 안된다는 것인가. 일본에서도 전력회사가 재처리 시설 도입을 주도했다”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의 전력회사는 민간기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한국전력은 공기업이니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 문제는 정부가 나서서 추진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아무튼 한국은 NPT를 어겨서는 안된다. 내가 핵연료 재처리시설 도입을 취소시키자 박관용(朴寬用) 의원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를 보내왔다. 하지만 내가 IAEA의 사무총장을 만나 상의했더니, 그는 한국의 핵연료 재처리시설 도입 노력을 중지시킨 것을 칭찬하더라. 핵연료 재처리 시설 도입을 추진한 사람의 애국심은 인정하지만 그런 일을 하면 안된다.”

    그는 묻지도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해명을 했다.

    “내가 H&H사와 재계약을 취소시키자 한동안 H&H가 나를 고소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1998년 나는 미국의 한 행사에 참석해 H&H의 번즈씨를 만나게 돼 매우 걱정했었다. 그런데 번즈씨는 나를 환대했다. 그는 내게 아무런 감정을 표하지 않았다.”

    장영식씨는 후에 원전 건설부지 선정 문제로 박태영 당시 산자부 장관과 갈등을 빚다가 사퇴했다. 그는 박장관과 갈등을 빚은 경위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원래 원자력 발전소 건설부지는 한전 사장의 추전이 있어야 산자부에서 결정한다. 당시 산자부는 삼척과 울진·해남을 원전 건설 후보지로 보고, 이곳을 추전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이곳 주민들이 하나같이 원전 건설에 반대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런 상태에서 그곳을 원전 건설 후보지로 추천한다면, 격렬한 반핵운동이 일어나 DJ에 대한 지지도가 떨어질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추천을 거부했더니 박장관과 사이가 나빠졌다.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을 DJ에 대한 과잉충성이었다고 비난해도 좋다. 나는 내가 잘했다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원자력 문제를 정치적으로 판단했다. 지난해 정부는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을 선정하기로 돼 있었다. 이를 위해 원자력계의 여러 인사들어 발벗고 뛰어다녔다. 몇몇 지방에서는 지역주민들이 지역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을 유치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을 유치하면 한전으로부터 상당한 지원금이 제공된다.

    반면 일부 주민들은 반대했다. 이렇게 의견이 엇갈릴 때는 기초 자치단체가 결정을 해주어야 한다. 기초 자치단체의 의원은 공천권을 쥔 그 지역 국회의원에 의해 주로 통제된다. 그리고 그 국회의원(여당 의원이었다)은 대통령이나 청와대의 실력자가 통제할 수 있다.

    원자력계의 고위인사는 청와대 실력자를 찾아가 “원전 사업은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지원을 부탁했다. 그러나 실력자는 “쓸데 없는 소리 말어. 지금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을 추진하면 선거에서 표 떨어져”라는 말로 일축했다고 한다.

    전체 전력의 3분의 1을 원자력에 의존하면서도 한국은 정치 논리 때문에 원자력 분야를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력 착착 산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한국은 영원히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일까.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