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공기로 달리는 차 ‘페브’ 발명한 (주)에너진 조철승 회장

“30년을 바쳤다 꿈은 이루어졌다”

  • 곽대중 자유기고가 bitdori21@kebi.com

    입력2004-09-03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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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25일 남산 순환도로에 마티즈 한 대가 나타났다. 지침 없이 오르내림 많은 길을 시속 80㎞의 속도로 달렸다. 남산을 두 바퀴 도는 데 걸린 시간은 40여 분. 가볍게 ‘임무’를 완수한 마티즈는 (주)에너진 조철승(趙哲承·60) 회장, 프랑스 전기자동차업체 노가로테크(Nogarotech) 개발팀장 티에리 라드레(Thierry Ladreyt) 박사 등 관계자들의 힘찬 박수를 받으며 부드럽게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보닛을 열어 엔진부위를 보여주었다. 외형은 마티즈지만 내부는 전혀 달렸다. 우선 엔진이 독특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모양새였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단순했다. 당연히 옆에 있어야 할 냉각장치 등이 보이지 않았다. 운전자는 “엔진에 손을 한번 얹어보라”고 했다. 사람들은 방어본능이 발동한 듯 순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쉼 없이 40분 동안 피스톤 운동을 한 엔진은 한껏 열이 올라 있을 터였다. 그런데 어찌 손을 얹으란 말인가.

    운전자가 먼저 시범을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싱긋 웃는다. 사람들은 다가가 손가락을 살짝 대보았다. 전혀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따뜻하지 조차 않았고, 오히려 차가웠다. 이것이 바로 (주)에너진에서 개발한 ‘공압식(空壓式) 엔진’이다.

    운전자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이번에는 차 뒤편으로 가 배출구에 흰색 종이를 대보라고 했다. 조용히 몸을 떠는 머플러에 화장지를 갖다댔다. 페달을 힘껏 밟아대는지 몇 분 동안 ‘웅-’하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연기는 나오지 않았다. 휴지도 깨끗했다. 마치 에어컨을 틀어놓은 듯 배출구로 시원한 바람이 쏟아졌다.

    “방금 최고 시속 130㎞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래도 차가 제법 조용하고 매연도 전혀 없지요?”



    이렇게 말하며 운전자는 연신 싱글벙글했다. 그는 “배출구로 나오는 바람을 들이마셔도 건강에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옆으로 가 연료 주입구를 열어 보였다. 텅 비어 있었다. 연료통이 아예 없다. 지금까지 이 차는 휘발유 같은 연료 없이 달린 것이다. 동력은 전기. 그렇다고 이 차를 단순한 ‘전기자동차’라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을 이 차를 ‘공기로 가는 차’라 부른다. 세계 최초로 전기자동차에 공압식 엔진을 장착했다. 전기자동차의 약점을 공압식 엔진으로 보완한 잡종(hybrid)이다. 무연료, 무매연, 공기로 가는 차. 그래서 이름도 ‘페브(PHEV ; Pneumatic Hybrid Elec tric Vehicle)’다.

    5월25일은 에너진이 개발한 전지용 공압식 자동차 ‘페브’의 시운전을 한 날이다. 지난해 7월24일 서울 여의도 둔치에서 공개 시운전을 한 데 이어 두번째다.

    이번에는 경사가 심한 곳에서의 등판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남산을 택했다. 1년 전의 시운전과 또 다른 점이 있다면 프랑스 최고의 전기자동차 회사인 노가로테크 관계자가 참관한 것이다.

    시운전을 지켜본 라드에 박사는 “페브는 전기자동차의 단점을 훌륭하게 보완한 혁신적인 하이브리드 자동차”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여기저기 들춰 살펴보고 두드려보고 직접 운전석에 앉아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는 후문이다.

    에너진과 노가로테크사는 지난 3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모터쇼에서 이미 기술 합작 합의를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라드에 박사의 방문은 페브의 ‘상용화(商用化)’에 착수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6월26일에는 에너진의 연구원 3명이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들은 노가로테크사에 파견돼 본격적인 기술이전에 돌입했다. 세계 일류 전기자동차와 한국의 독창적 발명품이 결합을 시작한 것이다.

    ‘공기나 물로 가는 차를 만들 수는 없을까.’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내 ‘그게 가능키나 하겠어’하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누구도 가능성을 믿지 않고, 그래서 도전조차 하지 않은 이 엉뚱한 일에 뛰어든 사람이 에너진의 조철승 회장이다. 공압식 엔진의 발명자이자 에너진의 CEO이면서, 지금도 손수 공구를 만지며 연구원들과 함께 밤을 지새는 자칭 ‘최고연구원’이다. 본인 스스로 “양복보다는 작업복이 더 어울린다”고 말한다. 공압식 엔진은 올해 환갑의 나이가 된 조회장이 반평생을 꼬박 바쳐 만들어낸 인생 역작(力作)이다.

    조철승 회장이 공압식 엔진 개발에 뛰어든 것은 30여 년 전의 일이다. 황해도 개성이 고향인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전 가족을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4형제가 모두 우동장사, 연필장사 등을 하며 자수성가했다. 막내인 그 역시 형님들의 일을 돕다 1969년 서울 노량진에 오토바이 판매·부속 상점을 차렸다. 상호는 고향 이름을 따 ‘개성오토바이’라 했다.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그는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 오토바이 상점을 하면서 심심풀이로 엔진을 분해 조립하는 일을 하곤 했다. 그러던 중 일생을 바꾼 사건을 겪게 된다.

    1971년경이었다. 미국제 오토바이인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을 멋지게 색칠해 타고 다니던 그는 유턴을 하다 그만 오토바이가 전복되는 사고를 겪는다. 묵직한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울 수 없어 일단 시동부터 끄려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밸브를 다 잠그고 당기며 한참을 끙끙거려도 엔진은 멈추지 않았다. 주위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어 너나없이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거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근처에 있는 자기 가게에 달려가 종업원들을 불러왔으나 모두 “연료공급이 되지 않는 엔진이 왜 계속 돌아가느냐”며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한참 후에야 엔진이 멈춰 겨우 오토바이를 옮겨갈 수 있었다.

    당장은 3000평 정도를 계약했지만 생산공장 설립을 위해 앞으로 더 많은 부지를 사들일 예정이다. 인근에 있는 작은 섬 소조도(小鳥島)도 매입해, 장차 선박엔진 개발을 위한 실험장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상기 차장은 “자금 들어갈 일이 많지만 여러 곳에서 지원이 답지하고 있어 큰 재정적 곤란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7월24일에는 투자자들을 초대해 조촐한 축하파티도 연다.

    그러나 페브 상용화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가장 큰 문제는 배터리 성능. 현재 PHEV4는 1시간 30분을 충전해 3시간 이상 300㎞를 달릴 수 있다. 여전히 충전시간이 너무 길다. 에너진 연구원들은 “현재 성능 좋은 배터리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고, 납축전지를 대체할 2차전지나 연료전지가 실용화돼 공압식 엔진과 결합하게 되면 최고의 콤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노가로테크사의 전기자동차에 장착된 배터리와 결합해도 짧은 충전시간에 수백㎞는 거뜬히 달릴 수 있다고 한다. 이론적으로는, 만약 연료전지를 장착하게 되면 기계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운행 가능하다.

    또 하나는 과연 ‘현존하는 일반 자동차와 가솔린-전기 하이브리드 자동차 시장의 벽을 넘을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에너진 관계자들도 아직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몇 개 주(州)에서 무공해 차량 판매를 의무화한 법률을 채택한 것이 하나의 변화가능성”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미 1990년에 채택된 캘리포니아주의 대기정화법은 오는 2003년까지 자동차업체들이 판매하는 차량 중 10%를 무공해 차량으로 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 법률은 주위의 다른 주로까지 확산되었고 유럽 각국에서도 잇따라 도입하고 있다.

    환경관련 국제회의가 늘고 각종 협약이 채택되면서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러한 법률이 강제화할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언제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큰 흐름을 놓고보면 전망은 분명 밝다고 하겠다.

    에너진 관계자들은 페브의 성공가능성을 ‘기존 차량 엔진과의 대체 가능성’에서 찾는다. 공압식 엔진은 기존 내연기관의 부속 몇 가지만 교체하면 되므로, 지구상의 모든 자동차를 공압식 엔진으로 만드는 데 시간과 비용이 얼마 소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가로테크사와 기술합작을 시작하면서 페브의 엔진을 비롯한 주요 부품을 경량(輕量) 소재로 교체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차량의 무게도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게 된다.

    나아가 공압식 엔진을 군(軍)무기에 채택할 수도 있다. 공압식이라 비금속성 소재를 사용할 수 있고, 따라서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는 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 한 연구원은 이미 군사용으로 활용 가능한지 타진하는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귀띔한다.

    페브의 상용화가 눈앞에 다가오면서 조철승 회장은 요즘 굉장히 바빠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프랑스에 파견된 연구원들과 통화하며 각종 연구성과를 주고받느라 바쁘다. 또 새로운 개발에 착수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제 갓 이순(耳順)에 접어든 나이임에도 앞니가 몇 개나 빠지고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렸다.

    30년을 쏟아온 땀방울의 결정체가 비로소 주목을 받게 되자 그는 요즘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져 있다. 아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게다.

    페브의 핵심기술이 그의 머릿속에 전부 아로새겨져 있는 만큼, 조회장은 자신의 안전을 지금껏 공압식 엔진의 성공을 믿으며 지원해준 후원자들의 안전으로 여기고 있다.

    공압식 엔진의 성공이 알려지면서 기술을 팔라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밀려들어오고, 신변 위협을 느낀 적도 몇 번 있기 때문에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페브가 완전히 상용화돼 세계 무대를 누비는 날이 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이 조회장의 심정이다.

    페브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후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조회장은 답변에 앞서 에너진 로고 앞에 붙은 슬로건을 가리켰다. ‘Club of inventors’ ‘발명가들의 모임’이란다.

    조회장은 “크게 성공한다면 발명가들을 위한 연구단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돈 없는 발명가들을 위해 매머드급 연구소를 차리고, 그곳에 공구·기계 등을 들여놓아 공동 사용케 하며, 개인에겐 4~5평 규모의 연구실을 제공하고, 중앙에는 대형식당도 만들어 숙식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등… 꿈같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신이 성공하고 안하고는 예측할 수 없지만, 성공한다면 이러한 구상을 반드시 현실화시킬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사기꾼, 공상가로 멸시받으며 공압식 엔진 개발에만 미친 듯 달려들었던 젊은 날을 그렇게 값진 형태로 보상받고 싶은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인 듯했다.

    조회장은 지금껏 은행 빚을 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돈을 빌리러 가면 “담보를 제시하라”는 말부터 하는데, 자신에겐 담보로 맡길 거라곤 머릿속에 든 설계도면(圖面)과 마음에 품은 꿈과 이상밖에 없었기 때문이란다. 또 수 십억원씩도 그냥 가져다 쓴다는 ‘그 흔한’ 정부 연구지원금이나 창업기금 한 번 받아본 적 없다.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으로, ‘일등 국가로 가는 길’이라는 쪽지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남다른 애국심을 가진 조회장이지만, 눈물을 머금고 공압식 엔진 기술을 외국 기업과 합작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기술을 훔쳐가려는 사람은 많은데 기술의 가치를 인정해주려는 사람은 없더라”면서 “사기꾼이라며 등 돌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헐값에 팔라니 말이나 되느냐”고 한숨 섞인 속내를 털어놓았다.

    인터뷰를 끝내며 조회장은 “발명가를 대접하는 나라, 발명가가 마음껏 자기 이상을 펼칠 수 있도록 돕는 나라가 비전이 있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老)발명가의 얼굴 위로, 한편으론 패기와 도전정신이, 다른 한편으로는 회한과 섭섭함이 소리 없는 주름을 만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이렇게 평범하게 끝났다. 그런데 1년쯤 지난 어느 날 조회장의 머릿속에 문득 ‘연료 없이 돌아가던 엔진’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자연히 무한동력(無限動力)에 관심이 쏠렸고, 공기로 엔진을 계속 가동시킬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자신이 그것을 연구해보리라는 결심까지 하게 됐다. “그때부터 고생길에 접어들었다”며 조회장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며 ‘공기를 이용한 엔진’의 성공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된 조회장은 결국 그동안 하던 사업을 중단하고 연구에만 몰두한다. 실패와 좌절을 거듭하면서 갖고있던 재산도 모두 날렸다. 빈털터리가 되면 다시 사업을 시작하고,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또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그래서 조회장은 “실제 연구에 투여한 시간은 10여 년 정도밖에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사업을 해도 공압식 엔진 개발의 연장선에서 일을 벌였으니, 1971년 이후의 삶은 오로지 새 엔진개발에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에너진의 연구실은 그가 운영하던 노량진의 옛 오토바이 가게터다. 이름이 ‘연구실’이지, 허름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마당에 실험용 차량 몇 대, 각종 장비가 가득 차 있는 허름한 모양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자동차 정비소로 생각될 정도다. 그곳에서 그는 30년 동안 공압식 엔진 개발의 꿈을 키웠다.

    이제 공압식 엔진에 대해 알아보자. 전세계에 굴러다니는 수억대의 자동차는 대개 휘발유·경유·가스 등 화석연료를 이용해 달린다. 화석연료는 고갈의 운명을 피할 수 없고 환경오염도 심각하다.

    그래서 인류는 ‘대체에너지’ 개발에 착수했다. 화석연료가 아닌 다른 에너지로 차를 굴려보자는 것이다. 값싸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거기다 오염물질의 배출 없이 기기(器機)의 성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태양열·수소·메탄올·에탄올·자기장·식물성 기름 등은 물론 동물 배설물에서 나온 가스를 활용하는 방안까지 고려됐다. 이를 국책사업으로 정해 추진한 나라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상용화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어느 정도 상용화 단계에 들어선 대체에너지가 있다면 ‘전기(電氣)’다. 전기자동차는 가솔린 자동차보다 빠른 1873년, 이미 제작된 적이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상품이 시장에 등장한 것은 1996년 GM사의 EV1이 최초다. 그러자 포드·크라이슬러·BMW·볼보·푸조 등 세계 유수 자동차 회사들도 앞다투어 전기자동차를 출시했다.

    전기자동차의 가장 큰 단점은 배터리가 오래 못 간다는 것이다. 5시간 충전해 고작 100㎞를 달리는 차와, 2분 주유(注油)로 400㎞를 달리는 차는 애초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주행거리를 늘이려면 배터리를 더 많이 장착해야 하는데 그러면 차가 무거워진다. 그래서 뒷좌석을 몽땅 배터리로 채우고 바퀴를 8개나 단 기형적 자동차가 등장하기도 했다.

    또 다른 단점은 힘이 약해 등판능력이 현격히 떨어진다는 점이다. 힘을 내 언덕을 오를 수도 있으나 전력 소모가 너무 많으며 자칫하다가는 모터가 타버린다. 이밖에도 제작비용이 일반자동차의 2~3배에 이르는 등 전기자동차의 상용화까지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숱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전기자동차의 발전은 ‘배터리 성능을 향상시키는 기술’이 발전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 ‘하이브리드’ 자동차다. 전기에만 집착말고, 전기자동차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자는 것이다. 그로써 두 개 이상의 동력을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자동차가 개발되었다. 대표작으로 도요타의 ‘프리우스(PRIUS)’가 있다.

    1997년 도쿄 모터쇼에서 첫 선을 보인 프리우스는 세계 최초의 양산(量産) 하이브리드 자동차다. 기본원리는 전기자동차에 가솔린 엔진을 결합한 것. 출발 때는 배터리의 전원을 이용해 전기모터로 차를 움직인다. 그러나 일정 속도가 넘으면 가솔린 엔진이 구동하며, 이때 엔진의 일부 동력은 발전기(Generator)를 회전시켜, 여기서 발생하는 전류로 전기모터에 힘을 더한다. 차가 최고속도로 달릴 때는 배터리까지 가세한다. 차량 속도가 줄면 다시 전기모터에 의존해 움직이고, 발전기는 배터리에 충전을 해주는 역할로 전환된다.

    이렇게 해서 프리우스는 초기 테스트에서 리터당 32㎞의 높은 연비(燃費)를 보였다. 또 일종의 자가(自家)발전을 하므로, 전기자동차의 최대 단점인 충전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이브리드형 자동차는 국내에서도 여러 모델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가솔린 엔진과 전기모터를 결합하는 방식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배기가스를 어느 정도 줄일 수는 있어도, 아예 없앨 수는 없다. 따라서 완벽한 무공해 차량이 개발되기 전까지 간극을 채우는 역할 정도를 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브는 신개념의 하이브리드형 자동차다. 핵심 요소는 공압식 엔진을 장착했다는 것. 페브는 기본적으로 전기자동차이지만, 출발 때나 큰 힘이 필요할 때는 공압식 엔진이 작동해 전기자동차의 여러 단점을 보완해준다. 우선 주행속도와 주행거리가 늘었다. 또 순수 전기자동차의 경우 성능이 월등한 배터리가 개발된다 해도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등판능력인데, 공압식 엔진을 장착하면 일반 자동차보다 등판능력이 월등히 높아진다. 엔진 작동 매체가 ‘공기’인 만큼 당연히 무공해다.

    페브는 출발 때에는 공압식 엔진으로 움직인다. 그러다 일정속도(시속 21㎞)를 넘어 차에 가속이 붙으면 전기모터로 운행된다.

    평지에서 시속 130㎞까지는 전기모터의 몫이다. 차량이 경사진 언덕을 오르거나 가속으로 많은 힘이 필요할 때는 여기에 공압식 엔진이 가세한다. 지금 차량이 공압식 엔진으로 움직일 것이냐, 전기모터로 움직일 것이냐의 여부는 장착된 첨단전자시스템에 의해 제어된다.

    이렇게 보면 페브는 전기자동차를 주(主)로 하고 공압식 엔진이 보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전기자동차가 널리 쓰이지 못하는 주원인을 극복함으로써, 기술면에서는 오히려 공압식 엔진이 핵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공압식 엔진은, 종전 엔진이 휘발유나 디젤로 전기스파크를 일으켜 차를 움직이는 것과 달리 전기를 이용해 압축시킨 공기의 팽창력을 실린더에 뿜어내 피스톤 운동을 일으킨다. 공기를 압축시키는 역할은 특별한 콤프레서(compressor)가 담당한다. 압축된 공기는 압축탱크에 저장되고, 이것이 필요에 따라 분사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압식 엔진에는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여느 내연기관에서 볼 수 있는 흡입-압축-폭발-배기의 4행정 중 압축행정과 폭발행정이 필요 없다. 폭발행정이 없기 때문에 점화장치와 냉각장치도 필요 없고, 엔진오일 또한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다. 또 크랭크축이 720도 회전할 때마다 폭발행정이 일어나는 4행정 기관과 달리, 공압식 엔진은 팽창 1회에 360도 회전해 동력을 전달함으로써 일반 차량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한다.

    이미 공압식 엔진은 ‘압축공기를 동력매체로 하는 엔진’의 이름으로 한국·미국·영국·독일·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캐나다 등 세계 8개국에서 특허를 받았으며, 일본·중국에서는 특허 출원중이다. 조회장은 “전기자동차가 널리 상용화되면 공압식 엔진은 빠져서는 안될 요소가 될 것”이라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조회장은 공압식 엔진을 개발하며 숱한 고난을 겪어야 했다. 작업실에서 위험한 사고를 당한 적도 여러 번이다. 한번은 연구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불똥이 튀며 배터리가 폭발했다. 천장이 훌렁 날아가고 파편이 여기저기로 날아와 박혔다. 그도 온몸에 상처를 입고 그을음을 뒤집어썼다. 완전히 폐허가 된 현장에서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둘째아들이었다. 방금 전까지 차 뒤에서 놀고 있던 애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주위의 잿더미보다 더 새까매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 틈에서 아들의 이름을 애달프게 불렀으나 찾을 수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아들이 나타났는데 태연히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다”고 했다. 아들이 되살아난 양 부둥켜안곤 “내가 이 미친 짓을 왜 하나” 하는 후회에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왜 공압식 엔진 개발에 착수했냐”고 물으면 “미쳤으니까 했던 일이지 정상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개발에 투자하겠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엔진 성능을 보여주는데, 갑자기 폭발하면서 부속품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사람이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사망할 위력이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려 아무 말도 못한 채 도망가는 투자자의 뒷모습을 보며 조회장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돈도 많이 빌려 썼다. 다행히(?) 형님들이 재산가라 도움을 받았다. “그동안 큰형님에게 받아 쓴 돈만도 20억은 족히 될 것”이라고 조회장은 말했다. 공압식 엔진을 개발하기까지 투입된 비용은 40억원이 훨씬 넘는다. 조회장은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동창·동문, 이웃들과 친척에 이르기까지 손 내밀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개발후원금을 이야기하고, 빌려 썼다 하면 갚을 도리가 없어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조회장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말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당연히 구박과 손가락질도 많이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어이, 물로 가는 건지 공기로 가는 건지, 그거 잘돼?”하며 조롱하듯 물었다. 투자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도 약속한 기간 안에 연구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사기꾼이라며 멱살을 잡았고, 고소도 여러 번 당했다. 부도가 나 도망도 다녀봤다. “그동안 고소 고발당한 기록만 출력하여도 키를 넘길 것”이라고 한다.

    그 와중에도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꾸준한 연구성과를 보이고, 때가 되는 대로 다른 돈벌이를 찾았다. 1980년대에는 외산(外産) 중고자동차 판매업에 손을 대 돈도 쏠쏠히 벌어들였다.

    그러나 벌면 뭐하나. 주머니에 들어오는 대로 개발비에 몽땅 쏟아 부었다. 버스 토큰이 없어 먼 거리를 걸어다니고, 점심은 물로 때우면서도 각종 부품과 재료를 사들이기 바빴다. 이런 행동을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겼다

    그는 “가족들에게 소홀했던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했다. 불평 한마디 없이 후원해준 아내와 스스로 학비를 마련해 대학까지 마친 자식들도 고맙다. 현금으로 주면 몽땅 연구비로 탕진해버리니, 형님들은 나중엔 쌀이나 연탄 등 현물로 생활을 보조해주었다. 그것마저도 아내에게 사정해 되팔아 연구비로 썼고 같이 일하는 연구원들의 회식비로 썼다 하니 그의 집념을 알 만하다.

    형제들은 서울에서 이름난 부자였지만 그는 토담집에 살았고, 홍수가 나 집이 쓰러져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한번은 넋을 놓은 아내가 죽을 생각으로 집에서 멀지 않은 한강을 향해 걸어갔다고 한다. 맨발로 뚜벅뚜벅 갔다는데, 나중에 “왜 신을 신지 않고 갔느냐”고 물으니 “내가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라곤 신발 한짝밖에 없어서”라고 대답해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30년 동안 엔진에만 미쳐 살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것이 가장 미안하다. 머지않아 공압식 엔진을 장착한 전기자동차가 상용화되면 잃어버렸던 명예를 되찾고, 도움 주었던 사람들에게도 보답하겠다.”

    조회장은 이렇게 말하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인류 최초의 자동차를 이것이라고 딱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개는 1770년 프랑스 군인이던 니콜라 조제프 퀴뇨(Nicholas Joseph Cugnot)가 포차(砲車)를 견인할 목적으로 만든 3륜차를 꼽는다. 자동차라고 해봤자 투박하기 이를 데 없어 15분마다 보일러에 물을 보충해야 했고, 브레이크조차 없어 끝내 사고를 내고 말았다. 그러나 인류는 이를 ‘세계 최초의 증기자동차’로 기록하고 있다.

    1803년 영국의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이라는 기술자는 사람들이 타고 다닐 수 있는 승용차를 만들었다. 3륜차에 8명의 장정을 태우고 런던시내를 시속 13㎞의 속도로 주행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역시 현대 자동차와 비교하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지만 인류는 이것을 또 ‘세계 최초의 승용차’라 부른다.

    ‘세계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는 독일의 카를 벤츠(Karl Benz)가 1885년 개발해 이듬해에 특허를 획득했다. 당시 벤츠자동차는 1기통에 최고 시속 16㎞에 불과했다.

    이렇듯 ‘최초’라는 이름이 붙은 발명품은 후세의 눈으로 보면 그 성능이 극히 미미하고 외형 역시 우스꽝스럽지만, 바로 그런 출발이 있었기에 오늘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일 게다.

    세계 최초로 공압식 엔진을 장착한 차량이 선을 보인 것은 1984년이다. 조회장이 CAV1(Compressed-Air Engine Vehicle 1)이라 이름 붙인 이 차량은 고작 시속 4㎞ 정도의 성능을 보였다. 1992년 다시 CAV2를 시운전했는데 이때의 속도 역시 시속 20㎞였다. 쿵덕쿵덕 소리를 내던 엔진은 얼마 안가 멈춰버렸다. TV를 통해 공압식 엔진의 발명 사실이 보도되긴 했지만, 이때까지도 그 가능성을 믿는 이는 거의 없었다. 다만 하나의 ‘화젯거리’일 뿐이었다.

    이즈음 조회장은 투자자를 모집하기 위해 공압식 엔진을 상용 자동차에 장착해 구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 1994년 1월7일, 포니1에 1400cc 공압식 엔진을 얹어놓고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그러나 엔진은 가동이 되는데 차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 하며 돌아섰다. 그 동안 적지 않은 자금을 보탰던 한 후원자는 “사기꾼을 당장 구속시키자”며 노발대발했다.

    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2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애원했다. 왜 움직이지 않았는지 밤낮없이 연구해 문제점을 보완한 후, 정말 딱 2주일이 지난 날 다시 시운전을 했다. 차는 시속 4㎞로 달렸다.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 조금 느린 수준이었다.

    이때의 공압식 엔진 차량을 본 사람들은 그 우스꽝스러움을 잊지 못한다. 포니 자동차에 소 젖 짜는 착유기(搾乳機)가 잔뜩 붙어있는 데다 괴상한 탱크가 실려있었으며 운전사와는 별도로 호스를 집어든 사람이 따라 움직여야 했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공기로 가는 차’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님을 보았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만족했다. 이것이 오늘의 페브를 있게 한 출발점이다.

    이렇게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갖고 모여든 사람들을 투자자로 해 1996년 (주)에너진을 창립하였다. 그해 8월27일, 공압식 엔진은 한국 특허를 취득하였다.

    당시 주주로 참여한 이상기(李相冀)씨는 “호기심에 참가한 사람이 절대 다수였고 나 역시 그냥 속는 셈치고 해보자는 생각에 찾아간 것”이라고 했다. 그뒤 페브의 시운전을 몇 차례 지켜보고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신뢰하게 된 이씨는 하던 일을 접고 지금은 에너진의 기획실 차장을 맡고 있다.

    에너진은 1997년에 CAV3 시운전을 실시하여 시속 40㎞로 성능을 향상시켰고, 유럽 5개국 특허도 받았다. CNN 등 외신도 관심을 갖고 보도하였다.

    1998년 공압식 엔진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전기자동차와의 접목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페브가 탄생하였다. 그해 8월7일 PHEV1을 시운전했다. 시속 80㎞. 대성공이었다. 캐나다에서도 특허를 취득했다는 낭보가 날아왔다. 이후 페브는 개량을 거듭했다.

    2000년 12월 PHEV2가 시속 110㎞로 달리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고, 2001년 7월24일 공개 시운전에서 PHEV3는 최고 시속 120㎞를 자랑했다. 조회장과 에너진 직원들은 이 ‘7월24일’을 역사적인 날로 기억한다. 언론을 통해 페브를 대외적으로 공개한 날이고, 전기자동차의 최대 약점인 등판능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세계를 놀라게 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선박에도 ‘724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으로 역사적 건물이나 기기가 생길 때마다 ‘724’라는 명칭을 붙이겠다고 한다.

    이때부터 에너진은 급상승을 시작한다. 내친김에 공압식 엔진을 선박·항공기·농기구·산업용 기계 등에 도입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보트용 엔진을 개발했다. 투자자들이 모이면서 개발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조회장 스스로도 “30년 동안 고생한 것이 지난 1~2년 사이에 꽃을 피웠다”고 만족스러워했다. 회사의 ‘살림’을 맡고 있는 최병우(崔炳宇) 상무도 “이제 본격 상용화에 들어가면 앞으로 몇 년 동안 상상도 할 수 없이 발전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에너진은 2002 스위스 제네바 모터쇼에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4개국 6개 업체로부터 기술제휴를 제의 받아, 3월23일 프랑스 노가로테크사와 기술합작 계약을 맺었다. 계약 후에는 성능 확인을 위해 여러 차례 시험주행을 했다. 페브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박종빈(朴鍾彬) 책임연구원은 “이왕 시험주행을 할 거면 일반 차량도 오르기 힘든 곳에서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대관령 옛길. 경사가 6~20도에 이르는 가파른 길을 페브는 부담 없이 달렸다.

    에너진 연구원들은 마음껏 시험주행을 해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욕심 같아서는 서울-부산 왕복 시험주행도 해보고 싶지만 아직 개발중인 차량이라 당국의 복잡한 허가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개발에 있어 어려운 점은 시행주행만이 아니다. 연구원들의 가장 큰 애로점은 연구개발 장비 문제다. 연구원들은 1000분의 1mm라도 오차가 생기면 안되는 자동차 엔진의 각종 부속을 직접 손으로 깎아 만들고 있다. 크랭크샤프트·캠샤프트 등을 수작업으로 두세 달에 걸쳐 깎아내고 있는 것이다. 장비 하나에 수십억원씩 하는, 컴퓨터로 제어하는 공작기계를 구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기술합작이 본격화되면 고가 장비를 원없이 만져볼 수 있을 것 같아 몹시 기대된다”고 연구원들은 말했다. 박종빈 연구원은 “그렇게 되면 작업효율이 월등히 높아져 기술 개발도 훨씬 빨라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에너진 연구실을 둘러보면 ‘어떻게 이런 곳에서 그런 발명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름 모를 거창한 설비가 빙 둘러있는, 깔끔하게 정돈된 작업환경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이곳에서 “소박하지만 큰 꿈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조회장도 그렇지만 에너진 연구원들은 대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박종빈 연구원만 하더라도 일본 도요타와 미쓰비시자동차에서 10여 년 간 엔진관련 업무에 종사했다. 자신의 표현으로는 “눈 감고 엔진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사용했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1990년대 초반부터 자동차 엔진에 관심을 가져 온 박연구원은 조회장을 만난 후 국내의 좋은 자리를 마다하고 에너진 연구원을 자청했다.

    현재 프랑스 노가로테크사에 파견 근무중인 이종억(李鍾憶) 연구원 역시 고등학교 때부터 자동차를 만진 사람이다. “자동차를 완전히 분해해놓고 다시 조립하라 해도 어려움 없이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밖에도 6명의 연구원들이 모두 20~30년 이상 현장에서 자동차를 만진, 정규 학위는 없지만 그야말로 ‘자동차 박사’들이다.

    조회장은 “나는 직원을 채용할 때 학력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력서도 신입사원 선발 때 잠시 살펴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현장에서의 실무능력이지 학력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연구원들은 정비공장에서 망치로 머리 맞아 가며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다. 책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피땀 흘리면서 배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는 졸업장보다 손에 박인 굳은살을 더 신뢰한다.”

    “레이더 포착 불능” 군에서도 관심

    조회장은 대학교 자동차학과를 졸업한 사람 중에도 엔진 분해조립조차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꼬집었다. “이론만 알고 실제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공압식 엔진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박사들을 만나면 이렇게 물어본다. 당신, 엔진 분해조립 몇 번이나 해봤어?”

    7월24일, 에너진 연구실은 이사를 한다. 노량진의 좁은 마당을 떠나 충청남도에 있는 아산국가산업단지(부곡지구)로 가는 것이다. 우선 컨테이너 박스 몇 개를 쌓아두고 시작하지만 머지않아 번듯한 건물을 세우겠다고 잔뜩 벼른다. 연구원들은 “대기업 주행테스트 코스처럼 넓은 대지에 완벽한 시설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주위에 자동차를 시험 운전할 수 있는 도로가 많아 기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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