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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숨은 인권운동가 ⑥

“작은 것 하나만 바꿔도 산재 없앨 수 있어요”

노동건강연대 임상혁 공동대표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shamora@donga.com

“작은 것 하나만 바꿔도 산재 없앨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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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표에게 구로의원에서의 경험은 많은 것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여러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노동건강권’이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대로 아는 계기가 됐다는 것. 이때 만난 많은 환자들은 아직도 그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돼 있다.

“한번은 할머니가 초등학교 5학년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오셨어요. 상처를 보니까 평범하지 않아서 캐물었더니, 아이가 그 나이에 벌써 폭력배들과 어울려 본드를 불고 돌아다닌다는 것이었어요. 사연을 들어보니 그 배경에는 역시 산업재해가 있더군요. 아이 아버지가 구로공단 공장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다쳤어요. 회사를 그만둬야 했지요.

보상금으로 동네 떡볶이가게를 차렸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내에게 경제권이 넘어갔던 모양이에요. 집에만 있던 아버지는 자괴감에 빠져 알코올에 의지했고, 결국 폐인이 된 거죠. 부인이 도망간 뒤에 할머니가 남은 손자를 키웠는데 아이가 그만 탈선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죠.”

결국 아버지 대의 운명이 아이에게 대물림된 셈이었다. 한번의 산업재해로 시작된 악운의 사이클이 이 아이를 지나 다시 그 아이의 아이에게도 계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세상물정에 눈 떠가던 청년의사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국 노동자들은 너무 착해요



“그렇지만 구로의원은 ‘의원’이었어요. 매일 환자를 보면서 직업병 연구와 운동을 펼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새로운 직업병이나 산업재해에 대한 문제제기를 뚝심 있게 완결해낼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원진녹색병원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던 겁니다.”

원진녹색병원은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산재시설 설립기금 90억원을 들여 만든 병원. 임대표는 병원 설립 준비작업에서부터 함께 했다. 주로 산업재해를 당한 근로자들의 치료를 담당하지만 지역 의료기관의 역할도 함께하겠다는 청사진도 마련했다. 결국 1999년 6월 산업의학과를 중심으로 9개 진료과목과 53개 병상을 갖춘 병원이 탄생했다.

기반은 마련됐지만 오히려 산재추방운동의 열기는 이전보다 식었다는 것이 임대표의 솔직한 고백이다. 우선 시민·사회단체의 결집력이 떨어진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사회적 관심은 어느새 산재를 ‘과거의 일’로 치부하며 눈을 돌렸다고 임대표는 지적한다.

“우선 언론에서 기사를 다루는 횟수도 상당히 줄었어요. 예전 같으면 크게 이슈가 될만한 사건들도 보도가 되지 않으니까요. 늘 같은 얘기가 반복된다고 생각하더군요. 실제로는 전에 발생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시 불거진 것인데 말입니다.”

노동조합운동의 괄목할 만한 성장은 역설적으로 ‘산재는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개별 사업장의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한 원인이 됐다고 임대표는 진단한다. 현장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해 노동조합이 1차 역할을 담당하는 형태로 바뀌면서 오히려 본질이 희석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아직도 건강보다는 급여를 근로조건의 핵심으로 두고 있습니다. ‘건강한 환경에서 자신의 몸에 해가 가지 않도록 일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몸이 좀 상하더라도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권리’에 가까운 거죠. 특히 IMF 경제위기 이후에 상황은 더 악화됐습니다. 구조조정이 가속화되면서 인원이 줄었고, 그러다 보니 생산라인의 속도가 빨라졌죠. 교대시간 등 노동강도나 환경도 열악해졌고요.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조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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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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