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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베이징 속의 시골’ 후통(胡同) 기행

  • 권삼윤·문화비평가 tumida@hanmail.net

700년 숨은 매력 뿜어내는 知足常樂의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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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통이 가장 극심한 변화를 겪은 것은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면서 신거주지역으로 대규모 이주가 일어난 1950년대 초와 재개발 사업이 가속화하고 있는 지금이다. 그렇지만 후통은 여전히 베이징 구시가의 뼈대를 이룬다. 시 전체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시(광역시 전체가 아님) 인구가 400만명이라면 200만명이 후통에 살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후통을 알게 된 것은 베이징을 처음 다녀온 뒤인 1993년이다. 베이징에서 온 중국인 친구가 당시 중국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던 ‘기러기(鴻·우리나라에선 ‘대륙의 딸’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란 소설을 소개하면서 후통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국 각지에서 상경한 선각자, 호족, 유지들이 청조 관헌의 눈에 띄지 않게 비밀 회동을 갖기도 하고 몸을 숨기기도 했으며, 더러는 애첩과 애정행각을 벌이던 곳이 바로 후통이라고 했다.

당시 각 성(省)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베이징에 머물면서 중앙정부와 교섭하거나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성(省)별로 회관을 세웠고, 대학들은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숙식 걱정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기숙사를 마련하게 됐다고 한다.

베이징대는 이런 전통을 살려 지금도 신입생을 뽑을 때는 성적순으로만 선발하지 않고 지역할당제를 병행,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에게 수학(修學)의 기회를 고루 베풀고 있다는 것이다.



완당과 소현세자의 자취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조선조 순조 때의 선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떠올랐다. 그가 연행사의 서장관이 되어 연경(이는 3000년 전 ‘燕古城’에서 유래된 이름이나 조선시대엔 베이징을 이렇게 불렀다)을 찾았다가 당대 최고의 경학자이자 금석학자인 옹방강(翁方綱)을 만나 흉금을 터놓고 학문과 예술을 논했다는 석묵서루(石墨書樓) 역시 이런 후통에 자리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915년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 사학과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는 박사학위 청구 논문 ‘조선조에 있어서의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에서 추사가 옹방강을 처음 만난 1810년 정월 29일 석묵서루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이 논문은 1994년 ‘추사 김정희 또 다른 얼굴’이란 제목으로 번역됐다).

“석묵서루 안의 담계(覃溪·옹방강의 호) 노사(老師)는 78세이고, 해동의 뛰어난 재사 김완당은 불과 25세, 그리고 그날의 안내자인 이심암(李心庵)은 41세였는데, 이때 담계는 반가이 추사를 맞이했다…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작은 키의 정한(精悍)하고 기백이 넘치는 청년 완당의 대단한 호학심과 혀끝으로부터 미끄러져 나오는 경의한묵(經義翰墨)의 놀라운 조예에 그는 감탄하고 말았다. 담계는 말하기를 ‘해동에 아직도 이와 같은 영물(英物)이 있었던가’라고 하면서 청년 완당에게 ‘경술문장(經術文章), 해동 제일’이라고 칭찬했다. 완당 또한 담계의 평범하지 않은 마음 씀씀이와 탁월한 학문 품격에 감격해 수희갈앙(隨喜渴仰)의 정성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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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삼윤·문화비평가 tumi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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