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粗하고 野하되 卑하지 않았다”

동아방송 ‘노변야화’ 대담자 권오기 전 통일부총리가 말하는 인간 김두한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粗하고 野하되 卑하지 않았다”

2/2
-김두한 식으로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은….

“위선자라는 말이 있잖아요. 김두한씨는 일종의 ‘위악자’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그게 꼭 자기 본 모습은 아닌데 일부러 예의 없고 무식한 것처럼 구는 측면이 있었어요. 그게 김두한답다고 본인이 생각하는 거죠. 미리 외부에 비칠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춰 행동하는 겁니다. ‘남들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봐주고 있나’ 계속 의식하죠. 그런데 그 위악에서 솔직한 어법이 나오더라고요.

일종의 스타일리스트라는 생각도 듭니다. 얘기를 듣다 보면 어디 테러하러 갈 때는 꼭 망토를 입는 장면이 나와요. 실제로 망토를 입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옛날 영화를 보면 태양빛을 배경으로 멋있게 서 있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속에 자기를 그리는 거지. 그런 심미(審美)가 있었어요.”

-나름대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매력 있었죠. 일단 정직해 보여요. 정치 깡패들 중에 눈만 반질반질하고 거짓말 잘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인상이 없어요. 머리로는 ‘저게 거짓말이다’ 싶은데도 믿게 되고. 적어도 ‘본인은 그걸 진실이라고 믿고 있구나’ 싶으니까요. 왜 여러 번 얘기하다 보면 본인 스스로도 과장됐거나 사실과 다르다는 걸 잊고 진짜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어요.”



-학계 일부에서는 김두한씨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얘기 역시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아닌데 본인이 자기최면을 통해 믿게 된 것이 아니냐는 견해입니다만.

“이제 와서 유전자 검사를 할 수는 없겠지만 본인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는 장군의 아들이므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렛대 삼아 자신을 제어하는 거죠. 더 형편없는 짓도 할 수 있었는데 그게 일종의 브레이크가 돼준 겁니다. 방송을 들어보면 아버지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합니다. 자기도 그 이름에 걸맞으려고 애쓰는 것이 삶의 가장 큰 목표였을 겁니다.”

-방송을 들어보면 말하는 스타일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듣는 이 머리 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자연스럽게 그때 상황이 눈 앞에 떠오르게 하는 화법을 사용하던데요.

“그런 특징이 있죠. 그건 그 사람이 어릴 때 극장을 많이 다녔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자기가 어떻게 싸웠는지 얘기할 때 보면 굉장히 영화적이에요. 이런 식입니다. ‘공원길을 슥 걸어가는데 놈들이 저기서 이렇게 달려들더라. 그걸 내가 이렇게 날아서 이렇게 옆 발로 돌려 차서 샥샥 해치웠다.’ 한 장면 한 장면 보여주듯 계속 ‘묘사’하는 화법이죠. 그렇게 스토리를 영상으로 풀어내니까 듣는 사람이 재미있거든요. 생각해보면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가 말하는 방식을 보고 흉내낸 것 같아요.”

영화적 이미지 사용하는 묘한 화법

-그런 식의 화법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텐데요.

“그래요. 처음 들을 때는 말도 참 우락부락하게 하는구나 싶은데 듣다 보면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는 사람입니다. 뭐랄까, ‘감각’이 있는 말하기였죠. 녹음 끝날 무렵에 ‘다음에는 이런 얘기 합시다’ 말해두면 다음에는 주문한 것 이상으로 이야기가 나오곤 했습니다. 방송을 참 잘했어요. 텔레비전 시대였다면 더 유명해졌을 거예요. 공부를 제대로 못해서 그랬지 머리는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듭디다.”

-방송 당시 청취자들의 반응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반응에 고무돼서 방송기간을 늘린 출연자 가운데 하나였어요. 하다가 별로 재미가 없으면 줄이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광고도 많이 붙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내 주변에도 재미있게 들었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김두한이 그냥 깡패인 줄만 알았더니 재미있는 사람이네’하는 식으로.

김두한씨 본인도 방송이 끝나고 나서 ‘나가길 잘했다’고 했다더군요.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흔치 않았으니까요. 자기 이미지를 바꾸는 데 도움이 됐다는 거죠.”

-최근에 다시 김두한 열풍이 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그 사람을 과연 협객이나 영웅으로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 사람이 따를 만한 표상이냐 하면 그건 아니지요. 협객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영웅이라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그 시대에는 꼭 한 명쯤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길거리 보통 깡패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하죠. 다양한 지점에서 복잡한 의미로 한국 현대사를 증언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신동아 2002년 11월호

2/2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목록 닫기

“粗하고 野하되 卑하지 않았다”

댓글 창 닫기

2020/03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