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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억달러 탕감해주시오. 그러면 미국을 돕겠소”

9·11 테러에서 토라 보라 전투까지 핵심 5인이 털어놓은 아프간전쟁 막전막후

  • 글: 정리·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30억달러 탕감해주시오. 그러면 미국을 돕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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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아버지 부시행정부에서 국방장관 딕 체니 밑에서 4년 동안 정책담당 국방차관(1989∼93년)을 지냈다. 유대계인 월포위츠는 부시행정부 내 신보수주의 정치세력의 선두주자이며 대표적인 매파로 꼽힌다. ‘PBS 프런트라인’인터뷰에서 그는 미국이 CIA와 국방부의 공조 아래 아프간전쟁에 뛰어드는 과정을 증언했다.

“9월11일 아침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미 의회 의원 여럿과 아침식사를 하며 미사일방어망 구축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럼스펠드는 ‘우리는 위험한 세계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고 별로 반갑지 않은 놀라운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의원이 ‘어떤 종류의 놀라운 사건을 말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때 내가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이란이 핵무기 실험에 성공할지도 모르고, 북한이 대륙간 탄도탄을 시험발사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날 아침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바로 1시간 뒤 펜타곤(미 국방부)이 공격당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백지상태에서 세운 아프간 군사작전

첫 비행기가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부딪쳤을 때 월포위츠 부장관은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증언.



“사무실에서 참모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TV를 켜보라고 했다. 뭔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모든 것이 안개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펜타곤 건물이 흔들렸다. 지진이 일어난 느낌이었다. 내 사무실은 비행기가 부딪친 곳에서 400∼500m쯤 떨어진 반대쪽이었지만,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벌써 복도에 나와 있었다. 바깥에 나가보니 사람들이 사건현장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럼스펠드 장관은 경호팀이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갈 때까지 들것 나르는 일을 돕기도 했다. 내 기억으론, 그때 무슨 일이 생겼나 알아보려고 휴대전화를 걸었지만 그 시각 워싱턴지역은 불통이었다. 위기관리 측면에서 이런 일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한 가지 교훈은 얻었지만….”

펜타곤이 공격을 받은 바로 뒤 지하 3층의 지휘센터(command center)에서 월포위츠는 럼스펠드 국방장관, 합참의장 마이어장군과 마주앉았다. 그때 럼스펠드는 이미 백악관 벙커로 피해 있는 체니 부통령과 화상(畵像) 보안회의를 했다. 체니 부통령은 당시 플로리다주에 가 있는 부시 대통령과 보안전화로 통화하려 애쓰고 있었다. 월포위츠 부장관의 증언.

“당시 문제는 위치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제4의 비행기였다. 이미 우리는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필요할 경우 전투기로 그 비행기를 격추시키라는 지시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민간인들이 탄 여객기를 격추시킬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여객기는 휴대전화를 통해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승객들이 납치범들과 사투를 벌인 끝에 필라델피아 교외에 추락했다).

“비행기 충돌로 일어난 화재로 말미암아 펜타곤 지휘센터에까지 연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나는 럼스펠드 장관에게 펜타곤 건물에서 나가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으나,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0분 뒤 누군가 다시 말했으나 마찬가지였다. 20분쯤 뒤 내가 다시 말했다. ‘장관, 여기서 정말로 나가야할 것 같습니다.’ 럼스펠드는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이 나가는 게 어때? 위기 순간에 우리가 같은 장소에 머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펜타곤에서 90마일쯤 떨어진 보안건물로 옮겨갔다.”

이어지는 월포위츠의 증언.

“여태껏 이런 전쟁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해오던 전쟁이 아니었다. 백지상태나 다름없는, 한마디로 무(無)에서 전쟁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프랭크스 장군과 그의 장병들이 아프간에서 이룬 전과는 엄청난 것이라 할 만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부시 대통령은 9월20일 프랭크스 장군에게 아프간전쟁 계획을 세우라는 지침을 내렸고 그로부터 3주도 지나지 않은 10월7일 공습이 시작됐다. 10월19일 미 특수부대원들이 아프간에 상륙해 공습을 유도하는 작전을 폈고, 11월 초 마자르이샤리프를 함락했다. 사람들은 아프간전쟁의 전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지만, 실제로는 놀라운 속도였다.”

공습이 시작되기 6일 전인 10월1일 펜타곤에서는 조지 테닛 CIA 국장이 참석한 가운데 국방부-CIA 연석회의가 열렸다. 럼스펠드 국방장관, 월포위츠 부장관, 이제 갓 합참의장에 오른 리처드 마이어스 장군, 아프간전쟁을 지휘하게 될 미 중부군사령관 프랭크스 장군이 테닛 CIA 국장과 마주앉았다.

“그날 회의의 목적은 곧 다가올 아프간전쟁에서 국방부와 CIA가 업무를 조율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다시피 아프간전쟁은 매우 독특한 전쟁이어서 군부와 정보기관간 유기적 협력관계가 절실했다. 행정용어를 빌린다면, 두 부서 사이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to iron out the seams) 모였다. 그 자리에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탈레반체제가 무너질 때까지 아주 강력히 밀어붙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공습을 한 다음 쉬는 그런 전술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CIA는 비밀작전을 펴는 기관인 반면 펜타곤이 하는 일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CIA와 펜타곤 사이에 마찰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95%는 잘 돌아가고 5%가 삐그덕거렸다면, 그것은 커다란 성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CIA-국방부 합동수뇌회의

아프간에 미 지상군을 파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펜타곤 안에서는 많은 논의가 벌어졌다. 이와 관련한 월포위츠 부장관의 증언.

“우리는 북부동맹군뿐만 아니라 이보다 숫자는 훨씬 적었지만 아프간 남부의 반(反)탈레반 세력을 돕는 미 지상군 파견을 놓고 숱한 토론을 벌였다. 만약 그 전략이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를 가정하고 선택사항들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고려사항은, 만약 반탈레반 세력과 공조할 수만 있다면 아프간에 1만명 넘는 미 지상군을 투입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다. 프랭크스 장군도 그렇게 주장했다. 19세기 영국군, 20세기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당한 역사적 사실에 비춰 미군이 제3의 침략군으로 비치는 걸 우리는 바라지 않았다. 대규모 파병 대신 아프간에 투입된 미 특수부대는 참 잘해냈다. 당시 아프간에서 미군 특수부대는 모두 23차례 작전을 펼쳤는데, 그것은 20년 전에 실패로 끝났던 이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구출 작전처럼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특수작전은 모두 성공했다.”

당시 아프간 남부엔 하미드 카르자이가 소수의 무장세력을 이끌고 미 특수부대와 CIA의 지원 아래 탈레반 와해공작을 펴고 있었다.

“10월7일 공습이 시작될 즈음 CIA는 아프간에 있는 다양한 반탈레반 세력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 자리에서 카르자이의 존재가 부각됐다. CIA는 카르자이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비록 북부동맹군처럼 대규모 군사력을 이끌고 있진 않았지만, 남부 아프간에서 카르자이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다. 그가 탈레반군의 공격을 받아 매우 위급한 상황에 빠졌을 때 미 특수부대가 투입돼 그를 구출해낸 적도 있다.”

토라 보라 작전은 올해 봄 펼쳐진 아나콘다 작전에 비하면 문제가 많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전지역 민간인들을 다치게 한 오폭도 오폭이려니와, 당시 토라 보라에 있는게 확실해 보이던 오사마 빈 라덴을 놓쳤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월포위츠는 “오사마 빈 라덴이 토라 보라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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